허균을 <홍길동전>의 저자로만 알고 있는 독자들이 많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조선시대에 흔치않은 인물이었다. 기생과 어울리기도 했고, 당시 천대받던 불교를 신봉하기도 했다. 사고방식부터 행동거지까지 그의 행동은 조선의 모든 질서에 반(反)했다. 다른 사람들과 결코 같을 수 없었던 그는 기인(奇人)이었다. 소설 <허균, 서른셋의 반란>은 허균의 기인적인 모습을 보여주며 파격적인 삶을 표현한다. 모든 인간이 평등한 삶을 누려야 한다는 그의 의지 속에 태어나는 ‘홍길동’과 무릉도원 ‘율도국’. <허균, 서른셋의 반란>은 조선시대에 21세기의 시대상을 꿈꿨던 기인의 세상을 마음껏 느껴볼 수 있는 장이 될 것이다.
“그래요, 매창. 사람의 운명이란 선천적인 것도 있고 후천적으로 만들어지는 것도 있다지만 따지고 보면 결국 매한가지 아닌가 하오. 이것이 나의 운명이라면 나는 운명을 거부하고 싶소. 차라리 개·돼지로 태어난 것만도 못한 이 운명 말이오.”
“그러고 보면 소녀의 경우는 사치라는 생각이 드옵니다.”
“아니오, 고통이란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각자에게 미치는 영향을 어찌 비교하며 하찮다고 말할 수 있겠소.”
강릉에서
“하지만 나리의 운명은 너무 가혹하옵니다.”
“매창이 그리 생각한다니 내가 너무 미안하구려.”
“그런데 나으리, 강릉에서의 생활은 어떠하였나요.”
매창이 대화의 화두를 바꾸어야겠다는 생각이 든 모양이었다.
“강릉에서의 생활이라.”
“소녀는 강릉이라고 말만 들어보았지 가 본 적이 없어요. 그곳도 바닷가라고 들은 적은 있습니다만.”
“허 허, 이곳도 저 변산으로 나가면 바다가 나오지 않소.”
“소녀가 듣기로는 이곳 변산 바다와 강릉의 바다는 다르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바다면 다 같은 바다이거늘 무에 다를 것이 있겠소.”
“그쪽 바다는 색깔이 파랗다고 들었는데요.”
“그래요, 그 차이지. 이곳의 바다와는 달리 그곳의 바닷물은 파랗다오.”
“그 이유가 무엇인지요?”
“이유가 달리 있겠소. 서해안 쪽의 바다는 바닥이 뻘로 이루어져 있고 강릉 쪽 바다의 바닥은 바위와 모래로 덮여 있으니 그렇게 보이지 않겠소.”
매창이 잠시 생각에 잠겨 들었다.
“나으리, 그러면 본래 바닷물 색깔은 파란가요?”
한마디 한마디 질문하는 매창의 입이 밉지 않았다.
불쑥불쑥 그 입을 자신의 입으로 덮치고 그 상태에서 답을 해주는 편이 훨씬 이롭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매창이 그런 허균의 마음을 읽은 모양이었다.
“나리, 그만 쉬시겠습니까.”
“아니오, 난 지금이 아주 좋소. 그대와 함께 내 가슴속에 있는 모든 것을 훌훌 풀어버린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아주 가볍다오. 그러니 너무 신경 쓰지 마시오. 아, 그리고 바닷물이야 다 똑같이 투명하지 않겠소. 단지 바닥에 있는 물질들이 어떤 색깔을 띠고 있느냐에 따라 색깔이 달리 보이는 게지요.”
“바닥에 있는 물질 때문에 바닷물이 그렇게 달리 보인다.”
매창이 허균의 말을 되씹으며 스스로 답을 구하려는 듯 깊이 생각에 빠져들고 있었다.
허균이 사랑스러운 눈길로 잠시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매창이, 바닷물이든 인간이든 매한가지 아니겠소?”
“인간도요.”
“태어날 때 소위 양반이니 천민이니 하는 요상한 굴레 때문에 겉으로 드러나는 색깔이 달라 보일 뿐이다 이거요. 속은 모두 다 똑같으면서 말이오.”
매창이 가볍게 미소 지었다.
“왜 그러오, 매창.”
“불현듯 나리의 속 색깔은 어떨까 궁금한 생각이 들어서요.”
“속 색깔이라.”
“네, 그러하옵니다.”
“그리도 원한다면 내 기꺼이 보여주리다.”
말을 마친 허균이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옷 벗을 태세를 취했다.
“밖에 별이 있느냐!”
막 옷을 벗으려던 허균이 급히 행동을 멈추었다.
“아니, 왜 그러시옵니까, 나으리.”
허균이 멍한 시선으로 매창을 바라보았다.
“별을 부른 사연을 이름이시군요.”
“그러오.”
강릉과 변산의 바다…투명한 것은 매한가지
열일곱의 별…삼봉이 허균에 관해 한 말은?
“죄송하옵니다, 나리. 그 귀한 모습을 어찌 그냥 볼 수 있겠사옵니까. 그러니 상을 새로이 봐 오라고 별을 부른 것이옵니다.”
“허 허 허허허.”
허균이 탄성을 내지르며 자세를 바로 했다.
상이 새로 차려지고 있었다. 음식들이 식은지라 술을 계속 마시려면 부득이 상을 새로 보는 편이 낫겠다 싶었다.
매창은 잠시 자리를 비운 터였고 매창을 대신해서 상을 마무리한 별이 막 방에서 물러나려고 했다.
“네 이름이 별이라 했더냐.”
“네, 나리.”
완전 햇병아리라는 사실이 그녀의 얼굴색에서 드러났다.
묻기만 하였는데도 얼굴색이 붉게 물들고 있었다.
얼굴을 바라보던 시선을 돌려 찬찬히 그녀의 몸을 훑어보았다.
측간에 갈 때는 어둠 속이라 자세히 관찰하지 못했는데 자세히 살펴보니 약간은 오동통하게 생긴 것이 막 물이 오를 대로 올라 탱탱한 느낌마저 주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허균의 목구멍으로 침이 절로 넘어가고 있었다.
“네 나이 몇이더냐.”
별의 몸이 살짝 꼬여지고 있었다.
“소녀 이제 열일곱이옵니다.”
“열일곱이라, 참으로 좋은 나이로구나.”
허균의 말에 아니, 허균의 음탕한 시선에 별의 몸이 한껏 움츠러들었다.
그 모습을 보니 필시 남자와는 가까이 해본 적 없는 아이임이 분명하다는 생각이 일어났다.
갑자기 회가 동하기 시작했다.
“그래, 지금 삼복은 무엇을 하고 있더냐.”
“그 분은 지금 곤하게 자고 있습니다. 코 고는 소리가 밖에까지 들리고 있으니.”
말하다 아차, 하는 듯 급히 말을 멈추었다.
하지 않아도 될 말을 한다 싶은 생각이 들었던 모양이었다.
“그저…….”
허균이 별의 모습을 바라보며 가볍게 혀를 찼다.
좌우지간 하인들이란 그저 먹고 일하고 자는 일이 습관화 돼 있는 모양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 일 외에는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그러니 세상 돌아가는 대로 이리 뒹굴 저리 뒹굴 그저 편하게 살다 가면 그만이었다.
“자네는 매창과 어떤 사이더냐?”
“소녀는 조카이옵니다.”
“조카라…….”
당황한 별
물론 친조카는 아닐 터였다.
그냥 외롭게 지내는 기생들이 어미니, 이모니 부르면서 서로 위안 삼고 의지한다는 사실을 익히 알고 있었다.
“자네는 내가 누구인지 알고 있느냐.”
“물론이옵니다, 나리. 천하의 허균 나리라고 알고 있사옵니다.”
“천하의라. 누가 그러더냐.”
별의 몸이 죄지은 양 잔뜩 옹크려졌다.
“하인…….”
“삼복이가 말이더냐.”
<다음 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