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균을 <홍길동전>의 저자로만 알고 있는 독자들이 많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조선시대에 흔치않은 인물이었다. 기생과 어울리기도 했고, 당시 천대받던 불교를 신봉하기도 했다. 사고방식부터 행동거지까지 그의 행동은 조선의 모든 질서에 반(反)했다. 다른 사람들과 결코 같을 수 없었던 그는 기인(奇人)이었다. 소설 <허균, 서른셋의 반란>은 허균의 기인적인 모습을 보여주며 파격적인 삶을 표현한다. 모든 인간이 평등한 삶을 누려야 한다는 그의 의지 속에 태어나는 ‘홍길동’과 무릉도원 ‘율도국’. <허균, 서른셋의 반란>은 조선시대에 21세기의 시대상을 꿈꿨던 기인의 세상을 마음껏 느껴볼 수 있는 장이 될 것이다.
“불쌍한 것.”
홀로 중얼거리던 아버지가 정색하고 계생을 바라보았다.
“그래, 무슨 시를 읊고 있었다는 말이냐?”
“소녀가 일전에 지었던 시를 가락에 옮겨보았어요.”
“가락에 맞추어서 말이더냐.”
“그러하옵니다, 아버지.”
“그럼 우리 계생의 솜씨를 한번 뽐내보려느냐.”
아버지를 위해
자세를 바로 한 아버지가 진지한 표정으로 계생을 주시했다.
계생이 대답 대신 소중하게 거문고를 쓰다듬고는 자세를 가지런히 했다.
고사리 같은 손이 거문고의 현을 튕기기 시작했다.
가슴을 파고드는 애절한 소리가 공간 가득 채워지고 있었다.
‘터덜터덜 백운사 길 걸어 오르니 스님은 구름 잠을 쓸어내리네’
계생이 잠시 사이를 두었다.
애잔한 거문고 소리가 이어지고 계생의 눈동자가 반짝였다.
‘절이야 구름 속에 잠겨있건만 마음 또한 흰 구름과 한가지구나’
거문고 소리가 잦아들고 있었다.
거문고에서 손을 뗀 계생이 가만히 아버지의 얼굴을 주시했다.
눈을 감고 있던 아버지가 눈을 뜨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
“계생아, 한번 더 해줄 수 있겠느냐?”
“아버지께서 원하신다면 한번뿐이겠사옵니까.”
‘터덜터덜 백운사 길 걸어 오르니’
매창의 과거…부모의 사랑이야기
현감 서우관과의 인연이 시작되다
계생 어미와의 만남은 예삿일이 아니었다.
관아에서 기생으로 있던 시월은 현리라는 미관말직에 있었던 자신에게 과분했다.
아울러 항상 먼발치에서 그녀의 고혹적인 자태를 흠모하는 수준에서 머물러 있어야했다.
아니, 애초에 자신의 처지로 인해 그녀를 경원시했었다.
그러던 것이 시월에게 잠시 시를 논하고 거문고 소리를 들려주었던 일이 화근이 되었다.
달빛 아래서 우연히 마주친 시월이 먼저 자신의 심경을 고백해왔다.
자신을 흠모하고 있으며 평생 자신 곁에 머물겠노라고 했다.
자신의 처지를 솔직하게 이야기했다. 자신의 처지로는 두 집 살림은 고사하고 한 집 살림도 빠듯하다고 했다.
그러나 시월은 마음을, 이양종의 사랑을, 시를, 거문고를 먹고 살겠다고 우겨댔다.
자신은 자기에 대한 사랑과 시와 거문고 소리만 있으면 그것으로 족하다고 했고 결국 그녀의 애절한 마음이 자신의 처지를 망각하게 만들었다.
결국 서로 간의 애틋한 사랑으로 혼인이라는 버거운 벽을 걸어 올라간다.
‘스님은 구름 잠을 쓸어내리네’
시월의 의도대로 서로간의 사랑과 음악과 시만으로 살 수 있다고 생각했었다.
입으로 들어가는 음식이 거추장스러울 정도였고 그 입으로 사랑을 나누었다.
그 사랑이 끊임없이 가슴을 파고들었다.
그러나 현실은 그를 시기하고 가만히 놓아두지 않았다.
결국 그 시샘으로 시월과의 만남이 잘못되어졌다는 사실이 금방 판가름 났다.
사랑하는 시월은 둘 간의 사랑의 흔적을 남긴 체 눈을 감고야 말았다.
사랑하는 여인이 남긴 그 아이, 계생을 안고 눈물을 흘리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절이야 구름 속에 잠겨 있건만’
시월에 대한 사랑을 아이에게 오로지하기 시작했다.
어미 없이 홀로 살아갈 아이를 위해 아니, 자신을 남겨두고 먼저 간 그 사랑의 시름을 달래기 위해 자신이 지니고 있는 거문고 연주와 사랑하는 여인이 즐겨 듣기를 갈망했던 시를 계생에게 전수하기 시작했다.
그 어미에 그 딸이었다.
하나를 알려주면 열을 받아먹는 아이가 일취월장하더니 급기야 열 살이 되지 않아 글에 눈을 뜨고 스스로 시를 짓기까지 했다.
그 총명한 아이를 바라보며 먼저 간 여인을 그리면 가슴이 뭉개져오는 듯했다.
항상 내면의 세계는 첩첩 구름 속에 잠겨 있는 듯했다.
‘마음 또한 흰 구름과 한가지구나’
마음의 병이 깊어가고 있었다. 사랑하는 여인에 대한 그리움이 가슴 속에 한으로 뭉쳐가고 있었다.
그 한을 딸 아이 계생을 통해 풀어나가고자 했으나 그럴수록, 계생의 모습을 바라볼수록 마음의 병이 깊어가고 있었다.
어느 날 밤늦은 시간에 계생의 손을 힘없이 잡았다.
그 손에서 시월의 온정이 전달되고 있었고 끝내 그 손을 놓지 못하고 눈을 감았다.
눈을 감았는데 자꾸 흰 구름이 앞에서 솟아나고 그 사이로 저 멀리서 한 여인이 손을 흔들고 있었다.
그 여인 역시 흰 구름에 둘러싸인 채 흰 구름과 한가지 모습을 하고 있었다.
허균이 슬쩍 무릎을 쳤다.
“그런 애틋한 사연이 있었구려.”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소녀는 천애고아로 남게 되었지요.”
“그래서?”
매창이 대답 대신 저만치에 있는 거문고에 시선을 주었다.
손 내민 서우관
아버지께서 돌아가시자 의탁할 곳 없는 계생에게 현감 서우관이 손을 내밀었다.
관아에 들어와 잔심부름이나 하면서 생계를 해결하라는 의도였다.
계생도 현감이 아버지에 대한 배려로 자신에게 온정을 쏟는 것이라 생각했다.
어린 나이에 그것이 고마워 황송해 하며 관아에 머물렀다.
유별나게 자신을 따뜻하게 대해 주는 현감의 보살핌으로 관아에서의 생활에 젖어 들고 있었다.
그러나 틈만 나면 거문고를 가슴에 안고 붓을 들어 시작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또한 틈이 나는 대로 서우관이 아버지의 뒤를 이어 계생을 지도해주고는 했다.
서우관 현감이 초승달이 뜬 어느 날 밤에 자신의 처소로 찾아들었다.
마치 현감의 방문이 어린 나이의 자신을 찾던 아버지가 아닌가 하는 착각에 빠져들었고 그의 앞에서 한껏 자신의 갈고 닦은 실력을 드러냈다.
일찍이 동해에 신선이 내렸다기에
지금 보니 구슬 같은 말이나 그 뜻 슬프다.
후령 선인 노닐던 곳 그 어디메뇨
삼청 심정을 시편으로 엮노라
옥단지 속 세월 감이 빈틈이 없고
속세의 청춘은 소년 때일 뿐
후일에 선계의 자부에 돌아가거든
옥황 앞에 맹세하고 임과 살리라.
그날 밤 어린 계생은 물론 아버지처럼 자신을 살펴주던 현감도 한 순간의 격정에 휩싸였고 마치 꿈을 꾸는 듯이 격랑의 밤이 지나갔다.
그 일이 계기가 되어 현감의 따뜻한 손길이 한양으로까지 이어졌다. 서우관이 임기를 마치고 한양으로 가면서 계생을 동반했다.
부안에는 마땅한 거처도 거처려니와 가능하면 그곳을 떠나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하여 비록 하룻밤이지만 정을 통했던 서우관의 뒤를 따라 한양으로 터를 옮겨 새로운 삶에 젖고 싶었다.
<다음 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