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시사=정치팀] 김명일 기자 = 세월호 참사의 여파로 6·4지방선거 출마자들이 우후죽순 '안전공약'을 쏟아내고 있다. 하지만 참사 이후 보름여 만에 급조한 공약은 불확실한 재원 마련 방법 등으로 또 다른 논란을 야기하고 있다. 일각에서는 이를 두고 "우물에서 숭늉 찾는 격"이란 비아냥거림까지 들리고 있다. <일요시사>가 황당무계하기 이를 데 없는 후보들의 묻지마식 안전공약을 집중 취재했다.
세월호 참사가 지방선거의 판도를 180도 바꿔놓고 있다. 올해 초까지만 해도 뜨겁게 달아오르던 선거분위기는 세월호 사태 이후 찬물을 끼얹은 듯 차갑게 식었다. 세월호 참사에 대한 국민적 추모 분위기가 이어지면서 거리에선 확성기와 선거로고송 등을 찾아볼 수 없게 됐고, 합동연설회나 후보 선출 경선 등도 대부분 차분하게 치러지고 있다.
묻지마 안전공약
한편 세월호 애도 국면이 계속되면서 후보들은 우후죽순 안전공약을 쏟아내고 있다. 세월호 국면에서 다른 주제는 사실상 금기어가 됐고, 내놓아도 별다른 관심을 받지 못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불과 보름여 만에 급조된 공약들은 또 다른 논란을 야기하고 있다.
우선 중앙선관위가 지난 5일 홈페이지를 통해 공개한 예비후보들의 주요공약을 살펴보면 대부분 안전공약에 방점이 찍혀 있었다. 무작정 안전 관련 예산을 늘리겠다거나, CCTV를 몇 대 더 설치하겠다는 식의 보여주기 공약이 주를 이뤘다.
실제로 예비후보들의 안전공약을 살펴보면 서울시장 선거의 경우 새누리당 김황식 예비후보는 5대 공약 중 첫 번째로 '재난·재해에 강한 서울'을 내걸고 취임 즉시 주요시설물과 안전우려지역에 대해 전수조사를 실시, 도시재난 안심매뉴얼을 제정하며 도시안전 컨트롤타워를 정비하겠다고 밝혔다.
그런데 김 후보는 안전공약을 제1공약으로 제시하면서도 재원 조달 방안은 '시예산'이라고만 간단히 밝혔다. 심지어 새누리당 정몽준 예비후보는 지난 2일 서울 지하철 사고가 발생하자 불과 4일 만에 무려 1조원을 투입해 노후 차량 및 시설을 교체하겠다는 초대형 공약을 발표했다.
그러나 정확한 재원 마련 방법은 제시되지 않았다. 정 후보는 지난 18대 총선에서 뉴타운 지정과 관련해 허위공약을 한 혐의(공직선거법 위반)로 불구속 기소돼 벌금 80만원을 선고받은 전력이 있다.
안산 단원고가 소재하고 있는 경기도지사 선거에서도 안전공약이 쏟아져 나왔다.
우선 새정치민주연합(이하 새민련) 예비후보들을 살펴보면 김상곤 예비후보는 안전부지사 및 경기도안전관리위원회 도입 공약을 발표했고, 김진표 예비후보는 경기도재난위험평가제도 도입, 지역특성을 반영한 민방위훈련 분기별 실시, 범죄예방 환경디자인 확대, 안심마을 조성, 여성 1인가구 방범시스템 구축 등을 공약했다.
원혜영 예비후보는 어린이 보호구역 CCTV 100% 설치 등을 공약했다. 하지만 재원 마련 방법에 대해서는 하나같이 모르쇠로 일관했다. 원 후보의 경우는 재원 마련 방법에 대해 도예산과 더불어 교육청의 협력을 얻겠다고만 했으며, 김상곤 후보는 구체적인 재원 마련 방법을 언급하지 않았다.
새누리당에서는 경기지사 남경필 예비후보와 정병국 예비후보가 안전대책을 놓고 공방을 벌이기도 했다. 남 후보는 경기도 내에 안전처를 설립하고 안전부지사직을 신설하겠다는 정 후보의 공약에 대해 현실성이 떨어진다고 일갈했다.
세월호 사태로 안전공약 '우후죽순'
공약인데 앞뒤 안 가리고 보름 만에?
지나친 안전 몰두 공약도 있었다. 새민련 이춘희 세종시장 후보는 세종시를 '국제안전도시'로 키우겠다고 선언했다. 이 후보는 "오는 2018년까지 WHO(국제보건기구)의 국제안전도시 인증을 받겠다"며 "총 세출 예산의 1.3% 수준인 재난방재예산을 2018년까지 2% 이상으로 끌어올리겠다"고 밝혔다.
이외에도 이 후보는 세종시의 재난·안전관리를 총괄할 시장 직속의 안전총괄기획관을 신설하고 세계적인 수준의 재난안전전문가를 스카우트해 오겠다고 공약했다.
새민련 권선택 대전시장 후보는 '안전한 대전'을 첫 번째 공약으로 제시하면서 각종 재난 발생(인명, 재난피해 등)을 매년 10%씩 감축하겠다고 공약했다. 하지만 아무리 안전대책을 철저히 세운다고 해도 안전사고를 매년 10% 감축시키기란 어려운 일이다. 때문에 권 후보의 공약은 사실상 슬로건에 불과한 공약이 아니냐는 평가를 받아야만 했다.
게다가 현역 단체장 등은 아직 주요공약을 발표하지 않고 있는데, 이들이 본격적으로 선거운동을 시작하면 이 같은 묻지마 안전 공약은 더욱 늘어날 것이란 전망이다.
여기에 언급된 후보들뿐만 아니라 최근 후보들이 우후죽순 발표하고 있는 안전공약은 많은 문제점을 안고 있었다. 대부분의 후보들이 공약을 임기 내에 이행하겠다면서도 재원조달 방안은 국비나 시비로 마련하겠다는 안일한 생각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전국적으로 안전공약이 범람하는 가운데 국비 지원이 일괄적으로 이뤄질 가능성은 제로에 가깝다. 그렇다고 재정자립도가 갈수록 낮아지고 있는 지자체들이 당장 수많은 안전공약을 자체적으로 시행하기도 어려울 것이라는 지적이다. 게다가 공약의 내용을 살펴보면 위기관리 대응체계, 매뉴얼과 컨트롤타워 정비 등 비슷한 내용을 나열하는 수준에 그쳤다는 지적이다.
또 중구난방 식으로 쏟아져 나온 안전공약이 기존 정부 정책과 엇박자를 낼 가능성도 있다. 일례로 지자체마다 재난 컨트롤타워 신설을 약속하고 있는데, 이 같은 지자체 컨트롤타워가 중앙 컨트롤타워와 충돌하며 지휘체계에 혼선을 가져올 가능성도 있다.
정치권의 한 관계자는 최근 범람하는 안전공약들에 대해 "사고 보름 만에 급조한 공약에 문제가 없다면 오히려 이상한 것 아니냐"며 "급조된 안전공약들로 시민들의 안전을 지킬 수는 없을 것"이라고 지적하기도 했다.
특히 안전공약에 밀려 정작 중요한 지역 현안들은 후순위로 밀리거나 외면 받는 상황도 심각한 문제점으로 지적되고 있다. 세월호 사태로 이번 지방선거는 그야말로 묻지마 선거로 전락하고 있는 것이다. 지방선거를 계기로 획기적인 지역발전을 기대하던 유권자들은 갑작스런 묻지마 선거에 적잖이 실망하고 있다.
안전도 '묻지마'
그러나 묻지마 선거의 가장 큰 원인은 세월호 사태가 아니라 후진적인 우리나라의 선거제도에 있다는 지적이다. 현행 선거법에 따르면 후보자들은 공약이 없어도 입후보가 가능하다. 그러다보니 선거를 전혀 준비하고 있지 않던 정치인들이 지지율 추이에 따라 갑작스럽게 출마를 결심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는 것이다.
출마를 결심한 후에야 부랴부랴 공약을 만들어내다 보니 졸속 공약이 될 수밖에 없고, 시류에 편승한 공약만 남발하게 된다는 지적이다. 한 유권자는 "지금까지 안전에 대해 전혀 관심이 없다가 세월호 사태 이후 우후죽순 발표되는 공약을 어떻게 믿을 수 있겠냐"며 "투표를 한다고 해서 정말 안전한 사회가 만들어질지는 의문"이라고 일갈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