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 황천우는 우리의 현실이 삼국시대 당시와 조금도 다르지 않음을 간파하고 북한과 중국에 의해 우리 영토가 이전 상태로 돌아갈 수 있음을 경계했다. 이런 차원에서 역사소설 <삼국비사>를 집필했다. <삼국비사>를 통해 고구려의 기개, 백제의 흥기와 타락, 신라의 비정상적인 행태를 파헤치며 진정 우리 민족이 나아갈 바, 즉 통합의 본질을 찾고자 시도했다. <삼국비사> 속 인물의 담대함과 잔인함, 기교는 중국의 <삼국지>를 능가할 정도다. 필자는 이 글을 통해 우리 뿌리에 대해 심도 있는 성찰과 아울러 진실을 추구하는 계기가 될 것임을 강조했다.
“그거 참.”
짧게 탄식을 내뱉은 유신이 지나쳐 온 길을 돌아보았다.
“백제 놈들 이미 포기한 거 아닐까요?”
“이 좋은 지점에 군사를 배치하지 않은 상태로 보아 그렇게 보아도 무방할 듯합니다.”
흠춘과 품일 역시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주거니 받거니 말을 이었다.
“워낙에 간사한 놈들이라 무슨 함정이 도사리고 있을지 모르니 여기서부터 척후조를 먼저 내보내면서 신속하게 이동합시다.”
의아한 신라군
유신의 명에 따라 십여 명의 병사로 하여금 척후조를 구성하여 급하게 앞으로 나아가도록 했다. 척후조를 보내고 진군에 속도를 더하여 가는 중에 척후병이 달려왔다.
“대장군, 백제의 군사들이 황산(黃山, 충남 논산 연산면 일대) 벌판에 진을 치고 기다리고 있습니다.”
“들판에 말이더냐?”
“그러하옵니다.”
“병력은 어느 정도 되어 보이느냐?”
“어림잡아 한 오천여 명 정도 되어 보입니다.”
“오천여 명으로 들판에!”
유신이 도대체 이해되지 않는다는 듯 곁에 있는 품일과 흠춘을 바라보자 그들 역시 믿기지 않는지 서로의 얼굴을 주시했다.
“대장군, 무슨 함정이 도사리고 있는 게 아닐까요?”
전술상으로 살피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처사였다. 오천의 군사로 오만에 이르는 신라의 대군과 들판에서 일전을 치루겠다는 발상은 도저히 납득하기 힘들었다.
“그들이 진을 친 장소를 상세히 말해보거라.”
“황산 벌판 뒤로 강이 흐르고 있었습니다.”
“강이라. 그러면 결국 배수진을 쳤다는 말이로고.”
유신이 잠시 사이를 두었다가 말을 이었다.
“혹시 백제군 장수가 누구인지 알겠느냐?”
“계백이란 이름이 깃발에 적혀 있었습니다.”
“계백!”
외마디 소리를 지른 유신이 흠춘과 품일을 바라보았다.
“아는 자입니까?”
품일의 질문에 지난 시절 자신의 곁에서 계백의 화살에 목을 맞아 쓰러졌던 부장을 떠올렸다.
“결코 쉽지 않은 전투가 되겠구려.”
계백이 황산벌에 세 개의 진을 치고 중앙에 위치한 진의 막사 안에서 잠시 휴식을 취하는 중에 중상과 상영이 들어왔다.
“두 분이 어인 일입니까?”
계백이 건성으로 그들을 맞이하며 자리하도록 유도했다.
그러나 둘은 자리에 앉을 생각도 않고 멀뚱한 표정을 지으며 계백을 주시했다.
“왜 그러시오?”
“왜나마나 지금 신라의 대군이 침현을 지나 이리로 쳐들어오고 있다는데 장군은 준비하지 않고 뭐하는 게요?”
“침현으로 달려가서 신라군과 일전을 벌이오리까?”
“그곳에 가라는 이야기가 아니라 군사를 이동해서 적절한 지점을 찾아 적을 맞을 준비를 해야 하지 않겠소.”
“일 없소. 아직 시간이 남아 있으니 그동안 휴식 취하면서 기다리다 이곳에서 신라군을 맞이할 것이오.”
“이 벌판에서 오만의 신라군을 맞이한다는 이야기요?”기어코 중상이 목소리를 높였다.
“어차피 죽을 목숨 당당하게 죽어야지 않겠소?”
“죽다니!”
김유신, 5만 병력으로 황산벌 진격
계백 백제군 앞서 중상·상영 베다
죽는다는 소리에 상영의 목소리가 올라갔다.
“이미 백제는 기울었고, 단지 시간 문제지 조만간 신라와 당나라에 의해 점령당할 터요. 그러니 당연히 나라와 명을 함께해야지요.”
남의 일 말하듯 건성으로 답하는 계백의 표정을 살피며 두 사람의 얼굴이 창백하게 변해갔다.
“왜, 죽는 게 겁나시오?”
“이리 허무하게 죽을 수는 없는 노릇 아니요.”
“당연하고 말고요.”
기어가는 소리로 답한 두 사람이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왜 그러는 게요?”
“이곳은 장군에게 맡기고 우리는 궁으로 돌아가 전하를 보필하는 게 이로울 것 같소.”
“전하를 보필한다, 어떻게 말이오!”
계백의 목소리가 올라갔다.
“여하튼 전하와 함께하겠소.”
막 걸음을 떼는 순간 계백이 칼로 탁자를 내리쳤다.
“이런 쥐새끼들 같으니라고. 내가 왜 네놈들을 이 전장으로 끌고 들어왔는지 아직도 모르는 게냐!”
계백의 돌연한 변화에 둘의 동작이 동시에 멈추었다.
“밖에 누구 없느냐!”
계백의 외침에 병사 여러 명이 급하게 달려 들어왔다.
“이 두 놈을 포박하라!”
“장군, 그 무슨 소리요!”
갑작스럽게 변한 상황에 두 사람의 눈동자가 보름달처럼 변해갔다.
“백제의 멸망을 가져온 네 두 놈을 제물로 삼아 조상들께 이 사실을 고하련다. 그래서 내가 애초에 네 놈들을 이리 끌어들인 게다. 알겠느냐!”
계백의 고함에 병사들이 신속하게 움직여 둘을 포박하였고, 움직이지 않으려고 발악하는 두 사람을 개 끌듯 밖으로 끌고 나갔다.
그를 살피며 계백이 복장을 가지런히 하고 칼을 들고 막사를 나섰다.
“백제의 모든 병사들을 이곳으로 소집하도록 하라.”
계백의 명령에 따라 좌우 진에 있던 병사들이 가운데로 운집하여 정렬을 끝내자 둘을 끌고 병사들의 한 가운데로 들어갔다.
자연스럽게 병사들이 거리를 두게 되자 정 중앙에 계백과 포박당한 두 사람이 자리하게 되었다.
“백제 병사들이여!”
계백의 고함 소리에 병사들이 계백을 연호했다.
“나 계백은 결코 살아 돌아가지 않을 작정이다. 아니 돌아갈 곳도 없다.”
갑자기 백제 군사들이 숙연해졌다.
이미 계백이 자신의 식구들을 죽이고 출전한 사실을 알고 있던 터였다.
“나 계백과 또 백제와 운명을 함께하고 싶지 않은 군사들은 지금 바로 뒤로 물러나 집으로 돌아가도록 하라!”
이어 어정쩡한 모습으로 백제군을 살피는 중상과 상영의 발목을 전광석화처럼 칼로 베었다.
순간 고통스런 신음과 함께 두 사람이 자연스럽게 무릎을 꿇었다.
그 상태에 이르러 사방을 살펴보았다. 어느 한 사람의 이동도 보이지 않았다.
“백제 병사들이여, 고맙고도 고맙다.”
계백이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장군, 저희는 장군과 마지막을 함께하렵니다.”
정렬해 있던 부대에서 한 명의 병사가 앞으로 나서며 무릎을 꿇고 외쳐대자 모든 병사들이 따라 했다.
백제와 함께…
“고맙다, 백제 병사들이여.”
잠시 침묵을 지키며 병사들의 모습을 찬찬히 훑던 계백이 중상과 상영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나 계백은 전투에 앞서 이 두 간신 놈들의 피로 조상들께 우리의 처참한 현실을 고하려 한다.”
계백의 말이 끝나자 중상과 상영이 몸부림치기 시작했다.
“장군, 제발.”
“제발 무어란 말이냐. 이제는 그 간사한 세치 혀가 굳기라도 했느냐.”
<다음 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