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시사 정치팀] 허주렬 기자 = 7·30재보선이 끝난 이후 2년가량 전국단위 선거가 없는 선거 공백기, 정치권에 ‘무선거 증후군’이 심각한 수준이다. 정부와 여당은 대선공약이나 민심과는 괴리된 정책을 밀어붙이고 있고, 야당은 극심한 계파 갈등 속 무기력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여·야·정의 이러한 행태는 가까이에 선거가 있었다면 일어나기 힘든 정치행위라는 지적이 나온다.
7·30재보선 이후 2016년 4월 총선까지 21개월간은 전국단위 큰 선거가 없다. 정부와 국회가 잘하고 있는지, 못하고 있는지를 심판하는 잣대가 없는 지금과 같은 시기에는 민심과 괴리된 정치행위가 일어날 가능성이 높다.
밀어붙이는 당·정
아니나 다를까. 작금의 정부와 국회의 행태는 민심은 안중에도 없는 ‘그들만의 리그’가 한창이다. 우선 정부와 여당은 추석연휴가 지나자마자 담뱃값, 주민세, 영업용자동차세 인상 등 국민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서민 부담이 커지는 ‘서민증세안’을 줄줄이 꺼내들었다. 이는 지난 총·대선 과정에서 “증세 없는 복지확대”를 외쳤던 박근혜 대통령과 새누리당의 약속을 깨는 것이다. 또 부자들은 봐주고 서민들의 호주머니만 터는 셈이어서 조세 정의에도 어긋난다는 지적이 나온다.
특히 가장 논란이 되고 있는 담뱃값 인상의 경우 정부가 내세우는 표면적 이유는 ‘국민 건강을 위한 흡연율 감소’지만, 보건복지부가 아닌 기획재정부에서 이를 강력히 밀어붙이고 있다는 점에서 부족한 세수확보 때문 아니냐는 의구심을 낳고 있다. 때문에 야당과 시민단체를 중심으로 “지난 이명박정부에서 추진됐던 이른바 ‘부자감세’ 철회가 우선이다”라는 요구가 높지만 당·정은 아랑곳하지 않고 있다.
최대 현안인 세월호특별법 제정과 관련해서도 당·정은 초강경 입장을 고수하며 파행 국정운영의 단초를 제공하고 있다. 심지어 ‘세월호 지우기’를 노골화하고 있다는 정황도 곳곳에서 감지된다. ‘세월호 사고 직후 살릴 수 있었던 수많은 생명을 왜 살리지 못했나?’라는 의문이 여전한 상황에서 박근혜 대통령은 지난 16일 국무회의에서 “(세월호 참사는) 그동안 대부분 문제점이 드러났고, 이제 국가혁신을 추진해야 할 때다”라며 “하루빨리 세월호법을 통과시키고 유가족 피해보상 처리를 위한 논의에 시급히 나서달라”고 주문했다.
세월호 희생자 유가족들이 실효성 있는 진상규명을 위해 세월호법으로 만들어질 진상조사위원회에 수사권·기소권을 넣어야 한다는 요구에 수개월째 침묵했던 박 대통령의 느닷없는 이러한 언급은 “(세월호는) 이제 끝났다”는 선언으로 받아들여진다. 이는 국민의 안전을 지키지 못한 국가의 직무유기를 시간만 끌다 덮겠다는 것과 다를 바 없다.
특히 박 대통령은 희생자 유가족들의 요구에 대해 “삼권분립과 사법체계의 근간을 흔드는 일로 대통령으로서 할 수 없고 결단을 내릴 사안이 아니다”면서도 “(특별검사 추천위원회의 여당 몫 추천위원을 야당과 유가족의 동의를 거쳐 추천한다는) 여야의 2차 합의안이 마지막 결단이었다”라고 말했다.
박 대통령이 세월호법 입법에 대해선 국회의 영역이라며 삼권분립에 위배돼 어쩔 수 없다고 하면서도 여야의 2차 협상안이 마지노선이라고 밝힌 것은 논리적 모순을 넘어 이것이야 말로 삼권분립에 위배된다는 지적이 나온다.
새정치민주연합 박영선 원내대표는 “대통령이 삼권분립 운운하면서 세월호법 가이드라인을 제시하는 것은 모순적 통치행위”라며 “박 대통령이 국회에 최후통첩을 날리는 어처구니없는 사태는 결국 청와대가 뒤에서 (세월호법 협상을) 지휘했음을 드러낸 것이다”라고 말했다.
당·정, 민심 괴리된 정책 행보 속 ‘세월호 지우기’
무기력한 야당…계파 갈등에 매몰돼 존재감 상실
모순된 주장임에도 불구하고 사실상의 가이드라인으로 비춰진 박 대통령의 발언에 여당은 ‘2차 합의안 이상의 양보는 없다’는 입장을 분명히 하고 있다. 심지어 교육부는 전국교직원노동조합(이하 전교조)이 주도하는 ▲애도리본 달기 ▲점심 단식 ▲세월호법 제정 요구 학교 앞 1인 시위 ▲세월호 관련 공동수업 등에도 제동을 걸며 세월호 지우기에 나섰다. 교육부가 각 시·도 교육청에 이를 금지하는 공문을 내려 보낸 것이다.
교육부가 내세운 명분은 “교육의 정치적 중립성을 훼손하고 가치판단이 미성숙한 학생들에게 편향된 시각을 심어줄 우려가 있다”이다. 그러나 애도리본 달기조차 교육부가 나서서 막으려는 것은 국가가 국민의 감정마저 통제하려는 것 아니냐는 의구심과 함께 강한 반발을 야기하고 있다.
이석문 제주교육감은 지난 18일 CBS라디오 <김현정의 뉴스쇼>와의 인터뷰에서 “(리본을 달고 떼는 것은) 자기 마음의 표정들일 텐데, 이것을 간섭한다는 것은 민주주의를 후퇴시킬 수 있다”고 비판했다.
여당 내부에서도 반대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지난 17일 당 최고중진연석회의에서 비주류 맏형격인 이재오 의원은 “출구를 열어주는 정치를 해야지 출구를 있는 대로 탁탁 틀어막아 버리면 결국 그 책임은 정부·여당에 돌아간다”며 “협상이라고 하는 것은 끊임없는 인내와 서로 간의 양보를 통해 하나의 결실을 이뤄내는 것인데, 청와대부터 당까지 일사불란하게 ‘이게 마지막’이라고 하는 게 말이 되느냐”고 돌직구를 날렸다.
사실상 삼권분립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다는 정황도 곳곳에서 포착되고 있다. 정치검찰이라는 오명 속 신뢰도가 바닥까지 떨어진 검찰은 <산케이신문> 가토 지국장의 세월호 참사 당일 박 대통령의 사라진 7시간에 대한 기사를 문제 삼아 대통령에 대한 명예훼손 혐의로 사법처리할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검찰이 대통령의 심기를 살피며 움직이는 것 아니냐는 비판이 나온다.
이에 일본은 물론 미국 <월스트리트저널>과 국경 없는 기자회 등 해외언론과 언론단체들은 한국의 언론자유 침해에 대한 우려를 제기하고 있다.
최근 국가정보원의 정치개입 혐의에 대한 1심 재판부(재판장 이범균 부장판사)가 “선거 기간 정치개입은 했지만 선거개입은 아니다”라는 요지의 판결을 내놓은 것을 두고도 사법부가 청와대의 눈치를 살핀 끝에 나온 재판 아니냐는 지적이 나온다.
당장 수원지법 김동진 부장판사는 법원 내부 통신망 코트넷에 올린 ‘법치주의는 죽었다’라는 제목의 글에서 “국정원이 대선에 불법 개입한 점은 삼척동자도 다 안다”며 “재판장 스스로 가슴에 손을 얹고 양심에 따라 정말 선거개입의 목적이 없었다고 생각했는지 헛웃음이 나왔다”고 적었다.
그는 또 “선거개입과 관련이 없는 정치개입은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이것은 궤변”이라며 “(원세훈 선거법 무죄 판결은) 정의를 위한 판결인가, 아니면 재판장이 고등법원 부장판사 승진심사를 목전에 두고 입신영달을 위해 사심을 담아 쓴 판결인가. 나는 후자로 생각한다”고 강도 높게 비판했다.
무기력한 야당
야당도 민심을 외면한 그들만의 리그가 한창이다. 지난 총선부터 시작해 7·30재보선까지 주요 선거에서 유리한 국면에도 불구하고 사실상 전패한 야당은 세월호법 정국에서 갈피를 못 잡고 심각한 내부 계파 갈등에 매몰돼 정부와 여당을 견제하는 견제자로서의 역할을 하지 못하고 무기력한 모습만 보여주고 있다.
정치주체들의 이러한 행태는 가까이에 선거가 있었다면 일어나기 힘든 정치행위다. 정치권 한 관계자는 “무선거 기간이라고 민심을 무시해도 되는 것은 아니다”라며 “쌓였던 민심은 다음 선거에서 폭발할 수도 있고 시위 등의 방법으로 다양하게 나타날 수 있다. 정부든, 국회든 국민으로부터 권한을 위임 받아 국가를 운영한다는 점을 되새겨야 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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