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 황천우는 우리의 현실이 삼국시대 당시와 조금도 다르지 않음을 간파하고 북한과 중국에 의해 우리 영토가 이전 상태로 돌아갈 수 있음을 경계했다. 이런 차원에서 역사소설 <삼국비사>를 집필했다. <삼국비사>를 통해 고구려의 기개, 백제의 흥기와 타락, 신라의 비정상적인 행태를 파헤치며 진정 우리 민족이 나아갈 바, 즉 통합의 본질을 찾고자 시도했다. <삼국비사> 속 인물의 담대함과 잔인함, 기교는 중국의 <삼국지>를 능가할 정도다. 필자는 이 글을 통해 우리 뿌리에 대해 심도 있는 성찰과 아울러 진실을 추구하는 계기가 될 것임을 강조했다.
“소장에게 민족을 통일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십시오!”
“민족의 통일!”
“그러하옵니다. 저로 하여금 우리 신라가 고구려, 백제와 하나 될 수 있도록 배려 베풀어 주십시오!”“그 이야기는?”
“춘추 공에게 왕위를 넘겨주십사는 부탁입니다.”
“춘추 공에게!”
“그러하옵니다.”
알천을 찾은 이유
알천이 가벼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야만 할 사유라도 있는가?”
“소장이 아뢰지 않아도 잘 아시리라 생각하옵니다만.”
알천이 유신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다 보검을 뽑아들었다.
칼날에 반사된 불빛이 종이로 바른 창을 통해 밖으로 곧바로 뻗어나갔다.
알천이 그 불빛을 바라보며 잠시 생각에 잠겨들었다.
김춘추, 비록 자신과 같은 진골이지만 엄밀하게 살피면 자신과는 다른 진골이었다.
김춘추의 가계는 신라의 중흥을 꾀했던 진흥왕으로 올라간다.
진흥왕에게는 두 명의 아들이 있었다. 첫째는 동륜이고 둘째는 금륜이었다.
첫 아들 동륜이 일찍이 태자에 책봉되었으나 갑자기 세상을 떴다.
동륜에게는 백정이란 이름을 가진 아들이 있었는데 다섯 살로 너무 어렸고 그런 연유로 당시 둘째인 금륜이 형을 이어 태자에 책봉되고, 진흥왕 사후 왕위를 이어 진지왕이 되었다.
그런데 불과 사 년 후에 황음에 빠진 그를 폐위시키며 성골에서 진골로 강등시키는 일이 발생했다.
진지왕에게는 춘추의 아버지인 용춘이 있었지만 왕위는 동륜의 아들 백정에게 돌아가고 그가 진평왕이 되었다.
아울러 아들을 두지 못한 진평왕이 큰딸인 천명공주를 용춘에게 시집보내 김춘추를 낳았으니 외형상으로는 진골이지만 내면으로는 성골이었다.
“춘추가 보위에 앉을 만한 적임자인가?”
“소장이 부탁드리는 바입니다.”
칼을 다시 칼집에 집어넣은 알천이 진지한 투로 말문을 열자 유신이 힘주어 답했다.“그 이야기인즉?”
“소장이 분신이 되어 반드시 우리민족을 통일 할 수 있도록 보필할 것이옵니다.”
“비록 자네가 함께한다 해도 성공적으로 신라를 이끌 수 있겠는가?”
“소장을 떠나서 그가 행한 그동안의 행적을 세심하게 살펴주십시오.”
김춘추는 비록 조공을 곁들였지만 당나라와의 관계 강화를 위해 지대한 공헌을 했다. 또한 당태종으로부터 백제공격을 위한 군사지원을 약속받았다.
또한 왕권강화를 위한 일련의 내정개혁을 주도하였다.
의복을 당나라 식으로 하자는 중조의관제(中朝衣冠制)를 채택하고 왕권 강화를 위해 정조하례제(正朝賀禮制, 관료들의 왕에 대한 의례)를 실시하였으며 품주(稟主, 신라 최고의 행정기관인)를 집사부(執事部)와 창부(倉部)로 분리해 효율성을 기했다.
물론 당나라의 정책을 모방하였지만 이 같은 제도의 시행은 신라로서는 후진적인 정치문화를 극복하고자 한 노력의 결과였다.
“그건 그렇다 하고 자꾸 민족, 민족 하는데 무슨 근거로 그들이 우리와 같은 민족이라 확신하는가?”
“이미 작고하셨지만 마령간 스승으로부터 들었습니다.”
“마령간이라면?”
“이 나라를 세우신 박혁거세 그리고 눌지왕 시절 충신으로 명성을 날렸던 박제상 대감의 후손 되시지요.”
“그를 몰라서 묻는 말이 아니네.”
“하오면?”
“어느 선까지 알고 있느냐 이 말이네.”
김유신, 보검을 바치다 “김춘추를 왕위에”
성골인 김춘추에게 왕위 전달…놀란 김춘추
유신이 의아하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뜨자 알천이 가벼이 한숨을 내쉬었다.
“마령간 생전에 나도 그에게 이야기 들었었네. 그런데 하도 믿기지 않아 그냥 소홀히 넘기고 말았었네.”
유신이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며 스승 마령간으로부터 전해들은 우리 민족의 시원으로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을 차근하게 설명했다. 이야기를 마치자 알천이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유신이 건넨 보검을 다시 유신에게 돌려주었다.
“대감, 아니 받으시겠습니까?”
“그런 뜻이 아니라네. 우리민족의 통일을 위해서라면 이 보검은 자네가 지녀야 하네.”
유신이 알천을 바라보자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 모습을 주시하던 유신이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 큰 절을 올렸다.
“대감이야 말로 신라의 진정한 군주이십니다.”
“아닐세, 진정한 신라의 군주는 이 시간 이후로 김유신 장군일세.”
잠시후 소소한 이야기로 대화를 이어가던 유신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장군, 무슨 의미로 내게 보검을 건넸었는가?”
유신이 답을 하지 않고 그저 미소만 보이고 자리에서 물러났다.
다음날 아침 알천이 대전으로 들자 모든 신하들이 정중하게 고개 숙여 맞이했다.
그러나 알천이 용상에 오르지 않고 자신들과 함께 자리하자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대감, 용상에 오르시지요.”
유신이 다가서서 은근히 용상에 오를 것을 권유하자 알천이 잠시 눈을 감았다 뜨고는 한걸음 앞으로 나섰다. 모든 사람의 시선이 일시에 알천에게 집중되었다.
“내 여러분께 양해 구할 일이 있소.”
가볍게 운을 떼고 찬찬히 모두의 얼굴을 둘러보았다.
“비록 화백회의에서 여주의 후임으로 나를 선택하였지만 그 자리는 내 자리가 아닌 듯하오.”
“그게 무슨 말이오. 용상에 오를 수 없다니!”
순간 필탄이 목소리를 높였다.
“두 가지 사유에서요.”
모두가 두 가지를 되뇌었다.
“첫째는 개인적인 문제로, 내 건강이 그렇게 좋지 않소. 모두 나의 몰골을 찬찬히 살펴보아 주시오.”
이미 생의 막바지를 향해 달리고 있는 알천의 모습을 바라보던 대신들이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국가의 중대사를 살피려면 젊은 사람이 맡아야 한다는 생각이오.”
“다음은?”
“둘째는 순리상 문제로 성골이 있는데 진골인 내가 용상에 앉을 수는 없소.”
“성골!”
필탄 혼자만이 아닌 모두의 외침이었다.
“그가 누구란 말이오!”
알천이 고개를 돌려 김춘추를 주시하며 그에게 다가갔다.
“전하, 용상으로 오르시지요.”
“네!”
김유신의 뜻대로…
춘추가 전혀 예기치 못한 일이 발생했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서 오르시지요.”
말을 마친 알천이 천천히 노구를 숙여 절을 올렸다. 어리둥절한 상태서 그를 바라보던 대신들이 잠시 후 춘추에게 일제히 절을 올리기 시작했다.
“신라왕 김춘추 만세!”
김유신이 우렁찬 목소리로 김춘추를 연호하자 잠시후 대전은 ‘신라왕 김춘추 만세’ 소리로 가득 찼다.
<다음 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