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정으로 연산군이 폐위되고 보위에 오른 중종은 사림파의 대표 주자인 조광조를 전격적으로 발탁한다. 그에게 전권을 위임하며 개혁과 동시에 당시 막강한 권한을 쥐고 있던 훈구파들을 견제하라는 주문을 준다.
이에 따라 조광조는 현량과(賢良科, 학문과 덕행이 뛰어난 인재를 시정으로 선발한 제도)를 설치해 사림 출신들을 대거 발탁, 홍문관·사간원 등 요직에 등용하며 중종이 주문한 일에 박차를 가하기 시작한다.
그런데 조광조가 추진하는 개혁은 너무나 급진적이며 이상주의로 흐르게 된다. 또한 훈구파를 견제하는 과정에서 무소불위의 힘으로 반정공신의 4분의 3에 해당하는 76명의 위훈을 박탈한다.
이 과정을 지켜보던 중종은 고민에 빠져든다. 조광조가 실시하는 개혁이 이상주의로 흐르고 훈구파에 대해서는 견제 차원을 넘어 몰살시키려는 상황을 살피면서 훈구파를 사림파가 대신하는 게 아닌가 하는 의심을 보내고, 결국 중종은 훈구파의 손을 들어주게 된다.
이어 훈구파의 반격이 시작되면서 조광조, 김식, 김구, 김안국, 김정국 등을 비롯한 70여명의 사림파 관료들이 반역죄로 목숨을 잃거나 처벌을 당했으며 사람파가 주도한 개혁 역시 거의 모두 폐지된다. 이 사건이 이른바 ‘기묘사화(己卯士禍)’다.
그런데 왜 조광조는 중종으로부터 전권을 위임받은 상황에서 개혁에 실패했을까. 단순히 이상주의로 빠진 개혁과 훈구파의 반격 때문이었을까. 물론 두 가지 요인 모두 무시할 수 없다. 그러나 그보다 더 근본적인 문제가 있다.
조선조 석학 중 한 사람인 율곡 이이가 그 답을 제시하고 있다. 그의 저서 석담일기(石潭日記)에서 조광조를 비롯한 사림파들의 개혁 실패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옛 사람들은 반드시 학문이 이루어진 뒤에나 이론을 실천했는데, 이 이론을 실천하는 요점은 왕의 그릇된 정책을 시정하는 데 있었다. 그런데 그는 어질고 밝은 자질과 나라 다스릴 재주를 타고났음에도 불구하고, 학문이 채 이루어지기 전에 정치 일선에 나간 결과 위로는 왕의 잘못을 시정하지 못하고 아래로는 구세력의 비방도 막지 못하고 말았다. 그러나 그가 도학을 실천하고자 왕에게 왕도의 철학을 이행하도록 간청하기는 했지만, 그를 비방하는 입이 너무 많아, 비방의 입이 한 번 열리자 결국 몸이 죽고 나라를 어지럽게 했으니 후세 사람들에게 그의 행적이 경계가 되었다.』
이이는 조광조의 개혁 실패에 대해 명료하게 결론 내렸다. 조광조가 자질과 재주를 겸비했지만 학문이 채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이를 달리 이야기하면 조광조에게는 개혁을 주도할 수 있는 내공이 갖추어지지 않았었다는 이야기다.
이제 현실로 돌아와 안철수를 바라보자. 그동안 누누이 안철수의 행태에 대해 자질은 물론 인성 부분까지 거론했었다. 아울러 정치판을 떠나 자신의 원래의 길로 돌아가는 일이 국가와 개인 모두에게 도움이 될 것이라 했다.
그런데 안철수는 결코 정치판을 떠나지 않을 모양이다. 하여 안철수에 대해 수차례 부정적인 의견을 보인 입장에서 그가 사는 길을 제시한다. 안철수가 사는 길은 역설적이게도 이번에 확실하게 죽으라는, 당당하게 야권연대를 거부하고 자폭하라는 이야기다.
이후 깨달음을, 안철수가 주장하는 중도를 찾아 길을 떠난 부처님의 6년여에 걸친 고행을 스스로 실천해 새 정치를 구체화한 연후에 다시 돌아오라는, 그게 안철수가 사는 길이다.
※ 본 칼럼은 <일요시사> 편집 방향과 다를 수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