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실록에 실린, 조선 중기 형조판서·우의정 등을 역임했던 김구(金構)의 졸기에 관한 두 개의 기록을 살펴보자. 먼저 숙종 30년(1704년) 12월18일 기록이다.
『김구는 관찰사 김징(金澄)의 아들로 젊을 때부터 문한(文翰, 문필)이 넉넉하고 민첩하였으며, 문과에 장원 급제하여 청환(淸宦:학식이나 문벌이 높은 사람에게 시키던 규장각·홍문관·선전 관청 등의 벼슬)과 현직(顯職:실무를 보는 문무관의 벼슬)을 역임하였다.
자질과 성품이 명철하고, 재지(才旨)가 더욱 뛰어나 누차 바쁘고 번거로운 직임을 맡았으나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데 지체함이 없었으며, 임관(任官)이 직무에 적합함이 많았다. 또 말주변이 능숙하여 임금과 면대해 아뢸 때에는 간곡하고 자상하니, 임금이 경청하였다.
정승에 임명된 지 얼마 안 되어 모친상을 당해서는 상을 감당하지 못하였는데, 임금이 병세의 위독함을 듣고 심지어 내시를 보내어 육식을 권했으니, 융숭한 총애가 이와 같았다. 졸할 때 56세요, 뒤에 충헌(忠憲)이란 시호를 내렸다.』
다음은 숙종실록보궐정오 29년(1703) 12월13일 기록이다.
『김구는 명민하고도 정력이 있으며, 사람 사귐에 유능하여 임금이 매우 융성하게 대접하였다. 그러나 진정한 재능이 없었으며, 까다롭고 잔꾀에 밝아 대체(大體)를 알지 못하였고, 가는 곳에 좋은 명성이 없었다.
또한 임금의 뜻에 아첨하고 순종하기를 좋아하여 일찍이 임금을 보좌하여 선을 전하고 악을 못하게 한 일이 없었으며, 강화도에 있을 때 밀지를 받고 사적으로 영전(影殿)을 세웠다가 결국 이광좌(李光佐)의 탄핵을 받았다. 그리고 병조판서로 있을 때 용대기(龍大旗:임금이 거둥하거나 열병할 때 쓰는 기)를 새것으로 바꾸자고 청하니, 세상에서 아첨하는 사람으로 지목하였다.
그리하여 조정위(趙正緯)·오명준(吳命峻) 등이 서로 잇달아 탄핵하였는데, 조정위의 탄핵이 더욱 참혹하였다. 임금이 탄핵한 자를 괘씸히 여겨 김구를 정승으로 임명해 더욱 총애하는데, 얼마 안되어 친상(親喪)을 당하여 직위를 버렸고 이 때에 와서 졸하였다.』
실록에 나타난 김구에 대한 극과 극의 평가, 사망년도도 그러하지만 내용을 살피면 어느 장단에 춤을 추어야할지 난감하다. 그런데 어떻게 이런 현상이 가능할까. 답은 간단하다. 바로 당파에 기인한다.
숙종실록은 노론이 숙종실록보궐정오는 소론이 주도하여 편찬하였기 때문이다. 즉 가장 엄정해야할 역사 기록에 패거리가 개입된 결과다.
이와 한 치의 오차도 보이지 않는 현상이 지금, 2015년에 다시 발생하고 있다. 역사 교과서를 두고 청와대와 여야 간, 또 좌우 진영으로 나뉘어 첨예하게 대립하면서 극도의 아전인수로 대처하고 있다.
심히 우려스럽지 않을 수 없다. 가장 엄정해야할 역사 기록에 패거리들이 가세하고 있고 벌써 그들의 전유물이 된 듯 보인다. 그렇다면 그 결과는 결코 상기의 상태를 벗어날 수 없다.
하여 주로 역사소설을 집필하고 있는 필자의 입장에서 강력 주장한다. 청와대를 포함하여 정치권은 물론이고 민족문제 연구소 혹은 전교조 등 일체의 패거리들은 역사 기록에서 손을 떼고 순수하게 역사를 전공한 사람들이 나서라는 이야기다.
아울러 그 과정에 프랑스의 유명한 역사학자 마르크블로흐가 그의 저서 ‘역사를 위한 변명’에서 “지난 역사를 현재의 가치관으로 접근하는 것은 금물이다. 그 당시의 환경을 철저하게 검증하여 그 시절의 가치관으로 판단하여야 한다”는 명언에 따라야 한다.
※ 본 칼럼은 일요시사 편집방향과 다를 수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