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 황천우는 우리의 현실이 삼국시대 당시와 조금도 다르지 않음을 간파하고 북한과 중국에 의해 우리 영토가 이전 상태로 돌아갈 수 있음을 경계했다. 이런 차원에서 역사소설 <삼국비사>를 집필했다. <삼국비사>를 통해 고구려의 기개, 백제의 흥기와 타락, 신라의 비정상적인 행태를 파헤치며 진정 우리 민족이 나아갈 바, 즉 통합의 본질을 찾고자 시도했다. <삼국비사> 속 인물의 담대함과 잔임함, 기교는 중국의 <삼국지>를 능가할 정도다. 필자는 이 글을 통해 우리 뿌리에 대해 심도 있는 성찰과 아울러 진실을 추구하는 계기가 될 것임을 강조했다.
“그러면 당분간 그들의 저항은 없다는 말일세.”“저항은커녕 낯 들고 다니기도 힘들 걸세.”
알천이 웃으며 말을 받았다.
“그렇다면.”
말을 하다말고 유신이 모두의 얼굴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말씀하시게.”
“이제 내실을 기하는데 총력을 기울여야 합니다.”
“무슨 뜻입니까, 처남.”
“비록 당나라에 의지해 이 순간을 버틸 수 있다고 하지만 우리 역시 차후를 위해 만반의 준비를 갖추어야 하네.”
“그렇지. 언제까지 당나라에 의지할 수는 없는 일이야.”
“그 시작에 알천 대감의 역할이 지대하지요.”
알천을 바라보는 유신의 얼굴에 비장감이 가득했다.
양동 작전
“새해가 되기 전에 당항성을 쳐야하지 않겠소?”
의자왕이 군사 흥수를 포함하여 장군들을 소집하고 운을 떼었다.
“당연하옵니다, 전하. 빨리 기습공격을 감행하여 이른 시일에 당항성을 점령해야 합니다.”
성충이 말을 받자 곁에 있는 윤충, 은상, 의직 등 장군들의 얼굴에 가벼운 경련이 일어났다.
“군사, 고구려와의 협공은 어찌되었는가?”
의자왕의 질문에 흥수가 앞으로 나섰다.
흥수가 극비리에 고구려에 입국하여 선도해를 만났다.
“고구려는 언제 군사를 움직일 계획입니까?”
“물론 백제군과 함께입니다.”
“백제는 제가 돌아가면 바로 군사를 일으켜 당항성으로 진격할 작정입니다만.”
순간 선도해의 표정이 어둡게 변했다.
“왜 그러십니까?”
“귀 사절단이 돌아간 후 우리 내부에서 회의를 하여 다시 입장을 정리했습니다.”
“입장 정리라니요!”
“방식을 달리 한다는 이야기지요.”
“무슨 말씀인지 이해되지 않습니다.”
“어차피 당항성은 백제의 영토가 될 게 아닙니까?”
“그 말씀은?”
“양동 작전을 감행하자는 이야기입니다.”
“쉽게 설명해 주시겠습니까.”
“당항성을 함께 취한다 해도 우리가 관리하기는 어려운 실정 아닙니까?”
“그야 그렇지만…….”
“그래서 백제는 당항성을 치고 고구려는 신라군이 움직이지 못하도록 국경 근방의 성을 치기로 하였습니다.”
“하면 발을 빼겠다는 말입니까?”
“발을 빼는 게 아니라 상생이지요. 고구려가 신라를 쳐서 병력이 이동할 수 없도록 조처를 취하고, 백제는 손쉽게 당항성을 점령하고 말입니다. 그래서 백제는 당항성을 그리고 우리는 신라의 영토를 얻자는 의미입니다.”
흥수가 생각에 잠겨 침묵을 지켰다.
“그러니 그게 그거 아니겠습니까?”
선도해의 말에 흥수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흥수의 설명이 끝나자 모두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군사, 그게 무슨 말이오?”
“말 그대로입니다. 어차피 당항성의 경우 고구려에서 관리하기 힘드니 전적으로 우리에게 맡기고. 대신 고구려는 신라의 군사들이 움직이지 못하도록 하면서 영토를 취하겠다는 이야기입니다.”
흥수 고구려 입국…생각 잠긴 선도해
고구려 협조·자력 공격 ‘양자택일’
윤충의 반문에 흥수가 차근하게 설명을 곁들였다.
“어째 이상하게 들립니다.”
가만히 듣고 있던 의직이 한마디 하고 나섰다.
“무엇이 말입니까?”
“물론 결과야 같을 수 있겠으나 한편으로 생각하면 찜찜합니다.”
“찜찜하다니, 말해보게.”
의자왕이 의직을 주시했다.
“고구려가 우리를 이용해서 자신들의 영토를 확장하자는 의도로 들려 그러하옵니다.”
모두가 의직의 말을 되새기는 듯 침묵이 이어졌다.
“소신도 그런 생각을 하지 않았던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결과를 놓고 볼 때 우리 입장만 내세울 수 없다는 판단을 하게 되었습니다.”
“목적은 같은데 방식이 변경되었다는 말입니까?”
“전하, 반드시 그런 뜻은 아닌 것 같습니다.”
의직의 반문에 이어 성충이 나섰다.
“말해보시오, 장군.”
“당항성과 다른 지역과의 비중에 대해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성충이 말해보라는 듯 흥수를 주시했다.
“그 부분 인정합니다. 당나라에서 볼 때 조공 거점인 당항성과 여타 지역과는 다른 의미를 주지요. 하오나 잠시 돌려 생각하면, 즉 우리는 우리대로 또 고구려는 고구려대로 득을 취할 수 있을 것입니다.”
흥수의 말에 여기저기서 탄식의 한숨이 흘러나왔다.
“결국 당나라와 우리 간의 문제로 귀결될 수도 있다는 이야기인데.”
의자왕이 나직하게 말하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바로 그렇습니다, 전하.”
답을 한 성충의 얼굴이 어둡게 변해갔다.
“좋소, 그러면 결과적으로 생각해 봅시다. 고구려의 입장이 이해되지 않는 바는 아닌데, 아니 한편 생각하면 그들의 생각이 옳소. 그들이 먹지도 못할 일에 군사를 출정시킬 리 만무하지 않겠소.”
“바로 그런 맥락입니다.”
흥수의 표정이 진지하게 변해갔다.
“생각해보니 짐이라도 고구려의 입장을 취하겠소.”
비록 답은 그리했지만 의자왕의 얼굴에 근심이 어렸다.
“그렇다면 이를 어찌해야 하겠는가?”
“전하, 조금 더 시간을 두고 생각해 볼 일입니다.”
의직이 다시 나섰다.
“그런 경우 고구려의 협조는 별도로 하고 우리는 순수하게 자력으로 당항성을 쳐야 합니다.”
흥수가 의자왕의 결심을 구하겠다는 듯 소리를 높였다.
“그러면 고구려와의 동맹은.”
의자왕의 탄식에 가까운 소리에 모두 난처한 표정을 짓고 있는 순간 밖으로부터 당나라 사신이 입궐했음을 알려왔다.
잠시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던 의자왕이 서둘러 자리를 파하고 성충과 흥수를 대동하고 사신을 접견했다.
“신은 사농승(司農丞, 당나라 재정의 책임 장관) 상리현장으로 황제의 조서를 가지고 왔습니다.”
긴 한숨
당나라의 사신이 당당하게 자신의 소개와 아울러 용건을 밝혔다.
“항상 폐하의 황은에 심심한 사의를 표합니다. 그런데 조서라니요.”
잠시 면면을 훑던 상리현장이 곧바로 의자왕에게 조서를 건넸다.
조서를 받아 든 의자왕이 천천히 글을 읽어 내려갔고 한 순간 가벼이 한숨을 내쉬었다.
“이 내용이 무엇을 의미합니까?”
마치 생소하다는 표정을 짓고는 성충에게 조서를 넘겼다.
흥수가 바짝 달라붙어 함께 조서를 읽어 내려갔다.
“신이 이곳에 오기 전 신라에서 사신이 다녀갔습니다.”
“그게 무슨 관계요?”
<다음 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