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후기 이조·형조 판서 등을 역임했던 청문(淸文, 시와 문장이 뛰어남)과 고절(苦節, 곤경을 당해도 변치 않는 굳은 절개)로 한 시대의 추앙 받았던 조경(趙絅, 1586∼1669)이 조선 제16대 왕인 인조에게 대제학을 사직하는 소를 올린다. 그 내용 중 일부 인용한다.
『남의 돈을 한 푼만 훔쳐도 도둑이라 하는데, 국가의 막중한 관직을 훔치고는 마치 원래부터 자기의 소유인양 차지하고 있는 자라면 그 후안무치(厚顔無恥)하기가 남들 보는 앞에서 금을 훔친 자조차도 비웃을 일이 아니겠습니까.』
후안무치는 얼굴이 두껍고 부끄러움이 없다는 뜻으로 뻔뻔스럽기가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다는 의미다. 그런데 조경에 의하면 국가의 관직을 자기 소유로 착각하는 인간은 ‘남들 보는 앞에서 금을 훔친 자’도 비웃을 일이란다.
‘남들 보는 앞에서 금을 훔친 자’는 중국 전국시대의 철학자인 열자(列子)의 작품인 ‘열자(列子)’에 등장한다. 그 내용이다.
『제(齊)나라 사람이 금을 사려고 아침 일찍 시장에 갔다가 마침 금을 파는 곳을 보더니 그곳에 있는 금을 가지고 가버렸다. 관리가 그를 잡아서 묻기를 “사람들이 다 있는데 그대가 남의 금을 훔친 이유는 무엇인가?”라고 하니, 그가 대답하기를 “금을 훔칠 때에 사람은 보이지 않고 금만 보였다”고 답했다.』
이 정도면 대개의 사람들은 그저 혀를 내두를 일이다. 그런데 그런 사람도 비웃을 일이라니 글쟁이인 필자도 어찌 달리 표현할 방법을 찾을 수 없다. 그런데 그보다 더 뻔뻔한 일이 정치권서도 발생하고 있다. 최근 발생한 밀양 화재 사건과 관련해서다.
추미애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먼저 포문을 열었다.
밀양 화재참사 현장을 찾은 자리서 “직전 이곳(경남) 행정의 최고책임자가 누구였는지 봐야할 것”이라며 지난 대선에 출마하기 위해 사퇴하기 전까지 4년 4개월 동안 경남도지사를 지냈던 홍준표 자유한국당 대표의 책임론을 제기했다.
이에 대해 입방정으로 유명한 홍 대표가 가만히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추 대표가 다녀간 다음날 밀양을 방문한 홍 대표는 기자들에게 “거꾸로 우리에게 (책임을)넘기는걸 보니 후안무치하고 뻔뻔스럽다. 어떻게 정치를 그래(그렇게) 하느냐”는 반응을 내놓으며 “홍준표 책임이라고 그랬다며? 민주당 지도부의 지적 수준이 그것 밖에 안 된다”고 역공했다.
39명의 고귀한 생명을 앗아간 화재현장인 밀양서 이 두 사람의 ‘네 탓 공방’을 바라보면 문득 ‘불난 집에 부채질 한다’라는 속담이 떠오른다.
아니, 한걸음 더 나아가 이 두 사람의 행태는 이미 꺼진 불씨를 다시 살려내기 위해 안간힘을 쏟고 있는 형국이다.
다시, 아니다. 이 사람들을 보고 있자면 정녕 인두겁을 쓴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일어난다. 최소한 인간의 탈이라도 쓰고 있다면, 조금이라도 인간의 본성을 지니고 있다면 그 참혹한 현장서 정치공방을 이어갈 수는 없는 노릇이다.
혹시라도 이 두 사람이 자신들이 지니고 있는 알량한 권력이 자신의 소유라고 철석같이 믿고 망종에 가까운 행동을 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일어난다. 아울러 그들에게 한마디 한다. 후안무치도 이정도면 남들 보는 앞에서 금을 훔친 자조차도 비웃는다고 말이다.
※ 본 칼럼은 <일요시사> 편집 방향과 다를 수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