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급기획 일촉즉발 정윤회 게이트> ①정윤회vs조응천 진실게임

MB? 김기춘? 친박의원? “셋중 한명 작품”

[일요시사 정치팀] 허주렬 기자 = 청와대 공직기강비서실에서 작성한 ‘靑비서실장 교체설 등 VIP측근(정윤회) 동향’이라는 제목의 감찰보고서 내용이 일부 공개돼 파문이 일파만파 확산되고 있다. 그간 박근혜정부의 ‘숨은 실세’라는 의혹이 끊이지 않았던 정윤회씨가 ‘문고리 권력 3인방(이재만·정호성·안봉근)’을 포함한 이른바 ‘십상시’를 통해 국정에 개입했다는 충격적이 내용이 담겼기 때문이다. ‘정윤회 문건 파문’은 관련자들의 주장이 엇갈리며 진실게임 양상으로 흐르고 있다. 누가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일까.

정윤회씨와 조응천 전 청와대 공직기강비서관의 진실게임이 점입가경이다. 이들은 지난달 28일 청와대 공직기강비서실에서 작성한 이른바 ‘정윤회 감찰 문건’을 바탕으로 한 <세계일보>의 ‘정윤회 국정 개입은 사실이다’라는 내용의 보도가 나온 이후 문건의 작성부터 시작해 유출까지 사사건건 상반된 주장을 펼치며 충돌하고 있다.

‘정윤회를 정점으로 하는 비선이 국정을 좌지우지하고 있다’로 요약되는 문건 내용은 충격적이다. 정권 말기에나 나올법한 이야기가 이제 집권 2년 차에 불과한 박근혜정부 청와대 공식 문서에 담겨있기 때문이다. 정치권에 메가톤급 파문을 일으키고 있는 ‘정윤회 vs 조응천’의 진실게임 쟁점 세 가지를 <일요시사>가 정리했다.

쟁점1. 정윤회 국정개입 의혹

문건을 최초로 보도한 <세계일보>에 따르면 박근혜정부 문고리 권력 3인방이라고 불리는 청와대 이재만 총무비서관, 정호성 제1부속비서관, 안봉근 제2부속비서관 등 청와대 안팎에 포진한 십상시 10인은 지난해 10월부터 매달 2회 서울 강남의 모처에서 회동을 갖고 정씨에게 청와대 내부 동향, 국정 동향을 보고했다.

십상시는 중국 후한 말 영제 때 왕의 눈을 멀게 하고 전횡을 일삼아 나라를 망치게 한 10명의 환관을 일컫는 말로, 지난 1월 문건을 작성한 박관천 경정(당시 청와대 공직기강비서실 행정관)이 정씨를 따르는 10인의 청와대 안팎 인사들을 지칭한 것으로 보인다.


이 회동에서는 기춘대원군이라 불리는 청와대 2인자 김기춘 비서실장의 퇴진 시점 등 정부 고위공직자의 기용이나 퇴진, 향후 국정운영 방향 등에 대한 논의도 이뤄진 것으로 알려진다. 하지만 정씨는 잇단 총리 후보자 지명 실패로 ‘비선 인사’ 논란이 한창이던 지난 7월 <중앙일보>와의 인터뷰에서 문고리 권력 3인방과의 접촉설에 대해 “접촉이 없다. 인간적으로 이들이 나에게 연락하는 게 도리인데, 섭섭하다”며 의혹을 전면 부인했다.

이 총무비서관도 비슷한 시기 국회 운영위원회에 나와 “정씨를 최근에 만난 적 없다. 2003년인가 2004년에 만난 적 있다”고 말한 바 있다. <세계일보>를 통해 ‘정씨가 국정에 개입했다’는 내용이 담긴 청와대 문건이 공개된 이후에도 정씨는 “사실무근”이라며 문건을 보도한 기자들을 출판물에 의한 명예훼손 혐의로 검찰에 고소하는 등 결백을 주장했다.

청와대 문건 놓고…누가 거짓말?
유출경로 두고도 온갖 억측 난무

그러나 조 전 비서관은 지난 2일 <조선일보>와의 인터뷰에서 “박 경정이 작문할 이유가 없다”며 “해당 문건이 맞을 가능성이 60~70%쯤”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또 “지난 4월11일 퇴근길에 이 총무비서관이 내게 전화를 걸어와 ‘(정씨의) 전화를 좀 받으시죠’라고 했다”며 “정씨와 절연한 것처럼 얘기해온 이 총무비서관이 정씨의 메시지를 전하는 것을 보고 ‘도대체 이게 뭐냐’는 생각이 들었다”고 폭로했다.
 

조 전 비서관은 ‘문고리 권력의 인사 개입’에 대해서도 “어떤 때는 한창 검증 작업을 하고 있는데 인사 발표를 하는 경우도 있었다”며 “제2부속실에서 민정수석실 소속 경찰관 10여명을 한꺼번에 내보내라는 지시가 떨어진 적이 있고, 더 기가 막힌 것은 후임들이 다 단수로 찍어서 내려왔다”고도 밝혔다.

결국 정씨의 전화를 받지 않았던 조 전 비서관은 일주일도 채 안 돼 갑자기 청와대를 떠나게 된다. 당시 그의 사퇴에 대한 청와대 민경욱 대변인의 설명은 “조 비서관이 인생의 다른 길을 걷기 원해 사표를 제출했다”이다. 그러나 그는 이번 인터뷰에서 “정씨의 전화를 받지 않은 그 다음 주 화요일(4월15일) 홍경식 민정수석이 갑자기 불러 ‘그동안 수고했다’며 그만두라고 했다”고 자신의 사퇴가 정씨와 관련이 있음을 시사했다.

조 전 비서관 사퇴에 앞서 문건 작성자로 지목된 박 경정은 문건이 보고된 지난 2월 일선 경찰서로 좌천성 인사를 당했다. 이에 대해 박 경정은 지난 3월 <시사저널>과의 인터뷰에서 “문고리 3인방 때문에 인사상 불이익을 겪은 게 맞다”고 시인한 바 있다.


조 전 비서관의 인터뷰가 나온 직후 정씨는 한 방송과의 인터뷰를 통해 “지난 4월 이 총무비서관과 통화한 적이 있다”고 입장을 바꿨다. 또 안 비서관과 통화한 사실도 시인했다. 이런 가운데 청와대는 정씨의 입장에 보조를 맞추며 새로운 의혹이 제기될 때마다 입장을 번복해 의혹을 부추기고 있다.

이에 대해 참여정부 마지막 청와대 비서실장을 지낸 새정치민주연합 문재인 비대위원은 “공직비서관실이 루머를 모아 사실로 보고하는 일은 있을 수 없다”며 “만약 그랬다면 대통령비서실의 가장 중요한 기능이 마비된 것”이라고 꼬집었다. 문 비대위원의 주장에는 과거 청와대에서 근무했던 대다수 인사들도 공감대를 표하고 있다.

쟁점2. 문건 유출은 누가?

문건이 유출된 경로를 놓고도 관련자들의 주장이 엇갈리고 있다. 우선 정씨는 문건 유출 사건의 배후로 청와대 민정수석실을 지목하고 있다. 박 경정과 조 전 비서관이 청와대를 나가는 과정에서 문건이 유출됐다는 얘기다.

정씨는 지난 2일 <중앙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청와대도 (책임에서) 자유롭지 못하다고 생각한다”며 “한두 번도 아니고 민정수석실에서 계속 이런다면 나도 이제는 가만히 있을 수 없다”고 말했다. 문건 유출의 배후로 민정수석실을 지목한 것이다.
 

청와대의 주장도 정씨의 주장과 일맥상통한다. 앞서 청와대는 지난 4월 <세계일보>가 공직기강비서실 문건을 근거로 청와대 행정관의 금품수수 등의 혐의가 적발돼 퇴출됐다는 보도를 했을 때 문건 유출 경위에 대한 조사를 벌여 박 경정을 유출자로 지목했던 것으로 알려진다. 이번 문건의 유출도 사실상 박 경정의 범행이라고 잠정 경론을 내린 상태에서 외형상으로는 검찰 수사에 맡기겠다는 입장을 밝혔다는 얘기다. 

하지만 박 경정은 수차례 언론을 통해 “문건을 유출한 적이 없다”며 의혹을 부인하고 있다. 복수의 전·현직 청와대 관계자들도 “박 경정이 올해 초 청와대 근무 당시 상관인 조 전 비서관에게 정윤회 문건을 다른 사람들이 들고 다닌다”고 보고했다고 말했다.

조 전 비서관도 “박 경정이 아닌 제3자가 범인으로 지목된 보고서가 지난 5∼6월 민정수석실에 올라갔다”며 “문건을 빨리 조사해 조치를 취하라고 건의했지만 아무런 답을 듣지 못했다. 그래서 ‘나중에 보고서 유출 책임을 뒤집어씌우지 말라’고도 했다”고 주장했다.

그는 특히 “아마 민정수석실은 박 경정을 범인이라고 대통령에게 이미 보고된 것을 나중에 뒤집기가 힘들었을 것”이라고도 말했다.

‘보이지 않는 손’ 개입 의혹
‘제3자’ 특정인 배후설 부상

박 경정과 상관없는 제3자가 유출했을 가능성도 제기되고 있다. 현재까지 드러나지 않는 ‘보이지 않는 손’이 개입했다는 얘기다. 정치권에서는 보이지 않는 손에 대해 크게 3가지 주장이 나오고 있다.

첫째, MB배후설이다. 4자방(4대강·자원외교·방산) 비리로 코너에 몰린 MB가 이슈 전환을 위해 ‘정윤회 카드’를 꺼냈다는 것. 실제로 4자방 국정조사 등의 주장이 이슈에서 사라졌고, 박근혜정부 출범 이후 침묵을 지켜온 친이(친이명박)계가 서서히 기지개를 켜는 모습도 감지된다.
 


청와대가 <세계일보>를 고소하는 과정에서 청와대의 입장을 대리하고 있는 손교명 변호사가 이명박정부 인수위 자문위원을 거쳐, 정무수석 비서관을 지낸 친이계 인사라는 점도 의미심장한 대목이다.

둘째, 김기춘 배후설이다. 김 실장이 정씨와 박지만 EG회장 사이에 싸움을 붙여 막후 권력싸움에서 어부지리를 취하려 했다는 것. 실제로 이번 문건 파동은 ‘정윤회 vs 박지만 권력암투’의 결과라는 방향으로 흐르고 있기도 하다. 일부에서는 친박계 핵심 인사였던 A의원이 김무성 대표에게 줄을 서는 과정에서 문건을 흘렸다는 이야기도 나오고 있다.

쟁점3. 박지만 미행설 진실은?

이번 문건 파문으로 지난 3월 <시사저널>의 정씨가 박지만 회장을 미행했다는 보도도 다시 주목받고 있다. 당시 <시사저널>은 정체불명의 남성에게 박 회장의 미행을 사주했던 사람이 정씨라고 복수의 여권 관계자 말을 인용해 전했다.

당시 보도에 따르면 박 회장은 지난해 11월 수상한 오토바이 한 대가 자신의 승용차를 미행하고 있다는 낌새를 알아차리고 이 오토바이 기사를 붙잡아 ‘왜 나를 미행하느냐’고 추궁했고, 오토바이 기사로부터 ‘정씨의 지시로 미행하게 됐다’는 자술서를 받아냈다.

박 회장은 자술서를 받아낸 직후 김기춘 비서실장에게 전화를 걸어 “경거망동하지 말라”고 경고하는 한편, 청와대 민정수석실에도 통보해 박지만 미행 사건에 대한 내사를 지시했다고 한다. 즉 정씨에 대한 감찰 문건이 만들어진 배경이 정씨의 박 회장 미행이었다는 것. 당시 <시사저널>은 정씨와 가까운 문고리 권력 3인방과 박 회장이 갈등을 빚으며 권력암투가 벌어지고 있다고 의혹을 제기하기도 했다.


이에 대해 정씨는 “전혀 그런 적이 없다”며 “박 회장을 찾아가 미행한 사람의 자술서를 보여달라고 했지만 박 회장이 ‘주겠다’고 했다가 연락을 끊었다”고 주장했다. 박 회장이 침묵하고 있는 가운데, 검찰 수사에서 이 부분이 밝혀질지도 주목된다.

 

<carpediem@ilyosisa.co.kr>

 

<기사 속 기사> ‘십상시’ 멤버는?

청와대 공직기강비서실에서 작성한 ‘정윤회 감찰 문건’이 정국의 태풍의 핵으로 부상한 가운데 문건에 담긴 정씨를 따르는 십상시 면면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십상시는 ‘박근혜 대통령 만들기’에 헌신한 핵심 실무그룹을 칭하는 것으로, 지난 대선에서 승리한 이후 대거 청와대로 입성한 것으로 알려진다.

십상시 멤버로 거론되는 인사는 박 대통령의 문고리 권력 3인방(이재만·정호성·안봉근) 외에 문건을 보도한 <세계일보>를 명예훼손 혐의로 고소한 청와대 인사들이 멤버가 아니냐는 분석이 많다.

고소인은 3인방 외에 김춘식 국정기획수석실 행정관, 이창근 제2부속실 행정관, 음종환 홍보수석실 행정관, 신동철 정무수석실 비서관, 조인근 연설기록비서관 등 8명이다.

이들 외에 청와대 외부 인사로 여당 실세 A의원의 J보좌관, B장관의 J정책보좌관 등이 거론되고 있다.

이와 관련해 새정치민주연합 ‘비선실세 국정농단 진상조사단’은 지난 4일 국회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십상시로 거론되는 인물을 잠정적으로 고발(공무상 비밀누설·직권남용 혐의)하기로 결론을 내렸다”고 밝혔다. 진상조사단은 또 “문고리 권력 3인방에 대한 직무정지 가처분 신청도 검토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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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벼랑 끝’ 장동혁 옹립의 정치학

‘벼랑 끝’ 장동혁 옹립의 정치학

[일요시사 정치팀] 박형준 기자 = 국민의힘 구 친윤(친 윤석열)계 핵심으로 분류됐던 윤한홍 의원이 국민의힘 장동혁 대표를 강하게 비판했다. 하지만 장 대표는 흔들리면서도 흔들리지 않는다. 이들의 공개 갈등엔 ‘옹립의 정치학’이 숨어 있다. 특정 세력이 정변을 일으키거나 지도자 교체를 시도할 때,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지도자 옹립이다. 그 과정에서 정치적 정당성·생존 본능이 적절하게 조화해야 한다. 그래서 복잡한 조건이 가미된다. 지도자 옹립을 위한 조건으로는 대체로 ▲적절한 상징성 ▲새 기득권이 될 주도 세력과의 조화 ▲지도자의 약한 권력 의지 등을 들 수 있다. 아무나 못 갖는 지도자 조건 이 중 가장 어려운 숙제는 ‘지도자의 약한 권력 의지’라고 할 수 있다. 새 지도자가 자신의 정치적 의지를 강하게 밀어붙이면, 새 기득권 세력과의 충돌은 불가피하기 때문이다. 반대로 새 지도자는 자신의 생존을 도모해야 한다. 생존 본능은 강한 권력 의지로 연결된다. 자신만의 새로운 비전을 실천하려는 정치적 의지가 강할 수도 있다. 이 때문에 자신을 옹립한 주도 세력과 마찰한 사례는 역사적으로 빈번하다. 왕은 왕권을 강화하려고 했고, 귀족은 이를 막으려고 했다.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왕과 귀족은 끊임없이 정치적 다툼을 벌였다. 이 때문에 많은 왕이 교체돼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옹립된 지도자는 대체로 권위가 약하다. 옹립된 지도자는 지배 질서가 규정한 정통성이 약한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그리고 옹립되는 과정 자체가 지도자로선 주도 세력에게 빚을 진 격이 되는 사례도 많다. 조선 태종은 정변을 일으켜 아버지를 몰아낸 후 즉위했다. 태종은 태조의 다섯 번째 아들이었다. 적장자 승계를 중시하는 유교 질서에선 도저히 후계자가 될 수 없었다. 하지만 태조는 막내아들을 세자로 책봉하는 악수를 뒀고, 사병을 혁파하려고 했다. 새 질서를 왕이 직접 부정하는 사태가 발생했고, 기득권 세력의 기반을 침범하려고 한 것이다. 태종은 적장자 대접을 받던 형 정종을 세자·왕으로 옹립한 후 형의 양자로서 왕위를 승계해 질서를 지키는 모양새를 갖췄다. 제1차 왕자의 난에서 주축은 주도 세력이 동원한 사병이었는데, 태종은 이들에게 빚을 진 셈이다. 하지만 그는 주도 세력 중 상당수를 정계에서 일시 퇴출시킨 후 사병을 혁파했다. 자신과 왕조의 생존을 유지하기 위한 안전판을 확실하게 확보한 것이다. 경제적 이권까지 거둬들이려고 해선 생존을 담보할 수 없다. 태종은 공신들이 저지르는 각종 비행을 적당한 선에서 눈감아줬다. 태종의 킹메이커 하륜은 도성 안에 조성된 신덕왕후의 능이 이장되자, 주변의 좋은 땅을 선점하기 위해 사위들을 동원했다. 하륜에겐 지금도 유능한 신하·부정부패의 상징이란 평가가 함께 따라다닌다. 조선 중종도 형 연산군 폐위 이후 옹립된 임금이었다. 엉겁결에 왕위에 올라 큰 빚을 졌기 때문에 중종은 공신들을 통제할 수 없었다. 하지만 핵심 공신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병사했다. 이후 중종은 조광조·김안로 등 대리인을 내세웠다가 토사구팽하는 정치술을 반복했다. 너무 유능해도, 너무 무능해도 안 된다 출마설 도는 주호영·윤한홍의 장 직격 조광조 일파는 중종이 한밤중에 비상계엄을 선포하면서 숙청됐다. 김안로는 아들의 초례가 예정된 날 체포됐다. 주도 세력으로선 왕이 너무 유능하거나 정치에 밝으면 곤란하다. 그렇다고 너무 무능하거나 막 나가도 안 된다. 지나치게 막 나가서 폐위된 대표적인 왕은 고려 충혜왕이었다. 충혜왕은 아버지 충숙왕이 양위해서 즉위했다. 당시 고려 왕은 원나라 사신이 하루아침에 폐위해 귀양을 보낼 수 있을 정도로 권위가 없었다. 고려 친원파의 권력은 왕보다 더 강했다. 그리고 고려엔 원나라 제2황후 기황후의 오빠 기철이 있었다. 고려 왕은 정상적으로 즉위하더라도 원나라·친원파가 사실상 인준해야 왕 노릇을 할 수 있었다. 즉위하는 임금마다 옹립된 지도자나 다름없었다. 충혜왕은 즉위 후 아무나 성폭행하는 기행을 저질렀다. 성폭행 대상 중엔 서모 경화공주도 있었다. 이 사실은 원나라 사신에게도 알려졌다. 결국 충혜왕은 폐위돼 귀양 가던 중 사망했다. 한편으로 충혜왕은 폭력배들을 자신의 측근 세력으로 양성한 후 권문세족이 독점하던 유통구조 개선을 통해 재정을 확충하려고 했다. 아울러 권문세족의 사유지를 혁파하려 하는 등 이들의 경제기반을 뒤흔들려고 했다. 충혜왕이 폐위된 결정적인 계기는 기철의 건의였다. 원나라는 기철의 건의를 받아들여 충혜왕을 폐위했다. 충혜왕은 폐위되던 순간 사신으로부터 발길질을 당하는 수모를 겪기도 했다. 윤석열 전 대통령이 주도했던 12·3 비상계엄 1주년을 맞아, 국민의힘 의원 25명은 사과 성명을 발표했다. 이들 대부분은 소장파 성향의 초·재선 의원들이었다. 이들은 지난 1년 동안 꾸준히 당에 비상계엄 관련 사과와 당의 혁신을 요구했기 때문에 딱히 특별할 것은 없었다. 하지만 ‘원조 친윤’ 중 1명으로 평가받는 국민의힘 3선 윤한홍 의원이 국민의힘 장동혁 대표에게 비상계엄 관련 사과를 요구한 것은 이례적이었다. 윤 의원은 지난 5일 진행된 국민의힘 ‘이재명정권 6개월 국정평가 회의’ 도중 장 대표에게 “윤 전 대통령과의 인연과 골수 지지층의 손가락질을 다 벗어던지고, 계엄 굴레에서 벗어나자”고 요구했다. 이어 “국민의힘은 비상계엄이 잘못됐단 인식을 아직도 못한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데 계엄을 벗어던지고, 국민께 어이없는 판단의 부끄러움을 사과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장 앞에서 사과 요구 이는 장 대표가 지난 3일 비상계엄에 대해 사과하지 않고 “비상계엄은 의회 폭거에 맞서려던 계엄이었다”고 주장한 것에 대한 반박이었다. 장 대표는 이날 윤 의원의 비판을 들은 후 고개만 살짝 숙인 채 굳은 표정을 유지했다. 국민의힘 6선 주호영 국회부의장도 장 대표를 강하게 비판했다. 주 부의장은 지난 8일 대구 지역 언론인과의 정책토론회 중 장 대표를 일컬어 “자기 편을 단결시키는 과정을 밟다가 중도가 도망간다면 잘못된 방법”이라고 주장했다. 이어 “장 대표는 ‘12월3일까진 지켜봐 달라’고 말했고, 그 이후엔 민심에 따르는 조치가 있을 거라고 기대했지만, 그런 말을 하지 않아서 당내 반발이 많다”고 강조했다. 주 부의장은 “윤 전 대통령은 폭정을 거듭하다가 탄핵당했다”며 “비상계엄도 김건희 여사 특검을 막으려던 것이 아닌가 짐작만 할 뿐”이라는 등 윤 전 대통령도 강하게 비판했다. 주 부의장과 윤 의원은 광역자치단체장 선거 출마 가능성이 있다는 공통점이 있다. 주 부의장은 이날 대구시장 출마 가능성에 대해 “준비는 많이 해왔고, 이른 시일 안에 의견을 결정하겠다”고 밝혔다. 윤 의원은 지난 2021년 경남도지사 출마 의사를 내비쳤다가 입장을 선회했던 바 있다.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이 지난 2월 공개한 명태균씨의 전화 통화 녹취엔 “윤 전 대통령과 김건희 여사가 윤 의원의 경남도지사 출마를 막았다”는 취지의 대화가 공개됐다. 지방선거를 약 6개월 앞두고 있는 시점이었다. 주 부의장처럼 출마 가능성을 암시한 것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지방선거는 국회의원에게는 매우 중요한 정치적 이벤트다. 국회의원이 지역구에서 이익을 거두는 방법엔 ▲지역구 내 지방선거 공천 ▲중앙정치에 지역 이해관계 반영 등이 있다. 지방선거에선 국회의원이 공천·조직 동원 등에 행사하는 영향력이 절대적이다. 민주당 이상헌 의원은 기초의원 공천 대가로 수천만원을 받은 정치자금법 위반 혐의로 기소돼 징역형 집행유예를 선고받고, 현재 항소심 재판을 받고 있다. 새누리당(현 국민의힘) 박순자 전 의원도 기초의원 공천 대가로 수천만원을 받은 혐의가 유죄로 인정돼 지난 3월 징역형을 확정받았다. 힘 못 쓰는 2가지 이유 국민의힘 대표를 지냈던 개혁신당 이준석 대표는 지난 2월 <일요시사>와 만나 “국민의힘은 김종인 선거대책위원장·이준석 대표 체제 외엔 선거에서 이겨본 적이 없다”고 단언했다. 실제로 국민의힘은 지난 2016년 이후 지난 2022년 대선·지방선거 외엔 참패를 거듭했다. 국민의힘이 선거에서 힘을 못 쓰는 이유로는 크게 2가지가 거론된다. 하나는 자체적으로 선거 후보를 양성하는 게 아니라, 선거가 임박해 외부 명망가를 데려와 주요 선거 후보로 옹립하는 특성이다. 다른 하나는 영남·강원 등 핵심 텃밭에 자리 잡아 중앙정치보다 지역구 기반 다지기에 집중하는 정치인 집단이다. 세간에선 이들을 일명 ‘언더 찐윤’이라고 부른다. 하지만 선거 참패가 이어지면, 중앙정치에 끼칠 수 있는 영향력도 줄어든다. 영향력이 줄면, 지역의 이익을 중앙정치에 반영하기 어렵다. 국회의원이 지역구에서 이익을 거둘 방법·영향력을 모두 잃는다는 것은 언더 찐윤 의원들에게 매우 치명적이다. 아무리 중앙정치·전국 단위 선거에 큰 관심을 두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정당이 정권 획득 가능성이 아예 없는 수준으로 추락하는 것은 매우 곤란하다. 그 정당에 소속된 국회의원과 이해관계를 교환해야 할 이유가 사라지기 때문이다. 21세기 이후 국민의힘에서 배출한 대선후보는 ▲한나라당 이회창 전 총재 ▲이명박·박근혜·윤석열 전 대통령 ▲홍준표 전 대구시장·김문수 전 고용노동부 장관 등이다. 이들의 대체적인 공통점은 ▲전국적 인지도 ▲정치적 상징성 ▲낮은 당 장악력 등이다. 대선 출마 당시 “당 장악력이 낮다”는 평가를 받지 않았던 대선후보는 이 전 총재·박 전 대통령밖에 없었다. “당 장악력이 낮다”는 명제는 국민의힘 친윤계 의원들에게 매우 중요했다. 당 장악력이 높은 대통령·대권주자는 의원들과 굳이 이익을 주고받을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다. 언더 찐윤 성향 의원들은 국민의힘 유승민 전 의원·국민의힘 한동훈 전 대표·국민의힘 안철수 의원·이 대표 등 수도권에 기반해 중도 공략 의지가 강한 정치인과의 불화가 잦다. 이들과 이해관계·성향·기질이 다르기 때문이다. 다른 것이 많아서 당권을 다투거나 알력이 있을 가능성도 큰데, 결국 화합하기 어렵다. 살기 위해 충돌하는 장 VS 친윤 “우리끼리 총구 안 돼” 의견 고수 언더 찐윤 의원들이 언론 노출을 꺼리는 성향도 ‘당 장악력이 낮은 적절한 대권주자’를 선호하는 현상과 맞물린다. 언더 찐윤의 관점으로 보자면, 윤 전 대통령은 자멸해서 사라졌다. 한 전 대표·안 의원은 수도권 엘리트 성향이 강하다. 지난 8월 당 대표 선거에 출마했던 국민의힘 조경태 의원은 언더 찐윤 성향 의원들을 청산 대상으로 지목했다. 이런 상황에서 두드러진 사람이 바로 장 대표였다. 장 대표는 정치 경력이 짧으면서도 한 전 대표와 결별한 이력이 있다. 지난 2월엔 백봉신사상을 수상할 정도로 신사적 이미지도 강했다. 국민의힘 내 강성 보수 성향 당원들은 장 대표를 선택했다. 이후 장 대표는 범보수 대권주자로 주목받았다. 코리아정보리서치가 지난 6일부터 이틀 동안 전국 만 18세 이상 남녀 1000명을 대상으로 진행한 범보수 차기 대선후보 적합도 여론조사에서도 21.3%의 지지를 얻어 1위를 차지했다. 하지만, 장 대표에겐 정치적 기반이 없다. 대권주자에게 필요한 것은 독자적인 정치 기반이다. 대선에 출마하지 않더라도, 독자적인 정치 기반이 없으면 정치 생명을 길게 유지할 수 없다. 장 대표는 장외집회 개최 위주로 정치활동을 이어갔다. 장외집회에선 이재명 대통령을 강하게 비난하는 강성 발언을 주로 내놨다. 국민의힘 양향자 최고위원은 지난달 29일 대전 장외집회에서 “윤 전 대통령의 비상계엄은 불법이었고, 국민의힘은 그 불법을 방치했다”고 주장했다가 강경 보수 성향 당원의 비난을 받았다. 장 대표와 국민의힘 김민수 최고위원은 국민의힘을 강경 보수의 길로 이끄는 ‘투톱’이다. 그런데 지방선거를 6개월 앞둔 시점이기 때문에 둘 사이에 충돌이 일어난다. 지방선거는 이들의 정치적 삶과 죽음을 좌우할 가능성이 있다. 장 대표와 국민의힘 의원들이 충돌하는 결정적인 지점은 살고자 하는 의지다. 윤 의원이 장 대표를 비판했다는 사실은 “국민의힘 구 친윤계가 장 대표를 통제불능으로 인식했을 가능성이 있다”는 분석으로 연결된다. 강경 보수 성향이 짙어지면, 선거의 캐스팅보트로 인식되는 중도층의 선택을 받지 못한다. 친윤계 의원들에겐 당과 개인의 이익이 모두 줄어드는 악순환으로 이어질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렵다. 조 의원은 지난 8월 <일요시사>와 만나 “강경 보수 성향 유권자들의 선택지는 어차피 국민의힘밖에 없다”면서 중도 공략 중요성을 강조했다. 이것이 지방선거를 6개월 앞두고, 친윤계 의원들이 장 대표를 강하게 비판한 이유와 맞물릴 가능성이 크다. 장 대표의 실질적 임기는 지방선거 결과에 달렸다. 따라서 장 대표에게 주어진 시간은 6개월 정도다. 장 대표는 이 안에 강경 보수 세력을 자신의 독자적인 기반으로 삼으려 할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렵다. 옹립하는 세력과 옹립되는 수장은 각자의 삶과 죽음이 걸려 있어 긴장 관계가 될 수밖에 없다. 장 대표에 대해선 “국민의힘, 나아가 보수 진영의 진정한 1인자가 될 만한 기반이 부족하다”는 다수의 분석이 나온다. 장 대표와 친윤계의 이해관계는 여기서 엇갈릴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렵다. 남은 6개월 빠듯한 시간 새누리당 정옥임 전 의원은 지난 9일 CBS 라디오 <박재홍의 한판승부>에 출연해 “주 부의장은 신중한 사람이지만 현실감각이 굉장히 빠르다”며 “장 대표는 화장을 지운 여자의 얼굴처럼 다 보여줘서 장 대표 체제 종언은 이제 뚜껑만 열리면 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장 대표에게 남은 시간은 불과 6개월이다. 부족한 것은 결국 시간이다. 하지만 장 대표는 윤 의원·주 부의장의 비판에 “우리끼리 총구를 겨눠선 안 된다”며 “싸워야 할 대상은 이재명 독재정권”이라고 반박했다. 장 대표는 흔들리고 있지만, 한편으로는 흔들리지 않고 있다. 장 대표와 구 친윤계는 과연 타협점을 찾을 수 있을까? <ctzxp@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