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생 나몰라’ 배만 불리는 대학들 천태만상

학생은 배 쫄쫄 학교는 배 불뚝

[일요시사 사회팀] 이광호 기자 = 최근 4년간 전국 사립대 적립금 규모가 1조원 증가했다. 문제는 많은 대학들이 교육여건이 열악하다는 사실을 인지하고도 지나치게 많은 적립금을 쌓아둔다는 것이다. 학문을 추구해야 할 대학이 돈에 눈이 멀어 점차 기업화 되고 있는 불편한 현실이다.

 
사립대의 과도한 적립금 문제는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사회문제로 부각된 지 오래지만 당국은 이를 규제할 의지가 없어 보인다. 대안 마련은커녕 수수방관하고 있다. 2013년 기준 4년제 사립대 156곳의 적립금 총액은 9조979억원을 넘어섰다. 머지않아 10조원대를 돌파할 것으로 보인다. 

대학? 기업?
돈독 올랐다
 
최근 대학교육연구소가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사립대 적립금은 갈수록 늘어 4년 만에 1조1090억원 증가했다. 이월·적립금은 다음해로 이월시키는 ‘이월금’과 특정사업 등을 위해 적립하는 ‘적립금’을 말한다. 대학 운영에 있어 이월금 발생은 불가피한 측면이 있다.
 
하지만 이월금이 과도하게 발생하는 것은 예산편성이 비합리적이거나 사업 예측에 오류가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적립금 또한 대학의 장기적 발전을 위해 일정 정도 필요성이 인정되지만, 교육여건이 열악한 상황에서 과도하게 적립금을 축적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지난달 29일 대학교육연구소가 2013년 기준 156개 사립대와 154개 학교법인의 교비회계와 법인일반회계를 분석한 결과를 보면 사립대 적립금은 ▲7조797억원(2009년) ▲7조6677억원(2010년) ▲7조9463억원(2011년) ▲8조153억원(2012년) ▲8조1888억원(2013년)으로 매년 증가했다. 같은 기간 학교법인 적립금은 392억원 늘어 2013년 8816억원으로 조사됐다.
 
적립금은 적립 목적에 따라 연구·건축·장학·퇴직·기타 적립금으로 구분된다. 2013년 적립금을 내역별로 보면 대학은 건축적립금이 46.0%(3조 7696억원)으로 가장 많았고, 기타적립금 27.0%(2조 2117억원), 장학적립금 17.0%(1조 3934억원), 연구적립금 9.1%(7446억원), 퇴직적립금 0.8%(694억원) 등으로 나타났다. 법인은 기타적립금이 87.8%(7740억원)로 대부분을 차지했고, 다음으로 건축적립금 9.2%(813억원) 순이었다.
 
 
2009년 대비 2013년 적립금 증감 현황을 보면 대학의 경우 증가한 곳이 93교(61.6%)로 3곳 중 2곳에 달했다. 감소한 대학이 48교(31.8%), 동결 대학이 10곳(6.6%)으로 나타났다. 법인의 경우는 절반(75개 법인, 50.3%) 가량 법인에서 동결됐고 43개 법인(28.9%)에서 증가, 31개 법인(20.8%)에서 감소했다.
 
사립대 적립금 1조 돌파…복지는 ‘낙제점’
교육 여건 개선보다 몸집불리기에 눈멀어 
 
2009년 대비 2013년 대학별 적립금 증액 현황을 보면, 가장 많이 증가한 대학은 홍익대로 2009년 4858억원에서 2013년 6642억원으로 1784억원 늘었다. 이어 이화여대 1588억원, 성균관대 1291억원, 연세대 1205억원, 수원대 792억원, 고려대 791억원, 청주대 742억원 등이 뒤를 이었다.
 
2013년 사립대가 보유한 총 이월·적립금 현황을 보면, 이화여대가 8447억원으로 가장 많았다. 이어 연세대 6917억원, 홍익대 6687억원, 수원대 4582억원 등으로 나타났다. 상위 10개 대학이 보유한 적립금은 총 4조3055억원으로 전체 사립대가 보유한 적립금의 41.2%에 달했다.
 

이처럼 많은 사립대들이 막대한 적립금을 쌓아놓고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비난 여론이 들끓었다. 지난 6일 ‘2015 대학교육문제 해결을 위한 대학생 대표자 연석회의(이하 연석회의)’ 소속 관계자들은 이화여자대학교 정문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대학의 부당한 적립금 쌓기 중단을 촉구했다. 이들은 자기 배만 불리는 대학을 향해 경고성 메시지를 날렸다.

쌓여 가는 곳간
비어 가는 지갑
 
연석회의는 기자회견문을 통해 “법원이 수원대 등록금 환불 판결을 내린 것을 환영한다”며 “이번 판결을 통해 다시금 자신들의 존재 의의와 역할을 자각하고 부당한 적립금 축적을 중단할 것을 요구한다. 정부 역시 제도 마련을 통해 대학의 적립금 규제에 더욱 적극적인 자세로 임하라”고 요구했다.
 
이날 기자회견에는 연석회의 참여 단체 중 부당 적립금 쌓기 중단을 촉구하는 연세대, 이화여대 등 10개 대학 총학생회와 반값등록금 국민운동본부, 21세기 한국대학생연합 등이 참여했다. 이들은 수원대에 대한 판결을 대학의 공공성과 학생의 교육권을 인정한 것이라 해석했다.
 
 
이날 기자회견에 나선 학생들은 “향후 연석회의를 진행해 적립금이 많은 대학들이 모여 집단 소송을 검토할 것”이라고 밝혔다. 수원대 등록금 환불 파문이 일부 대학이 아니라 전국 사립대로 점차 확산될 조짐이다.
 
앞서 지난달 26일 서울중앙지법 민사17부(부장판사 송경근)는 채모씨 등 수원대 학생 50명이 학교법인, 이사장, 총장을 상대로 낸 등록금 환불 소송에서 원고 일부 승소 판결을 내렸다. 법원은 수원대가 원고 중 2013년 이전에 입학한 46명에게 각각 30만∼90만원씩 돌려주라고 판결했다.
 
매년 느는 ‘총알’…어디에 쓰려고?
총액 1위=이화여대·증액 1위=홍익대
 
재판부는 수원대가 2010∼2012년 착공이 불가능한 건물의 신축공사비를 예산으로 잡는 등 세출 예산을 과다하게 편성해 적립금과 이월금을 부당하게 운영한 점을 지적했다. 수원대는 건물 공사비에 사용할 돈이라는 명목 하에 907억원을 적립했다. 적립금 사용계획을 제대로 수립하지 않은 수원대의 적립금은 2013년 2월 기준으로 무려 3244억원에 이른다. 교육부는 2011년부터 등록금으로 적립금을 쌓지 못하게 막았지만 건축비만 예외로 인정하고 있다.
 
곳간에 쌓아둔 적립금에 비해 학생 투자는 형편없었다. 등록금 대비 실험실습비와 학생지원비는 각각 0.88%와 0.25%에 불과했다. 수도권 4년제 대학 평균이 2%대라는 점을 감안하면 학생복지에 인색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 2010∼2011년에는 기준상 100%를 넘어야 하는 교육비 환원율이 70%에 그쳤다. 2011∼2012년 전임교원확보율도 기준 미달이다.
 
 
재판부는 “수원대의 시설·설비 등이 현저히 미비할 뿐 아니라 원고 학생들이 학교를 선택할 당시의 기대와 예상에도 미치지 못하는 수준이어서 학생들에게 정신적 고통을 가했다고 할 만하다”고 판시했다. 이어 “대학의 잘못된 관행에 경종을 울리는 차원에서 등록금 일부를 위자료로 인정했다”며 선고 이유를 밝혔다. 이번 판결로 인해 교육 투자에 인색한 사립대들이 바짝 긴장하고 있다. 유사 소송이 도미노처럼 이어질 수 있다는 얘기다.
 

수원대의 바통을 이어 받은 건 청주대다. 청주대는 3000억원대 적립금을 보유하고 있지만 형편없는 교육여건을 보여주고 있다는 비판을 사고 있다. 청주대 총학생회는 청주대를 상대로 등록금 반환 소송을 내기로 했다. 여기에 청주대가 2010∼2013년 동안 박물관에 전시할 유물 10점을 구입하는 데 총 13억4000만원의 교비를 사용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학내 갈등이 고조되고 있다.

전국 곳곳에…
제2의 수원대
 
청주대는 2010년 고려시대 청자흑백상감국화문병과 청자음각모란문주자를 구입하는데 총 2억9000만원을 들였다. 또 2011년 고려시대와 조선시대 유물을 구입하면서 2억5000만원을 사용한 것을 비롯해 2012년 4억9000만원, 2013년 3억1000만원을 투자했다. 청주대는 자체 감정위원회를 열거나 공고를 통해 적법한 절차를 밟아 유물을 매입, 문제될 게 없다는 입장이지만 일각에서는 청주대가 적립금을 활용하는 데 있어 우선순위가 잘못됐다고 지적한다. 지난해부터는 청주대가 정부 재정지원 제한대학에 선정되면서 유물 구입 예산이 따로 책정되지는 않았다.
 
청주대 유물 매입 사실이 알려지자 청주대 총학생회는 지난달 29일 성명을 통해 “대학이 등록금 13억원으로 고가의 유물을 사들인 경위를 밝히기 위해 진상조사위원회를 꾸리자”고 학교 측에 요구했다. 총학생회는 “황신모(현 총장) 교수가 보직교수와 부총장으로 일할 당시 유물을 사들이면서 펑펑 쓴 13억원은 학생 등록금을 2%가량 인하할 수 있는 금액”이라며 “유물구입 당시 학교 측이 감정위원회를 열었다고 하지만 유물감정과는 관련없는 교수가 위원으로 참여했기 때문에 공신력을 보장할 수 없었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어 “학교의 1년 예산편성을 책임지는 등록금 심의위원회 위원장을 맡았을 때 황 교수는 교육과는 무관한 김준철 박사 우상화 작업(150억원), 체육관 건립(500억원) 등을 추진한 인물”이라며 “황 교수의 문제점이 속속 밝혀지는 만큼 총장직에서 사퇴하라”고 촉구했다. 그러면서 “유물 구입 논란을 파헤칠 진상조사위원회를 가동해 감정위원회의 자격, 구입 근거 등을 파헤쳐야 한다”며 “교육목적과는 거리가 먼 유물구입에 등록금이 사용됐으니 유물구입비(13억원)는 즉각 학생들에게 반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청주대는 김윤배(현 학교법인 청석학원 이사) 전 총장 재임기간인 2010년 10월∼2013년 10월에 고려청자, 조선백자, 조선전기 금속활자본 등 13억4000만원 상당의 유물 10점을 외부에서 구입한 것으로 드러났다.
 
교육부는 지난 2009년 12월 사립대들이 과도하게 적립금을 쌓고 있다는 논란에 사립학교법을 개정해 교비회계를 등록금회계와 기금회계로 구분하고 등록금회계에서는 건물의 감가상각비 상당액만 건축적립금으로 적립할 수 있도록 했다. 그러나 2010년 이후에도 대학 적립금은 지속적으로 증가했다.
 
이후 교육부는 2013년 목적이 불분명한 ‘기타적립금(전체 적립금 규모의 30%)’을 ‘특정적립금’으로 바꾸고 학생취업 장려기금 등으로 쓰게 하는 사립학교법 개정안을 2013년 말 국회에 제출했지만 1년이 넘도록 국회에 발목을 잡힌 채 표류하고 있다. 기타적립금에 목적만 추가하면 자유롭게 적립할 수 있어 과도한 적립금 문제 개선이 쉽지 않을 전망이다.

당국 태도 어정쩡
팔짱 끼고 불구경
 
임은희 대학교육연구소 연구원은 “서울 및 수도권에 있는 대규모 대학들과 일부 지방대(수원대, 청주대 등) 적립금이 특히 높았다. 등록금이 동결되다 보니 대학들이 등록금에서 추가로 적립하기보다는 적립기금에서 나오는 이자 등을 다시 적립하는 양상이 나타나고 있다”고 설명했다.
 
임 연구원은 “기존에 적립금을 과도하게 쌓은 대학들의 경우 교육부가 행정조치 등을 통해 교육여건 개선과 등록금 인하 등에 우선 사용되도록 유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아울러 “등록금회계에서 건물의 감가상각비 상당액을 건축적립금으로 적립할 수 있도록 허용한 것을 금지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khlee@ilyosis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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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곡점’ 의정 갈등 엔드게임

‘변곡점’ 의정 갈등 엔드게임

[일요시사 취재1팀] 장지선 기자 = 구성원의 압도적인 지지로 당선된 수장이 반년 만에 끌려 내려왔다. 막말에 가까운 강한 발언과 제멋대로인 행보가 탄핵을 불렀다. 강성 수장이 물러나면서 변화를 기대하는 움직임이 일고 있다. 대화의 문이 열릴 것인가, 더 높은 벽이 쌓일 것인가. 임현택 대한의사협회(이하 의협) 전 회장이 3년 임기를 다 채우지 못하고 탄핵당했다. 지난 5월 취임 이후 6개월 만으로 의협 역사상 2번째, 최단기간 내 불명예 퇴진한 회장이 됐다. 첫 번째는 2014년 4월 임기 1년여를 앞두고 탄핵당한 노환규 전 회장이다. 두 번째 최단기간 의협은 지난 10일 오후 서울 용산구 의협회관서 임시대의원총회를 열고 임 전 회장의 불신임안을 처리했다. 참석 의원 224명 가운데 170명(75.9%)이 찬성했다. 반대는 50명, 기권 4명이다. 전체 대의원 249명 가운데 224명(91.1%)이 표결에 참여했다. 의협 정관에 따르면, 회장 불신임안은 제적 대의원 3분의 2 이상이 출석하고, 출석 대의원 3분의 2 이상이 찬성하면 가결된다. 지난 3월 임 전 회장은 선거서 유효 투표수 3만3084표 중 2만1646표를 받아 당선됐다. 65.43%의 압도적인 지지다. 의협 회장 선거는 정부의 의대 정원 증원 발표로 의정 갈등 수위가 높아지고 있을 무렵에 치러졌다. 전공의가 병원을 떠났고 정부가 ‘2000명’을 강조하던 시기였다. 의협 회원들은 강성 중의 강성으로 분류되는 임 전 회장에게 힘을 실었다. 임 전 회장의 어깨에 너무 힘이 들어갔던 것일까? 임 전 회장의 언행은 사사건건 도마 위에 올랐다. SNS에 올린 글, 공식 석상서 했던 발언 등이 막말 논란으로 번졌고, 단식투쟁 등의 행보는 ‘쇼’라는 비판을 받았다. 무엇보다 박단 대한전공의협의회(이하 대전협) 비대위원장과 갈등을 빚으면서 의료계 내부 분열을 조장한다는 지적이 뼈아팠다. 임 전 회장이 8개월 동안 보여준 모습은 고스란히 탄핵 사유가 됐다. 의협 회원 사이에서는 임 전 회장이 SNS로 막말과 실언을 해 의사단체의 명예를 훼손했다는 비판이 일었다. 또 ‘임 회장이 전공의 지원금을 빼돌렸다’는 허위 비방 글을 올린 시도의사회 임원에게 고소 취하 대가로 1억원을 요구한 사실이 녹취록을 통해 알려져 논란이 불거졌다. 특정 인물에 대한 수위 높은 비판은 여론의 역풍을 불렀다. 장상윤 대통령실 사회수석을 겨냥해 “정신분열증 환자 같은 개소리”라고 비난하는 글을 올렸다가 환자를 비하했다는 지적을 받았다. 임현택, 6개월 만에 탄핵당해 막말 논란·의대 증원 못 막아 또 2021년 한 의사가 80대 환자에게 ‘맥페란’ 주사제를 투여한 뒤 부작용이 나타나 기소된 재판에 대해서도 도 넘는 발언을 쏟아냈다. 이른바 ‘맥페란 재판’ 항소심서 판사가 1심의 금고 10개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은 해당 의사의 항소를 기각하자 “이 여자 제정신입니까?”라는 글을 SNS에 올린 것이다. 임 전 회장의 발언에 법원은 이례적으로 “재판장의 인격에 대한 심각한 모욕일 뿐 아니라 국민의 신뢰를 크게 훼손할 수 있는 매우 부적절한 행동”이라고 공개적으로 유감을 표명했다. 의대 정원 증원 집행정지와 관련해 기각·각하 결정을 내린 재판장이 ‘회유’받았을 것이라는 주장으로도 입길에 올랐다. 서울고등법원 재판부가 결정을 내린 다음 날 한 라디오 프로그램에 출연해 재판장의 실명을 거론하면서 “지난 정권에서는 고법 판사들이 차후 승진으로 법원장으로 갈 수 있는 그런 길이 있었는데 제도가 바뀐 다음에는 그런 통로가 막혀서 이분이 아마 어느 정도 대법관에 대한 회유가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있다” 말했다. 서울고법은 법원 명의로 입장문을 내고 “해당 단체장의 아무런 객관적 근거가 없는 추측성 발언은 재판장의 명예와 인격에 대한 심대한 모욕”이라면서 “사법부 독립에 관한 국민의 신뢰를 현저히 침해할 수 있는 매우 부적절한 언사다. 깊은 유감을 표명한다”고 밝혔다. 여기에 결정적으로 정부의 2025학년도 의대 증원을 막지 못한 점, 간호법 제정을 저지하지 못한 점이 탄핵 사유로 꼽혔다. 임 전 회장은 총회를 앞두고 의사 회원들에게 사과하고 페이스북 계정을 삭제하는 등 재신임을 호소했지만 반전은 없었다. 회장을 탄핵한 의협은 비대위원회 체제로 전환하고 지난 13일 새로운 회장 선거 전까지 단체를 이끌 비대위원장을 뽑았다. 그 결과 박형욱 대한의학회 부회장이 1차 투표서 총 유효 투표수 233표 중 123표(52.8%)를 얻어 과반으로 당선이 확정됐다. 임기는 내년 1월 차기 회장이 선출될 때까지다. 뒤늦게 호소했지만… 박형욱 비대위원장은 “정부는 의료 파탄이란 시한폭탄을 장착해놨다”며 “정말 대화를 원한다면 정부는 먼저 시한폭탄을 멈춰야 한다. 그래야 진정한 대화가 가능하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비대위원들의 합의에 기초해 입장과 행동을 결정할 것”이라며 “비대위 운영서 소외돼왔던 전공의들과 의대생들의 견해가 충분히 반영될 수 있게 하겠다”고 소감을 밝혔다. 임 전 회장이 물러나고 새로운 비대위원장이 등장하면서 의협의 투쟁 방향에 변화가 생길 가능성이 커졌다. 일각에서는 의협의 이번 행보를 의정 갈등의 중요한 변곡점으로 보고 있다. 강성 회장을 필두로 정부와 강하게 대립했던 이전 모습서 벗어나 대화에 참여할 것이라는 의견과 이전보다 더 수위 높은 대정부 투쟁이 예상된다는 의견으로 갈리는 중이다. 후자의 배경에는 대전협이 있다. 앞서 박단 비대위원장 등 전공의 70여명은 전날 의협 대의원들에게 “비대위원장으로 박형욱 교수를 추천한다”는 메시지를 보내 공개 지지 의사를 드러냈다. 대의원회서도 박단 비대위원장의 공개 지지에 대해 경고하는 등 잡음이 일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대전협의 지지를 등에 업은 박형욱 비대위원장이 당선되면서 전공의의 영향력이 상대적으로 커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됐다. 의협과 대전협의 공조가 본격화될 것이라는 관측이 나오는 이유다. 문제는 양측의 교류가 정부와의 대화로까지 이어질 수 있느냐는 점이다. 박형욱 비대위원장은 당선 소감부터 정부의 태도 변화를 요구하고 나섰다. 또 윤석열 대통령의 변화도 필요하다고 언급했다. 의정 갈등서 줄곧 선봉에 선 전공의들은 ‘의대 정원 증원 백지화’라는 요구사항서 앞으로도 뒤로도 움직인 적이 없다. 전공의의 행보는 의대생, 의대 교수 등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영향력 커진 전공의 단체 의료계가 전공의 중심으로 굴러가고 있는 셈이다. 실제 대전협은 지난 11일 출범했던 여야의정협의체(이하 협의체)에 대해서도 부정적인 태도를 보인다. 협의체는 야당인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이 불참하고 의료계에서는 학술 단체인 대한의학회와 의대 학장 모임인 한국의과대학·의학전문대학원협회(KAMC)만 참석하는 등 ‘반쪽 출범’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협의체의 운영 기한은 올해 말까지로, 다음 달 22~23일 전에 의미 있는 결과를 낼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는 태도다. 하지만 박단 비대위원장은 협의체에 대해 ‘무의미하다’고 평가했다. 그는 협의체가 첫발을 뗀 11일 SNS에 “국민의힘 한동훈 대표는 전공의와 의대생, 당사자 없이 대화나 하겠다는 한가한 소리를 하고 있다”며 “한 대표는 2025년 의대 모집 정지와 업무개시명령 폐지에 대한 입장부터 명확히 밝히시길 바란다”고 일갈했다. 이어 “눈치만 보며 뭐라도 하는 척만 하겠다면 한동훈의 ‘여야의정 협의체’ 역시 임현택 전 의협 회장의 ‘올바른 의료를 위한 특별위원회(올특위)’와 결국 같은 결말일 것”이라고 우려했다. 올특위는 의료계의 입장을 하나로 모으기 위해 의협 주도로 구성한 범의료계 특별위원회다. 전공의와 의대생이 해당 위원회에 불참하면서 파행 운영되다 지난 7월 해체됐다. 정부는 협의체서 의료계가 제안한 내용에 대해 “진정성 있게 검토하겠다”는 견해를 밝혔다. 지난 11일 협의체서 의료계는 한국의학교육평가원 자율성 보장, 추가 합격 제한 등을 통한 2025학년도 의대 선발 인원 축소 등을 제안한 것으로 알려졌다. 정윤순 보건복지부 보건의료정책실장은 지난 14일 의사 집단행동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이하 중대본) 회의를 주재하면서 “마주 앉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린 만큼 활발한 대화와 소통을 통해 누적된 갈등을 해소하고 신뢰를 회복해 국민이 원하는 결과를 끌어낼 수 있길 기대한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의협과 전공의 등 다른 의료계 단체의 참여를 호소했다. 박단 공개 지지 새 비대위원장 강경 투쟁이냐 VS 노선 변화냐 의료계 내부 상황은 크게 바뀌었지만 향후 상황은 여전히 ‘시계 제로(0)’ 상태다. 임 전 회장과 박단 비대위원장 간 갈등의 불씨도 여전히 살아있다. 대전협은 임 전 회장의 탄핵을 공개적으로 요청하는 등 ‘(임 전 회장과)같이 갈 수 없다’는 뜻을 분명히 밝힌 바 있다. 실제 대전협은 임 전 회장의 탄핵을 요청하면서 “이해와 소통이 가능한 새로운 회장을 필두로 의협과 대전협 두 단체가 향후 상호 연대를 구축할 수 있길 기대한다”는 입장문까지 냈다. 임 전 회장의 탄핵안 가결 직후 박 비대위원장이 “결국 모든 길은 바른 길로”라는 내용의 SNS 글을 올리기도 했다. 문제는 임 전 회장이 박단 비대위원장을 상대로 반격을 진행하고 있다는 점이다. 임 전 회장은 탄핵 사흘 만에 닫았던 페이스북 계정을 다시 열고 “박단과 그 뒤에서 박단을 배후 조종해 왔던 자들이 무슨 일을 해왔는지 전 의사 회원들에게 아주 상세히 밝히겠다”며 박단 비대위원장을 저격하는 글을 올렸다. 그러면서 “의협 대의원회 비대위원장과 의협 회장 선거가 더 이상 왜 필요한가”라면서 “박단이 의협 회장 겸 비대위원장을 맡아 모든 권한과 책임하에 의료 농단을 해결하면 된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지지해주셨던 모든 분에게 우선 사과의 말씀을 드린다”며 “이유가 어떻든 회장 취임 전부터 탄핵하겠다고 마음먹고 있던 자들에게 빌미를 주어 넘어간 것 자체가 제 잘못”이라고 주장했다. 또 의협의 근본적인 개혁의 첫걸음으로 의협 대의원회 폐지 등을 내용으로 하는 민법상의 사원총회를 개최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사원총회는 민법에 규정된 사단법인의 최고의사결정 기관이다. 의협 최고의결기구로 알려진 대의원총회보다 상위에 있고 정관의 규정으로 폐지할 수 없다. 사원총회는 이사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경우나 총 사원 5분의 1 이상이 회의의 목적 사항을 제시해 청구하는 경우 소집될 수 있다. 반격 시작 내부 갈등? 올해 2월 시작된 정부와 의료계의 갈등이 10개월째로 접어들었다. 온갖 말이 오갔지만 되짚어보면 조금도 좁혀지지 않은 평행선 상황이 계속되는 모양새다. 정부와 의료계의 대치 상황이 길어질수록 ‘의료 붕괴’는 가시화되고 있다. 한 의료계 관계자는 이렇게 말했다. “이제는 정말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jsjang@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