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 황천우는 우리의 현실이 삼국시대 당시와 조금도 다르지 않음을 간파하고 북한과 중국에 의해 우리 영토가 이전 상태로 돌아갈 수 있음을 경계했다. 이런 차원에서 역사소설 <삼국비사>를 집필했다. <삼국비사>를 통해 고구려의 기개, 백제의 흥기와 타락, 신라의 비정상적인 행태를 파헤치며 진정 우리 민족이 나아갈 바, 즉 통합의 본질을 찾고자 시도했다. <삼국비사> 속 인물의 담대함과 잔인함, 기교는 중국의 <삼국지>를 능가할 정도다. 필자는 이 글을 통해 우리 뿌리에 대해 심도 있는 성찰과 아울러 진실을 추구하는 계기가 될 것임을 강조했다.
외마디 소리를 지른 의자왕이 은고를 주시했다. 은고의 눈에 순간적으로 핏발이 섰다.
“전하, 우리의 약속을 잊으셨습니까?”
“약속이라니요?”
성충이 흡사 군사 전략처럼 강 후에 온의 대화를 구사하자 의자왕이 갈피를 잡지 못하는지 혹은 아직도 정상이 아닌지 힘없이 답했다.
“먼저 세상을 떠났지만, 제 아우인 윤충과 함께 백제의 중흥을 도모하기로 굳게 약조한 사실 말입니다.”
“짐이 지금 그런 차원에서 이리하고 있는 거 아니오.”
“이런 행동이 백제를 위한 일이란 말씀이십니까?”
“그렇소. 짐이 신라의 강성한 음의 기운을 억누르기 위해 고육지책으로 이런다는 사실을 모른다는 말이오?”
“음의 기운을 억누르다니요?”
“짐 스스로 음의 기운을 빌어 백제의 진덕을 사망케 한 사실 그리고 연이은 승리를 모른다 하지 않겠지요?”
성충 식음을 전폐
성충이 대답하지 않고 한숨을 내쉬며 은고를 주시했다. 시선을 받은 은고가 고개를 돌려 의자왕에게 상반신을 바짝 밀착시켰다.
“전하, 길게 이야기하지 않으렵니다. 저 요망한 계집을 내치시고 하루속히 국정에 전념해 주시기를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뭐라, 요망한 계집이라!”
“그러하옵니다, 전하. 자고로 한 국가가 망할 때는 흰 여우가 온 궁을 휘젓고 다닌다 하였습니다. 지금 전하 곁에서 연신 꼬리를 흔들어 대고 있는 저 요망한 년이 바로 여우 중에 흰 여우입니다. 그러니 즉각 내치십시오!”
“뭐!”
말을 마친 성충이 의자왕이 미처 뭐라 말하기 전에 자리에서 일어나 휑하니 밖으로 나가버렸다.
한동안 몸이 부들부들 떨려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던 의자왕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저런 무례한 놈이 있나. 여봐라!”
문이 열리면서 궁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성충 저놈을 당장 하옥하도록 하라. 내 이 놈을 갈가리 찢어 죽일 테다!”
고함을 지른 의자왕이 은고를 바라보았다. 고개를 숙인 은고의 어깨가 떨리고 있었다. 급히 곁에 자리하여 은고의 어깨를 감쌌다.
“전하, 너무나 억울하옵니다. 백제와 전하를 위해 소녀 혼신을 다하고 있는데 저런 소리나 들어야 하는지요.”
“저놈을 반드시 죽여 버리고 말테니 너무 심려 말거라.”
“그러면 뭐한데요?”
“그게 무슨 말인고.”
“이제 봇물이 터졌으니 이 사람 저 사람 소녀를 그리 대할 것은 자명한 일이옵니다.”
“하면?”
은고가 대답하지 않고 고개를 들어 의자왕의 목을 끌어안았다.
“자네를 정식으로 부인으로 맞이하도록 하겠네.”
“그리해 주시겠사옵니까, 전하.”“당연히 그리해야지.”
의자왕이 즉각 성충을 효수하려 했으나 흥수를 중심으로 한 신하들의 적극적인 만류로 하옥시키는 선에서 마무리했다. 그러나 옥에 갇힌 성충이 식음을 전폐하기 시작했고 그 소식을 들은 계백이 옥을 찾았다.
“뭐 하자고 이리 걸음 하였는가?”
“참으로 난감합니다, 장군,”
짧게 말을 마친 계백이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운이 다한 게야, 백제의 운이.”
“정말 그러한지요. 전처럼 혹여 일시적이지 않을는지요?”
물론 사택비의 경우를 지칭했다.
“그때와는 근본적으로 다르네. 사택비는 요부의 기질을 지니고 있었지만 백제의 미래에 전혀 해가 되는 여자가 아니었네.”
“하면, 이 여자는?”
의자왕 성충 가두고 은고를 부인으로
선도해 죽음에 연개소문 상심과 추억
“이 여자는 왕을 정신적, 육체적으로 망가트리고 있어. 아울러 지금 복용하는 마약으로 인해 그리 멀지 않아 비참한 결과를 맞이할 듯하네.”
“전혀 방법 없습니까?”“요망한 계집도 문제지만 오석산이란 마약이 더 문제야.
“그 이유는?”
“마약이란 한번 맛을 들이면 결코 끊기 쉽지 않네. 그러니 그게 더 문제야. 아울러 갈수록 더 강한 자극을 원하게 되고 또 그러니 더 많은 양을 복용해야 하고, 결국 몸과 정신이 망가질 때까지 가는 게야.”
“하온데.”
“뭔가?”
“식음을 전폐하신다고 들었습니다만, 이만 거두시지요.”
“아닐세. 전하께서 내가 죽어 조금이라도 느끼는 바가 있기를 바랄뿐이네.”
“그러면 기어코 죽음을 불사하시겠다는 말씀이십니까?”성충이 가볍게 웃었다.
“왜 그러시는지요?”
“사람이 왜 사람인지 아는가?”
계백이 대답하지 않고 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희망의 부분이네. 사람에게 희망이 보이지 않는다면 삶이란 자체가 무의미하지. 그러니 그럴 바에는 차라리 일찌감치 정리를 시도함이 옳네.”
“장군!”
“너무 마음 쓰지 말고 내 이야기나 전하께 전해주게나.”
“무슨 말씀이신지요.”
“내가 항상 때를 보고 변화를 살폈는데 틀림없이 전쟁이 일어날 것이야. 그것도 단순한 국지전이 아니라 전면전 말일세. 그런 경우 군사를 씀에 있어 반드시 그 지리를 살펴 택할 것이니, 강의 상류에서 적을 맞이하라 일러 주게. 그리고 침략군이 혹여 가까이 다가오면 육로로는 침현(沈峴, 탄현으로 대전과 옥천 경계)을 넘지 못하게 하고, 수군은 기벌포(伎伐浦, 충남 장항) 언덕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고서 험난하고 길이 좁은 곳에 의거하여 적을 막으라고 말일세.”
한동안 잠잠했던 당이 고구려를 침공하기 위해 출발했다는 보고가 왔을 무렵 선도해가 운명을 달리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그 누구보다도 연개소문의 상심은 깊었다. 비록 피는 다르지만 친형제 이상으로 가까이 지냈던 그의 죽음에 연개소문이 마치 넋이 빠져나간 듯했다.
“형님, 마음 좀 가다듬으시지요.”
연개소문이 상심에 빠져 집에 칩거하고 있는 중에 연정토가 방문했다.
“그래야겠지.”
다가선 동생의 손을 잡으며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지금 전하께서도 상심이 보통이 아니십니다.”
“당연히 그러하시겠지. 나도 그렇지만 전하 역시 선 책사를 잃은 심정 말로 표현하기 힘드실 게야.”
“그러니 가서 전하를 뵙고 슬픔을 함께 나누시면서 당나라 침입에도 대비하셔야지요.”
궁궐로 향하는 중에 바로 며칠 전 선도해와 마지막으로 함께했던 시간이 주마등처럼 떠올랐다.
선도해를 보내며
“대감, 지내놓고 보니 시간이 참으로 덧없다는 말이 실감납니다.”
“뚱딴지 같이 무슨 소리요?”
선도해가 답에 앞서 가벼이 한숨을 내쉬며 하늘을 바라보았다.
“왜 그러오?”“몸이며 마음이 예전만 못하여 그러합니다.”
“그야 당연한 거 아니오. 나 역시 이제는 인생의 막바지에 들어섰다는 느낌이 종종 들고는 하지요.”
“그러면 제가 대감에 앞서 먼저 길을 가도 결코 결례는 아니 되겠습니다.”
“허허, 무슨 섭섭한 소리를 그리하시오. 비록 피는 다르고 태어난 때도 다르지만 책사와 나는 한 운명 아니겠소? 그러니 유명을 달리한다면 함께해야 할 거요.”
<다음 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