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 황천우는 우리의 현실이 삼국시대 당시와 조금도 다르지 않음을 간파하고 북한과 중국에 의해 우리 영토가 이전 상태로 돌아갈 수 있음을 경계했다. 이런 차원에서 역사소설 <삼국비사>를 집필했다. <삼국비사>를 통해 고구려의 기개, 백제의 흥기와 타락, 신라의 비정상적인 행태를 파헤치며 진정 우리 민족이 나아갈 바, 즉 통합의 본질을 찾고자 시도했다. <삼국비사> 속 인물의 담대함과 잔인함, 기교는 중국의 <삼국지>를 능가할 정도다. 필자는 이 글을 통해 우리 뿌리에 대해 심도 있는 성찰과 아울러 진실을 추구하는 계기가 될 것임을 강조했다.
“그게 살리는 길인가, 혼을 죽여 놓고!”
고대양의 온 몸이 바르르 떨렸다.
“그만들 하게!”
이리와 고대양이 일촉즉발의 상황으로 치닫자 그를 감지한 영류왕이 급히 제동 걸었다.
“이미 우리 입장은 정해졌으니 아우는 그리 알고 가만히 지켜보게.”
“형님, 정녕 저 놈들에게 굴복하시렵니까?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그리 힘들여 천리장성을 축조하고자 했습니까. 오랑캐 놈들을 이 땅에 발도 들이지 못하게 함이 아니었던가요?”
“아직 완성 되지 않았지 않은가?”
“그러니 서둘러 완성해야지요.”
“그러면 당나라가 가만히 있겠소?”
이리가 다시 끼어들자 고대양이 그를 무시하듯 힐끗 살피고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영류왕을 주시했다.
“그런 연유로 연개소문의 직위를 인정하지 않는 겁니까? 한낱 오랑캐에 지나지 않는 당나라 눈치를 보느라!”
말을 마친 고대양이 이리에게 날카로운 시선을 보내면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형님, 부디 고구려의 정신을 잊지 마십시오. 저는 이 순간 이후 모든 일에 손을 떼고 야인으로 물러나렵니다.”
고대양이 가볍게 고개를 숙이고는 천천히 자리를 물렸다.
고대양이 집에 도착하자 오래 전부터 기다리고 있던 연개소문이 선도해와 함께 황급히 맞이했다.
“자네들이 어인 일인가?”
“뵙고 드릴 말씀이 있어 예고도 없이 찾아뵈었습니다.”
“마침 잘되었네. 그렇지 않아도 자네에게 주의 줄 일이 있어 부르려던 참이었다네. 어서 들어가세.”
“조정에서 긴한 일로 회의를 하고 계시다는 말을 들었습니다만.”
자리를 잡자마자 연개소문이 조심스럽게 운을 떼었다.
“회의는 무슨. 죽일 놈들 같으니라고!”
“어찌 그러시는지요?”
“고구려가 어떤 나라인데 오랑캐들에게 이런 수모를 당한다는 말인가. 무슨 낯으로 조상님들을 뵐 수 있는지!”
선도해의 질문에 고대양이 자학하듯 중얼거렸다.
“자세히 일러 주시지요.”
“이리들 가까이 앉게.”
두 사람이 자리를 가까이 하자 고대양이 방금 전에 있었던 일을 상세하게 전해주었다.
그 이야기를 듣는 연개소문의 얼굴이 급격하게 굳어갔다.
“어떻게 그런 일이!”
“당나라가 고구려를 치기는 쉽지 않을 걸세. 그저 공갈협박으로 고구려를 밀어붙여 경제적 실리를 극대화하자는 의도일 걸세.”
“그래서 진대덕이란 병부 놈이 사절로 들어오는군요.”
“그러니 자네가 그 놈이 입국하면 수하를 붙여서 놈의 일거수일투족을 놓치지 말고 상세하게 살펴야 하네.”
순간 선도해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선 책사에게 좋은 생각이 있는 모양일세.”
“예, 저하. 이미 일이 그리되었다면 그를 이용하시지요.”
“이용하다니!”
“일단 그들의 생각을 그대로 따라주어야 합니다.”
“그들이라니?”
“물론 조정 간신배들과 당나라 놈들이지요.”
고대양-영류왕 갈등…당나라, 고구려 접수?
연개소문 분노…보장 왕자 책봉 계획 착착
선도해의 말을 가만히 되새기던 고대양이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
“과연 선 책사네 그려. 이른바 허허실실 전술일세.”
“굳이 표현하자면 그렇지요.”
“무슨 말인지.”
“대인, 당나라 사절이 입국하면 우리가 먼저 손을 쓰자는 뜻입니다. 조정에 들기 전에 우리 쪽에서 먼저 손을 써서 저놈들을 혼란스럽게 만들자는 이야기지요.”
연개소문이 잠시 생각하다가는 역시 웃음을 터뜨렸다.
“오랑캐 놈들 귀빈 대우 해주어야겠습니다.”
“그런 연후에 일을 도모하시면 됩니다.”
“도모라니!”
고대양의 시선이 연개소문에게 향하자 연개소문이 얼른 무릎을 꿇었다.
“저하, 고구려를 더 이상 방치할 수 없습니다.”
두 사람의 표정을 번갈아 바라본 고대양이 자리에서 일어나 밖의 동정을 살피고는 다시 돌아왔다.
“지금 어느 정도까지 진행 중에 있는가?”
“오래지 않아 거사를 일으킬 생각입니다.”
“후사는?”
“그런 연유로 저하를 찾아뵈었습니다.”
“나를 말인가?”
“그러하옵니다. 저하께서 뒤를 이으셔서 쇠퇴해가는 우리 고구려 혼을 다시 살려주셔야 하옵니다.”
고대양이 심각한 표정을 짓고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왜 그러시는지요?”
“건강이 그리 좋지 않아 그러네. 나이 탓인지 이제는 기력이 영 딸리는구먼. 그러니 나로서는 무리네.”
고대양의 근심의 요지가 두 사람에게 전이된 듯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렇게 얼마간 시간이 흐른 즈음 느닷없이 선도해가 무릎을 쳤다.
“무슨 좋은 생각 있는가?”
“저하의 아드님이신 보장 왕자님이 계시지 않습니까?”
“너무 어리지 않은가, 아직 스무 살도 되지 않았는데.”
“저하께서 계시지 않습니까?”
“그리고 저희도 있습니다.”
선도해와 연개소문이 이어 말하자 고대양이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결국 일이 그리되어야 하는가?”
“현재로서는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저하.”
연개소문의 목소리가 낮게 가라앉았다.
“그것만이 고구려를 살리는 길이라면 무엇 때문에 주저하겠나. 응당 목숨이라도 내놓아야지.”
고대양의 얼굴에 가볍게 경련이 일어났다.
경계
“오라버니 계세요?”
김유신이 집에서 홀로 망중한을 즐기는 중에 뜻하지 않은 손님이 찾아왔다.
오래전에 김춘추에게 시집 간 동생 문희였다. 유신이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 방문을 열었다.
“외숙부 저예요.”
“소장 인사드리옵니다.”
문희 옆에 고타소, 김춘추의 전 부인인 보라 궁주에게서 태어난 딸과 그녀의 남편인 이찬(伊飡, 17등급 중 두 번째 직급) 김품석이 유신을 향해 고개 숙였다.
“너희들이 기별도 없이 어인 일이냐?”
“아이들이 오라버니께 작별 인사드리겠다고 해서 갑자기 찾아왔어요.”
“작별 인사라니!”
“일단 들어가서 말씀드리지요.”
유신이 문희의 뒤를 따라 성큼성큼 안으로 들어서는 품석을 눈여겨보았다.
“조카사위가 어디로 가는가?”
채 자리 잡기도 전에 유신이 세 사람의 얼굴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외숙부, 이 사람이 대야성(大耶城, 경남 합천) 성주로 발령 났습니다. 그래서 임지로 떠나기 전에 인사드리려고 들렀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