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시사 경제팀] 박호민 기자 = 국가적 재난이나 위기 시 모두가 동참하는 기부금. 재계도 사회구성원의 하나로서 기부를 한다. 하지만 재벌들의 기부는 국민의 기부와 다르다. 측은지심보단 서열이 기준인 것으로 풀이된다. 기부금액만 놓고 보면 그렇다. 재계 서열에 비례해 차등 기부하는 것이 보이기 때문이다. 짬짜미 의혹이 나온 배경이다.
청년실업의 아픔을 달래기 위해 박근혜 대통령이 나섰다. 청년희망펀드를 만들어서 말이다. 기업들은 정부 눈치를 안 볼 수 없다. 그룹 총수들도 정부의 시그널에 따라 기부행렬에 동참했다. 재밌는 점은 삼성그룹 이건희 회장을 기준으로 그룹 서열에 따라 조금씩 차등해 사재를 출연했다. 미리 입이라도 맞춘 듯 말이다.
서열 보인다
청년희망펀드의 취지는 장기화된 청년실업에 힘든 청년들을 돕자는 것이다. 재계 에서는 서열 1위 그룹의수장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이 ‘스타트’를 끊었다. 이건희 회장이 지난달 22일 청년희망펀드로 200억원 규모의 사재를 출연한 것. 이 회장이 현재 건강이 좋지 않아 포괄적 위임의 형식으로 기부했다.
삼성 미래전략실 이준 커뮤니케이션팀장(부사장)은 “이 회장이 수재의연금 등을 기부할 때는 포괄적 위임을 받아놓은 상태”라며 “이번 기부도 포괄적 위임에 따라 개인재산을 기부한 것”이라고 말했다.
재계 2위 현대자동차 정몽구 회장은 이 회장의 출연을 기다렸다는 듯 3일 뒤인 25일 150억원의 개인 재산을 기부했다.
현대차그룹 측은 “정 회장이 청년 일자리 창출을 위한 사회적 노력에 공감하고, 청년들이 미래에 대한 희망을 갖고 창의적 도전을 할 수 있도록 지원해야 한다는 사회공헌 철학에 따라 기부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재계 넘버 1, 2인 이 회장과 정 회장의 청년희망펀드 기부로 그룹 총수의 기부행렬이 점쳐진다. 실제 두 회장의 기부 이후 서열 3위 SK그룹 최태원 회장이 100억원, 4위 LG그룹 구본무 회장이 70억원, 5위 롯데그룹 신동빈 회장이 100억원을 각각 기부했다.
여기까지만 보면 대체로 재계 서열 순으로 기부금 규모가 정해진 모양새다. 신 회장의 경우 4위 구 회장보다 30억원 많은 액수를 기부했지만 ‘왕자의 난’으로 정부와 국민들에게 잘 보여야하는 특수한 상황임을 감안하면 기부금 규모 순위는 대체적으로 재계 순위와 정비례 관계다.
이외 GS, 현대중공업, 한진, 한화, 두산 등의 그룹들도 현재 청년희망펀드 기부 행렬에 동참하기 위해 준비 중이다. 기부액 규모는 재계순위가 높은 그룹보다는 적게 낮은 그룹보다는 많은 수준이 될 것으로 보인다.
대통령 이어 재계 총수들 동참 행렬
1위 기업에 기준…짬짬이? 눈치보기?
사실 기부금과 관련 재계에서는 ‘형님보다는 조금 적게 아우보다는 조금 많이 내는 것’이 통상적이다. 지난해 세월호 참사 당시 재계에서도 많은 성금이 걷혔는데, 여기서도 삼성을 기준으로 재계 순위에 따라 성금 규모가 차등된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세월호 참사 당시 삼성은 성금모금 첫날 150억원을 사회복지공동기금회에 전달했다. 다음날 재계 서열 2위인 현대차는 100억원을 기탁했다. 재계 서열 3∼5위인 SK와 LG, 롯데는 각각 80억원, 70억원, 43억원을 기부했다. 6위 포스코는 36억4000만원, 7위 현대중공업은 40억원, 8위 GS도 40억원을 각각 출연했다. 9위 농협은 지역 단위 별로 수천만원에서 수억원씩 기부하고 있다. 10위 한진과 11위 한화, 13위 두산은 똑같이 성금 30억원을 기탁했다. 14위 신세계, 15위 CJ는 20억원씩 내놓았다.
매번 재벌 총수 및 그룹이 내는 기부금에 일정한 법칙이 따르자 일각에서는 기업 기부금 짬짜미 의혹까지 나온다. 국가적으로 성금을 내야하는 분위기가 형성되면 각 그룹 실무진이 만나 성금 규모와 시기를 조율하는 것 아니냐는 것이다.
사실 기업들에게 짬짜미 기부금이 필요한 이유가 있다. 자신의 재계서열보다 낮은 그룹에 비해 돈을 적게 내면 정부나 국민들에게 째째해 보인다는 인상을 남길 수 있기 때문이다. 일례로 당초 청년희망펀드는 기업을 대상으로 기부를 받지 않을 계획이었다.
하지만 기부금액이 예상보다 적어짐에 따라 기업들도 정부의 눈치를 안 볼 수 없는 모양새가 됐다. 실제 이건희 회장이 200억원의 기부금을 내기 전인 지난달 22일 13개 은행을 통해 모금된 청년희망펀드 공익신탁 기금은 74억원에 불과했다. 하지만 얼마만큼 내야 정부로부터 안 찍히고 무난히 넘어갈지 기준을 알 수 없기 때문에 재계 1위 그룹 삼성의 기부금으로 기준선이 맞춰지고 있다.
청년희망펀드는 이런 배경 탓에 진정성 논란에 시달려야 했다. 그룹 총수의 기부행렬이 청년들의 실업의 아픔을 헤아린 기부가 아닌 정부의 눈치 때문에 마지못해 하는 기부 아니냐는 것이다. 기업들 입장에서는 돈을 내고도 찜찜한 상황이 됐다.
안내면 찍힌다
당분간 재계의 짬짜미 기부 의혹은 계속될 전망이다. 정부의 입김이 아니더라도 괜히 기부금 조금 냈다고 국민들의 눈총을 살 바엔 어느 정도 서열에 맞춰 내는 것이 속 편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각 그룹간 기부금 액수만 비교해도 재계 순위를 가늠해 볼 수 있을 것으로 예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