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시사 취재1팀] 장지선 기자 = 오랫동안 한가지 일에 몰입한 사람에게선 단단한 뿌리가 느껴진다. 또 변치 않고 꾸준히 자리를 지킨 가게를 볼 때면 그 우직함에 신뢰를 보내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 이미경 작가와 구멍가게의 인연은 ‘천생연분’이라고 해도 이상하지 않다. 작가는 구멍가게에 생명을, 구멍가게는 작가에게 추억을 건넸다.
이미경 작가가 구멍가게를 그리는 동안 강산이 두 번 바뀌었다. 1997년 딸아이와 산책하던 중 만난 퇴촌 관음리 가게에 매료된 이후 구멍가게를 찾아 전국 각지를 돌아다녔다. 차를 타고 무작정 길을 떠나 2박3일을 헤매도 만날 수 있는 구멍가게는 2∼3군데 정도.
다른 사람들은 재미가 없어 따라나서지도 못한다는 그 길을 작가는 20년째 다니고 있다. 그 사이 작가의 삶은 구멍가게와 그 안에 담긴 소소한 일상을 쫓는 여행이 됐다.
97년 첫 만남
지난달 25일 막바지 전시 준비로 분주한 이 작가를 만났다. 갤러리에는 작가 스스로 “한 고비를 넘겼다”고 할 정도로 힘겹게 준비한 작품들이 조명을 받아 반짝이고 있었다. 녹음이 짙은 나무와 눈꽃처럼 하얀 나무가 눈에 확 띄는 두 작품이 전시장 양끝을 장식했다.
그 양옆으로 뚜렷한 계절감이 돋보이는 구멍가게 풍경이 나란히 늘어섰다.
전시 개막 전 찾아온 늙수그레한 할머니 관람객은 “자연스러워서 좋다. 따뜻해서 좋다”며 연신 감탄을 터트렸다. 작품은 모두 17점, 전시장을 돌며 작품을 감상하는 시간은 10분 남짓이지만 이 작가는 6개월을 꼬박 이번 전시에 매달렸다. 매일 15∼17시간씩 매달린 강행군이었다.
“주어진 시간 안에 제가 만족할 만한 수준으로 그림의 완성도를 높이려니 작업 시간이 길어지더라고요. 시간이 갈수록 그림을 보는 눈이 달라지는 것을 느껴요. 눈이 높아지고 있는 거죠.”
전국의 동네점포 찾아 20년
따뜻함과 소소함 전하고파
그림이 완성되는 시기는 작가만 안다. 벽에 그림을 걸어두고 눈으로 훑어가며 덜고 더하는 작업을 하다가 어느 순간 ‘아무 것도 걸리는 게 없을 때’가 펜을 놓는 순간이다. 20년간 작가의 눈높이는 조금씩 높아졌다. 그 사이 외부의 평가는 전시를 거듭할수록 좋아졌다. 이번 전시가 작가에게 부담으로 다가왔던 이유다.
“올 봄에 <동전 하나로도 행복했던 구멍가게의 날들>이라는 책을 냈어요. 그 덕분에 그림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습니다. 많은 분들이 전시장을 찾아주실 것 같아 신경이 더 쓰였어요.”
올해 2월 출판사 ‘남해의봄날’서 나온 <동전 하나로도…>는 작가가 20년간 그린 구멍가게와 그에 얽힌 이야기를 담은 작품이다. 달고나를 해먹었던 이야기, 오토바이 한 대에 온 가족이 매달려 소풍을 갔던 이야기 등 작가의 어린 시절부터, 구멍가게 취재를 하며 만났던 마을 사람들의 삶이 한 데 어우러져 있다.
“독자들이 제 책을 읽고 행복을 느꼈으면 좋겠어요. 책 속의 제 어린 시절은 행복하기만 하거든요. 오토바이에 네 식구가 매달려 계곡으로 놀러갔던 날은 제 수많은 기억 중에서 가장 행복했던 때였어요. 열 살까지의 기억에서 삶의 에너지를 얻고 있죠.”
<동전 하나로도…>는 작가가 처음으로 글과 그림에 모두 관여한 책이다. 이전까지는 글에 삽화를 넣는 작업을 주로 해왔다. 구멍가게를 그린 지 20년 만에 온전히 자신의 책을 펴낸 작가는 이제야 ‘담대함’이 생겼다고 고백했다. 몸 상태가 좋지 않거나 용기가 나지 않으면 하지 않았던 일을 마주할 수 있을 만큼 성장한 것이다.
“나이가 들면서 물 흐르듯이 흘러들어온 일을 거부하지 않게 됐어요. 어느 순간부터 그 흐름에 몸을 싣는 법을 배운 것 같아요. 책 작업 역시 그랬어요. 불안한 점도 없지 않았지만 할 수 있는 만큼 최선을 다 해보자고 생각했더니 정말 책이 나왔습니다.”
옛 기억 떠올리는
이야기 엮어 출간
구멍가게를 그린 20년의 세월은 10년을 기점으로 확연하게 갈린다. 퇴촌서 구멍가게와 운명적인 만남 이후 10년은 오로지 혼자서 작업한 시기다. 전시회를 통해 관람객들과 소통한 지는 채 10년이 되지 않는다.
그 사이 작품 속 구멍가게는 조금씩 진화했다. 초기 10년 동안에는 사진을 찍듯 실제 구멍가게의 모습을 화폭에 담았다면 이후 10년은 작가 본인의 기억과 사람들의 기억을 버무려 상상의 가게를 창조했다.
예를 들면 구멍가게에 실제 존재하는 마호가니 빛깔의 문틀을 시작으로 상상을 더해 전체로 발전시켜 가는 식이다. 그 시작은 흐드러진 가을 단풍이 될 때도 있고, 벽과 벽 사이의 그림자가 될 때도 있다. 구멍가게를 만난 게 초여름이면 녹음이 깔리고 겨울이라면 흰 눈이 덮인다. 모든 과정을 거치면 관람객들이 성큼 안으로 발 들이고 싶을 정도로 풍성하고 따뜻한 공간이 완성된다.
상상 속 가게
“제가 학교 다닐 때만 해도 그림을 감상하는 일이 ‘그들만의 리그’라는 생각이 많았어요. 그림은 어렵고 접하기 힘들다는 인식도 여전하죠. 저는 관람객들이 이번 전시를 보고 ‘그림이 마냥 어려운 것만은 아니구나’라고 느꼈으면 해요. 또 구멍가게를 통해 옛날 기억을 떠올리면서 쉬어갈 수 있다면 더더욱 좋겠습니다.” 전시는 9월18일까지.
<jsjang@ilyosisa.co.kr>
[이미경은?]
▲학력
홍익대학교 미술대학서양화과 졸업(1994)
서울예술고등학교 졸업(1990)
▲개인전
‘이미경 展’ 갤러리 이마주, 서울(2017)
‘이미경 展’ 통인옥션갤러리, 서울(2016)
‘戀戀不忘(해남에서 한양까지)’ 가회동60, 서울(2013)
‘행복슈퍼’ 플러스엠갤러리, 청주(2013)
‘기억의 치유’ 아트팩토리 초대, 서울(20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