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일요시사>서 ‘지하철 노약자석 착석 논란’과 관련해 독자들에게 설문조사를 실시하는 장면을 목격했다. 이와 관련 필자는 술을 즐겨 마시는 입장서 음주운전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주로 대중교통, 특히 지하철을 자주 이용하면서 느낀 소회가 있어 피력해보고자 한다.
그런데 사실 이보다 먼저 선결돼야 할 문제가 있다. 노약자석 착석 논란에 앞서 과연 노약자석이 존재할 이유가 있느냐에 대한 설문조사를 실시해야 하는 것 아닌가 하는 아쉬움이다. 여하튼 그를 포함해 이야기를 풀어나가자.
1990년대 초반에 일어난 일이다. 철도청은 의정부서 수원과 인천을 오가는 전철 1호선에 대해 기발한 발상을 발표한다. 혼잡한 출퇴근 시간대에 여성들이 당하는 추행을 방지하겠다며 전철 맨 앞 칸과 뒤 칸을 여성전용 칸으로 설치하겠다고 한 것이다.
당시 철도청서 여성전용 칸 설치를 발표했을 때 ‘역시 철밥통이로구나’ 하는 생각이 절로 일어났다. 문제가 발생하면 근본적인 처방을 내놓지 못하고 눈 가리고 아웅하는 식으로 일관하는 수준 미달의 저급한 발상 말이다.
당시 그 문제의 본질은 추행을 일삼는 일부 남자들이었다. 당연히 그들에게 초점을 맞춰 대책을 내놨어야 했는데 철도청은 애꿎게도 성추행당하는 여성들에게 초점을 맞췄다. 그래서 그런 어처구니없는 발상이 나왔고 결국 그 일은 여론의 질타로 유야무야됐다.
그 무렵 설치된 노약자석도 노약자의 입장서 바라봐야 했다. 노약자는 노인을 포함해 사회적으로 약자에 입장에 있는, 즉 장애를 지니고 있는 사람들을 지칭한다. 그러나 당시 실정을 살피면 노약자는 노인으로 국한될 수밖에 없었다. 왜냐, 장애를 지니고 있는 사람들을 위한 제반 시설들이 갖춰지지 않았던 시절이었기 때문이다.
지금도 노약자석은 주로 노인들을 위한 좌석으로 고착화돼있는 추세다. 비록 요즈음 들어 장애를 지닌 사람들을 위해 여러 조치를 취하고 있지만, 아직도 그들이 자유롭게 이용하기에는 역부족이다.
이로 인해 지하철을 이용하다 보면 자주 볼썽사나운 모습을 목격하고는 한다. 그 자리에 누가 앉아야 하는가 하는 문제로 세대 간 싸움이 자주 벌어지고는 한다. 한마디로 기가 막히는 형국으로 전형적인 후진국의 모습이 아닐 수 없다.
노약자석은 애초부터 천덕꾸러기로 전락할 수밖에 없었다. 앞서 언급했듯 노약자 입장서 바로 보지 않은 탓이다. 그와 관련 두 가지를 언급하자.
먼저 지하철을 떠나 모든 공공시설은 노약자가 우선 배려돼야 한다는 기본적 상식을 망각했다. 즉 지하철이고 대중버스고 간에 노약자가 있으면 자리를 양보하는 게 당연하다. 그런데 노약자석이라고, 그것도 차량 맨 구석에 지정해놓고 노약자를 보호하겠다고 하니, 이게 보호하겠다는 이야기인지 구금하겠다는 의미인지 애매하다. 차라리 비장애인의 자기 권리를 찾기 위한 방편으로 이용된 듯 보인다.
다음은 명백한 차별이다. 좌석을 구분하는 일이 멍청한 인간들에게 있어서는 우대로 비칠지 모르나 필자에게는 철저한 차별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노인들, 그리고 장애를 지닌 사람들의 경우 이 사회서 소외당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런 사람들의 경우 이래저래 사람 냄새가 그립다. 그런데 다른 곳도 아닌 대중교통서까지 자리를 구분하는 일은 그들 입장서 바라볼 때는 가혹하지 않을 수 없는 처사다. 나아가 또 다른 비애를 가져다주는 행위에 다름 아니다.
이제 지하철 노약자석 착석 논란과 관련된 설문조사에 대해 접근해보자. 결국 이 일도 어처구니없는 발상으로 설치했던 노약자석으로부터 비롯된다. 노약자석을 폐지하면 이 문제는 자연스럽게 해결된다.
※ 본 칼럼은 <일요시사> 편집 방향과 다를 수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