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시사 취재1팀] 신상미 기자 = 나혜석은 안온한 삶을 거부하고 자유를 향한 개척자의 길을 걸었다. 천부적인 재능으로 그림을 그리고 글을 썼다. 타협하는 삶을 거부했고 인습에 저항했다. 많은 유화작품을 그렸지만 작업실이 전소되면서 현재까지 전해오는 작품은 얼마 되지 않는다.
올해 탄생 120주년을 맞은 한국 최초의 여성 화가 나혜석의 특별전이 그의 고향인 경기도 수원에서 열리고 있다. 수원시립아이파크미술관은 ‘시대의 선각자, 나혜석을 만나다’특별전을 오는 8월21일까지 연다고 밝혔다.
수원서 특별전
이번 전시에선 지난해 11월, 유족에게 기증받은 <자화상>, 남편인 <김우영 초상>과 사진앨범 등이 일반에 처음으로 공개 중이다. 이외에도 나혜석이 남긴 삽화, 판화, 미술전람회 출품작, 유품, 사진, 잡지에 실린 원고, 친필 편지와 엽서, 다큐멘터리, 연보 등 아카이브 자료 90여점을 함께 선보인다.
그는 미술, 문학 등 문화 전반에 걸쳐 영향력을 나타내며 시대를 앞서간 선각자, 신여성 또는 비운의 인물로 평가받는다. 한국 최초의 여성 서양화가이자 문학가, 여성인권 신장을 위해 앞장선 최초의 페미니스트이기도 하다.
전통과 혁신, 신구의 갈등과 분열이 휘몰아치던 근대의 격변기에 태어난 나혜석은 풍부한 재능과 날카로운 감수성을 지닌 예술가였다. 그는 그림 뿐 아니라 소설이나 수필도 썼다. 그의 첫 소설인 <경희>는 최초의 근대 여성소설로 평가받았다. 이 소설은 축첩 관행에 문제를 제기한 선구적 작품이다.
동시에 3·1운동 확산 활동을 계기로 옥고를 치렀고 외교관인 남편 김우영을 따라 만주 안동현에 살면서 의열단원이 맡긴 총을 보관해 줄 정도로 독립운동에 관심을 보이기도 했다. 여자야학(1922), 여자미술학사(1933)를 설립해 여권의식 향상을 위해 열정을 쏟기도 했다.
나혜석은 1896년 4월28일 경기도 수원에서 출생해 일본 도쿄사립여자미술학교 서양학과를 졸업했다. 그는 김우영과 혼인, 세계일주, 개인 전람회 개최, 이혼, 작업실 화재로 인한 작품 전소 등 파란만장한 삶을 살다가 1948년 세상을 떠났다.
나혜석의 공식적인 작품 활동은 1921년 <경성일보> 내청각에서 개최된 첫 개인전을 시작으로 서화협회 및 고려미술회 동인 활동, 조선미술전람회 및 도쿄 제국미술원전 입선 및 특선을 거듭하며 화가로서 성공을 거둔 뒤, 1935년 소품 200여점을 출품한 조선관 전시를 마지막으로 막을 내린다.
나혜석의 초기작은 여성의 가사노동, 노동하는 사람을 주제로 한 삽화와 판화가 주를 이룬다, 만주 이주를 계기로 견고한 고건축물과 풍경을 그렸다. 또 1927년 유럽여행 당시 야수파와 입체파 경향의 화가 로저 비시에르(Roger Bissier)의 아카데미 랑송(Ranson)에서 수학한 경험은 다양한 소재와 변화를 모색하는 기반이 됐다.
이번 전시에선 화가로서의 나혜석 뿐 아니라 문학가로서의 그를 소개하는 것에도 중점을 뒀다. 나혜석이 살았던 당시 조선사회의 부조리를 고발하는 대표작인 <이혼고백서>, 소설 <경희> 등을 소개했다.
그는 이혼 후인 1935년 월간지 <삼천리>에 <신생활에 들면서>라는 글을 게재해 “사남매 아이들아, 어미를 원망치 말고, 사회제도와 도덕과 법률과 인습을 원망하라. 네 어미는 과도기에 선각자로 그 운명의 줄에 희생된 자였더니라”라고 쓰기도 했다.
그는 자기 삶의 주체가 되기 위해 꿈과 좌절, 고난이 반복되는 와중에 인습과 권위에 도전하는 글을 지속적으로 발표했다. 대부분 계몽적 성격이거나 여성해방사상을 담은 것이다. 오늘날 나혜석의 글은 남성중심적 사회에 대한 비판적 목소리를 통해 사적인 경험을 공공의 담론으로 이끌어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공공의 담론으로
수원시립아이파크미술관은 “올해는 나혜석이 탄생한지 120주년이 되는 해로 이번 전시를 통해 관습과 인습에 저항하며 자신이 주체가 되는 자유로운 삶을 살았던 나혜석의 일생과 그가 천착해온 예술세계가 재평가되길 바란다”고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