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 황천우는 우리의 현실이 삼국시대 당시와 조금도 다르지 않음을 간파하고 북한과 중국에 의해 우리 영토가 이전 상태로 돌아갈 수 있음을 경계했다. 이런 차원에서 역사소설 <삼국비사>를 집필했다. <삼국비사>를 통해 고구려의 기개, 백제의 흥기와 타락, 신라의 비정상적인 행태를 파헤치며 진정 우리 민족이 나아갈 바, 즉 통합의 본질을 찾고자 시도했다. <삼국비사> 속 인물의 담대함과 잔인함, 기교는 중국의 <삼국지>를 능가할 정도다. 필자는 이 글을 통해 우리 뿌리에 대해 심도 있는 성찰과 아울러 진실을 추구하는 계기가 될 것임을 강조했다.
“장기적이라 하면.”
“백제야 어차피 망한 나라고. 그런데 그 백제를 신라에게 넘겨줄 수는 없고. 그러나 시간이 흐르고 고구려의 문제가 겹쳐지면 자연스럽게 해결될 터이니 그리 신경 쓰지 않아도 될 일이오. 다만.”
“말씀하세요.”
“인문에 관한 이야기요.”
은근한 협박
인문이라는 소리가 나오자 문희가 바짝 긴장한 표정을 지었고 문무왕은 가볍게 혀를 찼다.
“어찌하면 좋을까요?”
“먼저 당의 입장을 봅시다.”
“당의 입장이라면?”
“당이 전하가 버젓이 존재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자꾸 인문을 내세우는 이면에는 여차하면 신라의 왕을 교체하겠다는 협박이 숨어 있는 게요.”
“신라를 일개 도독부(계림도독부)로 격하시킨 것도 부족해서.”
문무왕이 은근히 이를 갈았다.
“일전에도 이야기했지만 여하한 경우라도 인문을 해할 수 없소.”
“그야 당연하지요.”
문희가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외숙, 그 문제도 결국 길게 보아야 합니까?”
“바로 그 이야기요. 모든 문제가, 특히 나라 간의 문제는 반드시 힘의 논리에 저촉됨을 명심하기 바랄 뿐이오.”
“결국 이번 일에 일언반구도 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소나기가 내릴 때 잠시 피했다 가는 것도 방편이라오.”
문무왕과 문희가 소나기를 되뇌었다.
“아울러 나의 파면을 서두르시오.”
연개소문은 부여 풍을 구하면서 당을 끌어들여 일전을 불사하려 했던 계획이 수포로 돌아가자 잠시 상실감에 빠져 있다 다시 일상으로 돌아갔다.
“아버지 계세요?”
그날도 국정에 관해 소소한 사항을 챙기고 일찌감치 집에 돌아와 쉬고 있는 중에 아들 남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들어오너라.”
문이 열리며 남건과 함께 온사문이 모습을 드러냈다. 잠시 멈칫하며 온사문의 얼굴을 바라보다 자리에서 일어나 급히 손을 잡았다.
“어디를 떠돌다 이제 오는 게요.”
“소승이 어디를 갔다고 그러십니까. 이렇게 대감 앞에 있는데.”
온사문의 얼굴을 바라보던 연개소문이 웃음을 터트렸다.
“스님 말이 맞소. 이렇게 함께하고 있는데 말이오.”
연개소문이 자리를 안내하고 남건에게 눈치를 주었다.
“대감, 곡차라 그냥 말씀하세요.”
“그럴까요. 남건아, 가서 곡차 내오라 이르거라.”
남건이 미소를 보이며 자리를 물렸다.
“그동안 어디를 다니셨습니까?”
“그 일을 마무리하고 당나라 이곳저곳을 구경하며 소일했습니다.”
“허허, 당나라를 점령하셨다는 말씀으로 들리오.”
온사문이 연개소문의 말을 되뇌다가는 박장대소했다.
“왜요, 틀린 말이오?”
인문을 내세운 이유는?…파면을 서두르다
연개소문과 온사문 당나라 점령을 논하다
“틀린 말이 아니오라 실은 그 때문에.”
“시원하게 말씀하시오.”
“소승 혼자 그 재미를 느낄 게 아니라 대감과 함께 느끼면 훨씬 좋을 것이란 생각에 이리 찾아뵈었습니다.”
연개소문이 온사문의 얼굴을 주시하며 가만히 그 말의 의미를 되새겼다.
“이른바 당나라 점령을 위한 여행이로세.”
“그렇지요, 여행이지요.”
여행이라는 말을 뱉어내고는 연개소문이 천장을 바라보았다.
온사문은 그저 미소만 짓고 바라볼 뿐이었다.
“그럽시다, 스님. 우리 함께 여행 떠나봅시다.”
온사문이 가볍게 합장했다.
“스님은 이미 알고 계셨지요?”
“무엇을 말입니까.”
“아무리 당을 점령하려 해도 점령되지 않으리란 사실 말입니다.”
“허허, 이미 대감께서는 오래전에 당나라를 점령하시지 않으셨습니까?”
“그야 마음만으로지요.”
“그러면 된 게 아닙니까?”
연개소문이 온사문의 얼굴을 가만히 주시했다.
비록 스님의 입장이라 나이를 가늠하기 힘들지만 은근히 나이가 들어보였다.
“왜 그리 유심히 바라보시는지요?”
“스님의 속세 나이가 궁금하여 그럽니다.”
“대감 모시고 당나라 정도는 점령할 수 있습니다.”
“하기야 나이가 무슨 소용 있다고. 여하튼 이번에는 마음만이 아니라 반드시 몸으로 당나라를 점령해야겠소.”
“당연히 그리하셔야지요.”
“그런데 스님. 내가 왜 그리도 당나라를 멸하려, 아니 멸하려한 게 아니고, 그들을 몰아내려 했는지 아십니까?”
“그야 우리의 뿌리를 찾으려 하신 게지요.”
“그런 측면도 있지만, 반드시 그런 건 아니었습니다.”
“하오면?”
“가능성 여부를 떠나서 그를 통해 우리 민족이 대동단결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고자 했습니다.”
“그런 연유로 백제와 신라에 대해서는 관대했고요.”
“관대라기보다도. 여하튼 신라가 그를 무시하고 알량한 이익을 추구하는 통에 가끔 심술을 부리기는 했습니다.”
“일전에 신라의 김유신 대장군을 살려주셨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만.”
“살려주었다기보다 그저 노인네 둘이 허심탄회하게 시간을 가졌다 함이 옳은 표현이겠지요.”
“여하튼 잘하신 일입니다.”
“무슨 의미요?”
“살려줌으로 인해 항상 대감을 염두에 두면서 살아갈 것 아닙니까?”
“그런가요.”
연개소문이 답하고 웃는 순간 남건이 조촐하게 상을 보아 직접 들고 들어왔다.
“스님, 천천히 드시고 가세요.”
“그러리다. 그런데 장군도 함께하지 않고.”
“두 분께서 오붓하게 시간 보내십시오. 소장은 자리를 물리렵니다.”
남건이 가볍게 고개 숙이고 자리를 물리자 연개소문이 두 개의 잔을 채웠다.
“대감, 자식이라고 다 똑같을 수는 없지요?”
돌아온 온사문
“무슨 말씀하시려는지 바로 하세요.”
“대감의 아들들 중에서 유독 남건 장군이 대감을 빼닮은 듯해서 그럽니다.”
“말씀만이라도 고맙습니다. 그런데 스님은 참으로 묘한 구석이 있소이다.”
온사문이 잔을 비우자 연개소문도 잔을 비워내면서 여운 대신 말을 건넸다.
“그런가요?”
“흡사 도를 깨우친 것 같기도 하고.”
“혹은 그야말로 땡중이라는 생각도 들고 말입니까?”
“그런가요?”
연개소문이 호탕하게 웃어 젖혔다.
“대감, 결국 부처에 이르는 길은 깨달음이지요.”
“그야 말할 것도 없지 않습니까.”
“자신이 하고 싶은 일만 해서 깨달음이 얻어질 수는 없다고 봅니다. 그러니 차마 하지 말아야 할 일들을 하며 그런 차원에서 진정한 의미의 깨달음을 찾아야지요.”
“하기야, 부처님도 주색에 빠져 있다 깨달음을 찾았다고 하니.”
<다음 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