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균을 <홍길동전>의 저자로만 알고 있는 독자들이 많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조선시대에 흔치않은 인물이었다. 기생과 어울리기도 했고, 당시 천대받던 불교를 신봉하기도 했다. 사고방식부터 행동거지까지 그의 행동은 조선의 모든 질서에 반(反)했다. 다른 사람들과 결코 같을 수 없었던 그는 기인(奇人)이었다. 소설 <허균, 서른셋의 반란>은 허균의 기인적인 모습을 보여주며 파격적인 삶을 표현한다. 모든 인간이 평등한 삶을 누려야 한다는 그의 의지 속에 태어나는 ‘홍길동’과 무릉도원 ‘율도국’. <허균, 서른셋의 반란>은 조선시대에 21세기의 시대상을 꿈꿨던 기인의 세상을 마음껏 느껴볼 수 있는 장이 될 것이다.
매창의 대꾸에 허균의 너털웃음이 방안을 가로질러 세상으로 힘차게 뻗어나가고 있었다.
그 웃음소리가 빨리 주안상을 들여오라는 소리로 들린 모양이었다.
문이 열리며 별의 지휘로 상이 들어오고 있었다.
그 상 너머로 삼복의 얼굴이 나타났다.
얼굴빛이 초조하게 비치고 있는 모습으로 보아 필시 속으로 침을 흘리고 있을 터였다.
“이 상보다 더 휘어질 정도로 삼복에게도 보내주도록 하시게.”
정식으로 맞이하다
삼복의 눈동자가 커지며 그 눈동자만큼이나 커다란 함박웃음이 얼굴 가득 번져가고 있었다.
상이 자리 잡자 고홍달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고생원은 왜 그러시는가.”
“이제는 소생도 자리를 물리고 일을 보아야 합지요. 이제 제 할 도리는 다한 것 같아서 말입니다.”
“그 사람 눈치 한번 빠르구먼. 이제 모든 일은 이 자유인에게 맡기고 고생원도 따로 자리하도록 하시게나.”
조금도 머뭇거림이 없는 답변에 매창의 얼굴 위로 미소가 번지고 있었다. 고생원이 나가자 매창이 호리병을 들었다.
“소녀 정식으로 판관 나리를 뵈옵니다.”
아직도 매창의 음성에서 떨림이 감지되었다.
“그러세. 그러면 나도 정식으로 매창을 맞아보세.”
매창이 허균이 내민 잔을 채우기 시작했다.
도대체 허균이란 사람 종잡기 힘들다는 생각이 들었다.
외모에서 느껴지는 흡인력도 그러려니와 세상의 모든 일을 빨아들일 것 같은 눈매와 거침없는 말투에서 모든 것이 강하다는 인상을 받을 뿐이었다.
잔을 받은 허균이 매창의 손에 들려 있던 호리병을 받아들었다.
“내 술도 받아주시게.”
잠시 손사래를 치던 매창이 차분하게 자신의 앞에 놓인 잔을 들었다.
“그렇다면 저도 정식으로 나리를 맞이하도록 하겠나이다.”
“그대는 나에 대해 마치 잘 알고 있는 듯하오.”
“소녀뿐만 아니옵지요. 나리의 고명은 이 나라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을 듯하옵니다. 그러니 천하의 소리가 나오는 것이 아니온지요.”
허균이 잔을 들어 매창 앞에 놓인 잔 가까이 가져갔다.
그를 바라본 매창이 자신의 잔을 향해 손을 움직였다. 그러나 잔 가까이에 이른 손이 쉽사리 잔을 잡지 못하고 가느다랗게 떨리고 있었다.
“그대가 정녕 나에게 자유인이라 했소?”
“그러하옵니다.”
매창의 갑작스런 질문…당황한 허균
늘 품고 있던 생각에 대한 이야기를…
“자유인에게 유교는 무슨 얼어 죽을 유교라고. 우리 케케묵은 물건일랑 저만치 던져버리고 자유를 찾아보도록 하시게나.”
허균의 은근한 소리가 이어지자 매창의 떨리는 손이 기어코 잔을 잡았다.
그 잔 가까이로 허균의 잔이 다가갔다.
매창이 두 손으로 소중하게 잔을 들어 허균의 잔과 거의 맞닿을 지점까지 가져갔다.
“자유를 위하여!”
허균이 짤막하게 소리를 내지르면서 가볍게 잔을 부딪치고 입으로 가져갔다.
술잔을 기울이며 매창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매창의 눈가가 촉촉이 젖어드는 모습을 허균이 놓치지 않았다.
매창이 자신을 바라보는 허균의 시선을 의식한다는 듯이 조심스럽게 잔을 들어 고개를 돌리고 입으로 기울였다.
“나으리, 소녀를 기생으로 여기시는지요!”
가볍게 잔을 입에 대었다가 뗀 매창이 눈가에 고인 이슬을 입술에 담아 입을 열었다.
깨끗이 잔을 비워낸 허균이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질문 탓인지 아직 채 넘기지 못한 술이 목에 걸린 듯 심하게 기침하기 시작했다.
입에서는 방금 마신 술인지 침인지 하얀 이물질이 튀어나오고 몸이 심하게 요동치고 있었다.
다행스럽게도 손에 들려 있는 잔은 비어 있었던 관계로 그저 흔들리기만 할 뿐이었다.
매창이 아차한 모양으로 급히 수건을 들어 허균에게 다가갔다.
허균이 손사래 치며 매창의 행동을 저지했다.
허균의 저지에 다시 자리에 물러앉아 허균의 모습을 걱정스러운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한참 기침을 해대던 허균이 소매로 입가를 훔치더니 손에 들려 있는 빈 잔을 앞으로 내밀었다.
그 잔을 채우라는 무언의 행동이었다.
“나리, 괜찮으시온지요. 안주를 먼저 드심이…….”
“이열치열이라 하지 않았소. 그러니 술로 목에 걸린 술을 넘겨야 되는 게지요.”
매창의 얼굴이 살짝 찡그러졌다. 순간적으로 허균의 편치 않아 보이는 얼굴이 안쓰러웠던 모양이었다.
“정말 괜찮으시겠사옵니까.”
허균이 대답 대신 애써 미소 지었다.
그 묘한 표정을 바라보며 매창이 조심스럽게 빈 잔을 채우기 시작했다.
잔을 받은 허균이 잔을 입에 기울였다.
그리고는 진한 여운을 남겼다.
“나으리, 소녀의 무례함을 용서하여 주십시오.”
“무례함이라니. 당치 않소. 내가 아직 수양이 덜 되어 그런 탓이거늘 너무 괘념치 마시오.”
“그래도…….”
“정 그러면 안주나 챙겨주구려.”
말이 끝나기 무섭게 매창이 전을 집어 두 손으로 공손하게 허균에게 건넸다.
“허 허, 이런 과분한 영광이. 내 또 한 번 사래에 걸려야겠소.”
매창의 얼굴이 한쪽으로 살며시 기울었다.
약간은 찢어진 듯이 보이는 매창의 눈매가 고혹적으로 비쳐지고 있었다.
“너무하시옵니다.”
“너무 하긴 무엇이 너무하다는 말이오. 내 좋아서 그런 것이거늘. 그건 그렇고 방금 한 말이 무슨 뜻이오.”
매창이 근심스런 표정으로 허균을 응시했다.
“소녀가 괜한 말씀을 여쭈어서…….”
“아니오, 내 한번 이야기 좀 들어봅시다.”
매창이 꺼낸 이야기가 황당해서가 아니었다.
바로 자신의 생각의 정곡을 찌른, 늘 품고 있던 생각에 대한 이야기였던 탓이었다.
늘 품고 있던 생각
“계생(매창의 어린 시절 이름, 매창은 그녀의 호임)이 안에 있느냐.”
“예, 아버지. 소녀 방안에 있사옵니다.”
열두 살 정도 되어 보이는 앳된 아이가 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문을 열었다.
갓을 쓴 초췌한 모습의 사내가 헛기침하고 방안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이 무료한 시간을 어찌 보내고 있었느냐.”
아버지, 이양종이 자리 잡자 계생이 급히 거문고 가까이로 다가 앉았다.
“소녀 거문고를 타며 시를 읊고 있었사옵니다.”
말을 마친 계생을 바라보는 아버지의 눈가에 이슬이 고이고 있었다.
<다음 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