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 황천우는 우리의 현실이 삼국시대 당시와 조금도 다르지 않음을 간파하고 북한과 중국에 의해 우리 영토가 이전 상태로 돌아갈 수 있음을 경계했다. 이런 차원에서 역사소설 <삼국비사>를 집필했다. <삼국비사>를 통해 고구려의 기개, 백제의 흥기와 타락, 신라의 비정상적인 행태를 파헤치며 진정 우리 민족이 나아갈 바, 즉 통합의 본질을 찾고자 시도했다. <삼국비사> 속 인물의 담대함과 잔인함, 기교는 중국의 <삼국지>를 능가할 정도다. 필자는 이 글이 우리 뿌리에 대해 심도 있는 성찰과 아울러 진실을 추구하는 계기가 될 것임을 강조했다.
열기를 보내고 유신이 일부러 인문을 대동하고 실정을 살펴보았다. 그곳까지 이르는 동안 희생이 적지 않았다. 여러 필의 소와 말이 동사한 것은 물론이고 병사들 역시 추위에 얼어 죽은 사람이 한둘이 아니었다.
당군 퇴각 통보
잠시 생각에 빠져들었던 유신이 고구려 영토임에도 불구하고 일대 용단을 내렸다.
비록 완벽하지는 못하지만 그곳에 진을 구축하고 병사들에게 따듯한 음식과 충분한 휴식을 제공하도록 했다.
곁에 있는 인문 역시 어쩔 수 없다 판단하고 그저 함구했다.
병사들에게 충분한 휴식을 제공하며 며칠이 흐르자 소정방에게 갔던 열기가 돌아왔다.
“그쪽 상황은?”
답에 앞서 열기가 한숨을 먼저 내쉬었다.
“왜 그러는가?”
“성화가 불같으셔서 제대로 말도 못 하고 돌아왔습니다.”
“우리 상황도 전하지 못했는가?”
“우리 상황은 전혀 재고의 여지가 없었습니다. 그저 당나라 군사들이 아사 직전에 직면해 있는데 신라 왕은 무얼 하느냐며 그 기승이 대단하였습니다.”
열기의 설명에 인문의 표정이 급격하게 일그러졌다.
“서둘러 가야겠군.”
짧게 답한 유신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대장군!”
“말해보게?”
“직접 가시지 않는 게 이로울 듯하여 그러합니다.”
“그 정도란 말인가?”
“이루 말로 설명하기 힘들 정도였습니다.”
유신이 인문을 바라보다 다시 열기에게 고개 돌렸다.
“그러면 고구려 군과의 전투는 어찌되고 있는가?”
“소장이 도착했을 때 이미 방효태가 이끄는 부대는 방효태를 비롯하여 그의 열세 아들 모두 전사하는 등 몰살당했고, 임아상이 이끄는 부대 역시 참패를 면치 못하여 그 잔류 병사들이 소정방 대장군의 부대와 합류하여 그야말로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곤경에 빠져 있었습니다.”
“원망이 대단하겠군.”
“그러니 대장군께서 직접 가시지 마시고 수하 장수들에게 대신하게 하십시오.”
“알았네.”
유신이 길을 재촉하다 소정방이 주둔하고 있는 가까운 지점에 이르러 행군을 멈추었다.
열기의 의견에 따라 자신이 직접 가지 않음이 이로우리라 판단하고 인문의 얼굴을 주시했다.
인문이 슬그머니 고개 돌리자 아찬 양도와 대감 인선을 불렀다.
그들에게 당 군영에 양곡과 의복을 가져다주라 하고는 따로 소정방에게 은 5700푼, 가는 실로 곱게 짠 베 30필, 두발 30량과 우황(牛黃, 소의 쓸개에 병으로 생긴 덩어리로 강장제로 씀) 19량을 보냈다.
두 사람에게 군사를 딸려 보내고 휴식을 취하며 기다리는 중에 양도와 인선 등이 돌아와 소식을 전했다.
군량과 뜻밖의 선물에 소정방의 마음이 조금 누그러들었지만 진노를 숨기지 않았고 기껏 전한 식량으로 군사를 정비해서 철수하겠다는 통보였다.
연개소문이 집무실에서 잠시 휴식을 취하는 중에 뇌음신이 찾아와 당의 철군 소식을 전했다.
“그게 무슨 소린가!”
“신라에서 군량이 도착했다 합니다.”
“그래서 그를 퇴각에 이용하겠다는 이야기로고.”
“그런데 흥미로운 사실이 있습니다.”
“무엇인가?”
“신라의 군량 수송 책임자가 김유신 대장군이라 합니다.”
“뭐라, 김유신!”
연개소문이 순간적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찌할까요?”
“확실한가?”
연개소문이 다시 자리에 앉았다.
수그러들지 않는 소정방의 분노…당군 퇴각 결정
연개소문 김유신과 독대 요청…술잔 기울이는 둘
“정확한 정보입니다. 지금은 깃발을 세우지 않았지만 우리 국경을 건널 때 김유신의 깃발을 보았다 합니다.”
연개소문이 가볍게 한숨을 내쉬고는 뇌음신에게 장군들을 소집하라 지시하고 급하게 보장왕을 찾았다.
물론 퇴각하는 당나라 군사와 국경을 침범한 신라군에 대한 대처 문제 때문이었다.
보장왕과 잠시 대화를 나눈 연개소문이 집무실로 들어서자 연락을 받고 달려온 장군들이 맞이했다.
본격적인 회의에 앞서 연개소문이 뇌음신에게 파발마를 띄워 퇴각하는 신라군을 봉쇄하고 전투는 자제하라고 지시했다.
아울러 김유신이 무사통과한 지점, 장새를 막으라고도 했다.
뇌음신이 명을 받들기 위해 자리를 뜨자 본격적으로 장군들에게 각자의 임무를 지시했다.
고문 장군을 필두로 모든 장군들에게 퇴각하는 당군을 몰살시키라는 명을 내리고 연개소문은 뇌음신과 남건만을 대동하고 김유신의 신라군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장새에 이르자 김유신이 이끄는 신라군이 고구려 군사들에 의해 남하가 봉쇄된 채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었다.
먼발치에서 신라군이 제대로 진용도 갖추지 못한 모습을 살피던 연개소문이 간단한 술과 안주를 준비하여 신라 진영으로 이동했다.
“대감, 어찌하시려고!”
“저들은 어차피 독 안에 든 쥐 꼴이니 그리 서둘 필요는 없지 않겠는가.”
“그래도 저들이……”
“막다른 골목에 처한 쥐는 고양이도 문다는 말일세.”
뇌음신이 근심에 찬 표정으로 말을 건네자 한 연개소문이 호탕하게 웃었다.
“신라 최고의 장수이니 대우나 해줌세. 그리고 왜 당나라에 그리도 기를 죽이며 사는지 그도 좀 알아봄세.”
말을 마친 연개소문이 남건에게 눈짓을 주었다.
남건이 삼족오가 그려진 깃발을 들고 말에 박차를 가하며 앞으로 달렸다.
오래지 않아 신라군의 안내로 남건이 막사 앞에서 서성이던 유신과 마주했다.
남건이 자신을 소개하고 아버지인 연개소문이 김유신 대장군과 독대하고자 한다는 말을 전했다.
유신이 가벼이 한숨을 내쉬고는 자신의 진영을 둘러보는 듯 고개를 좌우로 돌렸다.
현 상태로는 전쟁은 고사하고 제 한 몸 부지하기 힘들 정도였다.
만약 고구려군이 전면공격을 감행한다면 앉은 자리에서 목을 바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그를 살핀 유신이 곁에 있는 병사를 막사로 이끌어 자리를 정리하라 지시하고 밖으로 나섰다.
밖으로 나서자 꾸물꾸물하던 하늘에서 기어코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그 눈 속을 뚫고 저만치서 눈처럼 하얀 수염을 휘날리며 연개소문이 개선장군처럼 당당하게 모습을 드러냈다.
그를 살핀 남건이 급히 몸을 움직여 다가오는 연개소문 곁에 함께했다.
“어서 오십시오, 대감.”
“연개소문이 신라의 김유신 대장군을 뵙니다.”
말에서 내린 연개소문이 유신의 손을 잡았다.
유신이 그 손을 바라보는 순간 하얀 눈이 살며시 손에 내려앉았다.
“누추하지만 드시지요.”
“그래주신다면 기꺼이 들겠소.”
두 사람이 막사에 들어서자 연개소문이 뇌음신과 남건에게 눈짓을 주었다.
뇌음신이 가지고 온 술과 안주를 탁자 위에 내려놓고 남건과 함께 서둘러 밖으로 나가 막사에 시위하고 있는 신라 병사 옆에 자리 잡았다.
희대의 만남
“대장군은 연세가 어찌 되시오?”
연개소문이 술을 따르며 유신을 찬찬히 살펴보았다.
“하릴없이 세월만 축냈구려. 이제 예순여덟입니다.”
순간 연개소문이 술 따르던 동작을 멈추었다.
<다음 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