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는 광복 69주년이 되는 해다. 내년이면 벌써 광복 70주년을 맞이하지만 일본의 진정성 있는 사과는 요원하기만 하다. 게다가 고노담화를 부정하고, 위안부 문제를 왜곡하는 등 일본의 역사인식은 과거보다 오히려 퇴보하고 있어 국민들을 분노케 하고 있다. 이런 시기에 일본의 자랑인 ‘사무라이 정신’의 실체를 낱낱이 밝혀내 화제가 되고 있는 책이 있다. 일요시사가 화제의 책 <사무라이 정신은 거짓이다>를 연재한다.
주군이 죽으라고 해서 죽는 것은 이미 불충이었다. 잘못을 했으면 미리 알아서 할복해야 했다. 그래야 주군으로부터 충성심 있는 사무라이, 책임감 있는 사무라이로 인정받아 그 가족이라도 앞날이 보장되는 것이다. 괜히 죽기 싫어 머뭇거렸다가는 주군에게 충성을 보여 주려는 다른 가신으로부터 살해당할 것이기 때문이다.
빈번했던 할복
영주나 주군으로부터 명을 받기 전에 스스로 알아서 할복해야 하는 것은, 오늘날 회사에 손해를 끼치면 알아서 사표를 내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버티면 오히려 강제퇴직을 당한다. 그렇게 되면 퇴직금뿐 아니라 많은 불이익이 따른다. 당시 사무라이들도 마찬가지였다.
스스로 알아서 할복하면, 적어도 그가 갖고 있던 직책과 영지는 그의 아들에게 대물림될 수 있었으나, 할복하지 않고 머뭇거리면 다른 가신들에게도 본보기를 보여 주고 싶은 주군으로부터 할복을 명받아 죽을 뿐만 아니라, 그가 갖고 있던 직책과 영지도 빼앗기는 가혹한 처벌을 받았다.
당시 사무라이에게 있어 죽음이라는 것은 이미 일상의 한 부분이 되어 있었다. 날마다 계속되는 전투에서 보고 듣는 것이 죽음이었다. 지난 싸움에서는 형제가 죽고, 이번 싸움에서는 조카가 죽고……. 묻히지도 못한 주검이, 그것도 목이 떨어져 나간 시체가 곳곳에 널려 있었다.
아울러 말 한 마디 잘못했다고, 행동 한 번 잘못했다고 파리 목숨같이 죽어가는 평민 또한 심심치 않게 있었을 것이다. 도쿄대학 사료편찬소에는 규슈의 ‘시마즈(島津)’ 집안의 족보가 보관되어 있다. 그 족보에 의하면, 남자들은 18세를 전후하여 전사한 것으로 되어 있다. 이로 미루어 볼 때 당시 사무라이들의 평균 연령은 20세를 넘기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들에게 있어 죽음은 단지 시간 문제였다. 이번 싸움에 죽느냐, 아니면 다음 싸움에 죽느냐 하는 문제이지, 결코 죽음 자체를 두려워할 수 있는 처지가 아니었다. 그들에게 있어 가족을 위하여 죽는다는 것은, 그것도 전쟁터도 아닌 집안에서 할복하여 죽는다는 것은 행복한 죽음이었을지도 모른다.
할복함으로써 주군에게 충성심을 보여 주고, 또 한편으로는 자신의 가족을 책임지라는 말 없는 압박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충성심으로 할복한 가신의 아들을 거두지 않고, 그 가족을 돌보지 않는 주군이라면 다른 가신들로부터 신망도 받을 수 없을 것이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자식에 대한 부모의 사랑은 헌신적이다. 하물며, 죽음이 생활의 일부분이 되어버린, 그래서 언제 어떻게 죽을지조차 알 수 없는 전국시대에, 그리고 자신의 영지와 직책이 아들에게 대물림되는 당시의 사회 구조를 고려하면, 사무라이들이 자신의 가족을 위해 할복하는 것은 기꺼이 맞이할 수 있는 죽음이었을 것이다. 여기에 바로 사무라이들이 주군을 위해 목숨을 쉽게 내버릴 수 있었던 근본 이유가 있는 것이다.
잘못했으면 알아서 할복해야
18살 전후로 전사 ‘파리 목숨’
또 한편으로는 당시 일본인들의 생사관(生死觀)의 기초를 이루었던 불교의 윤회설도 이들이 쉽게 죽을 수 있었던 또 다른 배경이 되었다. 당시의 권력 구조뿐만 아니라 일본인들의 소심한 성격까지 생각한다면, 사무라이는 그 주군 앞에서 고양이 앞의 쥐 정도가 아니라 호랑이 앞에 쥐 꼴이었을 것이다. 사무라이는 그 주군의 뜻에 어긋나는 말 한 마디, 행동 한번 제대로 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사무라이가 그 주군에게 충성을 하는 데 있어 어떤 이유도 있을 수 없고, 선택의 여지도 있을 수 없었을 것이다. 주군이 좋다고 충성을 하고, 싫다고 충성을 안 할 수도 없는 것이다. 자신이 살고, 가족이 살고, 그 자식이 계속 사무라이로서 살아가려면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주군에게 진심으로 충성을 하든 아니면 싫어도 하는 척이라도 해야 하는 것이다. 결코 주군의 눈 밖에 나서는 안 되었다. 절대적 권력자 앞에서 사무라이들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그런 의미에서 주군에 대한 사무라이들의 충성이, 목숨을 초개같이 버려가며 보인 충성이 진심에서 우러난 충성인 경우도 있었겠지만, 대부분이 자신이 살고 가족을 살리기 위한 위장된 충성이요, 영지를 유지하려는 또 다른 형태의 아부성 충성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당시 사무라이들은 ‘내 주군의 주군은 내 주군이 아니다’라고 생각하며 살았다. 오직 자신에게 무사 직책을 주고 영지도 내려 주며, 때로는 몰수도 함으로서 실생활에 막대한 영향을 줄 수 있는 자만을 주군으로 믿고 충성도 하고 때로는 배반도 하였던 것이다. 심지어 쇼군도 주군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당시 사무라이들의 기본 정신이요, 영주와 사무라이들의 주종관계를 잘 나타낸 말이 있다. 1) 주군은 부하 사무라이에게 영지를 내림으로써 은혜를 베풀며, 사무라이는 전쟁에 나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싸우는 것이 그 은혜에 보답하는 사무라이의 의무이다.
2) 사무라이는 주군에게 무조건 복종함을 원칙으로 하며, 주군에 대한 반항을 가장 극악한 죄로 생각한다. 이 말도 당시의 정치적, 경제적 상황 등을 고려하여 곰곰이 따져 보면, 바로 사무라이들의 주군에 대한 아부성 표현이다.
여기서 ‘영지를 내림으로써 은혜를 베풀며’라는 말은 단순히 농지를 나누어 주어 먹고살게 해 주었다는 것이 아니다. 칼도 갖게 해 주고, 성(姓)도 갖게 해 주고, 평민들에게 호랑이같이 군림하며 살 수 있는 신분도 주었다는 뜻인 것이다.
영주가 사무라이에게 영지를 하사하는 첫 번째 이유는, 전쟁이 났을 때 영주를 위하여 전쟁에 나가 싸우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자신과 영지를 지키라는 것이다. 이 말을 뒤집어 보면 사무라이는 영주에게 ‘목숨을 걸고 전쟁에 임하겠다’는 충성 서약 아래 영지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이 된다.
사무라이가 받은 영지를 유지하려면 목숨을 사리지 않고 전쟁에 임해야 하고, 영주에게 충성을 보여 주어야 하는 것이다. 또 당시 일부 사무라이들은 칼집에 이런 문구의 글까지 새기고 다녔다. ‘어떤 산도 주군의 은혜보다 가볍고, 주군의 한 가닥 머리카락도 나의 목숨보다 무겁다(萬山不重君恩重, 一髮不輕我命輕)’ 진실로 주군에 대한 고마움과 충성심을 잊지 않으려고 이렇게 칼집에 새겨 놓은 것일까? 아니면 주군에게 은근히 보여 주려고 새겨 놓은 것일까?
몸에 밴 아부
진심으로 주군에 대한 고마움과 충성심을 잊지 않으려고 칼집에 새겨 놓은 것이라 하더라도, 보통 사람들은 낯간지러워 함부로 할 수도 없는 아부성 말을 일부 사무라이들은 칼집에까지 새겨놓고 다닌 것이다. 과연 도를 넘어선 사무라이들의 태도가 진정으로 주군을 존경해서였는지, 아니면 영지를 지키기 위한 또 다른 아부였는지 궁금하다. 이렇게 전국시대는 형성되었고, 주군과 사무라이들 사이의 주종관계도 이렇게 정립되었다.
<다음 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