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균을 <홍길동전>의 저자로만 알고 있는 독자들이 많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조선시대에 흔치 않은 인물이었다. 기생과 어울리기도 했고, 당시 천대받던 불교를 신봉하기도 했다. 사고방식부터 행동거지까지 그의 행동은 조선의 모든 질서에 반(反)했다. 다른 사람들과 결코 같을 수 없었던 그는 기인(奇人)이었다. 소설 <허균, 서른셋의 반란>은 허균의 기인적인 모습을 보여주며 파격적인 삶을 표현한다. 모든 인간이 평등한 삶을 누려야 한다는 그의 의지 속에 태어나는 ‘홍길동’과 무릉도원 ‘율도국’. <허균, 서른셋의 반란>은 조선시대에 21세기의 시대상을 꿈꿨던 기인의 세상을 마음껏 느껴볼 수 있는 장이 될 것이다.
“나리!”
잔뜩 겁에 질린 사내가 앞서 걷고 있는 남자를 다급하게 불렀건만 아무런 반응이 없다.
거세게 내리치는 비바람에 사내의 목소리는 순식간에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나으리!”
자신의 부름에 전혀 반응을 보이지 않자 다시 한 번 힘주어 앞서 가는 남자를 불렀다. 순간 또 다른 소리가 창공을 가르고 있었다.
벼락과의 싸움
“우르르릉… 꽝!”
동시에 두 소리가 합쳐졌다.
온 힘을 다해 부른 ‘나으리’ 소리는 하늘을 가르고 땅을 찢어버릴 듯이 내리치는 벼락소리에 고스란히 말려들어 갔다.
사내의 몸이 바로 웅크러들었다. 본능에 따른 행동처럼 보였다.
잠시 후 손을 뻗어 머리 위까지 덮어 쓴 도롱이를 양손으로 꽉 쥐어 잡은 삼복이 30대 중반으로 보이는 남자에게 다가서는가 싶더니 급하게 앞을 막아섰다.
“나으으리!”
“이놈아, 왜 길을 막아서는 게야!”
허균의 속내를 알길 없는 삼복은 그래도 허균이 반응을 보이자, 크게 한숨을 내쉬며 바짝 다가섰다.
“나으으으리!”
삼복의 하는 양이 가관이었다.
분명히 무슨 말을 하는 듯 보이는데 아래턱이 심하게 떨리고 있어 이빨 부딪는 소리에 무슨 말인지 전혀 알아들을 수 없는 데다, 몸은 오금이 서로 달라붙은 듯 잔뜩 움츠러들어 차마 눈 뜨고 못 볼 지경이었다.
“못난 놈 같으니라고.”
“나으으리!”
얼굴에 모든 힘을 쏟아 간신히 말하려고 애쓰는 모습을 보고 허균이 혀를 찼다.
“무슨 일로 앞을 막았는지 똑바로 이야기해보거라!”
“저 앞에 보이는 숲… 잠시 쉬어감이 어떠할….”
바로 그 순간 하늘 저편에서 섬광과 함께 음울한 소리가 일고 있었다.
급히 고개를 돌려 그를 확인한 삼복의 얼굴빛이 다시 하얗게 변해가고 있었다.
방금 전에 보였던 희미한 생기는 온데간데없고 다시 사시나무 떨 듯했다.
잠시 후 삼복의 행동에 일격을 가하기라도 하듯 방금 전보다 더 큰 벼락이 굉음과 함께 창공에서 대지로 내리꽂혔다.
허균의 시선은 삼복의 모습에는 아랑곳하지 아니하고, 저 멀리 대지로 힘차게 곤두박질하고 있는 벼락으로 향했다.
“그놈, 참 고약한 놈이로고.”
벼락이 땅에 떨어진 사실을 인지한 삼복이 허균 옆으로 바싹 다가섰다.
삼복의 도롱이에 떨어진 빗방울이 허균의 발치로 떨어지고 있었다.
“나으리, 뭐라고 말씀하셨는지요.”
“너에게 한 이야기가 아니니 괘념치 말거라.”
말이 채 끝나지 않은 상태에서 허균이 갑자기 갓을 벗었다.
벼락만큼이나 사납게 휘몰아치는 비가 허균의 얼굴 곳곳을 때리기 시작했다.
“고약한 놈이 여기 또 있었구먼.”
삼복이 그제야 허균의 말을 이해한 모양이었다.
“잠시 저 숲에서 비 좀 피했다 가심이….”
“비를 피하자는 게야, 벼락을 피하자는 게야!”
“비도 피하고 그리고….”
몸을 비비꼬는 삼복의 상태를 확인한 허균이 다시 혀를 차고는 들고 있던 갓을 삼복에게 건넸다.
이유를 알지 못하는 삼복이 겁에 질려 움츠린 몸으로 받아들었다.
갓을 건넨 허균이 급히 윗도리를 벗어 건네자 삼복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나으리!”
“이왕에 젖은 몸, 목욕이나 해야겠다.”
내리는 빗줄기에 진짜로 목욕할 심산인지 바지 고름을 잡았다.
비에 젖어 군데군데 달라붙어 있던 바지의 고름을 잡아당기자 스르르 내려가는 듯하더니 무릎 부근에 멈추고는 흉물스럽게 들러붙어 있었다.
허균이 상체를 숙여 손으로 바지를 벗어 삼복에게 건넸다.
허균의 온몸으로 거센 빗줄기가 부딪쳐왔다.
마치 그 빗줄기를 온몸으로 잡겠다는 듯이 허균이 양팔을 벌리고 얼굴을 하늘로 향했다.
“이렇게 시원한데 괜히 거추장스럽게 갓을 쓰고 있었구나!”
“나리, 이 무슨 일인지요?”
허균의 기행, 벼락을 향해 맨몸으로…
겁먹은 삼복, 허균의 기행에 용기를…
허균의 괴이한 모습을 바라보는 삼복에게 두려움은 깨끗하게 자취를 감춘 모양으로 목소리에 생기가 묻어 있었다.
“일은 무슨 일. 네 놈도 한번 해보거라. 얼마나 시원한지. 마치 창공을 날고 있는 듯한 기분이다. 이 세상이 모두 내 것 같고 말이야.”
그렇게 말하는 허균의 얼굴 위로 미소가 번지더니 급기야 웃음소리가 터져나오기 시작했다.
허균의 웃음소리가 하늘로 전달된 모양이었다.
다시 섬광과 함께 음울한 소리가 일어나고 있었다.
“저런 고얀 놈 같으니라고. 어서 이리로 오거라!”
발가벗은 허균이 천둥이 일고 있는 곳으로 몸을 돌렸다.
마치 자신의 품으로 벼락을 맞이하겠다는 기세였다.
삼복은 벼락이 내리칠 낌새를 알아채고 다시 몸을 움츠렸다.
그러나 방금 전처럼 떨지는 않았다. 얼떨떨한 표정으로 허균을 주시할 따름이었다.
“왜, 이놈아. 벼락이 너보다 나를 더 좋아할 것 같으냐!”
삼복이 대답 대신 어정쩡한 표정을 지었다. 그 표정을 질타라도 하듯 다시 벼락이 일어났다.
이번에는 삼복의 표정이 담담했다. 아니, 삼복의 시선과 정신은 온통 허균의 기이한 행동에 집중돼있었다.
한참 동안 맨몸으로 비를 맞은 허균이 삼복의 손에 들려 있던 옷을 집어 들었다.
“삼복아.”
“네, 나리.”
“네 이름이 왜 삼복이냐?”
“그야 물론…. 여자 복, 재물 복, 또 오래 살라고 삼복입죠.”
말을 마친 삼복의 표정이 다시 어색하게 변해갔다.
“오래 살라고 주어진 이름으로 보아 네 놈이 그리 쉬이 죽겠느냐.”
삼복은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듯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허균의 몸에만 시선을 모으고 있었다.
거세게 내리고 있는 비를 흠뻑 맞아서인지 아니면 벼락 소리에 놀라서인지 허균의 가운데가 한껏 쪼그라들어 있었다.
삼복이 시선을 급히 다른 곳으로 돌렸다.
“삼복아, 저 벼락이란 놈은 세상의 오물을 뒤집어쓴 너나 나보다 자연을 더 좋아하는 게야. 저기 네가 가리킨 곳에 있는 나무들 말이다. 이 미련한 놈아.”
삼복이 저만치 앞에 있는 숲으로 고개 돌렸다.
“꼭 이놈이 네놈과 닮았구나.”
바지를 입던 허균이 자신의 가운데를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 삼복의 시선 역시 함께했다.
“그나저나 여기가 어디냐?”
잠시 허균의 가운데를 주시하던 삼복이 더 이상 두려움에 떨 이유가 없음을 확실하게 알아챘는지 당당하게 입을 열었다.
“저 앞에 갈라지는 곳이 부안현과 고부로 향하는 갈래 길이옵니다. 고부로 가자면 바로 가야 합지요. 오른쪽 길로 접어들면 부안현이옵구요.”
“아니, 이렇게 팔팔한 놈이 그깟 벼락이 무서워서 그리 안절부절 못했단 말이냐! 한심한 놈이로고. 그건 그렇고 네 놈의 심사는 어떠냐?”
“소인의 심사라니요?”
방금 전에 사로잡혔던 두려움은 말끔히 사라진 듯 말하는 표정이 당당했다.
“이놈아, 네가 방금 전에 쉬어가자고 하지 않았더냐?”
삼복이 슬그머니 고개를 옆으로 돌리면서 자신의 뒷덜미를 긁적였다.
“그건 그때 일이고, 지금은….”
“그래, 지금은 방금 전의 일은 까맣게 잊어버렸으니 지체 없이 길을 가자, 이 말이냐?”
“고부까지 가려면 여기서 한가하게 시간을 죽일 겨를이 없습지요. 서둘러 가야 날이 어둡기 전에 도착할 듯싶은데요.”
말을 마친 삼복의 얼굴로 야릇한 미소가 번졌다.
“예라, 이 잡놈아!”
허균이 내뱉은 소리가 다시 벼락 속으로 감겨들었다.
삼복이 마치 허균의 말을 똑바로 알아들었다는 듯이 미소를 머금고 바짝 다가섰다.
“나리, 부안현에서 잠시 쉬었다 가셔야겠지요?”
“이놈아, 잠시가 무어냐. 네놈이 원하는 대로 비가 그칠 때까지 그곳에서 머물러야지.”
삼복의 얼굴이 능글맞게 변해갔다.
괴이한 모습
“그러면 그렇지. 참새가 방앗간을 그냥 지나….”
“이놈이!”
허균의 짤막한 일성에 삼복이 반사적으로 뒤로 물러났다.
“부안현 방향으로 길을 잡으면 될 거 아닌가요.”
“내가 다 너를 위해 양보하는 것이니 그리 알고 어서 부안현으로 길을 잡도록 해!”
잠시 쭈뼛하던 삼복이 허균의 아랫도리로 시선을 던졌다.
<다음 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