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원수 모독’ 자유한국당 노림수

  • 최현목 기자 chm@ilyosisa.co.kr
  • 등록 2019.03.18 10:25:20
  • 호수 121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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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토끼’ 제대로 몰았다

[일요시사 정치팀] 최현목 기자 = 풀릴 것처럼 보였던 여의도의 날씨에 갑자기 한파가 몰아쳤다. 자유한국당 나경원 원내대표의 발언은 정국을 얼어붙게 만들었다. 여야의 대치 정국으로 3월 국회는 파국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 4선 의원으로 산전수전 다 겪은 나 원내대표가 이 같은 결과를 예상치 못했을 리 없다.
 

“국민 여러분, 지난 70여년의 위대한 대한민국의 역사가 좌파정권 3년 만에 무너져 내려가고 있습니다. …힘겹게 피와 땀과 눈물로 쌓아올린 이 나라가 무모하고 무책임한 좌파정권에 의해 쓰러지고 있습니다. …북한에 대한 밑도 끝도 없는 옹호와 대변, 이제는 부끄럽습니다. 더 이상 대한민국 대통령이 김정은의 수석대변인이라는 낯 뜨거운 이야기를 듣지 않도록 해주십시오.”

김정은 대변인?
묘수냐 악수냐

지난 12일 국회 본회의장은 약 30분 동안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평소 침착했던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 의원들까지 격분해서 나 원내대표를 향해 고성과 삿대질을 해댔다. 특히 수석대변인이라는 말이 나왔을 때는 민주당 의석에선 “어떻게 대통령을 수석대변인이라고” “그만해” “제발 표현 좀 가려하십시오” “취소해, 사과해” 등의 항의가 터져나왔다.

자유한국당(이하 한국당) 측은 수석대변인이라는 표현이 문제될 것 없다는 입장이다. 자신들은 외신의 보도를 인용했을 뿐이라는 논리다.

지난해 9월26일 <블룸버그 통신>의 한국 주재기자가 쓴 기사(South Korea's Moon Becomes Kim Jong Un's Top Spokesman at UN-남한의 문 대통령, 김정은의 수석대변인이 되다)를 일컫는다.


청와대는 즉각 입장을 내놨다. 지난 12일 한정우 청와대 부대변인은 입장문을 통해 “나 대표의 발언은 국가원수에 대한 모독뿐 아니라 한반도 평화를 염원하는 국민에 대한 모독”이라며 “대통령까지 끌어들여 모독하는 것이 혹여 한반도 평화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 아니길 바란다”고 밝혔다.

청와대는 입장문을 통해 ‘모독’을 강조했다. 이는 민주당 지도부도 마찬가지다. 본회의 직후 긴급 의원총회를 연 이해찬 대표 등 민주당 지도부는 나 원내대표의 발언을 ‘국가 원수에 대한 모독’으로 규정해 발언 철회 및 사과를 촉구했다.

민주당과 한국당의 공방전은 ‘윤리위 제소’로 확전됐다. 발언이 있은 다음 날 오전, 민주당은 국회 윤리위원회에 나 원내대표에 대한 징계안을 제출했다. 윤호중 사무총장이 대표 발의했으며 민주당 국회의원 128명 전원이 찬성했다.

“문통은 김정은 대변인” 정국경색
실보단 득 ‘나다르크’로 급부상

나 원내대표는 격분했다. 그는 민주당의 제소 소식에 대해 “의회 헌정사상 없었던 일”이라며 “야당 원내대표 연설을 갖고 윤리위에 제소한다는 것은 국회를 같이하지 말자는 게 아닌가”라고 반문했다.

민주당은 징계안서 나 원내대표가 연설을 통해 국회법 제25조, 제146조 등을 비롯해 국회의원윤리강령과 국회의원윤리실천규범을 위반했다고 주장한다. 국회법 제25조는 품위유지의 의무 조항, 제146조는 모욕 등의 발언 금지 조항이다. 

한국당도 가만 있지 않았다. 한국당은 의원총회를 잇따라 열어 민주당 이해찬 대표와 홍영표 원내대표를 윤리위에 맞제소했다. 제1야당 원내대표의 연설을 방해했다는 사유다. 이로써 두 달이 넘는 공전 끝에 열린 3월 국회는 개회 수일 만에 다시 파행 위기에 놓였다.
 

▲ 회색 만연한 나경원 자유한국당 원내대표

3월 국회가 안갯속에 휩싸이자 또 다른 갈등 요소가 수면 위로 올라왔다. 한국당을 제외한 민주당과 바른미래당, 민주평화당, 정의당이 선거제 개혁안과 개혁입법을 패키지로 묶어 신속처리 안건(패스트트랙)으로 지정하자는 데 공감하고 있는 것. 구체적인 안들을 조속히 확정 지으려는 움직임도 보이고 있다.

한국당 입장에서는 무슨 수를 쓰든 ‘여야 4당 패스트트랙 연대’를 저지해야 한다. 국회의원을 뽑는 선거제 개혁을 하면서 제1야당을 ‘패싱’하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정치권에서는 여야 4당 패스트트랙 연대의 목적이 한국당을 협상 테이블로 끌어들이기 위한 압박용이라고 해석한다.

한국당은 의원 총사퇴도 불사한다는 입장이다. 국회 정치개혁특별위원회 한국당 간사인 장제원 의원은 “한국당은 논의 구조서 빠진 채 패스트트랙에 태워진 선거법이 오는 12월 본회의에 상정돼 통과된다면 이 제도로 내년 4월 총선을 치를 수 없다”며 “차라리 의원직 총사퇴를 한 뒤 조기총선을 할 것”이라고 엄포를 놨다.

헌정 초유의
쌍방향 제소

4선 의원으로 산전수전 다 겪은 나 원내대표를 비롯한 한국당 지도부가 이 같은 결과를 예상치 못했을 가능성은 지극히 낮다. 오히려 의도된 결과라는 것이 정치권의 중론이다. 

실제 한국당을 제외한 야권 내에서는 민주당의 과민반응에 대해 부적절하다는 비난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민주당이 ‘나경원 띄워주기’에 일조했다는 것이다.

‘정치 9단’ 민주평화당 박지원 의원은 지난 12일 본회의장이 아수라장으로 변한 모습을 보고 “민주당 전략은 나 원내대표를 잔다르크로 만들어주고 있다”고 꼬집었다.

설령 3월 국회가 파국을 맞더라도 한국당 입장에서는 딱히 손해 볼 일은 없다. 국회가 문을 열지 않으면 부담은 여당의 몫이기 때문이다.

현재 국회에는 선거제 개혁안, 검경수사권 조정, 사법 적폐 청산 등 사법개혁, 5·18 왜곡 폄훼 처벌 내용이 담긴 5·18특별법 개정안, 유치원 3법, 탄력근로제 확대 관련 법안, 최저임금 결정구조 변경 관련 법안 등 처리해야 할 현안들이 산적해 있다.
 

▲ 이해찬·홍영표 징계안 제출하는 자유한국당

하나같이 한국당이 반대하는 현안들이다. 선거제 개혁안에 대해 한국당 측은 “내 손으로 직접 뽑는 국회의원이 좋은지, 정당이 알아서 정해주는 국회의원이 좋은지, 직접 국민들께 물어보라”고 답한다. 사실상의 반대 의사다. 

시간은
한국당 편

검경수사권 조정과 공직자비리수사처(이하 공수처) 도입에 대해서도 한국당은 공수처가 검찰·경찰의 ‘옥상옥’이 될 우려가 있으며, 상설특검법이나 특별감찰반 제도라는 대안이 있다며 반대하고 있다. 그 외 5·18특별법 개정안, 유치원 3법, 탄력근로제 확대 관련 법안 등도 한국당이 소극적이거나 반대하는 쪽이다.


민주당 입장에서는 조급할 수밖에 없다. 국회 공백이 길어지면 대통령의 정책에도 제동이 걸린다. 당장 정부의 개각으로 개최돼야 할 7건의 인사청문회도 정상적인 진행을 기대할 수 없게 된다. 내각 공백현상이 일어날 수 있는 것이다. 잇따라 열릴 인사청문회도 정쟁으로 파행을 맞을 공산이 커졌다. 

시간은 한국당의 편이다. 경제 악화와 미세먼지 등 최근 정부의 분위기는 좋지 않다. 여기에 민주당이 나 원내대표를 제소해 한국당은 여당으로부터 탄압받고 있다는 이미지까지 얻었다.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 이후 한국당의 숙원과도 같은 ‘보수 단일대오’의 밑그림이 그려진 것이다. 

적어도 한국당의 내부결집은 이뤄냈다. 나 원내대표의 연설이 끝난 후 한국당 의원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나 원내대표에게로 달려가 그를 격려했다. 무엇보다 지난 2·27전당대회서 김진태 당시 당 대표 후보의 낙선으로 불만이 ‘쌓일 대로 쌓인’ 태극기부대에게 큰 점수를 얻었다는 점이 긍정적이다. 다가올 21대 총선서 이들의 지지를 표심으로 이어가려는 복안으로 읽힌다.

‘야당 탄압’ 프레임 성공
보수 단일대오 밑그림도

민주당 표창원 의원은 지난 13일 BBS불교방송 라디오에 출연해 “당내 많이 유입된 친박 성향의 당원들과 그 지지자들이 원하는 내용들로만 (나 원내대표의 연설이) 가득 차 있는 것으로 봐서는 다분히 전략적이라는 생각이 든다”고 분석했다.

앞서 한국당 황교안 대표는 ‘대여투쟁 로드맵’을 공개한 바 있다. 당 최고위원회의에 참석한 그는 당의 대여투쟁 목표로 ▲싸워서 이기는 정당 ▲대안을 가지고 일하는 정당 ▲미래를 준비하는 정당 등을 제안했다.
 


‘싸워 이기는 정당’에 대한 세부 과제도 공개했다. 좌파독재 저지 투쟁, 문재인정권 경제실정백서위원회 출범, 싱크탱크인 여의도연구원 개혁 등이 그것이다. 이어 현 정부의 소득주도성장은 ‘좌파 포퓰리즘 정책’, 대북정책은 ‘가짜 평화정책’으로 규정했다.

한국당 지도부가 확실한 방향성을 보이면서 당 지지율도 상승하고 있다. 여론조사 전문기관 리얼미터가 tbs 의뢰로 지난 11∼13일 조사해 14일 공개한 3월2주 차 주중집계에 따르면, 한국당 지지율은 전주 대비 1.9%포인트 오른 32.3%로 집계됐다. 4주 연속 상승이자 1개월 만에 7.1%포인트나 오른 가파른 상승세다.

지지율 1위인 민주당과의 격차도 5%로 줄이는 데 성공했다(자세한 조사개요와 결과는 리얼미터 홈페이지 또는 중앙선거여론조사심의위원회 홈페이지 참조).

다음 목표는
4·3재보선

한국당은 기세를 이어 4·3재보궐선거의 전승을 내심 기대하고 있다. 한국당 의원실 보좌진은 지난 13일 <일요시사>를 통해 “당원들의 반응이 아주 뜨겁다”며 “격려 전화가 수시로 온다. 기세를 탔다는 느낌이다. 이대로 재보선서 좋은 성적을 내면 지난해 6·13지방선거 때 당한 참패를 만회할 수 있다. (나 원내대표가) 집토끼 몰이에 제대로 성공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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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꾸는’ 장동혁 용꿈

‘혼자 꾸는’ 장동혁 용꿈

[일요시사 정치팀] 박형준 기자 = 이재명 대통령의 임기 초반 난맥상이 이어지지만, 더불어민주당과 국민의힘의 지지율 격차는 더욱 벌어지고 있다. 국민의힘 장동혁 대표는 용꿈을 꾸지만, 새 비전을 제시하지 못한 채 강경 보수 세력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장 대표에게 그와 용꿈을 함께 꿀 수 있는 창조적 소수가 없는 이유는 뭘까? 국민의힘은 지난달 장외투쟁에 집중했다. 지난달 21일엔 대구에서, 지난달 28일엔 서울에서 각각 개최했다. 국민의힘 장동혁 대표는 지난 2일 기자간담회에서 “장외투쟁을 통해 정부·여당의 잘못을 국민에게 알렸다”며 “그 과정에서 정부·여당의 지지율이 하락했다면 소기의 목적을 달성한 것이고, 지지층 결집으로 싸울 동력도 확보했다”고 주장했다. 벌어지는 지지율 격차 하지만 외부의 평가는 다르다. 보수 신문 <조선일보>는 지난달 23일 사설에서 “스마트폰과 각종 미디어가 발달한 시대라서 국민은 정치권 소식을 실시간으로 보고 듣는다”며 “장외투쟁은 시대에 뒤떨어졌다는 느낌을 준다”고 비판했다. 추석 연휴 직전인 지난 2일 오후엔 이진숙 전 방송통신위원장이 체포됐다가 지난 4일 체포적부심이 인용돼 석방됐다. 김건희 여사의 경기 양평군 공흥지구 개발사업 개입 의혹과 관련해 김건희 특검에 소환돼 조사를 받았던 고 정희철 단월면장도 “특검이 강압 수사를 했다”는 취지의 자필 메모를 남긴 채 같은 날 사망했다. 이후 국민의힘은 국회에 정 면장의 분향소를 차렸고, 의원들이 돌아가면서 빈소를 지키고 있다. 지난달 6일 방송된 JTBC 예능 프로그램 <냉장고를 부탁해>엔 이재명 대통령 부부가 출연했다. 이 방영분은 지난달 26일 발생한 국가정보자원관리원 화재 사건 이후인 지난달 28일 촬영됐다. 이를 두고, 국민의힘 주진우 의원은 “국가적 재난 때문에 지금도 국민은 피해를 보고 있는데, 한가하게 예능 촬영하고 있었다면, 이 대통령은 대통령 자격이 없다”고 주장하면서 추석 연휴 내내 쟁점화를 주도했다. 하지만 국민의힘의 대여 투쟁엔 힘이 붙지 않는다. 리얼미터가 <에너지경제신문> 의뢰로 지난 1일부터 2일까지 전국 18세 이상 유권자 1008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국민의힘 지지율은 전주 대비 2.4% 하락한 35.9%로 확인됐다. 47.2%의 지지를 얻은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보다 11.3% 뒤처지는 수치였다. 이는 장 대표의 자화자찬과는 다른 결과라고 할 수 있다. 그동안 이 대통령과 민주당엔 ▲검찰 해체 시도 ▲조희대 대법원장과의 갈등 ▲이 대통령의 예능프로 출연 논란 ▲김현지 제1부속실장 관련 논란 등 악재가 이어졌다. 그런데도 지지율 격차가 10% 이상 벌어진 결과가 나온 것이다. 정의화 전 국회의장은 지난 13일 장 대표와 상임고문단의 오찬 회동에 참석해 그 이유를 설명했다. 정 전 의장은 장 대표에게 “과거 안하무인 정치 행태를 보여온 보수 정당의 잘못이 크다는 걸 인정해야 하고, 깊은 반성과 성찰도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이어 “국민의힘 한동훈 전 대표·개혁신당 이준석 대표·국민의힘 유승민 전 의원 등과 함께 못할 이유가 없다. 새 지도부는 용광로 같은 화합의 정치를 만들어내길 바란다”며 “부정선거론이나 ‘윤 어게인’ 같은 낡은 의제와 결별하고, 민생을 살피면서 국가 미래 비전을 제시하는 데 온 힘을 다해주길 바란다”고 강조했다. 답 없는 장외투쟁에 멀어지는 대권 ‘밖에서’ 집착… 본질 “사람 없어서” 정 전 의장의 발언 중 핵심은 한 전 대표를 향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장 대표는 지난해 12월 윤석열 전 대통령에 대한 탄핵소추와 관련해 의견이 엇갈려 한 전 대표와 결별했다. 장 대표는 지난달 <연합뉴스>와의 인터뷰에서 “한 전 대표를 지지하는 분들이 무차별적으로 저를 비난·모욕·배척하는데 어떻게 정치 행보를 같이 할 수 있겠느냐”고 비판했다. 장 대표는 취임 직후엔 자신의 당 대표 당선을 도운 강경 보수 성향 유튜버들의 반발을 감수하면서 당내 중도 성향으로 평가받는 김도읍 의원을 정책위의장으로 발탁하는 등 중도 공략을 고려하는 것으로 보였다. 유튜버 고성국씨는 이에 크게 반발하면서 “많은 분이 ‘김도읍이 웬 말이냐’고 비판하는데, 김 의원은 그런 비판을 받을 만하다”고 주장했다. 고씨는 “국민의힘은 자유통일당 등 원외 보수 정당에 지방자치단체장 30석을 양보하라”고 요구했다. 장 대표는 이들의 요구를 일체 무시하면서 이들의 영향력 감소를 시도하는 것으로 보였다. 한때는 “공천 청탁을 받고 있다”고 주장하는 등 “보수의 김어준 반열에 오르려는 것 아니냐”는 평가까지 들었던 전한길씨도 최근엔 전당대회 당시의 기세는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그런데 장 대표는 추석 연휴이던 지난 7일, 서울의 한 극장에서 다큐멘터리 영화 <건국전쟁 2>를 관람했다. <건국전쟁 2>는 1947년부터 군·경찰·서북청년단 등과 남조선노동당이 제주도에서 번갈아 이어간 학살 사건인 4·3 사건을 다뤘다. 이를 연출한 김덕영 감독은 주로 남조선노동당의 학살 위주로 내용을 구성했다. 김 감독은 평소 이승만 전 대통령을 지지하면서 부정선거론을 주장해 왔던 인물이다. 4·3 사건은 국가 폭력을 상징하는 전형적인 사건이기 때문에 여전히 민감하다. 하지만 국민의힘과 보수 진영 일각에선 잊을 만하면 양민 학살을 부정하거나 군경의 대응을 찬양하는 움직임이 있었다. 장 대표의 <건국전쟁 2> 관람은 보수 정당 수장이 4·3 사건에 대한 국가 책임을 부정하는 것으로 해석될 소지를 남긴다. 아울러 국가 책임을 부정하는 주장을 수시로 제시하는 세력은 강경 보수 세력이다. 이런 대응은 이재명 대통령을 비판하는 사람들에게 “국민의힘이 대안이 될 수 있다”는 믿음을 주지 못하고 있다. 이는 국민의힘 지지율 추세로 확인할 수 있다. 추석 연휴 전까지 집중했던 장외투쟁도 장 대표 스스로 직접 전면에 나서 여론을 움직이려 한다는 취지로 해석됐다. 하지만 장 대표가 강경 보수 진영의 지원을 토대로 당선됐던 것 자체가 강경 보수 외 유권자에겐 큰 호감을 주지 못하는 족쇄가 되고 있다. 윤 전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 이후 국민의힘에서 가장 큰 문제가 됐던 것은 당내 쇄신이었다. 기행은 멈췄지만… 특검 3개(김건희·내란·채 상병)가 국민의힘을 동시에 겨냥하는 현 상황은 모두 윤 전 대통령의 그림자로부터 비롯된 것이었다. 따라서 국민의힘엔 ▲부정선거론 근절 ▲강경 보수 세력의 영향력 제거 ▲중도 공략 등 산적한 숙제가 있었다. 장 대표가 무시 전술로써 강경 보수 세력의 영향력을 서서히 줄이고 있지만, 유권자로선 만족을 느끼기 어렵다. 정권을 맡을 수 있는 정당으로 다시 도약하기 위해선 확실한 절연이 필요했다. 하지만 장 대표 스스로 <건국전쟁2>를 관람하면서 그동안 구사했던 무시 전술도 그 진의를 의심받을 가능성이 열렸다. “당내 쇄신이 아닌 자신의 영향력 확대만을 위한 무시였느냐”는 의심이다. 특정 세력의 지원을 받은 수장이 수성을 위해서 해야 할 일은 대개 토사구팽이다. 현대에 이르러서도 정치력을 높이 평가받는 역사적 인물들은 적절한 토사구팽을 통해 수성기를 열었다는 공통점이 있다. 장 대표 취임 이후의 국민의힘이 이전과 달라진 게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장 대표 취임 이전 국민의힘은 권영세 전 비상대책위원장·권성동 전 원내대표가 일명 ‘쌍권 체제’를 구성해 ▲대선후보 심야 교체 시도 ▲자체 개혁안에 대한 특정 계파의 조직적 저항 등 기행을 저지르면서 여론의 손가락질을 받았다. 장 대표 취임 이후의 국민의힘에서 이런 기행은 잘 보이지 않으나, 그 이상으로 나아가질 못하고 있다. 이는 재보궐선거 당선으로 국회에 입성해 재선 의원이 된 지 불과 1년여가 지난 장 대표의 짧은 정치 경험 등 부실한 정치 기반으로부터 비롯되는 문제라고 할 수 있다. 개혁신당 이준석 대표는 장 대표에 대해 꾸준히 “용꿈을 꾸고 있다”고 평가한다. 장 대표도 이를 직접 부인하진 않는다. 그런데 용꿈은 특정 정치인 1명이 특출나다는 이유만으로 꿀 수 있는 꿈이 아니다. 장 대표는 아직 “용꿈을 꿀 만큼 특출난 정치인”이란 평가를 받고 있지 못하다. 용꿈을 현실로 구현하기 위해선 ▲시대적 사명 구현 ▲강한 개혁 의지 ▲구체적 개혁 대안 제시 ▲강도 높은 자체 혁신 ▲추상적 비전을 구체화할 수 있는 전문가 집단 구성 등 요소가 필요하다. 용꿈은 용이 되려는 사람과 이를 뒷받침하는 집단의 상호 작용으로 현실이 된다. 전문가 집단은 추상적 비전을 구체적 개혁 대안으로 제시해야 하고, 용꿈을 꾸는 사람은 구체적 개혁 대안을 현실에서 구현해 민심의 호응을 얻어야 한다. 부실한 정치 기반 역사학자 아놀드 토인비는 저서 <역사의 연구>를 통해 ‘창조적 소수’라는 개념으로 용꿈을 현실화하는 과정을 이론화했다. 토인비는 문명의 순환을 통해 역사의 변혁 과정을 설명했다. 그에 따르면, 문명이 쇠퇴하거나 낯선 도전에 직면했을 때 이를 극복하면서 새로운 발전을 꿈꾸는 집단이 나타난다. 토인비는 이들에게 ‘창조적 소수’라는 이름을 붙였다. 장 대표가 강경 보수와의 관계에 명확하게 선 긋지 못한 채 장외투쟁에 집중하는 것에 대한 해답도 있다. 토인비는 창조적 소수가 새로운 발전을 이끌 수 있는 비결로 혁신적인 구상을 제시했다. 혁신적인 구상을 통해 세상에 충격을 주면서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동력을 확보해야 한다. 이는 우리 역사에서도 충분히 확인할 수 있다. 진골 귀족들 간 왕위 쟁탈전이 장기간 이어져 중앙정부가 지방 통제 능력을 잃었던 통일신라 말기엔 후삼국시대가 이어졌다. 이때까지만 해도 이미 멸망한 고구려·백제가 통치했던 지역에선 유민 의식이 유지되고 있었다. 고려 태조 왕건이 후백제 견훤을 물리칠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는 정치적 비전이었다. 왕건은 ‘삼한일통’이란 구호를 내걸면서 신라에 우호적인 관점을 유지했다. 이는 신라를 무력으로 함락해 경애왕을 살해한 후 신라의 각종 기술자를 후백제로 압송했던 견훤의 대응과는 완전히 다른 것이었다. 견훤의 대응에 분노했던 신라 호족은 고려로 기울었고, 이는 왕건이 후삼국을 통일하게 된 결정적 밑거름이 됐다. 훗날 고려는 원나라의 간접 지배와 권문세족의 수탈로 인해 저물었다. 권문세족이 산과 강을 경계로 대농장을 소유하면서, 조세·부역을 직접 감당하는 평민의 경제 기반이 무너졌다. 조선 태조 이성계는 2000명 규모의 사병 집단 가별초를 거느린 대부호였다. 그는 경제력과 군사력을 기반으로 왜구와의 전쟁에서 대활약해 실력자로 부상했다. 그의 막료로 가담한 정도전·조준·남은·윤소종은 당시 새로운 흐름이었던 성리학을 배운 신진사대부였다. 이들 중 조준은 권문세족의 토지 겸병을 막을 수 있는 방편으로 과전법을 제시했다. 과전법은 권문세족의 토지를 모두 몰수해 국유화한 후 전·현직 관료에게 경기도에 한정해 세금을 거둘 수 있는 권리를 부여하는 제도였다. 과전법은 이성계의 막강한 권력·군사력을 기반으로 실현됐고, 그가 새 왕조의 문을 열 수 있었던 결정적 계기가 됐다. 과전법이 시행돼 백성들이 춤을 추면서 기뻐할 때, 국왕 즉위 이전부터 대토지를 보유했던 고려 마지막 임금 공양왕은 아쉬움의 눈물을 흘렸다. 고려가 왜 멸망했고, 조선이 왜 개창될 수 있었는지 잘 보여주는 한 장면이다. “싸울 동력 확보” 자화자찬 “이미 한계만 노출” 평가도 이성계의 등장 이전 강력한 권력과 군사력을 가졌던 사람은 최씨 무신정권을 열었던 최충헌이었다. 그런데 최충헌은 정치개혁과 체질 개심엔 전혀 관심이 없었다. 그는 정예 병력을 자신의 사병 조직에 포함할 뿐, 거란 유민의 고려 침공을 방치했다. 거란 유민은 당시 떠오르던 몽골과의 협력을 통해 물리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는 늑대를 몰아내고 호랑이를 불러들였을 뿐이었다. 최충헌 사후 닥친 국난은 여몽 전쟁이었다. 최우 등 최충헌의 후계자들은 임시 수도 강화도에서 오로지 정권 보위에만 집중했다. 그들은 몽골군이 쳐들어오면 항복한 후 몽골군이 철군하면 항복 조건을 어기는 행태를 반복했다. 그러는 사이 백성들은 각자도생해야 했다. 최씨 정권이 몰락한 후 집권했던 무신 집권자들도 이 행태를 반복했다. 그들이 국난 극복을 등한시한 결과, 고려는 몽골이 중국을 접수한 후 세운 원나라의 간섭을 장기간 받아야 했다. 이는 현대 정치에서도 예외가 아니다. 역대 정권은 모두 새로움을 강조하는 슬로건을 제시했다. 김영삼 전 대통령은 군정 종식을, 김대중 전 대통령은 최초의 수평적 정권교체를, 노무현 전 대통령은 사람 사는 세상을, 이명박 전 대통령은 경제위기 극복을, 문재인 전 대통령은 적폐 청산을, 이 대통령은 내란 종식을 제시했다. 토인비가 문명의 순환을 강조했던 이유는 성공하거나 많은 것을 누리면 나태해지는 인간의 속성과 관련돼있다. 토인비는 “성공한 창조자는 다음 단계에서 다시 창조자가 되기 어렵다”고 주장했다. 그 이유로는 “성공 자체가 큰 흠결이 되기 때문”이라며 “이미 성공했기 때문에 노를 젓는 손을 쉬고 있어서 사회 발전에 쓸모를 다했다”고 설명했다. 국민의힘에선 김용태 전 비대위원장과 윤희숙 전 혁신위원장이 당 체질을 개선할 혁신안을 발표한 후 실행하려고 했다. 하지만 일명 ‘언더 찐윤’으로 통하는 영남권 일부 국민의힘 의원들은 조직적으로 이를 방해했다. 이를 똑똑히 목격한 장 대표는 지방선거 승리를 외치면서도 당내 혁신에 대해선 언급하지 않는다. 오히려 당 주류와 반목하는 한 전 대표와 친한계(친 한동훈)를 겨냥해 패널 인증제를 언급하는 등 당 주류의 영향력을 고착화하는 방안을 발표했다. 누구나 꿈꿔도 이룰 수 없는… 하지만 여론은 국민의힘의 혁신과 중도 확장을 바라고 있다. 이 때문에 이재명정부의 초반 난맥상에도 불구하고, 민주당과 국민의힘의 지지율 격차는 더욱 커지고 있다. 용꿈을 함께 실현할 창조적 소수는 하루아침에 만들어지지 않는다. 자기 사람은 진득하게 비전을 통해 설득하면서 만들어진다. 장 대표에게 필요한 것은 “국정감사 이후엔 어디서 장외투쟁을 하느냐”가 아니라 “왜 내 주변엔 사람이 없어서 내가 직접 장외투쟁을 해야 하느냐”는 것이다. 용꿈은 누구나 꿀 수 있지만, 아무나 이룰 수는 없다. <ctzxp@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