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시사 정치팀] 김명일 기자 = 지난달 치러진 10·28재보선에서 새정치연합이 또 한 번 굴욕적인 패배를 당했다. 정부가 추진하는 역사교과서 국정화에 대한 반대 여론이 높아지고 있고, 선거 전날 정부의 비밀TF팀까지 발각되는 등 유리한 정국이 조성됐지만 선거에는 하등의 영향이 없었다. 정부 여당에 불만이 많은 민심은 새정치연합보다는 차라리 무소속 후보들의 손을 들어줬다. 충격적인 재보선 결과에 따라 향후 정국은 크게 요동치게 됐다.
‘전국 스코어 15:2, 수도권 스코어 9:1’
지난달 28일 치러진 재보선의 최종 성적표다. 전국 24곳에서 실시된 10·28재보선에서 새누리당은 모두 15곳에서 승리하며 압승을 거뒀다. 반면 새정치연합은 24곳 중 호남 1곳과 인천 1곳 등 고작 2곳만 당선되는 초라한 성적표를 받아들었다. 나머지는 무소속 후보들의 몫이었다. 특히 새정치연합은 텃밭인 호남에서 치러진 선거에서조차 3곳 중 단 한 곳에서만 승리하는 처참한 성적표를 받아들어야 했다.
여당의 무덤?
야당의 무덤!
광역단체장이나 국회의원 선거가 치러지지 않아 이번 재보선에 대한 정치권의 관심이 적었지만 이번 선거 결과는 곱씹어 볼수록 충격적이다. 정부가 추진하는 국정 역사교과서에 대한 반대 여론이 높아지고 있고, 선거 전날 정부의 비밀TF팀까지 발각되는 등 유리한 정국이 조성됐기에 내심 새정치연합에서도 좋은 결과를 기대하고 있었다.
통상 재보선은 정권에 대한 심판의 의미가 있어 ‘여당의 무덤’이라 불렸다. 게다가 이번에 선거가 치러진 지역 중 상당수는 야권 강세 지역으로 분류되는 곳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새정치연합은 선거에서 참패했다.
서울, 경기, 인천 등 10곳에서 치러진 수도권 선거에서도 새정치연합은 단 한 석을 차지하는데 그쳤다. 모두 9개 지역에서 열린 광역의원 재보선은 원래 새누리당 3석, 새정치민주연합 6석이었지만 이번 재보선을 통해 새누리당이 7석, 새정치연합 2석으로 크게 역전됐다. 인천 부평제5선거구, 경기 의정부제2선거구, 의정부제3선거구, 광명제1선거구까지 새누리당은 수도권에서만 4곳을 새롭게 차지했다.
수도권서 9:1 완패에도 책임지는 사람 없어
'이기는 야당' 만든다더니 필패하는 야당?
새정치연합의 텃밭인 호남에서의 민심이반 현상도 눈에 띈다. 새정치연합은 호남에서 치러진 선거에서 3곳 중 단 한 곳에서만 승리했다. 그 중 전남 신안에서 치러진 선거에서는 무소속 후보들에 밀려 새정치연합 후보가 3위에 머무르는 굴욕적인 상황까지 연출됐다.
부산에서 치러진 재보선 결과도 매우 처참했다. 새정치연합 문재인 대표는 당 혁신위원회의 요청에 따라 내년 총선에서 부산 출마를 검토하고 있다. 그러나 광역의원 2곳 기초의원 3곳 모두 새정치연합은 전패했다. 지난 지방선거나 총선 등과 비교해보면 새누리당과의 득표율 차이는 더 크게 벌어졌다. 이번 재보선에서는 특히 문 대표의 지역구인 부산 사상구에서도 기초의원선거가 실시됐으나 새정치연합 후보는 새누리당 후보에게 참패하고 말았다.
부산지역 재보선을 진두지휘했던 새누리당 박민식 의원은 “사상구는 문 대표의 지역구이고 새정치연합 후보는 4선 구의장 출신인데 반해 우리당 후보는 정치신인이었다”며 “부산이 여권세가 강하다고 하지만 질 수도 있다고 생각했던 지역인데 예상보다 훨씬 크게 압승을 거둬 기뻤다”고 말했다.
새누리 연전연승
새정치 연전연패
당장 새정치연합 내부에선 “문 대표가 지역구관리를 어떻게 했길래 자신의 지역구에서 치러진 선거에서 이렇게 큰 표차이로 참패했는지 모르겠다”며 문재인 책임론이 불거져 나오고 있다. 이런 지역민심이라면 문 대표가 내년 총선에서 자신의 지역구에 다시 출마하더라도 당선된다는 보장이 없는 것 아니냐는 비관론까지 나온다.
이번 재보선은 내년 총선의 결과를 예측해볼 수 있는 마지막 모의고사 성격이 강했다. 그런데 유리한 정국에서도 참패를 당하자 새정치연합은 당혹감을 숨기지 못하고 있는 모습이다. 이처럼 충격적인 패배소식이 전해지자 당내 비노인사들은 부글부글 끓고 있다. 이미 문 대표를 비롯한 친노진영은 지난 4·29재보선에서 참패를 당하고도 아무런 책임도 지지 않고 넘어간 터였다.
이어 10월 재보선마저 충격적인 참패를 당하면서 비노진영에서는 문 대표와 친노진영이 이번만큼은 선거 결과에 책임져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고 있다.
비노진영의 한 인사는 “문 대표와 당지도부가 4월 재보선 참패 이후 달라진 모습을 보여줬어야 하는데 전혀 달라진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다. 총선을 앞둔 마지막 기회인데 아무런 준비도 하지 않고 선거를 치러 또 다시 참패했다”며 “문 대표가 취임 당시 약속했던 것이 ‘이기는 야당’이었다. 그런데 이기는 야당은커녕 비기지도 못하는 야당, 선거 때마다 참패하는 야당을 만들어 놨다”며 문 대표를 신랄하게 비판했다.
또 다른 비노진영 인사도 “선거결과보다 더 충격적인 것은 아무도 선거결과에 책임지려는 사람이 없다는 것이다. 문 대표는 선거에서 참패를 당하고도 다음날 사과 한마디 안 하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국정 역사교과서 관련 기자회견을 했다.
이쯤 되면 국정교과서 투쟁이 내부 불만을 잠재우기 위한 수단은 아닌지 의심할 수밖에 없다”며 “국민들이 역사교과서 국정화에는 반대하지만 그렇다고 우리당을 찍어 줄 생각은 없다는 것이 이번 선거를 통해 확인됐다. 국정교과서에 대해 국민들의 반대여론이 높은 만큼 이 문제만 물고 늘어지면 국민들이 우리를 선택해줄 것이라고 생각했다면 너무 순진한 생각이었다”고 지적했다.
실제로 문 대표는 재보선 다음날 국정 역사교과서 문제와 관련해 사회적 논의기구를 만들자고 제안했지만 새누리당은 “문 대표가 재보선 패배의 책임을 회피하고 야권의 분열을 막기 위한 전략으로 국정 역사교과서 문제를 이용하려는 것”이라며 단박에 거절했다.
문 대표는 이번 재보선을 치르면서 별다른 지원유세활동도 하지 않았다. 비노진영에선 “이번 선거결과로 입지가 흔들리는 것을 우려해 재보선의 의미를 축소시키려고 문 대표가 의도적으로 지원유세에 나서지 않은 것”이라며 “매우 무책임한 행보”라고 비판했다.
무책임한 친노
부글부글 비노
당장 당내에서는 이번 재보선의 후폭풍으로 문 대표가 사퇴해야 한다는 주장이 힘을 얻고 있다. 새정치연합 박지원 의원은 “재보선 지원유세를 다니는 과정에서 과거 우리당을 지지했던 단체들조차 이제는 우리당을 못 돕겠다고 해 놀랐다”며 “작은 선거라고 변명하지 말고 문 대표가 큰 책임을 져야 한다”고 언급해 사실상 문 대표의 대표직 사퇴를 공개적으로 요구하고 나섰다. 하지만 문 대표를 비롯한 친노진영에서는 이번 선거결과를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있어 앞으로 친노진영과 비노진영의 갈등은 더욱 심화될 수밖에 없을 전망이다.
또 이번 재보선에서 무소속 후보들이 대거 당선되면서 신당의 성공 가능성이 확인된 만큼 야권의 신당 창당 움직임에도 더욱 가속도가 붙게 됐다. 정부 여당에 불만이 많은 민심은 새정치연합보다는 차라리 무소속 후보들의 손을 들어줬다. 정치권에서는 새정치연합 깃발 달고 출마하느니 무소속으로 출마하는 게 낫다는 말까지 나오는 상황이다. 결국 이번 재보선 결과가 야권 재편의 분수령이 될 것이라는 전망이다.
새누리, 내년 총선서 180석까지 전망
브레이크 없는 박근혜정부 독단 우려
반면 정부와 새누리당은 국정 운영에 탄력을 받게 됐다. 새누리당의 한 관계자는 “박근혜정부 출범 이후 온갖 억지로 장외투쟁만 일삼고 있는 새정치연합에 대해 국민들이 표로 심판해주신 것”이라고 평가했다. 당장 야권이 총력을 다해 반대하고 있는 역사교과서 국정화 문제에도 속도가 붙게 될 전망이다. 역사교과서 국정화에 대한 반대 여론이 높지만 정작 표심에는 별다른 영향을 주지 않는다는 것이 확인됐기 때문이다.
수도권 선거에 악영향을 끼칠 수 있다며 역사교과서 국정화를 반대하던 새누리당 내 소장파 의원들도 이번 선거 이후 기세가 한풀 꺾인 모양새다. 야권도 역사교과서 국정화 반대 운동에만 올인하다가는 내년 총선을 그르칠 수 있다는 위기감에 빠져들고 있다. 정부 여당이 이번 재보선 결과에 한껏 고무된 반응을 보이면서 벌써부터 정치권에선 박근혜정부의 독선이 더욱 심해지는 것 아니냐며 우려하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정치권의 한 관계자는 “이번 선거결과는 정부 여당이 잘해서 얻은 결과가 아니라 너무나 무능한 야당 탓이라는 것이 중론”이라며 “그렇지 않아도 박근혜정부는 너무 독단적이라는 평가를 받아왔는데 이번 재보선을 계기로 박근혜정부의 독단적인 국정운영 행태가 더욱 심해질 것”이라고 전망했다.
새누리당은 내년 총선 승리를 이미 기정사실화하고 목표치를 180석까지 높여 잡고 있다. 새누리당 김무성 대표는 지난달 기자들과 가진 오찬에서 내년 총선에서의 목표가 180석이라는 것을 분명히 밝혔다. 김 대표는 “야권이 새정치연합과 천정배 신당, 정의당 등등으로 나뉘어 있으니까 예전처럼 단일화는 못할 것”이라며 “공천만 잘하면 180석을 충분히 넘길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독선 심해질까?
브레이크 없다
새누리당이 내년 총선에서 180석을 차지한다면 국회선진화법의 적용에도 불구하고 야당의 도움 없이 법안을 처리할 수 있게 된다. 새정치연합의 한 관계자는 “우리 당이 수도권 선거에서 9:1로 깨질 정도면 내년 총선에서 새누리당이 180석을 가져가는 것이 결코 불가능한 이야기가 아니다”라며 우려했다.
야권은 19대 국회 들어 과반에도 못 미치는 의석수를 차지했지만 국회선진화법 덕분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 하지만 내년 총선에서 새누리당이 180석 이상을 차지하면 과거처럼 본회의장에서 몸으로 막는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