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숨은 멘토단 ‘7인회’ 실체 대해부

  • 이주현 jhjh1313@ilyosisa.co.kr
  • 등록 2012.05.30 16:4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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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독재’ 화려한 이력의 소유자들 ‘공주마마’ 옹립 나섰나?

[일요시사=이주현 기자] 유력 대선주자인 박근혜 전 새누리당 비상대책위원장의 ‘정치적 배후’ 실체가 드러나 적잖은 파문이 일고 있다. 그간 여의도 정가 일부에서만 나돌던 친박 내 원로그룹 ‘7인회’의 실체가 밝혀진 것이다. 지난 대선 때 이명박 캠프의 6인회(이명박·이상득·박희태·최시중·이재오·김덕룡)가 막강한 권한을 행세한 바 있어 7인회의 실체가 드러나자 정치권은 촉각을 곤두세우며 예의주시하고 있다. ‘박근혜 대통령 만들기’의 중심추 역할을 할 것이 확실시 되는 7인회의 실체를 낱낱이 파해쳐봤다.

박근혜 전 위원장의 고문 역할을 하고 있는 김용환 전 재무부 장관이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친박계 원로그룹 ‘7인회’의 실체를 언급해 정치권의 비상한 관심이 모아졌다.

김 전 장관이 밝힌 최병렬 전 한나라당 대표, 안병훈 전 조선일보 부사장, 김용갑 전 의원, 김기춘 전 법무부 장관, 현경대 전 의원, 강창희 당선자로 구성된 7인회의 면면을 살펴보면 단순한 원로급 인사가 아니라 ‘박정희 유신체제’를 이끌다시피 한 핵심 인물들이기 때문이다.

박근혜 멘토
있다? 없다?

그간 여의도 정가에서는 박 전 위원장의 ‘정치적 배후’에 대한 ‘설’들이 끊임없이 제기된 바 있다. ‘멘토가 누구냐’는 것.

박 전 위원장이 사석이나 비공식 회의에서 참모나 의원들로부터 건의 또는 조언을 듣고 공감의 뜻을 표명해 놓고도 다음날 이를 뒤집는 일이 허다하게 발생하자 이 같은 설들이 떠돌게 된 것이다.

친박계 핵심의원도 “분명 누군가와 의논하고 의사결정에 큰 영향을 받는 것 같다”며 “(박 전 위원장에게) 정치적 배후가 있는 것 같다”고 분석하기도 했다.


‘배후설’에 대한 추측은 끊임없이 쏟아져 나왔다. 수많은 인물들이 하마평에 올랐던 것이다.

오래된 인물로 정윤회 전 비서실장이 대두됐다. 정 전 실장은 박 전 위원장과 수많은 염문설이 떠돌았던 최태민 목사의 비서실장을 역임하며 사위자리까지 꿰찬 인물이다.

최 목사와 박 전 위원장의 커넥션을 가장 정확하게 알고 있는 인물로 최 목사의 후계자로 알려지기도 했다.

박 위원장의 1997년 한나라당 입당과 98년 총선 출마를 도왔고 2002년 한나라당 탈당 당시에도 정 전 실장이 정치적 조언자로 박 전 위원장의 결정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들과의 관계로 지난 대선과정에 수많은 네거티브 공격을 당한 바 있는 박 전 위원장이 정 전 실장을 멘토로 두기에는 무리가 있다는 판단에 하마평에서 제외됐다.

끊임없이 설로만 제기되던 ‘정치적 배후’ 낱낱이 밝혀져
‘박정희의 유신체제’ 이끌다시피 한 핵심인물들 포진

박 전 위원장의 동생 지만씨의 부인 서향희 변호사의 ‘실세설’도 한때 나돌았다. 올 초 황우여 대표가 원내대표 시절 박 전 위원장의 삼성동 자택을 방문했을 때 서 변호사가 배석했다는 얘기가 나오면서부터다.


그러나 서 변호사는 박 전 위원장이 멘토로 삼을 만큼 지식과 경륜을 지니고 있지 않아 단지 흘러가는 ‘설’로 묻혔다.

‘원로그룹설’도 있었다. 최필립·서청원·남덕우·김종인·김용환·최병렬 등으로, 이들은 박정희 시대 출신이거나 박 전 위원장이 어려웠던 시절 함께 했던 이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최필립 정수장학회 이사장과 김용환 전 장관 등은 아버지의 신임을 받던 참모출신이라는 점에서 박 전 위원장의 신뢰는 절대적이라는 분석이었다.

부모님을 총탄에 잃은 기억이 있는 박 전 위원장은 사람에 대한 믿음이 약한 편인데 수십 년 간 자신의 곁을 떠나지 않은 이들 원로그룹에 대해선 각별하게 대했다.

차기정권에서 이들이 현직을 맡기는 쉽지 않겠지만 국정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거나 일부는 총리 등에 중용될 수 있을 것이라는 전망도 나왔다.

특히 18대 총선에서 친박연대의 돌풍을 일으킨 서청원 전 대표와 김용환 전 장관의 배후설도 나왔다. 19대 총선 직후에 나온 ‘좌청원-우용환’ 설이 그것이다.

서 전 대표가 박 전 위원장과 정치적 관계를 유지하고 있고 김 전 장관은 자발적으로 찾아가 쓴 소리도 하고 건의도 하기에 나온 설이었다.

박 전 위원장도 이들의 충심을 잘 알고 있었지만 부정적 여론이 일자 즉시 소멸시켰다.

하지만 김 전 장관은 이것이 못내 아쉬웠던 듯 싶다. 한 언론과의 인터뷰 과정에서 원로그룹 7인회의 실체를 공개하며 자신의 위상을 과시했기 때문이다.

김 전 장관은 인터뷰에서 “사람들이 7인회라고 부르는데 가끔 만나 식사하고 환담한다”며 그 구성원이 “나를 포함해 최병렬, 안병훈, 김용갑, 김기춘, 현경대, 강창희 등이다”라고 밝혔다. 또 “4·11 총선이 끝난 뒤에도 박 전 위원장과 한 번 모였다”고 말하며 저간의 친분까지 공개했다.

일각에선 이를 두고 4년 전 MB캠프 6인회와 비교하는 시각이 많았다. 당시 6인회 멤버가 모여 모든 사안에 대한 최종 결정을 했고, MB정권 내에서도 막강한 권력을 휘둘렀기 때문이다.

이한구 원내대표
김용환의 작품?

 
7인회의 실질적 수장은 김 전 장관으로 알려졌다. 실제 7인회 멤버 중 선대위 고문단에 이름을 올린 유일한 인사도 김 전 장관이었다. 김 전 장관은 박정희 유신정권 당시 청와대 경제수석을 거쳐 재무부 장관을 지낸 인물이다.

1980년 신군부의 ‘숙정’ 대상에 올랐다가 13대 총선에 신민주공화당 공천으로 충남 보령에서 당선된 이후 내리 4선을 했다.


JP의 최측근으로 DJP연합 출범 당시 핵심적 역할을 했던 그는 1999년 자민련을 탈당했고 2001년 한나라당에 입당했다. 이번 총선에서 새누리당이 충청권에서 약진하는데 톡톡히 한 몫 한 그에 대한 박 전 위원장의 신뢰는 절대적이다.

김 전 장관은 이한구 새누리당 원내대표와 동서지간이기도 하다. 따라서 이번 원내대표 경선과정에 이 원내대표와 러닝메이트를 형성해 정책위의장에 입성한 진영 의원을 격려 방문한 것도 김 전 장관의 입김이 들어가지 않았겠느냐는 분석이다.

박 전 위원장을 위한 친목단체 ‘상록포럼’ 상임고문이기도 한 김 전 장관은 박 전 위원장이 현정부 실세인 이재오 의원과 정운찬 전 총리 등과 대립각을 세울 때면 날 선 발언으로 상대를 공격하며 막후에서 박 전 위원장을 든든히 도와주는 역할을 해봤다.

또한 재작년 말부터 박 전 위원장에게 (좌클릭) 정책기조로 변화가 필요하다고 조언해왔으며 평소 “박근혜 시대가 올 것이라 굳게 믿는다”는 말을 해온 것으로 알려졌다.

최병렬 전 대표는 유신시대 <조선일보> 정치부장 출신으로 5공 출범 직후 편집국장을 거쳐 민정당 국회의원으로 정계에 입문했다.

제12대(민주정의당), 제14대(민주자유당), 제15대(신한국당), 제16대(한나라당) 국회의원을 역임했고 디도스 사태의 최구식 전 의원과 BBK 검사로 유명한 최재경 검사의 삼촌으로도 유명하다. 별명은 히틀러에서 따온 ‘최틀러’다.


청와대와 정계의 요직을 거쳤고 관선 서울시장도 지낸 그는 2003년 노무현 전 대통령 탄핵을 진두지휘한 한나라당 대표였다.

헌법재판소에서 탄핵결정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탄핵역풍을 맞고 17대 총선에서 공천을 받지 못해 정치권에서 사라졌다가 2007년 대선 경선 당시 박 전 위원장을 지지하며 복귀했다.

탄핵정국 당시 최 전 대표의 후임자로 박 전 위원장이 바통을 이어 받기도 했다.

의사결정 과정에 지대한 영향력 행사할 것으로 여겨져
‘유신의 딸’이라는 사실 재확인시켜주는 ‘독배’ 될 수도

안병훈 전 <조선일보> 부사장은 유신 시절 <조선일보> 청와대 출입기자 당시 박 전 위원장과 교분을 튼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 대선 당시 박근혜 캠프 공동선대위원장을 지냈고 ‘친정’의 ‘편파보도’에 격분하기도 했다.

현재는 도서출판 ‘기파랑’의 대표를 맡고 있으며 기파랑은 보수단체 뉴라이트가 출간한 대안교과서의 출판사이기도 하다.

안 전 부사장은 18대 총선 당시 한나라당 비례대표 신청을 했었으나 박 전 위원장을 도왔단 이유로 찬밥 대접을 받기도 해 박 전 위원장이 늘 미안한 마음을 느끼고 있다고 한다.

검찰총장을 지낸 김기춘 전 법무부 장관은 중앙정보부 파견 검사 시절 유신헌법 제정의 실무를 담당한 전력을 지닌 인물이다.

정수장학회의 장학생이기도 했던 그는 박정희 정권 당시 법무부 과장으로 유신헌법의 초안을 작성한 당사자이기도 하다.

15대~17대 3선 의원으로 1992년 법무부 장관 재직 당시 부산지역 기관장들을 모아 지역감정을 조장해 여당 후보를 지원하는 내용을 의논했던 ‘초원복집 사건’으로 기소되었으나 무혐의로 풀려났다.

오히려 이 사건 이후 김영삼 전 대통령의 총애를 받아 승승장구하는 계기가 됐다. 그러나 이런 전력으로 시민단체에 의해 낙선대상으로 지목됐다.

김 전 장관 역시 노 전 대통령 탄핵 당시 적극적으로 주도한 인물로 법제사법위원장으로서 탄핵 심판 시 일종의 검사역할을 했다.

김용갑 전 의원은 육사 17기로 소령 예편한 후 국가안전기획부에서 근무했으며 5공화국에서 청와대 민정수석비서관을 역임했다.

6공화국에서도 총무처 장관과 민정수석을 역임했으며 전두환 전 대통령에게 ‘직선제 수용’을 주장한 인물이다.

5공 경력이 자랑스럽다는 자칭 원조보수로 ‘우익의 기수’ ‘대변자’라는 별명이 붙기도 했다. 15~17대 3선 의원으로 이명박 정부가 출범하면서 스스로 불출마를 선언하며 은퇴했다.

현경대 전 의원은 박 전 위원장의 외곽조직인 ‘한강포럼’을 주도한 인사로 지난 2008년 총선에서 낙천되자 탈당, 무소속으로 출마했다.

그러나 박 전 위원장이 비상대책위원장으로 취임한 뒤 탈당 전력에도 불구하고 올해 초 복당이 승인됐고 공천장도 땄지만 결국 또 낙선했다. 박 전 위원장이 정계에 입문할 당시 여러모로 조언을 해주며 자리를 잡을 수 있게 도움을 준 인물이다.

이번 4.11 총선에서 6선에 오른 강창희 당선자(대전 동구)의 경우 19대 전반기 국회의장이 유력시 되는 인물이다. 육사 25기 하나회 출신으로 신군부의 막내 격인 강 당선자는 1980년 육군 중령으로 예편한 이후 민정당 국회의원으로 정계에 입문했다.

친독재로 뭉친
화려한 경력들

이처럼 이들 7명은 단순한 원로급 인사가 아니라 박정희 유신체제를 대변하는 핵심인물들이다. “‘이명박 6인회’에는 김덕룡, 이재오 같은 인물이라도 있었지만 ‘박근혜 7인회’는 하나같이 친독재 이력을 가진 이들밖에 없다”는 이야기가 나오는 것도 이런 까닭이다.

따라서 “역사의 심판 받아야 할 이들이 다시 나타난 것은 박근혜 그녀가 ‘유신의 딸’이라는 사실만 재확인시켜주고 있다”는 비난과 우려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박 전 위원장의 대선 승리를 위해 뭉친 이들이 대선 정국에 어떤 파급력을 몰고 올 것인지 귀추가 더욱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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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명 덮치는 문재인 그림자

이재명 덮치는 문재인 그림자

[일요시사 취재1팀] 장지선 기자 = 대통령선거는 전 정부의 공과를 통째로 평가받는 시험이다. 여당 후보는 전 정부의 공이 크면 후광을 입고, 반대로 과가 많으면 핸디캡을 안고 시험장에 들어서는 셈이다. 이번 대선 정국은 대통령 탄핵으로부터 시작됐다. 야당은 5년 만에 정권을 교체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잡았다. 정권 창출에 성공한 대통령은 집권 1~2년 차에 가장 강한 힘을 발휘한다. 3~4년 차에 이르면 정부 안팎서 누수가 발생한다. 빠르면 이 시기에 레임덕이 시작된다. 임기 마지막 해에는 정권 재창출을 위해 몸을 사려야 한다. 지지율에 따라 차기 대선에 끼치는 입김도 달라진다. 5년 단임제 이후 대체로 나타나던 대통령의 모습이다. 주기설 깬 집값 폭등 국회의원 선거나 지방선거가 중간 평가의 성격을 띤다면 대선은 최종 시험에 가깝다. 모든 정당의 목표가 정권 창출인 만큼 대선의 무게감은 남다르다. 행정부 수장을 넘어 국가원수로서 대통령이 갖는 권한이 그만큼 어마어마하기 때문이다. 1987년 6월 민주항쟁의 결과로 대통령직선제가 도입됐다. 국민 모두에게 투표권을 부여하고 대통령을 ‘직접’ 뽑을 수 있도록 헌법이 개정된 것이다. 대통령직선제가 정착된 이후 정권교체는 10년 주기로 이뤄졌다. 보수 진영의 노태우·김영삼정부에 이어 진보 진영의 김대중·노무현정부가 들어섰다. 이후 이명박·박근혜 전 대통령의 당선으로 보수 진영이 다시 정권을 잡았다. 박 전 대통령이 탄핵으로 물러난 뒤 진보 진영의 문재인 전 대통령이 재수 끝에 청와대에 입성했다. 그대로 이어지는 듯했던 ‘10년 주기설’은 윤석열 전 대통령의 등장으로 깨졌다. 5년 만의 정권교체가 진보 진영에 안긴 충격은 컸다. 문 전 대통령의 국정 지지율은 퇴임 전까지 40% 안팎을 오르내렸다. 지지율 10~20%대를 오가며 레임덕에 시달렸던 과거 대통령 때와는 다른 양상이었다. 그럼에도 진보 진영은 정권 재창출에 실패했다. 득표율 차이는 1%도 되지 않았다. 지난 대선서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 이재명 후보는 윤 전 대통령에게 0.73%p 차이로 졌다. 대선 전 여러 여론조사에서 보여준 윤 전 대통령이 이 후보를 넉넉하게 앞선다는 결과와 비교해서는 선전이었지만 문 전 대통령의 지지율을 고려하면 충격적인 패배였다. 게다가 당시 윤 전 대통령은 선출직 출마 경험이 단 한 번도 없는 ‘초보 정치인’이었다. 대선 패배, 서울이 결정적 역할 부동산 가격이 낙선에 영향 줘 민주당에서는 대선 패배의 원인을 찾아야 한다는 목소리가 분출했다. 이 과정서 레이더망에 걸려든 게 ‘부동산’ 문제였다. 정확하게는 문재인정부의 부동산 정책이 도마 위에 올랐다. 문정부에서는 20번이 넘는 부동산 대책이 쏟아졌다. 정부 발표가 나올 때마다 부동산시장은 널뛰었다. 실제 윤 전 대통령 승리의 쐐기를 박은 서울 표심이 부동산 정책에 영향을 받았다는 분석이 개표 직후 제기됐다. 지난 대선은 말 그대로 양 진영을 ‘쥐어짠’ 선거였다. 국민의힘과 민주당의 ‘텃밭’인 영남과 호남 지역서 총결집했다. 당락을 가른 건 서울서의 격차였다. 윤 전 대통령은 서울서 31만여표를 앞섰다. 전체 표 차이인 24만표보다 많다. 윤 전 대통령은 마포·용산·성동 등 이른바 ‘마용성’으로 불리는 지역과 광진·강동·양천 등 아파트가 밀집돼있으면서 상대적으로 소득 수준이 높은 지역서 이겼다. 구별로 따지면 25개 구 중 14곳에서 윤 전 대통령에게 더 많은 표를 몰아줬다. 21대 총선 때 민주당이 4곳을 빼고 21개 구를 이긴 것과 비교하면 엄청난 선방이었다. 노원·도봉·강북 등 ‘노도강’으로 불리는 지역서도 윤 전 대통령은 선전했다. 이 지역은 민주당 지지세가 강한 곳이다. 재건축·재개발 아파트가 밀집돼있다. 승부 자체는 이 후보가 이겼지만 표 차가 근소했다. 총선 때 20% 가까이 차이 났던 게 대선에서는 1% 안팎으로 줄었다. 부동산 문제에 따른 민심이반이 뚜렷하게 드러났다는 분석이다. 완전한 실패 최악의 실정 같은 해 8월 국회입법조사처에서 발간한 <제20대 대통령선거 분석> 자료에도 부동산이 가른 표심이 언급돼있다. 보고서에 따르면 지난 대선에서 유권자가 관심을 가진 의제는 경제 회복과 주거 안정 등 부동산 정책이었다. 대선 전 여론조사 전문기관 한국갤럽서 조사한 대선 주요 의제 관련 설문서도 경제 회복(32%), 부동산 문제 해결(32%)이 첫손에 꼽혔다. 40~50대보다 30대서 부동산 문제에 관한 관심이 컸다. 그러면서 이 후보가 과거 민주당 후보에 비해 수도권 득표가 낮았다며 부동산 가격 상승과 관련성이 높다고 분석했다. 국회입법조사처는 “민주화 이후 모든 대선서 민주당 계열 후보가 국민의힘 계열 후보에게 서울서 패한 적은 2007년밖에 없었다”며 “수도권은 인구가 집중된 탓에 득표율 차이가 작더라도 득표 차는 매우 크게 나타난다. 그만큼 선거 승패에 수도권 표심의 영향이 컸다”고 설명했다. 국회입법조사처는 부동산 이슈와 득표율의 상관관계를 보기 위해 동 단위로 서울 지역의 아파트 가격을 살폈다. 아파트 가격 변동에 따른 득표율을 본 것이다. 분석 결과 2021년 아파트 가격과 2020~2021년 가격 변동이 윤 전 대통령, 이 후보의 득표율과 상관성이 높았다. 가격 변동보다는 가격 자체가 영향을 미친 것으로 나타났다. 보고서에 따르면 2021년 아파트 평(3.3㎡)당 평균 가격이 높은 지역일수록, 아파트 가격 증가폭이 큰 지역일수록 윤 전 대통령의 득표율이 이 후보보다 높았다. 또 재산세 부담이 증가한 지역서 윤 전 대통령에 대한 지지가 많았다. 재산세가 늘었다는 건 그만큼 부동산 가격이 올랐다는 뜻이다. 지지율도 무용지물 민주당서 지목한 패배 원인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민주당은 대선 패배 1년 뒤인 2023년 8월 녹서(Green Paper, 정책을 제안하고 다양한 의견 수렴 과정을 담은 대화록) <민주당 재집권 전략 보고서>를 발간했다. 민주당 을지키는민생실천위원회(을지로위원회) 출범 10주년을 맞아 발표한 일종의 대선 패배 ‘반성문’이었다. 민주당은 해당 보고서에서 “오락가락하는 정책으로 집값 상승을 잡지 못했다”고 짚었다. 문정부의 부동산 정책은 보수와 진보 양 진영서 ‘실패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며 그 원인을 일관성 부족에서 찾은 것이다. 그러면서 “노무현정부 부동산 정책도 부족한 것이 많았지만 선거 대패와 당내 비난에도 철학과 원칙을 버리지 않은 점은 높게 평가된다”며 “문정부는 세제 개편 이후에도 집값이 계속 상승하면서 비판에 직면하자 전반적인 세제를 완화하는 정반대 조치를 취했다”고 지적했다. 문정부는 부동산, 즉 집이 투자가 아닌 거주의 대상이라는 점을 시장에 각인시키는 데 정책 방향을 맞췄다. 당연히 투기 수요를 때려잡는 데 모든 역량이 집중됐다. 부동산으로 재산을 불리려는 세력이 많아지면서 집값이 왜곡되고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이른바 ‘부동산 투기와의 전쟁’이 벌어졌다. 문정부는 세금 부과, 대출 규제 등으로 돈줄을 조였다. 2017년 다주택자 양도소득세 중과, 대출 규제 강화 등의 정책이 시행됐고 2018년에는 주택을 보유한 사람이 규제 지역서 새집을 사려 할 경우 주택담보대출을 받지 못하도록 했다. 서울 25개 구, 분당·과천·하남·세종 등이 규제 지역으로 묶였다. 규제가 심해질수록 집값은 천정부지로 뛰었다. 부동산이 ‘우상향 안전자산’이라는 인식이 퍼지면서 시중에 풀린 돈이 몰리고 또 몰렸다. 저가의 낡은 집 여러 채보다 고가의 좋은 집 한 채를 사자는 ‘똘똘한 한 채’ 이론도 생겨났다. ‘자고 일어나면 집값이 오른다’는 말이 돌면서 부동산 심리를 크게 자극한 것이다. 당시 ‘영끌족’ 지금은 곡소리 통계 조작으로 검찰 수사까지 부동산을 움직이는 건 ‘심리’라는 말이 있듯 너도나도 집을 사는 데 혈안이 되면서 집값이 요동쳤다. 집값이 오르는데도 수요가 있으니 계속 상승하는 구조였다. 이 과정서 ‘벼락 거지’ 등의 말이 생겨났다. 부동산 등 자산 가치가 급격하게 오르면서 상대적으로 가난해진 상황을 일컫는 표현이다. 동시에 상대적 박탈감을 호소하는 목소리도 커졌다. 어느 정부든 출범하자마자 제일 먼저 손대는 게 부동산 정책일 정도로 우리나라 국민의 ‘집’ 사랑은 남다른 데가 있다. 문정부 역시 임기 내내 ‘집값 잡기’에 몰두했다. 하지만 끝내 실패했다. 몇몇 전문가는 문정부의 가장 큰 패착으로 부동산 정책을 꼽을 정도다. 그 여파가 대선까지 이어졌다는 것이다. 더 큰 문제는 후폭풍이다. 문정부 당시 ‘갭투자(전세 끼고 매수)’ 방식으로 집을 마련한 이들이 현재 파산 지경에 이르고 있다. 폭탄 돌리기를 하다가 더 버티지 못하고 폭발한 것이다. ‘영끌족’의 몰락이다. 영혼까지 끌어모아 집을 산 사람은 높아진 금리를 견디지 못하고 있다. 이뿐만 아니라 문정부가 부동산 정책을 펴면서 통계를 조작했다는 의혹이 제기돼 수사가 진행 중이다. 당시 정책을 주도했던 대통령 비서실장, 국토교통부 장관 등은 감사원의 의뢰로 전부 수사 대상에 올라 있다. 이들은 정부 정책을 뒷받침하는 통계를 만들어내라고 통계청, 한국부동산원 등을 압박했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 감사원에 따르면 문정부가 통계를 조작한 횟수는 102회에 달한다. 2018년 1월부터 2021년 10월까지 일어난 일이다. 청와대와 국토교통부는 한국부동산원에 주택 가격 변동률을 하향 조정하도록 하거나 부동산 대책이 효과가 있는 것처럼 통계 수치 조정을 지시했다. 민주당은 ‘전 정권에 대한 탄압’이라면서 반발 중이다. 이번에도 이슈 될까? 이 후보와 국민의힘 김문수 후보는 재건축·재개발을 활성화해 공급을 확대하겠다는 공약을 내놨다. 개혁신당 이준석 후보의 공약도 비슷하다. 후보별로 차이가 미미해 이번 대선에서는 부동산 이슈가 생각보다 대망론에 영향을 미치지 못할 것이라는 관측도 나온다. 하지만 일부 전문가들은 문정부의 정책 후폭풍이 여기저기서 나오고 있는 만큼 또다시 문정부에 이 후보가 발목을 잡히는 형국이 반복될 수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 <jsjang@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