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황에…' 팍팍 쓰는 기업들 백태

IMF보다 어렵다지만…두꺼워지는 재벌 지갑

[일요시사 경제1팀] 한종해 기자 = 우리나라의 소비자 심리지수가 60개국 중에서 59위를 기록했다. 30대 그룹 대부분도 지금 경제 상황에 대해 "글로벌 금융위기 때보다 더 나쁘다"고 생각하는 것으로 조사됐다. 한국 경제에 장기 불황의 그림자가 드리워진 것. 하지만 기업들의 배당·실적·임금을 보면 생각이 달라진다. 불황이라면서 그들만의 잔치를 벌인 기업들은 한둘이 아니다.

글로벌 정보분석 기업인 닐슨이 지난해 4분기 세계 60개국의 소비자를 대상으로 지출 의향 등을 물었더니 우리나라의 소비자 심리지수는 60개국 중에서 59위를 기록했다.

한국은행의 '1월 소비자 동향 조사'에 따르면 소비자 심리지수는 지난해 9월(107)부터 3개월 연속 떨어지다가 지난달 102로 1포인트 상승하며 하락세가 진정됐다. 하지만 세월호 참사 직후 기록한 소비자 심리지수(104) 수준에도 못 미치는 수치다.

부진 예측 뒤엎는
대기업 실적 개선

기업들이 한국 경제를 바라보는 인식도 비슷하다. 전국경제인연합회가 최근 30대 그룹을 대상(1개 그룹 무응답)으로 '2015 투자·경영 환경 조사'를 실시한 결과 24개 그룹(82.8%)이 '구조적 장기 불황이 우려된다'고 답했다. 절반이 넘는 그룹은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와 비교해 현 경영 환경이 '더 나쁘다'고 답했다. 44.8%에 해당하는 13곳은 경제 회복 시기가 '2017년 이후'라는 부정적인 전망을 내놨다.

올해 예상 투자규모를 묻는 질문에는 41.4%가 작년과 비슷한 수준이 될 것이라고 답했고 24.1%는 작년보다 줄 것이라고 응답했다.


이처럼 너도나도 허리띠를 졸라매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다르다. 연초부터 발표되고 있는 기업들의 배당, 실적, 임금 수치를 보면 '그들만의 잔치'를 벌이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전체적으로 부진할 것이라는 업계의 예측과 달리 지난 한해 대체로 양호한 실적을 올린 기업들이 많았다. 특히 한진그룹의 약진이 눈에 띈다.

에프엔가이드에 따르면 한진그룹 주력계열사 대한항공은 2013년 4분기 영업이익 178억원에서 지난해 4분기 영업이익은 1305억원으로 늘어날 것으로 전망된다. 여기에 3년 연속 영업손실을 기록하던 한진해운은 4년 만에 흑자를 달성했다. 지난해 매출은 전년 대비 10.3% 감소한 8조6548억원을 기록했으나 영업이익은 1435억원이다. 한진그룹의 지난해 4분기 영업이익은 280%가량 증가할 것으로 보인다.

전년 동기에 비해 36%나 줄어든 영업이익을 기록한 삼성전자 때문에 고전이 예상됐던 삼성그룹의 경우, 삼성카드, 삼성증권, 삼성생명, 호텔신라, 크레듀 등 타 계열사 실적 개선으로 그나마 '선방'한 것으로 나타났다. 현대차와 기아차 영업이익이 각각 전년 대비 7.6%, 23% 하락한 현대자동차그룹 또한 현대제철과 현대건설의 선전으로 작년과 비슷한 수준의 영업이익을 올릴 것으로 예상된다.

SK그룹도 SK이노베이션 부진을 SK하이닉스가 보완해 줬다. SK이노베이션은 지난해 4600억원대 영업손실을 냈다. 하지만 SK하이닉스는 지난해 매출액 17조1256억원, 영업이익 5조1095억원을 기록하며 또 한번 최대 매출액과 영업이익 기록을 갈아치웠다. 당기순이익도 전년 동기보다 46% 증가했다.

배당금 총액 전년 대비 61% 증가
100억 이상 배당 부자 최소 20명

LG그룹은 LG전자, LG디스플레이, LG이노텍이 선전하면서 LG화학의 부진을 메꿨다. CJ그룹도 CJ헬로비전과 CJ E&M의 부진에도 불구하고 CJ제일제당과 CJ대한통운의 실적 향상을 이끌어 내며 전체적으로는 성장했다.


포스코그룹은 3조원대 매출을 회복했다. 포스코그룹의 지난해 매출은 전년(61조865억원) 대비 5.2% 증가한 65조984억원으로 나타났으며 영업이익은 3조2135억원으로 전년 대비 7.3% 증가했다.

기업들의 실적 선방을 방증하듯이 올해 역시 '배당 잔치'가 벌어졌다. 한국거래소에 따르면 지난해 12월1일부터 올해 2월5일까지 2014년도 배당총액은 10조2751억원으로 전년 같은 기간에 비해 3조9025억원(61%)이 증가했다. 현금배당을 공시한 상장법인도 253개로 전년 같은 기간보다 113개(80%) 늘었다.
 

유가증권시장 상장법인 중 배당을 공시한 기업은 전년 86개에서 145개로 증가했고 배당금 총액은 6조1989억원에서 9조8774억원으로 늘어났다. 코스닥 상장법인 중 배당을 공시한 곳은 전년 54개 사에서 108개로 증가했고 배당금 총액은 1737억원에서 3977억원으로 집계됐다.

가장 많은 배당금을 지급한 기업은 삼성전자로 배당금 총액은 전년보다 40.5% 증가한 2조9246억원으로 집계됐다. 삼성전자는 보통주 1주당 배당금을 1만3800원에서 1만9500원으로 41.3% 늘렸다. 삼성화재해상보험은 주당 2750원에서 4500원으로 63.6%늘렸으며 배당금 총액은 1202억원에서 1988억원으로 65.4% 늘었다. 삼성카드도 2013년 700원에서 2014년 300원(42.9%)이 증가한 1000원을 배당해 배당금 총액 1154억원(전년 808억원)을 기록했다.

배당금을 큰 폭으로 확대한 주요 대기업을 살펴보면 ▲현대자동차(1950원→3000원, 53.8%) ▲기아자동차(700원→1000원, 42.9%) ▲동부화재해상보험(1000원→1450원, 45%) ▲SK C&C(1500원→2000원, 33.3%) 등으로 나타났다.

전년도 주당 600원을 배당한 포스코와 4000원을 배당한 LG화학, 1000원을 배당한 LG, 2500원을 배당한 SK는 올해 같은 금액을 배당하기로 했다. 전년도 배당을 하지 않았던 SK하이닉스는 올해 주당 300원 배당으로 배당금 총액 2184억원을 기록했으며, 역시 배당을 하지 않았던 LG디스플레이도 올해 500원을 배당, 총 1789억원을 배당하기로 했다.

배당 공시 기업
86개→145개

100%가 넘는 배당금 총액 증가율을 나타낸 기업은 엔씨소프트(472.4%)와 메리츠종금증권(108.7%), 아이마켓코리아(100%), 호텔신라(132.5%), 삼성생명(109.5%) 등이다.

코스닥시장에서는 동서가 전년보다 9.1% 증가한 596억원을, GS홈쇼핑이 119.3% 증가한 480억원을, 파라다이스가 56.6% 증가한 428억원을 배당했다.

주요 금융지주사들과 시중은행들도 '배당 잔치'를 벌이고 있다. 지난해 배당을 실시하지 않았던 우리은행은 올해 은행권 내 가장 큰 규모인 5000억원의 배당을 계획 중이다. 올해 3월 초 열리는 이사회에서 최종 배당액을 확정할 계획이다. 주당 배당금은 700~750원 사이로 검토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신한금융지주는 전년도 650원에서 46.2% 증가한 950원의 배당을 실시키로 결정했다. 배당성향(순이익 대비 배당 총액)은 21.6%로 전년(16.2%)에 비해 크게 확대됐다. 

지난해 주당 500원을 배당했던 KB금융지주는 올해 780원씩 배당하기로 했다. 배당성향은 15.1%에서 21.5%로 증가했다. 꾸준히 배당성향을 늘려오던 하나금융지주와 IBK기업은행도 적극적으로 배당을 확대할 것으로 보인다.


기업들이 배당을 늘리면서 100억 이상 '배당 부자'들도 속속 나오고 있다. 재벌닷컴과 금융투자업계 분석 결과 2014년 배당금을 100억원 이상 받게 되는 대기업 주주는 16명에 이르는 것으로 나타났다. 여기에 배당 규모를 발표하지 않은 기업을 포함하면 배당부자는 최소 20명으로 늘어날 전망이다.

기업 호실적 소식 잇달아
경영진 임금도 속속 올려

2014년 가장 많은 배당금을 받는 기업인은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으로, 지난 2013년 1079억원에서 2014년 1758억원으로 63% 증가했다. 정몽구 현대자동차그룹 회장도 지난 2013년 495억원에서 2014년 649억원으로 31% 늘었다. 2014년 120억원의 배당금을 받았던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은 올해 79.5% 늘어난 216억원의 배당금을 받게 됐다.

이밖에 ▲최태원 SK그룹 회장(2013년 배당금 286억원→2014년 배당금 330억원 증감률 15.4%) ▲홍라희 삼성미술관 리움 관장(155억원→217억원, 39.9%) ▲서경배 아모레퍼시픽그룹 회장(155억원→205억원, 32.2%) ▲정몽진 KCC그룹 회장(131억원→168억원, 28.6%) ▲김남호 동부제철 부장(94억원→144억원, 53.3%) ▲김상헌 동서 고문(126억원→135억원, 7.2%) ▲김석수 동서식품 회장(110억원→120억원, 9.3%) ▲이재현 CJ그룹 회장(118억원→119억원, 0.3%) ▲정용진 신세계그룹 부회장(91억원→109억원, 19.6%) ▲최태원 회장의 동생인 기원씨(79억원→105억원, 33.3%) ▲구광모 LG 상무(86억원→105억원, 22.6%) 등이 100억원 이상의 배당금을 받게 됐다. 구본무 LG그룹 회장(192억원)과 구본준 LG전자 부회장(137억원)은 배당 액수가 전년과 동일했다.

기업의 근간이 되는 직원들의 상대적 박탈감은 더욱 커졌다. 매출 1조원 이상 대기업 등기임원들은 직원들보다 13배 많은 연봉을 타갔다. 기업분석 전문업체 한국CXO연구소는 2013년 기준 국내 1500대 기업 등기임원 보수의 적정성을 분석한 결과를 내놨다.

매출 1조원이 넘는 대기업 등기임원의 1인 평균 보수는 8억2276만원으로 1인 당 평균 6121만원을 받은 직원들보다 7억6155만원이 높았다. 매출 1000억원 미만 중소기업에서 등기임원과 직원의 보수 격차는 4.8배에 불과했다.


1500대 기업 중 등기임원과 직원 보수가 5배 미만인 기업이 795개사로 절반을 넘었으며 15배 이상 차이가 나는 기업은 109개사에 불과했다. 매출 1조원 이상 대기업 때문에 연봉이 크게 차이가 난다는 얘기다.

등기임원과 직원의 평균 보수 격차가 가장 큰 기업은 SK이노베이션으로 70.4배에 달했다. 그 다름은 오리온(68.7배), 삼성전자(65.9배), 현대백화점(53.5배), SK(55.7배), 메리츠화재(55.5배), 코데즈컴바인(49.6배), 이마트(54.9배), SK C&C(47.2배), 에이블씨엔씨(45.5배)순이다.

불황 비웃는 기업
4분기 깜짝 실적

금액 순으로 등기임원 1인 평균 보수가 가장 높은 기업은 삼성전자로 65억8900만원이다. 2위는 50억2150만원이 지급된 SK, 3위는 47억2988만원이 지급된 SK이노베이션이 차지했다. 그 뒤를 현대백화점(33억7433만원), SK C&C(31억8033만원), 메리츠화재(27억9555만원), 삼성물산(25억3566만원), 삼성중공업(24억900만원), 오리온(23억9100만원), SKC(23억8133만원)가 이었다.

CXO연구소는 "대체로 국내 상장기업에서는 15배가 기준이 될 수 있다는 분석결과를 얻었다"며 "등기임원이 직원보다 15배 이상 받아가면 '과하다'고 볼 수 있다는 의미"라고 전했다.

<han1028@ilyosis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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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세보다 무서운 산재와의 전쟁

탈세보다 무서운 산재와의 전쟁

[일요시사 취재1팀] 장지선 기자 = 이재명 대통령이 ‘산재와의 전쟁’을 선포했다. 건설 현장에서 근로자가 사망하는 사건을 줄이겠다는 취지다. 이 대통령이 칼을 휘두르자 기업은 납작 엎드렸다. 이 대통령의 행보를 보는 시각은 엇갈린다. 산재 사망사고가 끊이지 않는 만큼 단호한 조치가 필요하다며 환영하는 의견과 구조적 문제를 뒤로하고 기업 ‘잡도리’만 하고 있다는 의견 등이다. 건설업계에 칼바람이 불고 있다. 미국발 관세나 국내 경기 문제가 아니다. 산업재해(이하 산재)가 건설 현장을 뒤흔드는 중이다. 대통령은 여러 현안 중 산재로 인한 사망사고 근절을 국정 과제 첫머리에 올린 듯한 모습이다. 대통령 한마디 이재명 대통령이 반복되는 산재 사망사고의 고리를 끊겠다고 나섰다. 산재 사망사고가 발생한 기업을 법과 제도를 통해 처벌하겠다고 선언했다. 발언 수위도 나날이 세지고 있다. 본보기가 된 기업은 대통령이 일으킨 칼바람을 온몸으로 맞는 모양새다. 지난 5월 고용노동부가 발표한 1분기 ‘산업재해 현황 부가 통계’에 따르면 올해 1~3월 재해 조사 대상 사고 사망자는 총 137명(잠정)으로 지난해 같은 기간(138명)보다 1명(0.7%) 줄었다. 사망사고 건수도 같은 기간 136건에서 129건으로 7건(5.1%) 감소했다. 업종별로는 제조업이 29명으로 지난해보다 2명, 기타 업종(건설업과 제조업 이외 업종)이 38명으로 6명 감소했지만 건설업은 71명으로 오히려 7명 늘었다. 노동부는 부산 기장군 건설 현장 화재와 서울-세종고속도로 교량 붕괴 등 대형 사고의 영향으로 건설업 사망자 수가 증가했다고 분석했다. 지난 2월14일 부산 기장군 반얀트리 리조트 신축 공사장에서 불이 나 6명이 숨졌다. 또 같은 달 25일, 경기도 안성시 서울-세종고속도로 건설 현장 교량 상판 구조물이 붕괴해 4명이 목숨을 잃는 사고가 일어났다. 규모별로는 상시 근로자 50인(건설 업종은 공사 금액 50억원) 미만 사업장에서 올해 1분기 사망자는 83명으로 지난해보다 5명(6.4%), 사망사고 건수는 83건으로 7건(9.2%) 늘었다. 반면 50인 이상 대형 사업장과 대규모 공사 현장에선 사망자 54명, 사고 건수 46건으로 각각 6명, 14건 줄었다. 사망사고 유형별로는 ‘추락’ 62명, ‘끼임’ 11명, ‘물체에 맞음’ 16명으로 지난해와 비교해 각각 1명, 7명, 5명 감소했다. 화재와 폭발로는 10명, ‘붕괴’ 사고로는 11명이 목숨을 잃었다. 지자체별로는 경기(31명), 서울(17명), 경북(15명), 부산·전남(12명), 경남(11명), 충남(9명), 강원·울산(6명) 순으로 많았다. 산재로 인한 사망은 건설 현장에서 일어날 수 있는 최악의 사고다. 정부는 산재 사망사고를 줄이기 위한 각종 대책을 내놨다. 2022년 1월부터 시행된 중대재해처벌법(이하 중처법)도 그중 하나다. 중처법은 근로자의 사망사고 등 중대 재해가 발생했을 때 기업의 경영 책임자 등이 안전 보건 관리 체계 구축 등 의무를 위반한 것으로 확인되면 처벌하도록 하는 내용이 골자다. 취임 이후부터 직접 챙겨 국정 운영 계획에도 포함 문제는 실효성이다. 중처법이 시행된 이후에도 건설 현장에서 근로자가 죽는 일이 계속 일어나고 처벌은 ‘솜방망이’ 수준에 그친다는 지적이 끊이지 않았다. 결국 이 대통령이 칼을 빼 들었다. 이 대통령은 지난 12일 “비용을 아끼기 위해 누군가의 목숨을 빼앗는 것은 일종의 미필적 고의에 의한 살인, 또는 사회적 타살”이라고 비판했다. 필요하면 법을 개정해서라도 ‘산재 공화국’이라는 오명을 벗겠다는 뜻도 밝혔다. 이 대통령은 이날 국무회의에서 “일상적으로 산업 현장을 점검해서 필요한 안전조치를 하지 않고 작업하면 엄정하게 제지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며 “제도가 있는 범위 내에서 할 수 있는 최대의 조치를 해달라”고 주문했다. 사고 위험이 큰 업무를 하청과 외주를 통해 해결하는 ‘위험의 외주화’ 현상에 대해서도 지적했다. 이 대통령의 산재 사망사고 근절 ‘드라이브’는 점진적으로 거세지고 있다. 초기에는 주무 부처에 대책을 요구했다면 최근에는 직접 목소리를 내고 움직이는 식이다. 대통령이 직접 나서서 산재를 줄이라고 지시했는데도 불구하고 사망사고가 이어지자 특유의 행동력을 보이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실제 이 대통령이 고용노동부에 산재 관련 종합 대책을 주문한 뒤에도 ▲인천 맨홀 작업 노동자 질식사 ▲포스코이앤씨 노동자 끼임사 ▲경기 의정부 아파트 신축 현장 노동자 추락사 등의 사고가 일어났다. 불과 한 달 새 일어난 일이다. 지난달 6일 인천 계양구 병방동의 한 도로 맨홀 안에서 지하 시설물 조사 작업 중이던 노동자 1명이 의식을 잃고 1명은 실종됐다. 이들은 결국 사망했다. 조사 결과 이 사고는 용역 계약 위반에 따라 허가 절차 없이 진행하다가 발생한 인재로 드러났다. 법으로도 안 됐는데… 숨진 근로자는 산소 마스크 등 안전 장비를 제대로 착용하지 않은 채 작업하다 유독가스에 중독된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 이 대통령은 “현장 안전 관리에 미흡한 점이 있었는데 철저히 밝히고 법령 위반 여부가 있었는지를 조사해 책임자를 엄중히 조치하라”며 “후진국형 산업재해가 다시는 발생하지 않도록 현장 안전관리를 정비하고 사전 지도·감독을 강화하는 등 관련 부처도 특단의 조처를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지난달 28일 포스코이앤씨가 시공하는 경남 함양-울산고속도로 의령나들목 공사 현장에서 사면 보강 작업을 하던 60대 근로자가 천공기(지반을 뚫는 건설기계)에 끼어 숨지는 사고가 일어났다. 포스코이앤씨 시공 현장에서만 올해 들어 4번째 일어난 사망사고다. 지난 1월 경남 김해 아파트 신축 현장 추락사고, 경기도 광명 신안산선 건설 현장 붕괴사고, 대구 주상복합 신축 현장 추락사고 등도 줄을 이었다. 이 대통령은 “똑같은 방식으로 사망사고가 나는 것은 결국 죽음을 용인하는 것이고 아주 심하게 얘기하면 법률적 용어로 미필적 고의에 의한 살인”이라고 질타했다. 그러면서 “(산재 사망사고가 나면) 여러 차례 공시하도록 해서 투자를 안 하고 주가가 폭락하게 (해야 한다)”고도 말했다. 여름휴가를 마치고 복귀 첫 일성도 산재 관련 발언이었다. 이 대통령은 “앞으로 모든 산업재해 사망사고는 최대한 빠른 속도로 대통령에게 직보하라”고 지시했다. 산재 사망사고를 직접 챙기겠다는 의지를 다시 한번 천명한 것이다. 사과문 내고 또 반복되다 지난 9일 강유정 대통령실 대변인을 통해 전해진 이 대통령의 발언은 전날인 8일 경기 의정부 신축 아파트 공사 현장에서 안전망 철거 작업을 하던 50대 근로자가 6층 높이에서 떨어져 숨진 사고가 영향을 미쳤다. 이 대통령이 선포한 ‘산재와의 전쟁’에 기업은 바짝 얼어붙은 상황이다. 지난달 25일 경기 시흥 SPC 삼립 공장을 방문해 ‘중대산업재해 발생 사업장 현장 간담회’를 열었다. 해당 공장은 지난 5월 50대 여성 노동자가 작동 중인 컨베이어벨트에 끼어 사망했고 2022년과 2023년에도 여성 노동자가 각각 소스 교반기와 반죽 기계에 끼어 숨지는 등 중대 산재가 빈번하게 일어났던 곳이다. 이 대통령은 이날 간담회에서 SPC 근로자의 노동 시간 등을 자세히 물었다. 그러면서 “(산재가) 심야에 대체적으로 발생하고 12시간씩 4일간 일하다 보면 사실 심야 시간에 힘들다. 주의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며 “심야 장시간 노동 때문에 생긴 일로 보여진다”고 말했다. 이 대통령의 지적에 SPC 회장을 비롯해 그룹 관계자들이 쩔쩔맨 것으로 전해졌다. SPC그룹은 이 대통령이 다녀간 지 이틀 만인 지난달 27일, 8시간 초과 야근을 폐지하겠다는 대책을 내놨다. 제품 특성상 필수적인 품목 외에는 야간 생산을 최대한 없애 공장 가동 시간을 축소하겠다는 것이다. 또 주간 근무 시간도 점진적으로 줄여 장시간 근무로 인한 피로 누적, 집중력 저하, 사고 위험 등을 사전에 차단하겠다고 밝혔다. 포스코이앤씨는 지난달 29일 담화문을 내고 고개를 숙였다. 정희민 전 대표이사는 “어제(28일) 사고 직후 모든 현장에서 즉시 모든 작업을 중단했고 전사적 긴급 안전 점검을 실시해 안전히 확실하게 확인되기 전까지 무기한 작업을 중지하도록 했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협력업체를 포함한 모든 근로자의 안전이 최우선 가치가 되도록 필요한 자원과 역량을 총동원해 근본적인 쇄신 계기로 삼겠다”며 “또다시 이런 비극이 발생하는 일이 없도록 사즉생의 각오와 회사의 명운을 걸고 안전 체계의 전환을 이뤄내겠다”고 말했다. 하지만 정 전 대표의 사과는 엿새 만에 또다시 일어난 사고로 빛이 바랬다. 지난 4일 오후 경기 광명시 옥길동 광명-서울고속도로 민간투자사업 제1공구 현장에서 미얀마 국적 30대 근로자가 감전돼 심정지 상태로 발견됐다. 이 근로자는 병원으로 이송된 지 8일 만인 지난 12일 의식을 회복했다. 높아진 발언 수위·제재 조치 “왜 기업만 잡도리?” 의견도 정 전 대표는 사의를 표명하고 물러났다. 연이어 산재사고가 일어난 포스코이앤씨는 ‘본보기’가 될 가능성이 커진 상황이다. 일단 이 대통령은 포스코이앤씨에 대한 건설 면허 취소, 공공 입찰 금지 등 법률상 가능한 방안을 모두 찾아서 보고하라는 지시를 내린 바 있다. 국내 건설 면허 취소는 현행 건설산업기본법상 최고 수위의 징계다. 1994년 성수대교 붕괴 책임이 있던 동아건설산업에 내려진 사례가 유일하다. 건설 면허가 취소되면 신규 사업을 할 수 없고, 다시 면허를 취득한다고 해도 수주 이력이 없기 때문에 관급공사를 따내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하다. 경찰은 사고 관련 수사 전담팀을 만들고 고용노동부 안양지청과 함께 포스코이앤씨와 하청업체에 대한 압수수색에 돌입했다. DL건설도 대표이사를 비롯한 임원진 전원이 공사 현장에서 발생한 사망사고에 책임을 지고 일괄 사표를 제출하는 등 납작 엎드렸다. 특히 이 대통령이 휴가에서 돌아와 산재 관련 발언을 한 직후 터진 사고여서 충격파가 더 컸다. DL건설에서 사표를 제출한 임직원은 80여명, 공사를 중단한 현장은 44곳에 이른다. 이재명정부는 산재사고로 인한 사망자 비율을 2030년까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 수준인 1만명당 0.29명까지 끌어내리는 방안을 추진하기로 했다. 지난해 우리나라에서 발생한 산재로 인한 사망자 비율은 1만명당 0.39명으로 OECD 평균을 크게 웃도는 실정이다. 이 같은 내용은 ‘이재명정부 국정 운영 5개년 계획’에 포함됐다. 이 대통령이 지난달 수석보좌관 회의에서 “전 세계에서 또는 OECD 국가 중 산업재해율, 사망재해율이 가장 높다는 불명예를 이번 정부에서 반드시 끊어내겠다”고 의지를 드러낸 부분을 국정과제로 담은 것이다. 구조 문제 나 몰라라 일각에서는 이 대통령이 지나치게 건설업계만 잡고 있다는 지적도 제기된다. 관련 법과 제도가 시행되고 있는데도 사망사고가 끊이지 않는다면 구조적인 문제도 살펴봐야 한다는 것이다. 수주 경쟁이 과열되면서 저가 입찰이 늘고 안전관리에 소홀해지는 점이 산재로 이어지는 식의 고리를 끊어야 진정한 의미의 ‘근절’이 이뤄질 것이라는 분석도 있다. <jsjang@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