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격적인 이야기에 앞서 잠시 시간을 거슬러 삼국시대 말기로 돌아가 보자. 백제의 의자왕이 보위에 오른 지 얼마 되지 않은 시점에 왕권강화를 위해 신라의 대야성(지금의 경상남도 합천)을 공격한다. 이른바 642년에 발생한 대야성 전투다.
그 전투에서 백제의 윤충 장군은 대야성 성주인 품석과 그의 부인 고타소를 비롯해 많은 신라인들의 목숨을 취한다. 그러자 고타소의 아버지인 김춘추는 이성을 잃을 정도로 깊은 상심에 빠져들고 이모인 선덕여왕을 찾는다.
김춘추는 선덕여왕을 닦달해 신라의 사절로 원병을 청하기 위해 고구려를 방문한다. 당시 고구려는 보장왕이 막 보위에 올랐으나 실권은 영양왕을 죽이고 보장을 왕으로 앉힌 연개소문이 장악하고 있었다.
연개소문이 영양왕을 죽이고 보장을 보위에 앉힌 사유는 영양왕이 당나라에게 너무 비굴한 자세를 유지하고 있었던 데에 따른다. 하여 연개소문은 백제를 우군으로 삼아 신라를 견제하고 당나라를 공략하려했다.
그런 그에게 김춘추가 백제를 멸하기 위해 원군을 요청했으니 먹혀들 리 없다. 결국 연개소문이 구실을 만들어 김춘추를 의도적으로 하옥하고 또 김춘추가 도망가는 듯한 모양새를 취하며 풀어준다.
자, 이제 현실로 돌아와 보자.
필자는 지난해 1월 <일요시사>에 ‘박근혜정권의 통일 노름’을 게재했었다. 그 글에서 박근혜정권의 ‘통일대박론’에 대해 강하게 질타했었다. 또한 그동안 우리가 취했었던 통일방안을 살펴보고 실현 가능성을 타진했었다.
이어 김정은이 존재하는 북한과의 평화통일은 요원하니 현실을 직시하고 뚜렷한 청사진을 먼저 그려야 한다고 역설하면서 박근혜 대통령이 통일을 위해 중국의 시진핑 주석에게 너무 의존하는 경향을 경계했었다.
마치 그를 입증하듯 박 대통령은 베이징 톈안먼광장에서 개최된 ‘중국인민의 항일전쟁 승리 및 세계 반파시스트 전쟁 승리 70주년’ 전승절 기념행사 및 중국열병식에 참여하기까지 했다.
이제 앞서 인용했던 역사와 현실을 대비시켜 보자. 김춘추는 김유신이 주창한 부국강병을 외면하는 것도 모자라 커다란 외교적 실수를 범했다. 고구려와 신라 사이에 일시적인 교류는 있었으나 고구려는 기본적으로 백제와 끈끈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런데 김춘추는 이해관계를 따지지 않고 고구려에 원군을 요청했으니 결국 망신 그것도 개망신만 당하는 결과를 초래하고 말았다.
이제 현실에서다. 박 대통령은 중국과의 극히 일시적인 관계로 인해 중국과 북한의 관계를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하는 우를 범했다. 북한을 압박하는 일에 중국의 도움을 받고자 했으니 돌아온 일은 역사에서 김춘추가 당한 치욕뿐이었다.
그렇다면 박근혜정권의 다음 카드는 무엇일까.
당연히 역사에, 김춘추의 이후의 행동에 답이 있다. 대외세력에 의존했던 김춘추는 자신의 잘못을 시인하고 가야 출신이라는 이유로 변방에 머물고 있던 김유신의 10만 양병을 적극 지원하기 시작한다. 그와 맞물려 비록 조공을 바리바리 곁들였지만 신라의 우군인 당나라를 찾아 당태종의 도움을 유도해 후일 대동강 이남의 영토를 차지하게 된다.
박근혜정권에 바로 이 부분을 제안하고자 한다. 우리의 안보는 전적으로 우리가 책임져야 한다. 그런 차원에서 공격이 최선의 방어인 점을 명심하여 핵무기 개발을 심도 깊게 고려하고 남의 도움을 빌려야 한다면 정말 우리의 우방이 누구인지 정확하게 파악하시라는 이야기다.
※ 본 칼럼은 일요시사 편집방향과 다를 수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