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 황천우는 우리의 현실이 삼국시대 당시와 조금도 다르지 않음을 간파하고 북한과 중국에 의해 우리 영토가 이전 상태로 돌아갈 수 있음을 경계했다. 이런 차원에서 역사소설 <삼국비사>를 집필했다. <삼국비사>를 통해 고구려의 기개, 백제의 흥기와 타락, 신라의 비정상적인 행태를 파헤치며 진정 우리 민족이 나아갈 바, 즉 통합의 본질을 찾고자 시도했다. <삼국비사> 속 인물의 담대함과 잔임함, 기교는 중국의 <삼국지>를 능가할 정도다. 필자는 이 글을 통해 우리 뿌리에 대해 심도 있는 성찰과 아울러 진실을 추구하는 계기가 될 것임을 강조했다.
유신이 흡사 무슨 일인지 어렴풋하게 짐작 간다는 듯이 눈을 게슴츠레하게 떴다.
“그래요, 처남. 지소가 아이를 가진 모양입니다.”
“아이를!”
유신의 목소리가 절로 올라갔다.
“그런 모양입니다. 그래서 지금 자기 방에서 잠시 휴식취하는 중입니다. 어서 들어가 보시지요.”
춘추의 은근한 말에 유신이 서둘러 지소의 방으로 들어갔다. 방에 들어서자 핼쑥한 모습의 지소가 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유신을 맞이했다.
“그게 정말이오?”
어깨를 감싸다
지소의 어깨를 가볍게 감싸고 눈을 동그랗게 뜨고 주시했다.
지소가 대답 대신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부인의 입으로 그 말을 듣고 싶구려.”
아기를 가졌다는 사실에 유신의 말투가 경어로, 호칭이 부인으로 바뀌었다.
“그렇다 하옵니다.”
“허허, 이렇게 기쁜.”
지소가 너무나 기쁜 나머지 말도 제대로 잇지 못하는 유신을 정면으로 바라보며 가만히 미소를 보냈다.
미소의 의미를 간파한 유신이 힘껏 지소를 껴안았다가는 손을 배로 이동했다.
그 손을 지소의 손이 감쌌다.
유신이 마치 새 생명의 존재를 느끼겠다는 듯이 찬찬히 배를 쓸자 지소가 유신의 행동에 자유를 주기 위해 약간 뒤로 물러섰다.
“이렇게 고마울 데가!”
유신은 뱃속에 있는 아기가 사내아이라 확신하는 듯 감탄에 겨워 지소를 바라보았다.
“아직은.”
“아직은 뭐요?”
“아들인지 딸인지…….”
“분명히 아들일 게요, 아들. 암 그렇고말고.”
흡족한 표정으로 지소의 배를 누른 팔에 힘을 주었다.
순간 지소의 표정이 시무룩하게 변해갔다.
“왜 그러오?”
이해할 수 없다는 투로 말을 꺼낸 유신이 순간적으로 아차 했다.
지소는 임신한 이상 정식 혼인을 염두에 두고 있을 터였다.
유신이 춘추의 집에서 지소와 달콤한 시간을 보내고 집으로 돌아갔다.
집에 들어서자 잠시 집안 곳곳을 둘러보았다.
항상 집에 들어올 때면 자신을 반기던 부인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던 때문이었다.
갑자기 이유를 알 수 없는 불안감이 일어났다.
신발을 벗는 둥 마는 둥 급히 방으로 들어섰다. 방으로 들어서자 하얀 옷을 입은 유모가 다소곳이 자리 잡고 있었다.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부인, 이게 무슨 일이오!”
유신이 자세를 낮추어 부인의 소매를 잡았다.
마치 그 손을 뿌리치기라도 하듯 유모가 천천히 일어나 유신을 향해 자세를 가지런히 하고 절을 올리기 시작했다.
“부인, 이게 무슨 일이냐고 해도!”
얼떨결에 큰 절을 받은 유신이 유모 곁으로 다가갔다.
“이 박복한 여자 이제 서방님 곁을 떠나려 하옵니다.”
“떠나다니!”
“그동안 서방님의 사랑에도 부응 못하고, 아들 하나 낳지 못한 죄가 크지 않다 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 이제 그만 물러나려 합니다.”
유신이 가벼이 한숨을 내쉬고 천장을 바라보았다.
부인이 지금 진행되고 있는 일련의 일들을 알고 있다는 생각이 불현듯 찾아들었다.
지소의 임신…아들을 얻다
상처 입은 유모 ‘떠나다’
“혹시…….”
“아무 말씀 마세요. 그럴수록 제 마음 괴롭습니다. 그저 조용히 떠날 수 있도록 배려 부탁드립니다.”
그럴 수는 없는 일이었다.
비록 자식을 낳지는 못했으나 그 누구보다도 열정을 다해 사랑한 여인이었다.
“부인!”
기어코 유신이 몸을 기울여 유모를 감쌌다.
“서방님, 이러.”
유신이 급히 유모의 입을 입으로 막았다.
“부인, 아무 말도 마시오!”떨리는 유신의 목소리 마냥 농익을 대로 농익은 유모의 몸도 떨었다.
“서방님, 이년을 죄인으로 만들 작정이십니까?”
유신을 밀쳐내는 유모의 목소리가 차분했다.
“그게 무슨 말이오?”
“이미.”
“이미 무엇이란 말이오!”
유신의 어깨가 움찔거렸다.
그 모습을 바라보며 유모가 잔잔한 미소를 머금었다.
“그렇게도 무디시오.”
“하면 부인은!”
“저를 끔찍이 생각하고 있음을 알고 있지요. 그러나 아들을 낳고 싶은 장군의 속내는 감출 수 없었지요.”
“어떻게?”
답에 앞서 유모가 천장을 바라보았다.
“집에 들어설 때 몸에서 나는 냄새 때문이었지요.”
“냄새라니?”
“전과는 다른 냄새가 났습니다. 그것도 아주 싱그러운 향기가 말이에요. 그러니…….”
물론 유신이 외간 여자와 어울리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 상대는 그저 그런 여인들이었으나 지소의 경우는 달랐다.
그러니 같은 여인으로 여인의 체취를 구분하기는 그리 어렵지 않았으리란 생각이 일어났다.
생각이 거기까지 이르자 유신의 얼굴에 곤혹감이 들어찼다.
“그런 표정 짓지 마세요.”
그저 바라볼 뿐 아무런 답을 할 수 없었다.
“오히려 그편이 내게는 이롭습니다.”
“그는 또 무슨 말이오?”
“장군이 저보다 못한 여인과 함께한다고 생각해 보세요. 그런 경우 저는 견뎌낼 수 없었을…….”
“하면.”
“그 정도 여인이어야 제가 비참하지 않지요.”
직접 거명하지 않고 있지만 부인은 이미 지소와 관련한 모든 사실을 알고 있다는 감이 강하게 일었다.
“그러면 부인은 그를 알고도 여태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는 말이오?”
“물론 처음에는 마음고생이 심했지요. 그러나 이 모든 일이 운명이라 생각되었습니다.”
연을 끊다
“운명이라.”
“이 모든 게 운명이지요.”
말을 마친 부인의 얼굴이 경직되고 있었다.
그러기를 잠시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다시 큰 절을 올리기 시작했다.
부인의 표정에서 확고한 마음을 읽은 유신은 더 이상 이렇다 할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러면 이후에 부인의 운명의 길은 어찌 되는 게요.”
유모가 다시 자세를 가지런히 하자 유신이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조용한 산사에서 세속을 잊고 여생 보내렵니다.”
결국 중이 되어 세상과의 연을 끊겠다는 의미였다.
이번에는 유신이 자리에서 일어나 부인에게 절을 올리기 시작했다.
<다음 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