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 황천우는 우리의 현실이 삼국시대 당시와 조금도 다르지 않음을 간파하고 북한과 중국에 의해 우리 영토가 이전 상태로 돌아갈 수 있음을 경계했다. 이런 차원에서 역사소설 <삼국비사>를 집필했다. <삼국비사>를 통해 고구려의 기개, 백제의 흥기와 타락, 신라의 비정상적인 행태를 파헤치며 진정 우리 민족이 나아갈 바, 즉 통합의 본질을 찾고자 시도했다. <삼국비사> 속 인물의 담대함과 잔임함, 기교는 중국의 <삼국지>를 능가할 정도다. 필자는 이 글을 통해 우리 뿌리에 대해 심도 있는 성찰과 아울러 진실을 추구하는 계기가 될 것임을 강조했다.
“왕과 귀족의 차이라니?”
“왕은 말 그대로 왕으로서 이 나라 최고 통치자이십니다. 어떠한 일이 있어도 우선적으로 고구려의 혼을 지켜야 하는 막중한 책임이 있습니다.”
“하면 귀족은?”
연개소문이 힘을 실어 말하자 영류왕이 짧게 한숨을 내쉬고는 마지못해 말을 이었다.
“귀족은 비록 일정 부분 특권을 가지고 있으나 왕의 입장과는 다릅니다. 왕만큼 절대적인 위치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그러니 그들은 누가 왕이 되던 상관없습니다. 그저 자신들의 알량한 권세만 누릴 수 있으면 그뿐인 존재들입니다.”
영류왕이 뜻을 생각하는 듯 침묵을 지켰다.
“부디 소신의 충정어린 말 깊이 헤아려 주시옵소서.”
영류왕이 더 이상 아무런 말도 하지 않자 잠시 살피고는 정중하게 예를 표하고 자리에서 물러나왔다.
영류왕을 알현하고 막 궁을 벗어나자 연정토가 기다리고 있었다.
“형님, 어찌 되었습니까?”
답에 앞서 연개소문이 하늘을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힘듭니까?”
“힘들다기보다 달리 방도가 없네.”
“그러면 결국!”
연정토가 소리 나도록 이를 갈았다.
“저런 것도 왕이라고.”
누구에게 들으라고 한 소리가 아니라 허탈한 나머지 절로 흘러나온 말이었다.
“일단 가시지요.”
움직이기에 앞서 연정토 뒤에 늘어선 수레와 하인들의 모습을 살펴보았다.
“이야기한 대로 실었느냐?”
연정토 역시 시선을 그리 주며 다시 이빨을 갈았다.
“그냥 확 쓸어버렸으면 하는 생각 굴뚝같습니다.”
연정토의 노기를 살피며 연개소문이 빙그레 웃었다.
“왜요?”
“방금 전 나도 똑같은 생각했다. 어차피 벽치기 하는 꼴인데 그냥 이것저것 가리지 말고 당장 절단내버릴까 하고 말이야.”
“그럼 그리 해버립시다, 형님!”
“허허, 이 사람이.”
아무렇지도 않은 듯 웃어 넘겼지만 마음이 씁쓸했다.
“서둘러 가세. 얼마 있지 않으면 회의가 시작될 모양이니 그 전에 만나서 미끼를 풀어놔야지 않겠나.”
“그 더러운 아가리로 덥석 물게 처박아 넣어야지요.”
연개소문이 미간을 찡그리며 아우를 바라보았다.
“왜 그러세요?”
“자네 말투 말이야. 아무리 미워도 좀 부드럽게 표현할 수 없겠나?”
“이리 같은 놈들에게도 그럴까요?”“말이 그렇게 되나!”
형제가 마주보며 한바탕 시원하게 소리 내 웃었다.
“그런데 형님. 그 부분은 어찌하시기로 했습니까?”
“그 부분이라니?”
“형님이 직접 보위에 오르는 일 말입니다.”
연개소문이 답에 앞서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왜요?”
“선 책사 말 대로 길게 살피기로 했다.”
“그렇다면?”
“고대양을 내세워야지.”
술 취해 걷는 김유신, 지난 날 회고
고구려 동태 파악… “후미부터 공격개시”
저녁 늦은 시간 술에 취한 김유신이 집을 향해 걷고 있었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경주 거리를 걷다 올려다본 남산 위로 보름달이 덩그마니 떠있었다.
그를 바라보다 걸음을 멈추고 그 자리에 목석처럼 서서 한동안 보름달을 주시하기 시작했다.
그 보름달 위로 지난 일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갔다.
나이 서른다섯이던 해에 소판(17관등 중 3위)인 아버지 김서현과 파진찬(17관등 중 4위)인 김춘추의 아버지 김용춘과 함께 진평왕의 명을 받고 고구려의 낭비성(파주 적성)을 공격하기 위해 전장으로 이동했다.
그곳에 이르자 고구려 군이 성이 아닌 성 앞에 진지를 구축한 점을 살피며 미처 전열도 가다듬지 않고 전투를 서둘렀다.
의기양양하게 진군한 신라군은 견고한 방어체제를 구축하고 있던 고구려 군을 얕잡아보고 섣불리 공격했고, 결국 고구려 군에게 대패한 신라군은 공격 한번 제대로 해보지 못하고 급히 퇴각하고 말았다.
저녁 늦은 시간 당시 하급부대 지휘관인 중당당주(中幢幢主)로 참전한 유신이 패배의 쓴맛을 곱씹고 있던 김용춘과 김서현 앞으로 나섰다.
“소장, 아뢰올 말씀 있습니다.”
느닷없이 앞으로 나선 유신의 굳은 표정을 보며 두 사람이 서로의 얼굴을 살폈다.
“무슨 일이냐?”
“지금 상태로는 힘든 일인 줄 아오나, 고구려를 치기에는 지금이 적기라고 판단됩니다. 소장에게 출전할 수 있도록 허락하여 주십시오.”
“자세히 일러 보거라.”
반문하는 김서현의 얼굴이 상기되었다.
“지금 고구려 군에 대한 첩보를 입수했습니다.”
“첩보라니!”
“전쟁에서 가장 중요한 일이 정보인지라, 퇴각할 때 제 수하병사를 적진 가까이에 남겨두고 돌아왔습니다.
그 병사로부터 방금 적의 동태를 전해 들었습니다.”
“그래? 적의 동태가 어떻다고 하더냐?”
“오늘의 승리로 모두 술에 취해 흥청망청하고 경계도 제대로 서지 않고 있다 합니다.”
“틀림없는 보고냐?”
“그러하옵니다.”
“허허, 어찌 그런 생각을 다했는가.”
확신에 찬 유신의 보고에 아버지는 물론 김용춘도 감탄의 표정을 지었다.
“그래서 지금 출전하겠다는 말이냐?”
“소장이 수하들과 적의 후미로부터 공격을 개시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니 두 분께서는 적진에서 불화살이 솟아오르면 본진을 이끌고 곧바로 공격하여 주십시오. 그러면 미처 준비하지 못하고 혼란에 빠진 적군을 섬멸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아버지의 걱정스런 말투와는 달리 유신은 담담했다.
“보내도 되겠소?”
김서현이 김용춘에게 시선을 돌렸다.
“공께서 판단하시지요.”
서현이 다시 유신을 바라보았다.
“반드시 적의 기선을 제압해야하느니라. 그리하여 승리를 쟁취하도록 하라!”
명령에 따라 유신이 미리 준비하고 있던 수하들을 거느리고 발소리를 죽여 가며 고구려 진영 가까이 이르렀다.
그곳에서 잠시 적진을 바라보다 병사들과 함께 적의 후미가 아닌 측면으로 접근해 들어갔다.
수하병사의 보고대로 고구려 군사들은 그날의 승리에 젖어 오합지졸도 그런 오합지졸이 없을 정도로, 여기저기 흩어져 잠에 떨어져 있거나 삼삼오오 짝지어 비틀거리며 흥청거리고 있었다.
고구려 군의 상태를 간파한 유신이 병사들에게 지시하기 시작했다.
발소리를 죽여 고구려 진영에 잠입해 있다가 자신이 장군 막사를 찾아 적장의 수급을 베어 신호를 보내면 일제히 공격하라는 지시였다.
<다음 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