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균을 <홍길동전>의 저자로만 알고 있는 독자들이 많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조선시대에 흔치않은 인물이었다. 기생과 어울리기도 했고, 당시 천대받던 불교를 신봉하기도 했다. 사고방식부터 행동거지까지 그의 행동은 조선의 모든 질서에 반(反)했다. 다른 사람들과 결코 같을 수 없었던 그는 기인(奇人)이었다. 소설 <허균, 서른셋의 반란>은 허균의 기인적인 모습을 보여주며 파격적인 삶을 표현한다. 모든 인간이 평등한 삶을 누려야 한다는 그의 의지 속에 태어나는 ‘홍길동’과 무릉도원 ‘율도국’. <허균, 서른셋의 반란>은 조선시대에 21세기의 시대상을 꿈꿨던 기인의 세상을 마음껏 느껴볼 수 있는 장이 될 것이다.
“‘광한전백옥루상량전’이라. 그래, 초희는 무엇을 보고 이 글을 짓게 되었느냐.”
“보름날 하늘에 동그랗게 떠 있는 달을 보며 마음속에 떠오른 감흥을 그리 그려보았습니다.”
허엽이 다시 한 번 딸아이를 바라보다 글로 시선을 주었다.
그녀의 재능
광한전백옥루상량문(廣寒殿白玉樓上樑文)
抛梁東(포양동) 어영차, 대들보 동쪽 향하니
曉騎仙鳳入珠宮(효기선봉입주궁) 새벽에 봉황 타고 진주 궁궐에 들어가
平明月出扶桑底(평명일출부상저) 날이 밝자 해가 동쪽 바다 밑에서 솟아올라
萬縷丹霞射海紅(만루단하사해홍) 일만 가닥 붉은 노을 바다 붉게 물들이네
抛梁南(포양남) 어영차, 대들보 남쪽 향하니
玉龍無事飮珠池(옥룡무사음주지) 옥룡이 하염없이 구슬 연못의 물 마시는데
銀床睡起花陰牛(은상수기화음우) 은 평상에 잠자다가 꽃그늘 짙은 한 낮에 일어나
笑喚瑤姬脫壁衫(소환요희태벽삼) 웃으며 아름다운 미녀 불러 푸른 적삼 벗게하네
抛梁西(포양서) 어영차, 대들보 서쪽 향하니
壁花零落彩鸞啼(벽화영락채난제) 푸른 꽃 시들어 떨어지고 오색 난새 우짖는데
春羅玉字邀王母(춘라옥자요왕모) 비단천에 아름다운 글씨로 서왕모 맞이하니
鶴馭催歸日己低(학어최귀일기저) 학 타고 돌아올 제 날 이미 저물었네
抛梁北(포양북) 어영차, 대들보 북쪽 향하니
溟海茫洋浸斗極(명해망양침두극) 북해 아득하여 북극성에 젖어드는데
鳳翼擊天風力*(봉익격천풍력흔) 봉새 날개 하늘 치니 그 바람 힘으로 뭍 높이 치솟아
九*雲垂雨氣黑(구소운수우기흑) 구만리 하늘에 구름 드리워 비의 기운 어둑하네
抛樑上(포양상) 어영차, 대들보 위쪽 향하니
曙色微明雲錦帳(서색미명운금장) 새벽빛 희미하여 비단구름 드리웠네
仙夢初回白玉床(선몽초회백옥상) 백옥 침상 위에서 신선 꿈 깨어
臥聞北斗回杓響(와문북두회표향) 누워 북두칠성 자루 도는 소리 듣네
抛樑下(포양하) 어영차, 대들보 아래쪽 향하니
八垓雲黑知昏夜(팔해운흑지혼야) 팔해에는 구름 덮여 어두운 밤이구나
侍兒報道水晶寒(시아보도수정한) 계집종이 수정 주렴 차다 말하는데
曉霜已結鴛鴦瓦(효상이결원앙와) 새벽 서리 원앙 기와에 맺혔네
그녀의 재능을 걱정하는 아버지
여자의 재능은 불운한 운명 의미
허엽의 입에서 가느다란 탄성이 새어나왔다. 그리고는 잠시 눈을 감았다.
균의 시선이 초희에게 향했다.
초희가 균의 시선이 거북스러운지 얼굴을 돌려 어머니를 바라보았다.
어머니의 얼굴에서는 가느다란 미소가 흘러나왔다.
초희의 시선이 다시 아버지에게 향했을 때 천천히 허엽의 눈이 떠지고 있었다.
“박복한지고.”
눈을 뜬 아버지의 입에서 순간적으로 흘러나온 말이었다.
말을 마친 아버지께서 어머니를 바라보자 두 분의 시선이 한 군데서 마주쳤다.
허균이 잠시 사이를 두었다. 그 틈을 매창이 치고 들어갔다.
“나리의 누님 되시는 허난설헌에 대해서는 익히 들어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나리께서 저와 같은 처지라니요.”
허균이 대답 대신 잔을 비워냈다.
“아직 갈 길이 멀구려. 그러니 어서 잔부터 채워 주구려.”
매창이 호리병 대신 안주를 들어 허균의 입으로 가져갔다.
허균이 어색한 표정도 없이 덥썩 안주를 받았다.
“그 이야기는 천천히 하도록 하지요. 어쨌든 아버지께서 누나 문제로 많은 생각과 함께 힘들어 하셨다오. 마치 훗날 누나의 운명을 예견이라도 하셨듯이 말이요.”
매창이 가느다랗게 한숨을 내쉬었다.
“왜 그러오?”
“혹시 이옥봉이라는 여인을 아시는지요.”
허균이 이옥봉을 되뇌며 쓴맛을 다셨다.
“매창, 이옥봉을 내 누나와 비교하지는 마시오. 아니.”
매창이 채근하지 않고 다만 바라볼 뿐이었다.
“그래요, 이옥봉이나 내 누나나 매한가지로 보아도 무방하지.”
말을 마친 허균이 매창이 채운 잔을 들어 한 번에 들이키고는 급하게 내려놓았다. ‘탁’하는 소리가 좁은 방안에 울려 퍼졌다.
이옥봉, 시대를 잘못 타고난 기구한 여인이었다.
서녀로 태어난 그녀는 시에 관해 천재적인 소질을 지녔었다.
당시 여자가 지니고 있는 재능은 결국 불운한 운명을 의미했고 특히 서녀로서의 운명은 예견되어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이옥봉은 사랑 때문에 자신의 천재적인 재능인 시를 쓰지 않기로 약조하고 조원의 소실로 들어갔다.
그러나 결국 자신의 솟구치는 재능을 속으로만 삭일 수 없었고 그를 밖으로 드러내는 순간 집에서 쫓겨난다.
자신을 감당하기 어려웠던 조원의 그릇된 사랑을 알아채지 못하고 종국에까지 서방님의 사랑의 손길을 기다린다.
그리고 그 기다림이 허망한 꿈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아채고 생전 자신이 쓴 시를 띠로 만들어 배에 두르고는 강물에 몸을 던져 스스로 생을 마감한 여인이었다.
박복한 인생
막상 말을 꺼낸 매창이 아차 한 모양으로 허균 쪽으로 바짝 다가갔다.
“소녀가 괜한 이야기를 꺼내서…….”
“아니오, 조금도 괘념치 마시오. 이옥봉이나 나의 누나나 박복하기는 매한가지 아니겠소.”
결국 앞에 앉아 있는 매창의 경우도 한 가지 아니겠느냐는 이야기였다.
“나리의 누님 되시는 분을 어찌 저희와 같이 천한 여인들과 대등하다 하십니까?”
“천한 여인이라…….”
<다음 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