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균을 <홍길동전>의 저자로만 알고 있는 독자들이 많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조선시대에 흔치않은 인물이었다. 기생과 어울리기도 했고, 당시 천대받던 불교를 신봉하기도 했다. 사고방식부터 행동거지까지 그의 행동은 조선의 모든 질서에 반(反)했다. 다른 사람들과 결코 같을 수 없었던 그는 기인(奇人)이었다. 소설 <허균, 서른셋의 반란>은 허균의 기인적인 모습을 보여주며 파격적인 삶을 표현한다. 모든 인간이 평등한 삶을 누려야 한다는 그의 의지 속에 태어나는 ‘홍길동’과 무릉도원 ‘율도국’. <허균, 서른셋의 반란>은 조선시대에 21세기의 시대상을 꿈꿨던 기인의 세상을 마음껏 느껴볼 수 있는 장이 될 것이다.
허균이 어머니께 그리고 갓 혼인한 부인에게 초시 급제를 핑계로, 더 많은 공부를 위해 형에게 지도받아야 한다는 이유로 길을 나섰다.
스승인 이달을 통해 허봉이 포천의 한 산, 백운산에 기거한다고 전해 들었다. 그곳에서 여러 친구들과 함께 새로운 세계를 찾고 있다는 이야기까지 곁들였다.
백운산으로
길을 가면서 형을 생각해보았다.
스승인 이달의 말에 따르면, 형은 문재와 관련하여서는 이달을 최고로 평가했었지만, 형이 조선 땅에서는 감히 그 벽을 넘을 사람이 없을 정도로 경지에 올라 있다고 했다.
그뿐만 아니었다.
허균이 바라본 형의 행동은 매사에 유별나게 보였었다. 현실에 안주하지 못했었다.
끝없이 새로움을 추구하고 현재의 틀에서 벗어나려 했다.
그런 연유로 자연스럽게 동인의 입장에 서게 되고 기존의 관습을 중시 여기던 서인들의 행태를 참지 못했다.
아니, 단순히 동인과 서인의 견해차 문제가 아닌 듯했다.
형의 열려 있는 사고를 이 사회가 수용하지 못하고 그런 요인들로 인해 형은 끊임없이 자신과의 싸움을 전개하며 스스로 고립의 길을 선택하고 있는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일어났다.
순간 누나의 삶의 방식과 겹쳐 그려지고 있었다.
자신만의 성을 쌓고 그 안에서 홀로 모든 고통을 감내하는 누나의 방식과 동일한 흐름으로 흘러가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었다. 그에 이르자 고개를 세차게 가로로 저었다.
형까지 그런 삶을 살면 안 될 일이다 싶었다. 무엇하나 부족할 것 없는 형은 이 사회 가운데에 서서 형이 지니고 있는 재질을 십분 발휘해야 할 일이었다.
또 충분히 그럴 자격을 지니고 있다는 확신까지 들었다.
형과 관련해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길을 걷다보니 저녁 무렵이 되어 이달이 이야기한 백운산의 조그마한 움막에 도착할 수 있었다.
먼발치에서 이마에 흐르는 땀을 손으로 닦으며 움막을 바라보았다.
흡사 거렁뱅이들이 거주하는 장소처럼 초라하기 이를 데 없었다.
그 움막을 바라보자 팔봉이 걸음을 서두르기 시작했다.
“이제 다 왔거늘 서두를 이유가 무엇이냐.”
“도련님, 어깨가 무너져 내리는 모양입니다.”
“내 등에 있는 책은 가벼울 거 같으냐.”
“그거야 도련님 양식이잖아요. 그러니 무거운들 무겁게 느껴지겠어요.”
“이놈이, 아니 이놈아 그럼 네 놈 등에 달라붙어 있는 것은 양식이 아니란 말이냐.”
어머니와 부인이 형과 같이 기거하는 친구들을 위해 산골 구석에서는 구경하지 못할 음식들을 바리바리 챙겨 팔봉의 등에 실었던 터였다.
“문제는 이 음식이 제 음식이 아니란 점이지요. 도련님 등에 있는 책들은 도련님만의 양식이니 무거울 리 없다는 말씀입니다.”
초시 급제 핑계로 길을 나서다
허봉 거처 도착…이상한 분위기
허균이 팔봉의 이야기가 일리 있다는 듯 크게 소리 내어 웃었다.
“그 놈의 잔머리는 발달해서 잔수는 부리는데. 이놈아, 이 책이 어찌 나만의 양식이란 말이냐. 향후 너 같은 놈에게도 유용하게 쓰일 터이거늘.”
“그거야 두고 봐야 알 일 아니옵니까.”
“두고 봐야 안다.”
눈에 쌍심지를 켜고 팔봉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팔봉의 이야기가 결코 틀린 말은 아니었다.
그냥 그대로 머무른다면 자신만의 양식이 될 터였다.
반드시 세상을 향해 이롭게 쓰일 수 있어야 할 일이었다.
“그놈 참, 바른 말 할 때도 있구먼.”
피식하고 웃으며 움막으로 걸음을 옮겼다.
움막에 당도한 팔봉이 대문 아니 얼기설기 엮은 싸리를 제치고 마치 제 집 들어가듯 안으로 당당하게 들어갔다.
아마도 저 놈의 눈에도 성에 차지 않으니 저리 행동하리라 생각하며 뒤를 이어 안으로 들어갔다.
집안이 조용했다.
방문을 바라보았다.
신발이 있는지 여부도 살폈다.
집안이 조용하듯 신발의 흔적도 찾아볼 수 없었다.
허균이 급히 방문을 열었다.
탁한 기운이 방에서부터 밀려나왔다.
흙냄새와 나무가 썩어서 나는 쾨쾨한 냄새였다.
희미한 어둠속에 가라앉아 있는 방안은 단출했다.
세 개의 상이 있고 그 곁에 가지런히 놓여있는 책들이 시선에 들어왔다.
그를 확인하고 등에 지고 온 보따리를 풀러 방바닥에 내려놓았다.
가슴 속으로부터 뭉클한 기운이 목구멍을 타고 솟구치고 있었다.
“그래, 해보자!”
고개를 돌리자 팔봉도 지고 온 짐을 방문 앞에 내리고 소매로 머리와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아내고 있었다.
“나리, 빈집 아닌지요.”
“이 놈아, 너는 사람의 온기가 이곳에서 느껴지지 않는다는 말이냐?”
“사람의 온기요?”
“진짜 살아 있는 사람의 온기 말이야.”
팔봉이 고개를 갸우뚱하며 코를 벌름거렸다.
“제 코에는 살아있는 사람의 온기가 아니라 흡사…….”
“흡사 뭐란 말이냐.”
“이게 어찌 살아있는 사람의 온기…마치 송장의…….”
“예라, 이놈아.”
더 이상 팔봉도 대꾸하지 않았다.
허균도 잠시 집안을 둘러보려다 그만두고 싸리문을 제치고 밖으로 나서 숲을 바라보았다.
저만치 숲 어디에선가 형이, 아마도 형을 포함해서 몇 사람이 함께 뭔가를 하고 있으리란 생각이 들었다.
방안에 상이 세 개가 놓여있는 모습으로 보아 세 사람이 함께 기거하는 듯했다.
어둠이 내리고 있는 숲을 잠시 바라보며 형을 찾아 숲으로 들어갈 것인지 망설였다.
숲으로 향했던 시선을 팔봉에게 돌렸다.
“왜요, 도련님.”
“왜요는 무슨 왜요냐. 밥 때가 되지 않았느냐. 그러니 형님 일행이 오시기 전에 밥을 해놓고 기다리고 있자.”
“만약 오시지 않으면 어쩌려고요.”
“그 놈 별걸 다 걱정하네. 그러면 네 놈과 내가 다 먹으면 될 거 아니냐.”
팔봉이 그 말은 싫지 않은 모양이었다. 입을 한번 해죽 벌리고는 부엌으로 짐작되는 곳으로 들어갔다.
팔봉을 따라 부엌으로 들어가 볼까 하는 생각이 일었으나 그냥 팔봉에게 모두 맡겨두기로 하고 다시 방으로 움직였다.
염주와 목탁
방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방금 전에는 어둠속에서 자세히 보지 못했는데 한 상 옆에 있는 이상한 물건이 시선에 들어왔다.
가만히 손을 뻗어 그 물체를 집어 들었다. 허균의 시선을 가득 채운 물체는 반질거리는 염주와 목탁이었다.
그 물건의 주인이 누구인지 금방 알아챌 수 있었다.
이달로부터 형과 함께 기거하는 사람 중에 사명당이라는 고승이 있다고 들었었다.
이달의 스승인 박순 대감과 가까운 사이로 봉은사 주지로 초빙되었으나 그를 사양하고 도를 닦기 위해 산천을 떠돌아다니다가 잠시 백운산에 기거한다고 했다.
한 그분의 가르침을 받고자 허봉이 백운산을 찾아들어간 것이라고도 했다.
<다음 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