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 입체 추적 ‘문정영농조합 조합원 갈등’ 내막 1탄

“지금 문정동에서 엄청난 사기극이 벌어지고 있다!”

[일요시사 경제팀] 이창근 기자 = “문정동 영농단지에서 엄청난 사기극이 벌어지고 있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그것도 문정영농단지의 조합원들에 의해서다. “조합설립 과정에서부터 정관의 변경, 처분총회에 이르기까지 정상적인 절차는 하나도 없고 조합장의 막무가내 식의 독단과 일부 동조세력의 서류조작에 의해 조합원들이 피해를 보고 있다”는 것이다. 조합원들의 희생 위에 시대행업체만 배를 채우고 있다는 게 이들의 주장이다.
 

송파구 문정동 일대는 서울시 산하 SH공사가 도시개발 사업 부지로 선정, 고시하면서 투기열풍이 분 지역이다. 소위 ‘딱지’라고 불리는 토지매입권이 7000만원 상당의 프리미엄이 붙어 거래됐다. 일부 거래의 프리미엄은 1억2000만원까지 갔다. 이러한 열풍 끝에 3개 조합이 결성됐다. 각 조합의 사업지는 문정동 8-1블럭, 8-4블럭, 8-5블럭 등이다.

각 사업지마다 크고 작은 문제와 다툼이 만연했지만 문제의 8-4블럭은 “조합장의 전횡에 의해 조합원들이 피해를 봤다”는 주장이 여러 건의 소송으로 비화되면서 심각성이 고조된 상태다.

설립단계부터
서류조작?

모델하우스 공개 이후 상가 및 오피스텔 분양까지 완료된 시점인데도 “조합을 새로 결성해서라도 조합원들의 권리를 되찾아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작년 말에 출범한 ‘조합원 권리회복 비상대책위원회’(이하 비대위)에 새해 들어 다수의 조합원들이 가세하는 중이다.

비대위는 늦어도 2월 초순까지 현 조합장의 해임과 시대행사와의 계약파기를 위한 총회를 소집할 계획이다. 한 관계자는 “최근 조합원들의 합류가 이어지면서 그 동안 소문으로만 돌았던 조합장의 전횡 및 시대행사와의 결탁을 증명할 증거와 증인이 확보되고 있다”면서 “반드시 조합원들의 권리를 회복할 것”을 강조하고 있다.   


전횡 논란이 일고 있는 문정동 8-4블럭의 사업주체는 원래 문정영농조합(이하 문정조합)이다. 조합장은 대치동에서 당구장을 운영하고 있는 문모(50)씨. 그러나 현재의 사업주체는 시대행사로 선정된 R사다. 문정조합이 SH공사로부터 받은 토지우선매입권을 R사에 양도함으로써 사업주체가 바뀐 것이다. 조합원들은 사업주체를 변경하는 과정에서 조합장의 불법과 전횡이 무수히 자행됐다는 시각을 갖고 있다. 주목할 것은 이러한 시각이 단순한 마녀사냥으로 치부할 수 없다는 점이다.

최근 송파경찰서에 “문정영농조합 설립 당시 조합장의 지시로 25명의 서류와 도장을 위조했다”고 자백한 증인이 나타난 것이 단적인 예다. 이 자백을 예사로 넘길 수 없는 이유는 향후의 파장 때문이다. 수사기관으로부터 문서위조가 확인될 경우 위조를 지시한 조합장과 이에 가담한 자들에 대한 법적처벌이 뒤따르게 된다.

뿐만 아니라 ‘조합의 불법행위가 드러날 경우 사업권을 회수할 수 있다’는 SH공사의 규정에 따라 문정조합의 사업권이 박탈되는 수순이 뒤따르게 된다. 따라서 ‘문정조합 설립 당시 불법행위를 저질렀다’는 자백의 등장은 8-4블럭의 사업이 원점에서 재검토될 것임을 알리는 신호탄인 셈이다.

여기에 문 조합장이 조합정관을 손 댄 부분도 SH공사가 책임을 물어야 하는 사안이라는 지적이 많다. 이는 “정관의 기본 기재사항 및 대표자의 직무권한을 왜곡해서는 안 된다”는 SH공사의 가이드라인을 무시한 행위이기 때문이다.

당초 SH공사가 8-1, 8-4, 8-5블럭 조합들에게 ‘대표자 직무권한 왜곡금지’를 못 박은 것은 조합관련 사업에서 수시로 나타나는 조합장의 전횡을 막기 위한 조치인 것이다. 그런데 문정조합은 이 부분에 손을 댔다.
 

변경된 조합정관 11조를 보면 <조합장 및 임원의 직무> 4항 ‘시대행사 선정권(시대행사와 조합의 공동시행계약체결권)’과 5항 ‘시대행사가 개별조합원에게 지급할 조합원 배당금액의 결정권’을 조합장의 권리에 포함시켜 놨다. SH공사가 금지한 행위를 대놓고 저지른 것이다.

조합 처분총회 전
이미 사업권 넘겨


조합 사업에 있어 시대행사 선정과 배당금 조건에 대한 결정은 특정 개인이 결정할 수 없고, 그렇게 해서도 안 되는 금기 사안이다. 조합원 개개인의 재산권이기 걸려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위와 같이 중대한 사안은 총회를 개최해서 조합원들의 의사를 묻는 의결을 거쳐야 한다.

조합원들 입에서 “시대행사 선정권, 조합원 배당금액 결정권을 조합장이 갖도록 정관을 변경한 것은 처음부터 조합원들의 권리는 염두에 두지 않았다는 증거”라는 말이 도는 것은 이런 배경에서다. 조합원 박모(50)씨는 ‘SH공사 기만설’을 제기하고 있다.

“조합장이 SH공사에 조합설립 당시의 정관만 보내고 이후 변경한 정관은 일부러 감추는 방식으로 SH공사를 기만했다”는 얘기다.   

SH공사가 금지하는 정관변경을 강행한 이후의 조합장의 행보에는 석연치 않은 구석이 많았다. 시대행업체를 세 번이나 갈아치운 것이다. 조합원 김모(52)씨의 말이다. “처음 데려 온 H사와 두 번째 데려 온 U사는 조합원에게 개인당 9000만원 이상의 현금 보상을 약속했다. 그런데 조합장이 그 계약을 파기하더니 최종적으로 R사와 계약했다. R사의 조합원 보상금액은 7000만원으로 세 업체 중 최악의 조건이다. 이게 정상으로 보이나?”

게다가 시대행사 선정과정에서 낯 뜨거운 추문도 드러났다. 당시 상황을 기억하는 정모(46)씨의 증언이다.

“문 조합장이 H라는 업체로부터 뒷돈을 몇 억 받기로 한 모양인데 그것을 예전 임원 한 명이 알고 와서는 엄청나게 따진 적이 있다. 그 돈을 혼자 다 먹으려고 사실을 숨겼냐는 항의였다. 조합장 얼굴이 새빨갛게 변한 것을 나 뿐 아니라 여러 사람이 봤다.”

이러한 추문은 현재 ‘문 조합장과 R사가 모종의 대가를 주고받기로 결탁한 것이 확실하다’는 조합원의 판단에 배경이 되고 있다.
 

여기에 조합원들이 제대로 화가 나게 한 사건이 터졌다. 작년 1월 경 “문 조합장이 조합원들 재산을 멋대로 팔아먹었다”는 말이 돌더니 뒤이어 문 조합장이 R사와 체결한 ‘사업권 양수도 계약서’가 공개된 것이다.

처분총회를 열어 조합원들의 동의를 얻는 후 체결됐어야 할 계약이 사전에 계약서로 작성됐다는 것을 예사로 넘길 사람은 없었다. ‘처분총회 무산 시 배상 책임을 진다’는 내용이 포함된 것도 조합원들을 크게 자극했다.

“말이 안 되지만 시대행사 선정권과 조건협상권이 조합장에게 있다고 치자. 그렇다고 내 동의 없이 맘대로 처분할 권리가 조합장에게 있는 것은 아니다. 내 동의도 없는데 내 재산, 내 권리를 조합장 맘대로 넘기다니, 그런 게 어디 있나. 배임이고 사기다!”

조합원 김모(61)씨가 “조합원들이 조합장과 R사에게 사기 당한 것”이라고 목소리를 높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관리인에게 집 열쇠 맡겼다고 집안 물건을 다 팔아도 된다고 허락한 건 아니라는 것이다.

조합원 재산권을 조합장이 독단 매각?
비상대책위 호소에 검찰개입 임박한 듯


사업권 양도 계약서의 유출은 엄청난 후폭풍을 몰고 왔다. “조합장을 파면해야 한다”라는 목소리가 쏟아져 나왔다. 문 조합장과 그를 따르는 임원들이 “나중에 사후 추인을 받으려 한 것”이라고 진화에 나섰지만 쉽지가 않았다.

이후 조합장이 개최한 처분총회에 조합원들이 ‘불참 전략’으로 대응한 것이다. 결국 계약서의 추인을 받고자 시도된 처분총회는 세 차례 모두 정족수 미달로 무산됐다.

그런데 지난해 4월10일 열린 네 번째 처분총회는 달랐다.

문 조합장이 “직접 참석 17명, 위임장 제출 130건으로 성원이 됐다”고 선포한 이후 R사에게 사업권을 양도하는 계약서의 추인을 강행한 것이다. 개회선언 이후 30분 만에 벌어진 일이었다.

이 처분총회는 현재 불법 논란의 화두가 되고 있다.

처분총회 당시의 동영상을 직접 열람해보니 “정상적인 처분총회가 아니다”는 주장에 수긍이 갔다. 회의장 안에서는 의사발언 중인 감사가 퇴장당하는가 하면 조합의 총무이사는 입장조차 저지당했다. 위임장을 지참한 몇몇 조합원의 입장이 거부되는 장면에서는 “억울하면 소송해!”라고 소리치는 주최 측 사람의 목소리가 또렷하게 들렸다.


물론 이날 입장 거부된 일부 조합임원과 조합원들이 잠자코 있지는 않았다. SH공사로 공문을 보내 “서면동의서에 포함된 인감서류 날자와 동의서 날짜를 확인해 달라”고 요구하는 한편 “절차적 문제가 해결 될 때까지 처분총회 승인을 보류해 달라”고 요청한 것이다.

그러나 이들의 요청은 수용되지 않았다. SH공사가 8-4블럭의 처분총회를 승인한 것이다. 첨부된 서류 중에 1년 전에 발급한 인감증명서가 무수히 나올 것이라는 주장도 SH공사 담당자를 설득해 내지 못했다.

‘추인 자체가 반칙"
"처분총회도 불법?’

조합원과 조합임원 명의의 공식적인 문제제기가 있었음에도 처분총회가 승인된 배경은 무엇일까. SH공사 담당자는 “인감증명서 발급 날짜까지 모두 확인했으나 이상이 없었다”는 답변을 내놨다. 총무이사 및 운영위원들이 요구한 승인보류 요청을 받아들이지 않은 이유 또한 “모든 것을 서류로 심사를 할 뿐 이해 관계자의 말을 일일이 검증할 수 없다”며 전혀 문제될 게 없다는 입장이다.

그러나 조합원들은 SH공사 담당자의 답변에 문제가 있다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조합임원과 운영위원의 사전경고와 서면 요청이 있었던 만큼 제출된 회의록의 검증 또한 이뤄졌어야 했다는 것이다. 여기에 자신의 위임장이 조작되었다고 나선 조합원도 5명이나 존재했다.
 

조합원들이 “전화 몇 통 돌려봐도 확인할 수 있는 일을 SH 담당자가 의도적으로 안 했다”고 주장하는 것은 나름 근거가 있는 셈이다.

최소 14일 이전에 소집공고를 하도록 한 정관을 위반한 것도 간과해서는 안 되는 대목이다. 그 자리에 참석하지 않은 조합원의 권리가 침해당할 수 있는 개연성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취재과정에서 만난 문정조합 총무이사 박순임(46)씨는 “앞서 시도됐다 무산된 3차례의 처분총회 과정에서 동일한 필적의 동의서 수 십 장과 1년 전에 발급된 다수의 인감증명서를 직접 목격했다”며 증언에 힘을 싣고 있다.

조합원 상당수는 문제가 많은 처분총회가 승인된 것은 SH 담당자와 조합장 간 혹은 SH 담당자와 R사 사이에 모종의 거래가 있었던 게 분명하다고 보고 있다.

<일요시사>가 SH공사 담당자에게 처분총회 관련 서류의 열람을 요청했지만 불허됐다. “조합원이 와도 보여줄 수 없고, 조합임원이 와도 열람이 안 된다”는 것이다. 감사원이나 검찰, 서울시 등의 개입 없이는 조합원들이 SH공사의 승인과정을 검증할 방법이 만무한 상태다.

시대행사 약속 불이행
조합원들 "역차별 발끈"

처분총회를 둘러싼 조합원들의 거센 반발에도 불구하고 R사는 거침없는 행보를 보였다. 모델하우스 공개 이후 실시된 사전청약에서 오피스텔과 상가 대부분이 절찬리에 마감된 것이다. 마감 결과 문정조합원들이 오피스텔이나 상가를 분양받은 케이스가 매우 적었다. 일반분양을 한 탓이다. 조합원들이 “10년 넘게 기다린 조합원들이 오히려 역차별을 받았다”며 분통을 터트리는 이유다.

“조합장이 제시한 R사의 문건에는 잔금의 상계처리가 약속되어 있었다. 그런데 그것이 지켜지지 않았다. 조합원들에게 상가나 오피스텔을 우선해서 선택하도록 하겠다는 말도 거짓말로 판명됐다. 조합원은 손가락 빠는데 R사는 이번 사업으로 200억원의 수익을 본다. 도대체 누가 이 지경을 만들었겠나?”

한 조합원의 발언에 고개를 끄덕이는 사람이 많은 까닭은 역차별 발언이 꽤 설득력을 갖기 때문이다. 조합원 둘 이상만 모이면 “조합장이 업체로부터 이익을 나누자는 약속을 받고 엄청난 사기극을 저질렀을 것”이란 이야기가 오고가는 것은 이런 배경에서다.

물론 이러한 추측은 군중심리에 의한 조합원들의 막연한 추측일 공산이 크다. 그러나 일련의 상황을 보면 터무니없는 마녀사냥으로 치부하기도 어려운 점이 적지 않다. 

일부 조합원은 문 조합장이 자신과 관련한 여러 소송에서 대형로펌이 동원하고 있다는 점을 근거로 들었다. 딱지 한 장 가진 사람이 얼마나 이익을 본다고 그 비싼 로펌을 고용해서 대응하겠느냐는 것이다. 밀접한 이해관계를 가진 R사가 조합장의 변호사 비용을 부담했거나 정산 후 받기로 하고 빌려줬을 것이 분명하다는 게 조합원들의 판단이다.
 

신탁사가 발행한 수익증권이 204명 조합원의 개별 명의가 아닌 문정조합 명의로 통합발행 된 점도 조합원들에게는 야합의 증거(?)로 비춰지고 있다. 조합청산에 들어갈 때까지 조합원들의 불만을 잠재우려면 조합명의 수익증권이 유리하다는 판단으로 저지른 의도된 행동이라는 것이다.

조합사무실이 사실상 폐쇄된 것도 의혹 증폭의 요인이 되고 있다. 조합원들이 받은 ‘조합사무실 이전’ 문자를 받아 찾아간 주소지에는 조합사무실이 발견되지 않았다. 건물 구석에 간판 없는 출입문이 하나 있었지만 그나마 잠겨있었다.

현재 조합원들의 시선은 ‘조합장과 R사의 야합이 있었을 것’이라는 의혹 수준에서 ‘분명히 야합을 했다’는 확신 단계로 이동 중이다. 그러나 정작 의혹의 눈총을 받는 조합장과 R사는 아무런 해명과 대응을 내놓지 않고 있지 않다.

<일요시사> 취재에 대해 “어떠한 것도 대답할 말이 없다(조합장)”거나 “귀 신문사의 질의에 답변을 하지 않기로 방침을 정했다(R사)”는 입장만 알려왔다. “반론할 기회를 주는 것”이라는 문자에도 일체 반응이 없었다.

문 조합장과 R사가 취재요청을 회피하는 동안에도 비대위는 조금씩 그리고 꾸준히 세력을 불리고 있다. 비대위 관계자는 “조합원이 조금만 더 모이면 문정조합이 아닌 다른 이름의 조합을 새로 결성할 수 있을 것”으로 확신하고 있다.

3주 이내에 총회를 개최해서 현 조합장의 해임, R사와의 계약 파기, SH공사에 신규조합 신고 등의 수순을 마칠 수 있다는 것이다. 문정조합이 설립 단계부터 처분총회까지 무수한 절차적 하자와 비리가 있었음이 드러난 만큼 새 조합에서 사업을 진행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것이다. “새로 출범하는 조합이 직접 사업을 해야 R사가 도모하고 있는 200억원의 수익이 200여 조합원들에게 돌아갈 수 있다”는 게 이들의 명분이다.

새 조합 만들어
조합사업 재추진 

한편, 비대위의 행보와 별개로 주목되는 움직임이 있다. 한 검찰 관계자는 “최근 검찰에 문정영농조합과 관련한 비리제보가 계속 수집되는 만큼 조만간 적극적인 개입이 불가피해 보인다”고 언급하고 있다. 감사원 주변에서도 “문정동 사업부지와 관련해서 SH공사에 대한 감사 타이밍을 조율중”이라는 말이 돌고 있다. 조만간 문정동 일대에 한바탕 소용돌이가 몰아칠 것이 예견되는 이유다.

‘조합장 치고 감옥 안 가는 사람이 없다’는 속설이 문정동 일대에 회자되는 가운데 문정단지 조합장이 예외가 될 수 있을지 귀추가 주목되는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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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리면 철퇴’ 대법정 417호의 저주

‘걸리면 철퇴’ 대법정 417호의 저주

[일요시사 취재1팀] 장지선 기자 = 법원은 내란 혐의로 기소된 전직 대통령에게 철퇴를 내렸다. 2024년 12월 비상계엄 사태 이후 400여일 만이다. 이날 선고로 서울중앙지법 대법정 417호는 ‘전직 대통령의 무덤’이라는 악명을 이어가게 됐다. 5명의 전직 대통령에게 가해진 ‘대법정의 저주’를 <일요시사>가 살펴봤다. 지난달 19일은 윤석열 전 대통령에게 ‘운명의 날’이었다. 각종 혐의로 받는 재판 중에 가장 핵심 사안에 대한 법원의 첫 번째 판결이 이날 나왔다. 1심 재판부는 윤 전 대통령에게 무기징역을 선고했다. 앞서 관련자들에 대한 판결이 나오는 족족 유죄였기에 반전이라고 할 만큼 놀라운 결과는 아니었다. 443일 걸렸다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 25부 지귀연 부장판사는 지난달 19일 내란 우두머리 혐의 사건 선고 공판에서 윤 전 대통령에게 무기징역을 선고했다. 내란 우두머리죄의 법정형은 사형, 무기징역, 무기금고로 윤 전 대통령은 최고형을 피해갔다. 재판부는 12·3 비상계엄이 형법상 내란죄가 맞다고 판시했다. 지 판사는 윤 전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 자체는 헌법상 권한 행사로서 내란죄에 해당할 수 없고 사법 심사의 대상이 된다고 보기 어렵다면서도 그 목적에 따라 내란죄가 성립할 수 있다고 했다. 비상계엄의 목적이 국회나 행정·사법의 본질적 기능을 침해했다면 내란죄가 성립된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재판부는 사실관계의 핵심으로 군을 국회로 보낸 점을 꼽았다. 지 판사는 “무력을 동원해서라도 국회를 제압해야겠다고 결심했기 때문에 비상계엄을 선포했다는 게 실체에 부합한다”고 밝혔다. 결국 군을 국회로 보낸 행위 자체가 내란죄 성립 요건인 ‘국헌문란 목적’과 ‘폭동’에 부합한다는 취지다. 이어 “윤 전 대통령은 국회에 군을 보내 봉쇄하고 주요 정치인 등을 체포하는 방법으로 국회 활동을 저지·마비시켜 국회가 상당 기간 기능을 제대로 할 수 없게 하려는 목적을 내심으로 갖고 있었음을 부정하기 어렵다”며 “군대를 보내 폭동을 일으킨 사실도 인정된다”고 설명했다. 야당의 연이은 탄핵, 예산 삭감 등에 따른 국가 위기를 타개하고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수호하기 위한 비상계엄이었다는 윤 전 대통령 측 주장에는 “명분과 목적을 혼동한 주장”이라고 지적했다. 이 대목에서 지 판사는 “성경을 읽는다는 이유로 촛불을 훔칠 수는 없다”고도 언급했다. 전두환·노태우·박근혜·이명박 법정에 선 전직 대통령 5명 국가 위기 상황 타개는 명분에 불과할 뿐 본질은 헌법기관의 마비였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재판부는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이하 공수처)의 내란죄 수사에 대해서도 인정했다. 윤 전 대통령 측은 공수처가 내란죄를 수사할 권한이 없다며 수사의 적법성을 문제 삼아 왔다. 재판부는 “공수처에 내란죄 수사권이 없다고 하더라도 검찰은 공수처 송부 기록 외 다른 증거들을 종합해 기소한 것으로 보이고 공수처가 수집한 증거를 다 빼더라도 피고인에 대해 유죄 판단을 할 증거가 충분하다”고 정리했다. 검찰과 조은석 내란특별검사팀(이하 내란 특검)의 주장 중 윤 전 대통령이 장기 독재를 하기 위해 2023년께부터 비상계엄을 선포하고 국회를 제압할 의도로 내외적 여건을 조성했다는 공소 사실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렇다고 보기엔 지나치게 준비가 허술했다는 것이다. 또 국회를 무력화할 계획 등에 관한 별다른 증거나 자료, 흔적도 찾아볼 수 없다고 설명했다. 윤 전 대통령 무기징역 선고 외에도 김용현 전 국방부 장관은 내란 중요임무종사죄가 인정돼 징역 30년, 노상원 전 국군정보사령관은 징역 18년, 조지호 전 경찰청장은 징역 12년, 김종식 전 서울경찰청장은 징역 10년, 목현태 전 서울경찰청 국회경비대장은 징역 3년을 각각 선고받았다. 최고형 피했다 윤 전 대통령 측은 선고 닷새 만인 지난달 24일 항소했다. 윤 전 대통령 측 변호인단은 “법정의 기록은 물론, 훗날 역사의 기록 앞에서도 이번 판단의 문제점을 분명히 남겨야 할 책임이 있다고 생각한다”며 “특검의 무리한 기소, 그 전제 위에서 이뤄진 1심의 모순된 판단과 그 정치적 배경에 대해 저희는 결코 침묵하지 않겠다”고 밝혔다. 윤 전 대통령이 중형을 선고받으면서 서울중앙지법 대법정 417호의 ‘저주’가 이번에도 나타났다는 말이 나오고 있다. 대법정 417호는 150석 규모의 형사 법정이다. 대법정 417호가 주목받는 이유는 이곳에서 윤 전 대통령을 포함한 전직 대통령 5명이 재판을 받았기 때문이다. 전직 대통령의 ‘무덤’이라는 별칭이 생길만한 대목이다. 전두환씨, 노태우 전 대통령의 하늘색 반팔 수의 차림은 국민의 뇌리에 깊게 남아 있다. 최고 권력이라 할 수 있는 대통령이 법정에 서서 판결을 듣고 있는 모습 자체가 충격인 시대였다. 12·12 군사반란과 5·18 광주민주화항쟁 관련 내란 우두머리(당시 내란 수괴) 등 혐의로 넘겨진 전직 대통령은 대법정 417호에서 중형을 선고받았다. 1996년 당시 검찰은 반란 및 내란 수괴 외에도 특정범죄가중처벌법상 뇌물수수 혐의 등 총 10개 죄목으로 전씨에게 사형을 구형했다. 노 전 대통령에게는 내란 중요임무 종사 등 9개 죄목으로 기소, 무기징역을 구형했다. 전 씨는 1심에서 사형을 선고받았으나 2심에서 무기징역으로 감형됐고 대법원에서 형이 확정됐다. 노 전 대통령은 1심에서 징역 22년6개월, 2심에서 징역 17년, 이후 대법원에서 확정 판결을 받았다. 국정 농단 다스 재판 그로부터 30여년 뒤 윤 전 대통령이 같은 장소에서 같은 혐의로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검찰 측 구형도 사형으로 같았다. 내란 특검은 지난 1월13일 “법률가로서 검찰총장까지 지낸 피고인은 대통령으로서 누구보다 앞장서 헌법을 준수하고 헌법 질서를 수호해야 할 의무가 있다는 점을 잘 알면서도 헌법 질서 파괴로 나아간 점에서 비난받아 마땅하다”며 “피고인은 반성하지 않는다. 양형에 참작할 사유가 없고 오히려 중한 형을 정해야 한다”고 구형 배경을 밝혔다. 박근혜 전 대통령의 국정 농단 사건의 1심 선고도 대법정 417호에서 이뤄졌다. 박 전 대통령은 헌정사상 처음으로 탄핵으로 지위를 잃고 구속 기소됐다. ‘비선 실세’ 최순실씨가 국정을 좌지우지하는 등 국민으로부터 위임받은 권한을 사적으로 남용했다는 혐의를 받았다. 국민의 공분이 하늘을 찌르던 시기였다. 2018년 4월6일 서울중앙지법 형사22부는 대기업 등으로부터 231억9427만원의 뇌물을 받은 혐의 등으로 재판에 넘겨진 박 전 대통령에게 징역 24년, 벌금 180억원을 선고했다. 당시 재판부는 2016년 10월 이후 불거진 국정 혼란의 장본인으로 박 전 대통령을 지목했다. 박 전 대통령이 국정 농단 사태에 궁극적인 책임을 져야 한다는 취지였다. 그러면서 “국정 혼란과 대통령 파면의 주된 책임은 피고인과 최순실에게 있다”며 “그럼에도 잘못을 반성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고 납득하기 어려운 변명으로 일관하면서 책임을 주변에 전가했다”고 지적했다. 재판부는 박 전 대통령이 받던 18개 혐의 중 ‘문화계 블랙리스트’ 사건 등 16개를 유죄로 봤다. 150명 규모 방청석 역사적 재판의 현장 이명박 전 대통령도 ‘저주’를 피하지 못했다. 자동차 부품업체 ‘다스’ 자금을 횡령하고 삼성 등에서 거액의 뇌물을 챙긴 혐의로 기소된 이 전 대통령은 2018년 10월5일 1심 재판에서 징역 15년, 벌금 130억원을 선고받았다. 법원이 다스의 실소유주를 이 전 대통령으로 결론 내리면서 ‘다스는 누구 겁니까’라는 논란에 종지부가 찍힌 순간이었다. 당시 재판부는 “2007년 대통령선거 기간 내내 피고인에 대한 각종 의혹이 제기됐지만 피고인의 결백을 믿는 다수의 국민 덕분에 피고인은 대통령으로 당선됐다”며 “피고인은 대통령으로서의 막강한 권한을 오직 헌법과 법률에 따라 국민 전체를 위해 행사해야 할 책무를 부담하고 있었다”고 말했다. 이어 “그러나 재판 결과 피고인이 친인척 명의를 빌려 다스를 설립해 실소유하면서 246억원가량 횡령한 사실이 드러났다”며 “범행 기간이 길고 이득액이 상당하며 범행 당시 이미 국회의원, 서울시장으로 활동했다는 점에서 죄질이 나쁘다”고 비판했다. 또 “의혹만 가득했던 사건의 실체적 진실이 밝혀지는 과정에서 대통령 재임 시절 저질렀던 다른 범행이 함께 드러남으로써 당시 피고인을 믿고 지지했던 국민은 물론 사회 전반에 큰 실망과 불신을 안겼다”며 “그런데도 친인척이나 측근이 범행을 저지른 것이라는 등 책임을 전가해 엄중한 처벌이 불가피하다”고 양형 이유를 밝혔다. 되풀이된 30년 역사 전직 대통령 관련 재판 등 사회적 관심이 높은 사건이 대법정 417호에서 열리는 건 규모 때문으로 알려져 있다. 많은 사람이 방청을 원하기에 대형 법정에서 재판을 진행한다는 것이다. 5명의 전직 대통령은 방청석의 150여명과 실시간으로 중계된 재판을 본 국민 앞에서 단죄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