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시사 정치팀] 김명일 기자 = 4월 재보선을 앞두고 호남민심이 요동치고 있다. 호남이 새정치민주연합(이하 새정치연합)의 텃밭이라는 말은 이미 옛말이다. 지난해 치러진 지방선거에서는 무소속 돌풍이 호남을 휩쓸었고, 곧바로 치러진 7월 재보선에서도 새누리당 후보가 1988년 소선구제 도입 이후 최초로 당선되는 진기록을 세웠다. 이참에 호남에서는 기득권세력인 새정치연합을 몰아내고 ‘호남판 자민련’을 만들자는 이야기도 공공연히 나돈다. 호남에서 들불처럼 번지고 있는 ‘호남신당론’의 실체를 살펴봤다.
“호남은 더 이상 새정치연합의 텃밭이 아니다.”
광주 서구을이 고작 한 달여 앞으로 다가온 4·29재보선에서 최대 관심 선거구로 떠오르고 있다. 천정배 전 법무부장관이 새정치연합을 탈당하고 무소속후보로 나선 가운데 이번 선거 결과는 내년 총선을 앞두고 호남민심을 알아보는 가늠자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천 전 장관이 광주 서구을에서 살아 돌아온다면 호남발 정계개편의 신호탄이 될 수도 있다.
친노 들러리 거부
현재 새정치연합을 향한 호남의 민심은 상상 이상으로 싸늘하다. 천 전 장관은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이대로라면 호남에서 새정치연합 소속으로 출마하는 것보다 차라리 무소속으로 출마하는 것이 유리할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순천에서 새누리당 이정현 의원이 당선된 게 우연한 일이 아니었다는 지적이다. 천 전 장관은 또 “이대로는 안 된다는 위기감이 호남 전반에 퍼져 있고 현재 야당은 무기력하면서 기득권만 지키고 있다”고도 했다.
현재 새정치연합의 당권을 장악하고 있는 친노세력에 대한 호남인들의 반감도 여전하다. 정치권에서는 친노와 호남의 관계에 대해 “남(새누리당)보다는 가깝지만 그렇다고 친자식은 아니다”라고 설명하기도 한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취임 직후 대북송금특검을 밀어붙인 것이 친노와 호남의 사이가 멀어지는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 대북송금특검으로 호남의 정신적 지주인 김대중 전 대통령은 정치적으로 큰 상처를 입어야만 했다.
친노진영이 민주당을 깨고 열린우리당을 창당한 것도 호남인들에겐 충격적인 일이었다. 당시 호남에서는 “노 전 대통령이 호남의 뒤통수를 쳤다”는 말까지 나올 정도였다. 친노가 주축이 되어 만든 열린우리당은 지난 2004년 총선에서는 탄핵역풍에 힘입어 어느 정도 선전했지만 지난 2006년 지방선거에서는 집권여당임에도 불구하고 당시 원내 9석에 불과하던 민주당에게 광주시장과 전남도지사 자리를 빼앗기는 굴욕을 당했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호남에선 이른바 ‘호남신당론’이 들불처럼 번지고 있다. 호남을 중심으로 뭉치면 당장 전국적인 정당은 만들 수 없겠지만 최소한 ‘호남판 자민련’은 만들 수 있지 않겠느냐는 계산이다. 자민련(자유민주연합)은 과거 김종필 전 총리가 주도해 만들었던 정당이다. 자민련은 충청권을 정치기반으로 삼아 소수 의석을 가진 제3당임에도 불구하고 여야 사이에서 캐스팅보트 역할을 하며 정치권에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했었다.
한편 호남신당론의 중심에는 각각 전남과 전북을 대표하는 천정배 전 장관과 정동영 전 통일부장관이 있다. 이른바 ‘천-정 드림팀’이다. 광주의 천정배와 전북의 정동영이 힘을 합친다면 호남은 크게 들썩일 수밖에 없다.
정동영-전북, 천정배-전남 ‘손잡나?’
새정치연합 내 ‘호남인사 역할론’도
정 전 장관은 이미 지난 3일 전북에서 국민모임 지지 기자회견을 시작으로 세 모으기 작업에 본격 착수했다. 이날 기자회견에서는 전북 출신 인사 105인이 정 전 장관이 몸담고 있는 국민모임에 대한 지지선언을 했다. 이들은 “호남을 친노의 들러리로 전락시키는 정치 행태는 가장 먼저 청산해야 할 과제”라며 친노세력을 강하게 비판하고 “야당교체 없이는 정권교체도 없다”고 주장했다.
특히 국민모임에는 유독 전북 출신 인사들이 많이 포진되어 있어 눈길을 끈다. 정 전 장관을 비롯해 최규식 전 의원, 임종인 전 의원 등이 모두 전북 출신 인사다. 이들은 모두 전주고 선후배이기도 하다. 정치권에서는 이들 3인방이 내년 20대 총선에서 전북 지역구에 각각 출마할 것이란 전망이 나오고 있다.
국민모임에서는 정 전 장관에게 4월 재보선 관악을 출마를 간곡히 요청하고 있지만 정 전 장관이 끝까지 불출마 입장을 고집하고 있는 것도 내년 전북지역 출마를 염두에 둔 포석이란 지적이다. 내년 총선에서 이들 3인방의 활약으로 국민모임이 전북에서 돌풍을 일으킨다면 호남신당은 곧바로 현실이 될 수도 있다.
천 전 장관의 행보도 주목할 만하다. 천 전 장관은 새정치연합을 탈당하고 무소속으로 출마선언을 하면서 자신이 당선된다면 내년 총선을 겨냥한 ‘호남 물갈이’를 시도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천 전 장관은 이날 기자들과의 질의응답을 통해 “이번에 국회에 진출하게 되면 광주 8곳을 비롯해 호남 30여개 모든 지역에 유능하고 개혁적인 새인물들을 모아 물갈이를 시도해 보겠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천 전 장관은 “지금도 시민사회, 기업인, 전문가, 연구가, 젊은이 등 광주에서 국회의원이 됐으면 하고 생각하는 사람만 100명이 넘는다”고 밝혔다. 비록 이번 재보선에는 혈혈단신 무소속후보로 출마했지만 당선 후에는 당장 호남신당을 본격적으로 추진할 수 있는 인재풀이 마련되어 있다는 것을 은연중에 과시한 것이다.
천 전 장관은 이를 ‘야권의 재구성’이라고 말했다. 천 전 장관은 이날 새로운 세력의 필요성을 주장하면서도 자신의 행보가 이른바 호남신당을 염두에 둔 것인지에 대해서는 “아직 호남신당이냐 아니냐를 말하기는 성급하다”며 신중한 태도를 보였다. 정치권에서는 두 사람이 호남신당을 밀어붙인다면 새정치연합 현역 호남 의원들의 합류 가능성도 점쳐지고 있다.
호남판 자민련
광주 서구을 선거가 새정치연합 후보와 천 전 장관 간 맞대결로 치러질 가능성이 높아지면서 이미 광주에 지역구를 둔 새정치연합 현역 국회의원들은 동요하고 있다. 광주에 지역구를 둔 의원들은 최근 천 전 장관의 무소속 출마를 반대하는 성명을 내자는 논의를 했지만 일부 참석자들의 반대로 무산되기도 했다.
특히 광주 동구가 지역구인 새정치연합 박주선 의원은 해당 논의 자리에 아예 참석하지도 않아 눈길을 끌었다. 박 의원은 과거 “집권이 불가능한 사람들과 한 지붕에 살기보단 가능성의 길을 찾아가야 한다”며 호남신당론에 불을 지폈던 당사자이기도 하다.
정치권의 한 관계자는 “호남신당 가능성은 이번 재보선 결과에 따라 판가름이 날 것”이라며 “광주에서 패한다면 천 전 장관은 사실상 정계은퇴 수순을 밟게 될 것이고, 새정치연합은 최악의 경우 내년 총선에서 텃밭인 호남을 대부분 잃게 될 가능성까지 있다. 양측 모두 사활을 걸고 선거전에 임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내다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