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 황천우는 우리의 현실이 삼국시대 당시와 조금도 다르지 않음을 간파하고 북한과 중국에 의해 우리 영토가 이전 상태로 돌아갈 수 있음을 경계했다. 이런 차원에서 역사소설 <삼국비사>를 집필했다. <삼국비사>를 통해 고구려의 기개, 백제의 흥기와 타락, 신라의 비정상적인 행태를 파헤치며 진정 우리 민족이 나아갈 바, 즉 통합의 본질을 찾고자 시도했다. <삼국비사> 속 인물의 담대함과 잔인함, 기교는 중국의 <삼국지>를 능가할 정도다. 필자는 이 글을 통해 우리 뿌리에 대해 심도 있는 성찰과 아울러 진실을 추구하는 계기가 될 것임을 강조했다.
기어코 유신의 소리가 올라갔다. 그제야 신라군들이 어정쩡한 자세를 취하며 활을 내렸다.
“성충 장군, 제 수하의 결례에 대해 사과드립니다.”
유신이 차분한 말투로 말을 건네자 성충이 계백에게 눈짓을 보냈다.
의미를 헤아린 계백이 앞으로 나섰다.
“소장 계백이오. 군인으로서 귀 병사의 무례를 용서할 수 없었소.”
말을 마친 계백이 유신을 향해 가볍게 고개 숙였다.
이어 성충과 함께 뒤로 물러서기 시작했다.
“장군, 어찌할까요?”
백제 진영으로 돌아오자 계백이 진지를 구축하고 있는 병사들을 바라보다 성충을 주시했다.
“일단 말미를 주겠다고 했으니 동태를 살펴보세.”
“과연 저들이 고구려에서 철수할까요?”
동태를 살피다
“당연히 그리할 일이야.”
“소장은 이해되지…….”
“우리가 신라로 하여금 고구려에서 손을 뗄 수 있는 명분을 주었네. 신라는 우리의 침공을 사유로 퇴각할 수 있는 명분을 얻은 게지.”
그 말을 되새기던 계백이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결국 우리는 고구려에게 면을 세운 거구요.”
“그러이. 그리고 자네 저 김유신이란 자를 염두에 두게.”
“무슨 말씀이신지요?”
“아마도 언젠가는 우리와 특히 자네와 한번 숙명적으로 마주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어 그러네.”
“그야 지금도 마주치지 않았습니까?”
“지금은 그저 상견례로 간주해야지. 어차피 피차간에 전쟁을 치룰 명분이 없으니 말이야.”
계백이 방금 전 일어났던 상황을 되새기며 김유신의 얼굴을 그리기 시작했다.
당나라의 이세적이 이끄는 병사들이 요수(난하로 중국 하북성 북동부를 흐르는 강)를 건너고 있다는 소식을 접한 연개소문이 즉각 고정의를 군사로 고연수와 고혜진을 장군으로 하여 오만의 병사를 거느리고 안시성으로 가도록 조처했다.
고구려 군사가 안시성으로 가는 사이 사이 당나라 군사들의 이동 소식이 계속 전해졌다.
당의 선발대인 영주도독 장검이 호병(胡兵, 북방 오랑캐)을 거느리고 요수를 건너 건안성으로 진격하였으나 사전에 연개소문의 지시를 받은 건안성은 수성에 오로지하며 그들의 발을 묶어 놓고 있었다.
또한 수군을 거느린 장량은 동래(東萊, 발해 동쪽 지역)로부터 바다를 건너서는 후속부대가 도착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한편 육군을 이끌고 있는 이세적과 도종은 신성에 이르자 견고한 수성 체계를 갖추고 항거하는 성을 압박해서 고립시켜 놓고 곧바로 개모성 이어 백암성으로 진군했다.
이어 당나라군이 연개소문의 지시로 이미 소개된 개모성과 백암성을 거치고 요동성에 이르자 난관에 봉착했다.
당군이 지나친 신성은 물론 이미 소개시켰었던 개모성과 백암성의 군사들이 요동성으로 합류했던 탓이었다.
거기에 더하여 국내성(만주 길림성)에 있던 병사들까지 합세하자 당군의 여러 차례에 걸친 공략이 처절하게 실패하고 만다.
결국 이세적은 당태종이 이끄는 주력군을 기다리기로 결정했다.
그 시점 당태종은 요택(遼澤, 요하 강가의 소택지로 요하는 중국 동북 지방 남부 평원을 관류하는 강)에 이르렀으나 이백여 리나 진흙으로 덮여 있어 사람과 말이 통과할 수 없었다.
결국 그곳에 흙을 덮어 다리를 만든 연후 그곳을 지나 요동성에 이르렀다.
요동성에 도착한 당태종은 성을 여러 겹으로 포위하고 북소리와 고함으로 심리전을 전개하기 시작했다.
어느 순간 당의 치열한 공격에 결사항전의 정신으로 응하던 고구려 군사들이 사전에 취해진 연개소문의 지시에 따라 서서히 안시성으로 이동했다.
뒤이어 요동성을 점령한 당태종은 그곳을 요주(遼州)로 삼았다.
이세적·도종… 앞마당까지 전진
승기 잡은 고구려…도망친 당나라
고연수의 지원군이 안시성 가까이 이르자 연개소문의 지시대로 안시성에 들르지 않고 내처 앞으로 나아갔다.
안시성에서 멀지 않은 곳에 멈추어 진을 치고 전열을 가다듬으면서 휴식을 취하는 중에 당군이 서서히 모습을 드러냈다.
한창 기세등등하게 진군해오던 당태종이 일순간 진군을 멈추고는 주변에 있는 높은 곳으로 올라 고구려 군사들의 진용을 살피며 싸움을 자제하는 듯한 양상을 보였다.
진지 앞에서 당나라 군사들의 동정을 살피던 고연수가 당나라 군사들이 자신들의 위용에 머뭇거리는 것이라 판단하고 고혜진에게 다가섰다.
“당나라 오랑캐들이 우리의 위용을 바라보고 겁을 먹은 듯 보이는데, 이참에 우리도 공을 세워봅시다.”
“공이라.”
공을 세워보자는 말에 고혜진 역시 귀가 솔깃해지는 모양으로 눈동자를 반짝였다.
그 모습에 곁에 있던 고정의가 가볍게 혀를 찼다.
“군사께서 왜 그러시오?”
“이러니 막리지 대감이 나를 보낸 거 아니오?”
“무슨 의미요?”
“두 사람 다 경거망동 마시오. 명색이 당나라 태종이 진두지휘하는 군사들이오.”
“우리를 어떻게 보기에 그런 식으로 말하는 게요!”
고정의가 목소리를 높이자 고연수가 핏대를 세웠다.
“어떤 식으로 보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상대의 전력 역시 세심하게 살피고 임해야 할 일 아니오.”
고정의가 다소 부드럽게 말투를 바꾸자 고연수가 고혜진을 바라보며 크게 헛기침했다.
“당태종 역시 인물이오. 단지 당나라의 왕이라 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뭔가 범상치 않은 사람이란 걸 왜 모르시오. 그 사람이 지금 당나라의 주력군을 모두 데리고 왔으니 함부로 대적할 수 없소. 그러니 우리는 군사를 정돈하여 싸우지 않고 시간을 보내며, 오랫동안 버티면서 기습병을 나누어 보내 당나라 군사들의 군량 길을 끊는 것이 옳소. 양식이 떨어지면 싸우려 해도 할 수 없고 돌아가려 해도 길이 없으니 그때 공격하면 우리는 백전백승할거요. 그러니 잠시 참았다 그때 공을 세우도록 하시오.”
고정의의 말이 지속적으로 이어지자 어느 순간 고연수가 퉁명스럽게 그나마 답을 하고 자신의 군막으로 가겠다며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고혜진 역시 고연수의 뒤를 따라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적의 계략
다음날 동이 트기 시작할 무렵 어지러운 기척에 고정의가 눈을 떴다.
급히 군막에서 나오자 고연수와 고혜진이 대군을 이끌고 적진으로 향하고 있었다.
급히 달려가 진군을 만류하나 두 사람은 들은 척 만 척하며 속도를 더하기 시작했다.
순간 고구려군을 맞기라도 하듯 당나라 군사들이 내처 앞으로 달려 나오기 시작했다.
고정의가 두 사람을 자제시키려던 행동을 멈추고 당군을 주시했다.
당나라 군사 중에 일부만, 기병들이 앞으로 나오고 있었다.
적의 계략임을 눈치 챈 고정의가 애써 진군을 만류했으나 오히려 그게 신호라도 된 듯 고구려 군사들이 속도를 더하며 기세 좋게 당나라 군사들을 향해 달려 나갔다.
양군 사이에 거리가 좁혀지자 달려 나오던 당나라 군사들이 전투하는 시늉만 내고는 고개를 돌려 자신들의 본진으로 도망가기 시작했다.
<다음 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