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시사=이주현 기자]10·26 서울시장 보궐선거 참패 이후 쇄신 논란에 빠진 한나라당이 ‘총선 물갈이론’이라는 해묵은 논쟁으로 다시금 깊은 수렁에 빠지고 있다. 공천 기준을 둘러싼 논란이 가져올 파장을 우려한 당 지도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당내 대권주자들까지 물갈이론을 들고 나오면서 잡음이 커지고 있다. 여기에 최근 구체적인 물갈이론 관련 문건이 유출됨에 따라 그 파장은 더욱더 커졌다. 물갈이론 파문과 현재 물갈이 대상자로 거론되고 있는 지역구와 의원들의 면면을 살펴봤다.
“사실상 영남권의 다선·고령 의원들 ‘정조준’한 것” 반발 확산
김형오, 박희태 의장 불출마 마음 굳혀, 이상득 ‘반드시 출마’
한나라당은 4·27 재보선 패배 때부터 ‘쇄신’과 ‘물갈이론’이 수면위에 떠올랐지만 ‘수박 겉핥기 식’의 대응으로 일관해왔다. 그 결과는 참담했다. 10·26 재보선에서도 수도 서울을 내주는 수모를 당했기 때문이다.
갈수록 민심이반은 가속화 되고 있고 거대 집권여당은 민심의 철퇴를 맞고 있다. 친이계와 친박계 의원들의 충돌로 당내 혼란은 더욱더 가중되고 있는 양상이다.
고령·다선 의원들
물갈이론 적반하장
김문수 경기지사가 영남 지역 50% 물갈이를 주장하고 정몽준 전 대표도 “최대한 많이 바뀌는 게 좋다”며 물갈이론을 주장했지만 사건의 발단은 지난 8일 여의도연구소의 ‘고령 의원 대거 물갈이’ 등을 골자로 하는 문건이 노출되면서부터 되었다.
여의도연구소는 A4용지 4쪽 분량의 내부 문건에서 10·26 재보선 패배 원인을 진단하고 이를 토대로 내년 총선 및 대선 승리 전략을 제시했다.
보고서는 특히 대대적인 외부인사 영입으로 불리한 선거환경을 극복한 YS정권 하의 1996년 15대 총선과, 고령 의원 20여 명의 자진 출마포기 선언 등의 쇄신으로 탄핵역풍에도 불구하고 궤멸 위기에서 기사회생한 2004년 17대 총선을 전략적으로 벤치마킹하거나 잘 응용해야 한다고 제안해 눈길을 끌었다.
보고서는 이어 전략적인 정국 이슈관리와 함께 ‘경쟁력 있는 후보’를 내세운다면 내년 총선에서 선전할 수 있다며 ‘경쟁력 있는 새로운 인물’의 대대적 영입을 통한 당 이미지 일신을 핵심과제로 제시했다.
파문은 거셌다. 특히 친박계 고령·다선 의원들이 주로 포진해 있는 영남권 의원들의 반발이 거세다.
친박계 4선의 중진인 이해봉(대구 달서을) 의원은 지난 9일 최고중진연석회의에서 “신한국당 시절부터 총선이 가까워오면 ‘영남 물갈이론’이라는 해괴망측한 논리가 적반하장 격으로 거론돼 왔다”며 노골적인 불만을 나타냈다. 이 의원은 “여야가 아슬아슬하게 맞서는 경합지역인 수도권에 참신하고 신망 받는 인사들을 공천해야 당선될 수 있고 많은 숫자를 확보할 수 있다”며 물갈이는 수도권에 집중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의원은 이어 ‘고령 의원 출마 포기 필요성’에 대해서도 불만을 나타냈다. 그는 “민주당 의원 평균 연령이 57.7세로 56.2세인 한나라당보다 1.5세 더 많은데 왜 국민들이 한나라당을 늙은 정당으로 보느냐, 국민들이 피부로 느끼지 못하는 정책에 원인이 있다”며 정책 쇄신을 주장했다.
대구 동구를 지역구로 두고 있는 친박계 유승민 최고위원도 가세했다. 유 최고위원은 “연령, 지역, 선수가 공천기준이 된다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된다”며 “수도권과 충청, 영남의 공천 기준이 달라야 할 이유가 하나도 없다”고 말했다.
하지만 정 전 대표는 “당이 공천개혁이라는 말을 쓰는데 많이 바꾸자고 해야지, 바꾸지 말자고 하겠느냐”며 “공천을 말할 시점이 아니라는데 공천개혁 시기가 늦었다. 말로만 개혁하는 건 (국민이) 원하는 게 아니다”고 주장했다.
이는 박 전 대표가 “지금은 (물갈이) 시점이 아니다”고 한 데 대해 반박한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이명박 대통령에 대한 사과를 요구한 쇄신파의 김성식 의원은 “내 충정을 비하하지 말기 바란다”고 반박했다. 정태근 의원도 “배신이라는데 대통령의 저서나 읽어봤느냐고 물어본다. 이 대통령이 조금이라도 훌륭한 대통령으로 남게 하는 게 제일”이라고 강조했다.
김·정 의원은 나란히 정책위 부의장직을 사퇴해, 본격적으로 쇄신 논의에 뛰어들 것임을 시사했다. 쇄신파의 핵심인 정두언 여의도연구소장도 소장직을 전격 사퇴하며 쇄신의 진정성을 강조했다.
보고서 실질적
표적은 이상득?
이렇듯 당내 혼란을 가져온 이 보고서의 실질적 표적은 이 대통령의 형 이상득 전 국회부의장을 정조준한 게 아니냐는 관측도 제기 됐다.
정 소장은 MB정권 출범직후인 지난 총선 때부터 지속적으로 이 전 부의장의 불출마를 주장하며 줄곳 날카로운 대립각을 세운바 있기 때문이다.
이 전 부의장은 그러나 내년 총선에도 자신의 지역구인 포항에 출마해 반드시 ‘7선 고지’에 오른다는 입장을 분명히 하고 있다. 이에 그치지 않고 정권 재창출을 이뤄낸 뒤 국회의장 자리를 노리고 있다는 소문이 공공연히 들리고 있다.
친이계 의원들은 자신들의 ‘수장’이나 다름없는 이 전 부의장이 불출마할 경우 레임덕이 급류를 탈 것이라 여겨 이 전 부의장 편을 들고 있다. 이 대통령이 퇴임하고 이 전 부의장마저 없다면 자신들의 입지는 점차 줄어들게 불 보듯 뻔하기 때문이다.
이 전 부의장이 당내 반발과 각종 압력에도 불구하고 사활을 걸고 있는 이유는 국회의장에 대한 자신의 욕심과 현 정권 들어 ‘실세중의 실세’로 군림하며 각종 이권에 개입한 점에 대한 검증을 사전에 차단하기 위한 수단으로도 여겨진다.
친박계에서 친이계로 돌아선 4선의 김무성 전 원내대표(부산 남구을)도 “딱 한 번만 더하고 물러나겠다”며 차기 총선 출마 강행 의사를 밝힌 후 지역구 챙기기에 몰두하고 있다.
최근 정가에서 ‘친이계의 입지가 줄어들자 다시 박 전 대표와 화해하고 싶어 한다’는 설이 떠도는 만큼 김 전 원내대표의 입지도 다급해 보인다.
불출마 고민하거나 지역구 바꿔 출마 결심 하는 의원 늘어
박근혜 안에 힘 실어준 쇄신파, 친박계와 연대 가능성 제기
이런 강경한 반응에도 불구하고 당내 중진들의 불출마가 줄을 잇고 있어 ‘고령 의원 물갈이’가 탄력을 받고 있는 실정이다. 먼저 김형오 전 국회의장이 지난 8월 기자회견을 통해 스타트를 끊었다.
당초 부산 신공항 문제, 한진중공업 사태 해결에 적극 나서는 등 왕성한 정치활동을 하며 출마가 예상됐으나 “당이 어려울 때 백의종군하는 모습도 나쁘지 않다. 따라서 19대 총선에 나서지 않겠다”고 선언하며 불출마를 공식화 한 것이다.
경남 양산이 지역구인 박희태 국회의장은 6선인데다 국회의장 출신은 명예롭게 정계를 은퇴하는 관례에 비춰볼 때 불출마할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박 의장은 그간 출마의지를 굽히지 않았지만 최근 불고 있는 물갈이 압박과 쇄신론 등 당내 분위기로 보아 입장을 정리 한 듯 여겨진다.
비교적 젊은 편인 원희룡 최고위원도 19대 총선 불출마 선언이라는 정치적 결단을 내렸다. 서울 양천을에서 3선을 지낸 원 의원은 지난 6월 전당대회를 앞두고 당 대표에 출마하면서 백의종군을 위한 진정성을 나타내기 위해 19대 총선 불출마와 서울시장 불출마를 선언했었다.
청와대 정무수석에 발탁된 김효재(성북을) 전 의원은 지난 8월 의원직을 사퇴하면서 내년 총선 불출마도 함께 선언했다.
이같이 친이계의 일부 고령·중진 의원들은 불출마 쪽으로 입장을 정리하는 분위기여서 과연 이 전 부의장이 고령 의원 물갈이 압박에 대응할 수 있을지 여부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조심스럽게 점쳐지는
친박과 쇄신파의 연대
10·26 재보선에서 기성 정치에 대한 성난 민심이 확인된 만큼 여야 모두 공천개혁 등 쇄신론에 힘을 쏟을 것으로 보여 앞으로 불출마를 선언하는 의원은 더욱 늘어날 전망이다.
하지만 그 시기는 잠시 늦춰질 것으로 전망된다. ‘쇄신 연판장’에 서명한 의원 25명 중 14명이 당 쇄신이 ‘정책 혁신이 우선’이라며 박 전 대표에 힘을 실어줬기 때문이다.
정태근 의원은 “일부에서 물갈이론이 나오는데 지금은 정책 혁신이 우선이라는 데 공감했다”고 밝혔다.
이는 박 전 대표의 인식과 궤를 같이하는 것이어서 향후 쇄신국면에서 친박계와 쇄신파 간의 연대 가능성도 제기되는 부분이다. 당 내외적으로 갖은 어려움에 직면한 한나라당이 이 난국을 어떻게 헤쳐 나갈지 귀추가 주목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