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균을 <홍길동전>의 저자로만 알고 있는 독자들이 많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조선시대에 흔치않은 인물이었다. 기생과 어울리기도 했고, 당시 천대받던 불교를 신봉하기도 했다. 사고방식부터 행동거지까지 그의 행동은 조선의 모든 질서에 반(反)했다. 다른 사람들과 결코 같을 수 없었던 그는 기인(奇人)이었다. 소설 <허균, 서른셋의 반란>은 허균의 기인적인 모습을 보여주며 파격적인 삶을 표현한다. 모든 인간이 평등한 삶을 누려야 한다는 그의 의지 속에 태어나는 ‘홍길동’과 무릉도원 ‘율도국’. <허균, 서른셋의 반란>은 조선시대에 21세기의 시대상을 꿈꿨던 기인의 세상을 마음껏 느껴볼 수 있는 장이 될 것이다.
허균이 입맛을 다셨다.
“그 분에게 이전까지 알지 못했던 부분이 있었어요. 아니 오래전부터 갈망했던 무언가가 숨어있었던 것이지요.”
“그 정체는?”
“아마도 그리움이 아닌가 하옵니다.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 또 제 팔자에 대한 사무침이 그 분을 만나면서 일시에 녹아내렸던 모양이지요.”
정신 세계까지…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은 이해가 쉽게 가는데 팔자에 대한 사무침이라.”
“저의 경우도 그렇지만 그분의 경우도 저와 별반 다르지 않았었다는 생각이었지요.”
“하기야 둘 다 천민이기는 마찬가지지.”
“그런데 나리께서는 천민들도 조정에 나아갈 수 있다 생각하시는지요.”
“지금으로서는 요원하다 봄이 타당하지 않겠소. 그러나 촌은처럼 월등한 사람이라면 천민의 벽을 넘을 수 있을 터인데.”
매창이 가느다랗게 한숨을 내쉬었다. 허균이 미처 마무리하지 않은 말의 내용이 짐작된 터였다. 남자와 여자의 차이였다.
“나으리, 이 사회에는 신분의 차이도 그러려니와 왜 남자와 여자의 차이가 그리도 명확하게 갈라져 있나요.”
“그 현상이 비단 이 시대만 그렇겠소. 인간의 욕심 즉 소유욕에 기인한 더러운 욕심이 사라지지 않는 한 언제고 어디서고 그 현상은 존재할 것이오.”
“그러하시다면, 나리께서 정상적이지 못한 방식이라고 말씀하심은.”
허균이 웃었다.
“내 한번 힘써 보리라.”
“나리, 그러면 양반들끼리도 서로 싸우는 것이 바로 더 가지려는 소유욕 때문이옵니까?”
균이 대답 대신 가벼운 웃음을 흘렸다.
“하오시면.”
“양반이란 종자들은 소유욕이 물질에만 그치지 않으니 더 문제라오.”
“물질에만 그치지 않는다 하심은.”
“소위 양반이라고 깝죽대는 인간들은 물질과 더불어 정신세계까지 욕심을 부린다 이 말이오,”
“정신세계요?”
“또 다른 욕심이지, 욕심. 아주 더러운 욕심 말이오.”
“팔봉아!”
허균이 갑자기 방문을 열고 밖을 향해 소리쳤다.
밖이 조용했다.
“팔봉아!”
다시 한 번 더 큰 소리로 팔봉을 불렀다.
그러자 팔봉이 눈을 비비적거리며 광 쪽에서 엉기적거리며 나타나고 있었다.
“도련님, 부르셨습니까.”
“불렀으니 네가 기어 나온 거 아니냐. 그래 네 놈은 그새를 참지 못하고 또 자고 있었다는 말이냐.”
팔봉이 즉답을 하지 않고 머리를 긁적거렸다.
“무슨 일이신데요.”
“이놈아, 일은 무슨 일. 그런데 네 놈은 살아 있는 시간이 아깝지도 않으냐.”
비비적거리던 눈동자에 힘이 들어갔다.
신분과 남녀의 차이 ‘소유욕 때문에…’
독수공방 스승게…언년이를 보내려고
“갑자기 그건 무슨 말씀이시래요.”
“이 놈아, 죽으면 영원히 잠들 터인데 살아 있는 동안 눈 좀 뜨고 있으라는 이야기야.”
팔봉의 표정이 볼만했다.
허균의 입에서 나오는 소리가 그러면 그렇지 하는 듯이 혀를 쏙 내밀었다가는 넣었다.
“저 놈이!”
팔봉이 급히 정색했다.
“저놈이고 이 놈이고 어쩐 일로 급히 부르셨대요.”
“너 가서 급히 네 누이 좀 불러 오거라.”
“네?”
“네 누이 언년이 말이다. 지금 가서 냉큼 이리로 오라 일러라!”
팔봉이 의혹의 눈초리로 허균을 주시했다.
“도련님께서 저의 누이를 어찌 찾으신데요.”“불러오라면 불러 올 일이지 무슨 토를 그리 다는 게냐.”
“그 이유를 알아야 불러 오든 말든 할 거 아니에요.”
그 주인에 그 하인이었다.
그 모습에 허균이 혀를 찼다.
“내가 네 누이 혼인시켜주려고 그런다.”
“혼인이라고요?”
“그렇대도 그러네. 그러니 빨리 가서 네 누이나 불러오란 말이다.”
팔봉의 의혹이 강도를 더하는 모양이었다. 물러가기는커녕 허균에게 바짝 다가섰다.
“설마, 도련님이…….”
말을 마치지 않은 팔봉이 허균의 가운데로 시선을 보냈다.
마치 옷을 뚫고 그 속을 들여다보듯이 뚫어져라 그 곳을 응시했다.
팔봉의 시선이 향하는 그곳으로 자신의 시선을 보냈다.
그리고는 가만히 손을 그곳에 대보았다.
조그마한 놈이 꼼틀거렸다.
“이 놈아, 내 것이 어때서 그리 유심히 살피는 게냐.”
“다 아시면서.”
“뭘 다 안다는 게냐.”
“도련님, 그걸 어찌 제 입으로 말씀드립니까.”
허균이 어이없다는 듯이 실소를 터트렸다.
“이놈아, 이놈의 주인을 찾으려고 하는 것이 아니니 그런 염려는 말거라.”
“하오시면.”
팔봉이 급하게 균에게 다가섰다.
“내가 네 누이 호강시켜 주려고 그러는 거 아니겠니.”
팔봉이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마치 믿지 못할 소리를 들은 듯이 고개를 흔들어댔다.
“네 누이를 나의 스승님께 시집보내 주려고 한단 말이야.”“네!”
자다 말고 봉창 뚜드리는 소리처럼 들렸던 모양이다.
“이달 스승님한테요.”
“그래, 왜 안 되겠니.”
“안 되는 것이 아니오라…….”
“그러니 빨리 가서 언년이 불러오란 말이다.”
결국 팔봉이 일의 자초지종을 알겠다는 듯이 엉기적거리며 밖으로 나섰다.
팔봉의 뒷모습을 바라보면서 이달을 생각했다.
한창 혈기 왕성할 나이에 홀로 독수공방하고 있는 스승에게 그리 만족스럽지는 않지만 언년을 보내 뒷수발이라도 하게 해드려야 할 듯했다.
뒷수발이라도
스승 이달의 경우 생각할수록 안쓰러웠다.
지금 자신의 형인 허봉의 경우는 조정에서 승승장구하고 이름을 세상에 알리고 있건만 형의 이야기로 형보다 더 많은 자질을 겸비하고 있는 이달의 경우는 단지 얼자라는 이유로 냉대 받고 있으니 제자로서 그를 모른 척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런 차원에서 제자로서 스승에 대한 최소한의 도리를 해드려야겠다는 생각이었다.
<다음 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