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시사 사회팀] 강현석 기자 = 정부는 항상 세수가 부족하다고 말한다. "돈이 없다"면서 만만한 서민의 호주머니를 털기 일쑤다. 그런데 정작 돈을 내야 할 사람들은 부정한 방법으로 조세를 회피하고 있다. 적게는 수천만원에서 많게는 수백억원까지 정부가 걷지 못한 세금은 40조원에 이른다. <일요시사>는 서울시가 공개한 고액체납자 명단을 토대로 체납액 5억원 이상의 체납자를 추적하는 기획을 마련했다. 41화는 464억600만원을 체납한 화곡주공시범재건축주택조합 조합장 심재수씨다.
지난 2005년 6월 주요 일간지를 통해 서울 강서구 화곡동 주공아파트 재건축 비리 의혹이 세상에 알려졌다. 서울남부지검이 무혐의 처리했던 이 사건은 서울 서초경찰서 수사팀이 새로운 비리 정황을 밝혀내면서 파문이 확대됐다.
시공사와 결탁
당시 화곡주공시범재건축주택조합(이하 재건축조합) 조합장이었던 심재수씨는 검찰에 진정서를 제출했다. 심씨는 진정서에서 "수차례 무혐의가 난 사건을 관할서가 아닌 서초경찰서가 한 것은 청탁수사"라고 주장했다. 시공을 맡은 A건설도 즉각 보도자료를 냈다. A건설은 "사업 내용에 전혀 문제가 없었다"라며 "검찰과 법원을 통해 무혐의 처리된 사안"이라고 힘줘 해명했다.
앞서 심씨에게 조합비를 납부한 몇몇 조합원들은 "심씨와 A건설이 집행한 공사비 중 1200억원이 증발했다"라며 의혹을 제기했다. A건설은 "수분양자가 분양금 3830억원을 냈고, 이 중 ▲공사도급액 3210억원 ▲부가가치세 267억원 ▲재건축조합 사업비 331억원 ▲기타 선수금 22억원 등이 정상적으로 회계 처리됐다"라고 반박했다. A건설과 심씨는 의혹을 제기한 조합원들을 상대로 90억원 상당의 재산 가압류를 시도했다.
화곡주공시범아파트 재건축사업은 1993년부터 추진된 지역주민의 '숙원사업'이다. 서울시의회 산하 도시정비위원회가 작성한 회의록(1993년 10월자)을 보면 심씨 등 730명은 '고도지구 지정을 철회해 달라'라고 시에 요구했다. 고도제한 완화의 목적은 고층아파트를 짓기 위함으로 해석됐다.
1996년 9월 심씨 등은 재건축조합 설립인가를 취득했다. A건설은 시공사로 선정됐다. 재건축 조합은 1999년 11월 강서구청으로부터 재건축 사업계획승인을 받았다. 그런데 승인 과정에서 문제가 생겼다. 2600억원으로 책정됐던 공사비는 조합원도 모르는 사이 3600억원으로 확대 편성됐다.
반면 전체 공급 가구수와 무상지분율은 떨어졌다. 무상지분율은 한마디로 수분양자가 기대할 수 있는 주택 평수다. 예를 들어 32평형 아파트 100채를 짓겠다고 했다가 28평형 아파트 70채만 짓겠다고 계획을 바꾸는 것이다. 실제 무상지분율은 117.2%에서 108.6%로 떨어졌다.
1999년 5월15일 심씨는 조합 총회에서 이 같은 내용을 골자로 한 '재건축 사업 변경안'을 표결에 부쳤다. 조합원 757명 가운데 537명이 찬성했다. 재건축 조합과 A건설은 2000년 본계약을 체결했다. 예정대로 공사는 진행됐다. 2001년 6월3일 동·호수 추첨을 위한 총회가 개최됐다. 이 자리의 숨겨진 안건은 '무상지분율 감소'였다.
서울시 57억500만원
국세청 407억100만원
화곡동 재건축 비리 연루 구속
심씨 측은 이날 총회에 참석한 조합원들에게 '사업시행 동의' 문구가 담긴 '재건축 결의문'을 배포했다. 총회장 입구에서 즉석으로 서명을 받았으며 사전 공지는 없었다. 781명의 조합원 중 764명이 총회에 참석했다. 재적 인원 78명은 서명을 거부했다. 남은 조합원(684명)은 인감을 찍어 결의문을 채택했다.
관련 민법에 따라 '서면결의'는 80% 이상의 찬성을 받았음으로 법적 문제가 없었다. 하지만 일부 조합원이 반기를 들었다. 심씨가 조합장으로서 조합원의 권익을 보호하는 것이 아니라 A건설의 편에서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는 주장이었다. 이들은 재건축 결의에 대해 법원에 가처분 신청을 내는 등 심씨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다.
결과적으로 법원은 심씨의 손을 들어줬다. 2005년 4월21일 선고된 대법원 판결문(총회결의무효확인 소송)을 보면 2001년 6월3일자 서면결의는 '조합원 의사에 반해 서명·날인이 이뤄진 것으로 볼 수 없는 유효한 합의'다. 대법원 전원합의체 가운데 김영란 당시 대법관만 반대 의견을 개진했다.
김 대법관의 의견은 "결의문에 대해 찬성·반대 의사표시를 선택할 수 없게 돼 있고, 의안에 반대하는 조합원들의 총회 출석권 및 발언권과 같은 권리를 박탈할 목적으로 서면결의를 시도하는 경우, 조합원 총회를 형해화시키는 경우임이 명백하여 그 서면결의가 유효하다고 인정할 수 없다"였다. 여기서 '형해화'란 형식만 남기고 실질적인 권한은 없게 만드는 것을 의미한다.
강서구청도 심씨 편을 들었다. 구청은 '조합원 간 해결해야 될 내부 문제'라는 입장을 유지했다. 심씨에 반기를 든 이모씨 등 일부 조합원은 "1999년 구청이 재건축을 승인할 때 관련법을 위반했다"라고 주장했다. 주장의 요지는 구청의 첫 승인 당시 조합원 757명 가운데 537명만 찬성했으므로 법적 구성요건인 '80%의 찬성'을 얻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대법원은 이씨 등에게 다시 패소 판결을 내렸다. 해당 소송(재건축결의 가처분)에서 법원은 '1999년 표결은 무효라고 할 수 있지만 2001년 6월 총회에서 재건축과 관련해 80% 이상의 찬성이 이뤄진 것을 볼 때 새로운 결의가 유효하게 이뤄진 것'이라고 판단했다.
아울러 심씨는 검찰 수사에서도 무혐의로 풀려나는 등 모든 법망을 피해갔다. 같은 기간 심씨는 자신을 공격한 조합원들에게 손해배상각서를 요구한 것으로 알려졌다.
2002년 입주가 시작된 아파트는 차질 없이 분양을 완료했다. 심씨는 대법원에서 승소했고, 서울남부지검마저 면죄부를 내렸다. 2005년 초 서울 서초경찰서 수사팀이 인지 수사를 시작하기 전까진 '완전범죄'였다. 수사 착수 사실이 알려지자 A건설이 앞장서 방어했다. 심씨의 '화양연화'는 거기까지였다.
2005년 11월 심씨는 '서울 화곡동 재건축 비리'에 연루돼 배임수재 혐의로 구속됐다. 경찰은 4곳의 재건축조합, 4개 시공사, 2개 시행사, 하청업체 4곳, 감리업체 2곳의 비리를 적발했다. 100여명의 공무원이 수사대상에 올랐다.
심씨는 시공사로부터 무상지분율을 낮춰주는 대가로 함바식당 운영권을 받았다. 1억5000만원의 금품을 포함해 심씨가 챙긴 부당이득은 12억5000만원에 이르렀다. 서울시 공무원, A건설 현장소장이 줄줄이 구속됐다. 쪼개진 통장에선 수십억원의 비자금이 발견됐다.
줄줄이 구속
하지만 사라진 1000억원의 행방은 끝내 규명되지 않았다. 당시 A건설 측은 언론을 통해 "고도제한에 묶여 있던 재개발 지구의 지반을 다듬는 과정에서 추가 공사비가 쓰였다"라고 해명했다. 심씨에게 매달 지급된 수백만원의 사업비 역시 조합이 자체 결정한 것이란 입장을 밝혔다.
증발된 돈을 포함한 조합비에는 세금이 부과됐다. 물론 A건설은 '세금 폭탄'을 피했다. 화곡주공시범재건축주택조합은 2008년 10월부터 주민세를 내지 않았다. 서울시가 과세한 세금은 57억500만원이다. 화곡주공시범재건축주택조합은 2002년부터 법인세를 체납했다. 국세청이 거둘 세금은 407억100만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