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균을 <홍길동전>의 저자로만 알고 있는 독자들이 많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조선시대에 흔치않은 인물이었다. 기생과 어울리기도 했고, 당시 천대받던 불교를 신봉하기도 했다. 사고방식부터 행동거지까지 그의 행동은 조선의 모든 질서에 반(反)했다. 다른 사람들과 결코 같을 수 없었던 그는 기인(奇人)이었다. 소설 <허균, 서른셋의 반란>은 허균의 기인적인 모습을 보여주며 파격적인 삶을 표현한다. 모든 인간이 평등한 삶을 누려야 한다는 그의 의지 속에 태어나는 ‘홍길동’과 무릉도원 ‘율도국’. <허균, 서른셋의 반란>은 조선시대에 21세기의 시대상을 꿈꿨던 기인의 세상을 마음껏 느껴볼 수 있는 장이 될 것이다.
“그런 일이 있었군요.”
“이 나라에서 가장 전도유망했던 형님이 그런 몹쓸 일을 당했다오.”
매창의 눈동자가 반짝였다.
“나으리, 그런데 상대를 해하면 무엇을 얻지요?”
“그 말인 즉?”
“서로 합의를 보아 일처리하면 좋지 않은지요.”
“그러면야 좋겠지. 그런데 좋은 일은 사람을 심심하게 만들지 않소.”
“네?”
허균 곁으로
“좋은 일만 이어지면 사람이 무료해진다 이 말이오.”
매창이 허균의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선뜻 이해되지 않은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인간이란 동물은 모름지기 자신이 잘못 될지라도 남이 잘 되는 꼴은 볼 수 없게 만들어진 모양이라 이 말이요.”
매창이 그 말의 뜻을 이해하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매창이!”
허균이 그윽한 시선으로 매창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 소리에 매창이 긴장한 듯 옷매무시를 가다듬으며 허균을 응시하자 이내 허균의 시선이 매창의 가슴을 거쳐 전신을 훑었다.
자연스레 매창의 손이 자신의 가슴으로 옮겨졌다.
“말씀하시지요, 나으리.”
매창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이리 가까이 와 앉을 수 없겠소. 그대와의 거리가 너무 멀다는 생각이 드는구려.”
매창의 당혹스러운 표정과는 달리 허균의 얼굴에는 변화가 보이지 않았다.
그런 허균의 얼굴을 주시하던 매창이 자리에서 일어나 허균 곁으로 자리를 옮기기 시작했다.
살랑거리는 치맛자락에서 풍겨나는 신비스런 냄새가 허균의 마음을 자극하고 있었다.
매창이 허균 곁으로 옮겨 앉자 허균이 손을 내밀었다.
잠시 허균의 얼굴을 바라보던 매창이 조금도 주저함 없이 그 손의 중간부분을 잡았다.
허균이 자신의 손을 잡은 매창의 손을 바라보았다.
이미 기생으로는 퇴기에 접어 든 나이였건만 아직도 어린 소녀의 손처럼 곱다는 생각이 들었다.
약간은 말라 보이는 손을 찬찬히 살피기 시작했다.
하얀 살결 위로 뼈마디가 훤히 드러나 보이는 그 작은 손을 허균이 힘주어 잡았다.
그 상태에서 매창의 전신을 훑었다.
크지도 작지도 않은 아담한 체구와 딱히 잘생겨 보이지도 않는 그 얼굴이 이상하리만치 살갑게 느껴졌다.
매창의 작은 손을 힘주어 잡다… 어떤 매력이?
받은 고통을 승화시켜 아름답게 풀어내는 여인
“그대의 매력은 무엇이오?”
매창이 미소 지으며 자신을 바라보는 허균의 손을 슬그머니 놓았다.
“제게 그리 말씀하심은 소녀가 밉지 않다는 뜻으로 받아들여도 되는지요.”
“그러이, 그래서 매창을 이리로 불렀소. 밉지 않은 그대의 매력이 과연 무엇인가 알아내려고 말이요.”
“고맙습니다, 나리. 멀리하지 않고 이리 가까이하여 어여쁘다 하시니 소녀 그저 감사하고 기뻐 어찌할 바를 모르겠사옵니다.”
매창의 가지런한 이빨이 말을 하는 중간중간 하얗게 빛났다.
조금은 얇은 듯한 입술이 오물거리자 아련한 꿈 속으로 빨려드는 것 같았다.
불현듯 술에 대한 강한 욕구가 솟구쳤다.
허균이 잔을 들어 단번에 비워 냈다.
매창이 급히 안주를 집어 허균의 입으로 건넸다.
“그대도 한 잔 하구려.”
“소녀는 술과 그다지 맞지 않는 듯하옵니다. 술을 마시면 반드시 뒤탈이 나 어지간하면 술을 마시지 않고 있습니다.”
“그래요, 그러면 마시지 말아야지.”
그리고는 조용히 잔을 들었다. 두 손으로 호리병을 잡은 매창이 조심스럽게 잔을 채웠다.
“이귀 선배가 그대에 대해 칭찬을 많이 합디다.”
“그 분이 무어라 말씀하셨는데요.”
“나와 그대가 딱 들어맞는 좋은 사이가 될 것이라 하더이다.”
“딱 들어맞는 좋은 사이라고 하시면.”
“글쎄, 나도 그를 확인해 보고자 하는데 서서히 그대의 진면목이 드러날 것 같소.”
매창이 다시 옷매무시를 가다듬었다.
“그런데 그 분은 어찌 아시는 사이인지요.”
“허봉 형님과 가까이 지내던 분으로 유성룡 대감이 있지요. 그 분으로 인해 이귀 선배를 알게 되었다오.”
“영의정을 지내셨던 유성룡 대감님을 이르심인지요.”
“그러하외다. 그 대감이오.”
매창이 바짝 다가앉았다.
“알고 싶어요. 그 분이 저를 구체적으로 어찌 말씀하셨는지요.”
허균이 즉답을 피하고 앞에 놓인 잔을 만지작거렸다.
“그대는 그대가 받은 고통을 승화시켜 아름답게 풀어내는 여인이라 합디다.”
매창이 그 말을 곱씹고 있었다.
“그 정도면 최상의 찬사가 아닌가 싶구려. 그렇지 않소.”
“너무나 과분한 말씀이옵니다.”
“아니, 꼭 그런 것 같지는 않소. 이귀 선배가 사람을 잘 못 보지는 않은 것 같소.”
허균이 손을 뻗어 가슴에서 놀고 있는 매창의 손을 잡아끌었다. 매창이 못이기는 척하고 허균에게 안겼다.
“매창이, 내게 거문고 한 곡 더 들려줄 수 있겠소.”
다가온 매창의 귀에 대고 속삭이듯 말을 건넸다. 그 귀로 허균의 술기운이 아니 묘한 기운이 고스란히 전달되고 있었다.
매창이 가벼이 한숨을 내쉬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허균과 마주앉았던 자리로 가서 거문고를 끌어당겼다.
거문고를 바라보며 매창이 잠시 생각에 잠겨들었다. 고요한 침묵이 두 사람 사이를 흐르고 있었다.
잠시 후 매창의 조그마한 손이 거문고의 현을 튕기면서 새로운 세상을 열었다.
거문고 한곡 더
平生恥學食東家(평생치학식동가) 떠돌며 밥 얻어먹기를 평생 부끄럽게 여기고
獨愛寒梅映月斜(독애한매영월사) 차가운 매화가지에 비치는 달 홀로 사랑했는데
時人不識幽閑意(시인불식유한의) 고요히 살려는 나의 뜻 세상 사람들 알지 못하고
指點行人枉自多(지점행인왕자다) 제멋대로 손가락질하며 잘못 알고 있네
거문고 소리에 맞추어 읊은 그 시, 차과객운(次過客韻)에 허균의 표정이 시시각각으로 변했다. 흡사 허균 자신을 두고 이르는 시 같기도 하고, 달리 생각하면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는 그런 내용으로 들렸기 때문이었다.
<다음 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