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기업 막후실세 ‘왕여사’ 열전

회사에 사모님 뜨면 건물이 ‘쩌렁쩌렁’

[일요시사=경제팀] 김설아 기자 = 재계 숨은 실세로 평가받는 ‘왕여사’들이 화제다. 왕여사는 창업주의 미망인으로, 가업을 물려받은 아들 뒤에서 기업을 움직이는 막후 조력자로 통한다. 가장 강력한 무기중 하나는 ‘노장의 힘’. 평소에는 잘 드러나지 않지만 결정적인 순간에 한방씩 해내며 기업의 구심점 역할을 톡톡히 해내고 있다. 산전수전에 공중전까지 경험한 왕여사님의 활약상을 짚어봤다.

국내 내로라하는 기업들은 대부분 창업주들이 작고하거나, 경영 일선에서 물러나고 2세 경영 시대로 접어들었다. 이 과정에서 창업주 부인이자 회장의 어머니인 이른바 ‘왕여사님’의 역할이 새삼 주목받고 있다. 왕여사는 기업의 숨은 실세로 통한다. 그들은 드러나지 않는 이면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보이지 않는
초고령의 힘

유업계 라이벌인 매일유업과 남양유업이 대표적 예다. 두 기업 창업주는 나이가 비슷하고 이북 출신이라는 점 등 공통점이 많아 곧잘 비교되곤 한다.

고 김복용 매일유업 창업주의 미망인인 김인순 명예회장은 79세 고령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왕성한 경영활동을 보이고 있다. 김 명예회장은 지난 3월 회사의 상근 등기이사로 재선임 됐다. 이사 재직기간만 8년차. 그는 아들이자 매일유업 최대주주인 김정완 회장을 도와 경영 전반을 챙기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김 명예회장은 지난 2005년 타계한 창업주와 경영 현장을 누비며 매일유업 치즈사업을 이끌어 온 것으로 전해진다. 2004년 적자를 감수하면서 250억원을 투입해 전라북도 고창에 자연치즈 공장을 세웠다. 당시 시장성을 놓고 많은 임원이 고개를 갸우뚱 했으나 ‘한국 낙농산업 육성을 위한 내 마지막 사업’이라며 밀어붙인 것은 업계의 유명한 일화다.


독실한 불교신자로 사회 활동에도 적극적이다. 1996년 ‘진암장학재단’을 설립해 어려운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지급하는 등 소외계층을 돕고 있다. 지난 2011년에는 조계종 사회복지재단에 매일유업 계열사 ‘제로투세븐’이 생산하는 영·유아 의류 4억원어치를 기증해 사회공헌활동 공로상을 받았다.

고 홍두영 남양유업 창업주의 미망인이자 홍원식 남양유업 회장의 어머니인 지송죽 이사도 85세의 고령이지만 아직 건재하다. 지 이사는 지난해 주총에서 이사로 재선임 되면서 1986년부터 무려 28년간 비상근 사내이사를 맡아왔다. 직위나 담당 업무 항목은 비어 있지만 지 이사는 그동안 그룹 경영에 간접적으로 참여해온 것으로 전해진다. 

지 이사의 경영참여는 회사의 성장과 궤를 같이한다. 지난 1967년 출시된 유아용 제조 분유 ‘남양분유’가 소위 대박을 터뜨렸고, 1978년 유업계 최초로 기업을 공개하고 주식을 상장한 시점부터다. 기업 몸집이 커지면서 가족 모두 팔을 걷어붙였다. 두 아들이 경영에 합류했고, 지 이사도 한때 남양유업 감사로 근무했다.

오너 경영 뒤 ‘창업주 미망인’ 영향력 높아
김인순·지송죽·이일향 등 사내이사 재선임

남양유업 계열사에도 이름을 등재했다. 최근 도마에 오른 빌딩상가 임대 업체 남양개발에 서 오랜 기간 등기임원을 맡아온 것으로 나타났다. 지 이사는 아들 홍 회장과 함께 2010년 초까지 등기임원에 이름을 올리고 회사 경영을 맡아온 것으로 전해졌다.

수산기업인 사조산업도 눈에 띈다. 이일향 명예회장은 고 주인용 사조그룹 창업주의 부인이자 주진우 사조그룹 회장의 어머니로 지난 3월 말 비상근 등기이사로 재선임 됐다.

1930년생인 이 명예회장의 나이는 올해 84세. 그는 그동안 비상근 감사로 사조산업의 경영에 간접적으로 관여해왔지만 2002년부터 비상근 등기이사로 경영에 참여하고 있다. 그가 사조산업 이사로 보낸 기간만 약 12년에 달한다.

이 명예회장은 한국 문단에서 왕성한 활동을 펼쳐온 것으로도 유명하다. 1979년 백수 정완영 선생으로부터 시조를 배우기 시작해 1983년 등단했다. 이후 시조 창작에도 전념해 중앙시조대상 신인상, 윤동주문학상, 노산문학상, 한국가톨릭문학상을 수상하는 등 한국 문학 발전에 지대한 공을 세웠다.


그룹 탄생부터
성장까지 기여

보다 직접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는 왕여사도 있다. 손복남 CJ고문이 그 주인공. 손 고문은 이맹희 전 제일비료 회장의 부인이자 이재현 회장과 이미경 부회장의 어머니로, 대외적인 직책을 맡고 있진 않지만 그룹에 적잖은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손 고문 역시 오늘날 CJ그룹이 있기까지 산파 노릇을 해온 것으로 전해진다. 지난 1993년 CJ그룹 모태인 제일제당이 삼성그룹에서 분리될 때, 손 고문은 자신이 보유한 옛 안국화재 지분을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의 지분과 맞바꿨다. 그로부터 5년 후, 맏아들인 이 회장에게 자신의 주식을 몰아주며 안정적인 후계구도를 완성했다. 이는 CJ그룹의 기틀을 세우는데 큰 역할을 했다는 평이다.

손복남 그룹 자금 업무 총괄 지휘
경영 노하우…산전수전 다 아는 노장

손 고문의 막후 정치는 이후에도 계속됐다. 삼성그룹에서 전문경영인으로 일하고 있던 동생인 손경식 회장을 불러 그룹을 맡김으로써 CJ가 삼성과 분리 후 연착륙할 수 있도록 했다. 딸인 이 부회장이 엔터테인먼트 사업을 막내 이재환씨가 광고대행사를 맡게 한 것도 손 고문의 의중이 작용한 것으로 전해진다.

이후에도 손 고문은 서울 남대문 본사에서 정기적으로 업무를 보고, 그룹의 공식 행사가 있을 때도 얼굴을 비추는 등 이 회장의 후견인 역할을 톡톡히 해 온 것으로 알려졌다.

업계 한 관계자는 “지난해 이맹희 회장이 이건희 회장과 벌인 재산분할소송에도 손 고문이 개입했던 것으로 안다”며 “최근에는 이 회장 구속으로 잠시 거리를 뒀던 그룹 인사권에까지 다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는 소리가 들린다”고 말했다.

남편 사망 후
‘여 총수’로

남편의 갑작스러운 사망으로 회사를 떠맡은 경우도 있다. 국내 ‘여성 CEO 1호’라 불리는 장영신 애경그룹 회장이 대표적이다. 장 회장은 1970년, 막내 아들인 채승석 애경개발 사장을 낳은 지 사흘만에 남편 고 채몽인 창업주를 심장마비로 떠나보냈다.

이후 남편 타계 1주기가 끝나자마자 경영수업을 받았고, 이듬해 8월 경영 최전선에 나섰다. 당시 경영 참여에 대해 주위 반대가 심했지만 장 회장은 40여년이 흐른 현재 장남 채형석 부회장과 함께 그룹을 잘 이끌고 있다는 평을 받고 있다.

양귀애 대한전선 명예회장도 남편을 여의고 경영 전면에 나섰다. 양태진 국제그룹 창업주의 막내딸인 양 명예회장은 서울대 음대를 졸업하던 해인 1969년 설원량 전 대한전선 회장과 결혼했다.

결혼 후 35년 동안 남편을 내조하며 가정주부로 지냈던 그는 2004년 남편이 뇌출혈로 급작스레 세상을 떠나면서 대한전선의 1대주주가 됐다. 이후 회사 경영은 전문경영인인 임종욱 부회장에게 맡기고 본인은 명예회장으로 회사 경영에 참여해 왔으나, 무분별한 투자로 경영난을 겪으면서 대한전선은 2009년 이후 강도 높은 구조조정을 진행 중이다.


이렇듯 재계에는 ‘뒤에서 앞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있는 왕여사들이 많다. 전문가들은 창업초기 오너 경영 강점을 2∼3세에게 잘 넘어가도록 교두보 역할을 하는 데 있어서, 왕여사들의 최대 강점이 드러난다고 입을 모은다.

한 관계자는 “창업주는 경영 능력이 뛰어나지만 2·3세들은 경영 능력에 대한 유전자가 없어 급변하는 경영 환경 속에서 위기를 맞을 가능성이 높다”며 “왕여사들은 창업 초기부터 산전수전 다 겪어봤던 노장의 힘과 노하우로 아들들에게 경영 조언을 하고, 기업 리스크를 줄이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sasa7088@ilyosis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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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세보다 무서운 산재와의 전쟁

탈세보다 무서운 산재와의 전쟁

[일요시사 취재1팀] 장지선 기자 = 이재명 대통령이 ‘산재와의 전쟁’을 선포했다. 건설 현장에서 근로자가 사망하는 사건을 줄이겠다는 취지다. 이 대통령이 칼을 휘두르자 기업은 납작 엎드렸다. 이 대통령의 행보를 보는 시각은 엇갈린다. 산재 사망사고가 끊이지 않는 만큼 단호한 조치가 필요하다며 환영하는 의견과 구조적 문제를 뒤로하고 기업 ‘잡도리’만 하고 있다는 의견 등이다. 건설업계에 칼바람이 불고 있다. 미국발 관세나 국내 경기 문제가 아니다. 산업재해(이하 산재)가 건설 현장을 뒤흔드는 중이다. 대통령은 여러 현안 중 산재로 인한 사망사고 근절을 국정 과제 첫머리에 올린 듯한 모습이다. 대통령 한마디 이재명 대통령이 반복되는 산재 사망사고의 고리를 끊겠다고 나섰다. 산재 사망사고가 발생한 기업을 법과 제도를 통해 처벌하겠다고 선언했다. 발언 수위도 나날이 세지고 있다. 본보기가 된 기업은 대통령이 일으킨 칼바람을 온몸으로 맞는 모양새다. 지난 5월 고용노동부가 발표한 1분기 ‘산업재해 현황 부가 통계’에 따르면 올해 1~3월 재해 조사 대상 사고 사망자는 총 137명(잠정)으로 지난해 같은 기간(138명)보다 1명(0.7%) 줄었다. 사망사고 건수도 같은 기간 136건에서 129건으로 7건(5.1%) 감소했다. 업종별로는 제조업이 29명으로 지난해보다 2명, 기타 업종(건설업과 제조업 이외 업종)이 38명으로 6명 감소했지만 건설업은 71명으로 오히려 7명 늘었다. 노동부는 부산 기장군 건설 현장 화재와 서울-세종고속도로 교량 붕괴 등 대형 사고의 영향으로 건설업 사망자 수가 증가했다고 분석했다. 지난 2월14일 부산 기장군 반얀트리 리조트 신축 공사장에서 불이 나 6명이 숨졌다. 또 같은 달 25일, 경기도 안성시 서울-세종고속도로 건설 현장 교량 상판 구조물이 붕괴해 4명이 목숨을 잃는 사고가 일어났다. 규모별로는 상시 근로자 50인(건설 업종은 공사 금액 50억원) 미만 사업장에서 올해 1분기 사망자는 83명으로 지난해보다 5명(6.4%), 사망사고 건수는 83건으로 7건(9.2%) 늘었다. 반면 50인 이상 대형 사업장과 대규모 공사 현장에선 사망자 54명, 사고 건수 46건으로 각각 6명, 14건 줄었다. 사망사고 유형별로는 ‘추락’ 62명, ‘끼임’ 11명, ‘물체에 맞음’ 16명으로 지난해와 비교해 각각 1명, 7명, 5명 감소했다. 화재와 폭발로는 10명, ‘붕괴’ 사고로는 11명이 목숨을 잃었다. 지자체별로는 경기(31명), 서울(17명), 경북(15명), 부산·전남(12명), 경남(11명), 충남(9명), 강원·울산(6명) 순으로 많았다. 산재로 인한 사망은 건설 현장에서 일어날 수 있는 최악의 사고다. 정부는 산재 사망사고를 줄이기 위한 각종 대책을 내놨다. 2022년 1월부터 시행된 중대재해처벌법(이하 중처법)도 그중 하나다. 중처법은 근로자의 사망사고 등 중대 재해가 발생했을 때 기업의 경영 책임자 등이 안전 보건 관리 체계 구축 등 의무를 위반한 것으로 확인되면 처벌하도록 하는 내용이 골자다. 취임 이후부터 직접 챙겨 국정 운영 계획에도 포함 문제는 실효성이다. 중처법이 시행된 이후에도 건설 현장에서 근로자가 죽는 일이 계속 일어나고 처벌은 ‘솜방망이’ 수준에 그친다는 지적이 끊이지 않았다. 결국 이 대통령이 칼을 빼 들었다. 이 대통령은 지난 12일 “비용을 아끼기 위해 누군가의 목숨을 빼앗는 것은 일종의 미필적 고의에 의한 살인, 또는 사회적 타살”이라고 비판했다. 필요하면 법을 개정해서라도 ‘산재 공화국’이라는 오명을 벗겠다는 뜻도 밝혔다. 이 대통령은 이날 국무회의에서 “일상적으로 산업 현장을 점검해서 필요한 안전조치를 하지 않고 작업하면 엄정하게 제지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며 “제도가 있는 범위 내에서 할 수 있는 최대의 조치를 해달라”고 주문했다. 사고 위험이 큰 업무를 하청과 외주를 통해 해결하는 ‘위험의 외주화’ 현상에 대해서도 지적했다. 이 대통령의 산재 사망사고 근절 ‘드라이브’는 점진적으로 거세지고 있다. 초기에는 주무 부처에 대책을 요구했다면 최근에는 직접 목소리를 내고 움직이는 식이다. 대통령이 직접 나서서 산재를 줄이라고 지시했는데도 불구하고 사망사고가 이어지자 특유의 행동력을 보이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실제 이 대통령이 고용노동부에 산재 관련 종합 대책을 주문한 뒤에도 ▲인천 맨홀 작업 노동자 질식사 ▲포스코이앤씨 노동자 끼임사 ▲경기 의정부 아파트 신축 현장 노동자 추락사 등의 사고가 일어났다. 불과 한 달 새 일어난 일이다. 지난달 6일 인천 계양구 병방동의 한 도로 맨홀 안에서 지하 시설물 조사 작업 중이던 노동자 1명이 의식을 잃고 1명은 실종됐다. 이들은 결국 사망했다. 조사 결과 이 사고는 용역 계약 위반에 따라 허가 절차 없이 진행하다가 발생한 인재로 드러났다. 법으로도 안 됐는데… 숨진 근로자는 산소 마스크 등 안전 장비를 제대로 착용하지 않은 채 작업하다 유독가스에 중독된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 이 대통령은 “현장 안전 관리에 미흡한 점이 있었는데 철저히 밝히고 법령 위반 여부가 있었는지를 조사해 책임자를 엄중히 조치하라”며 “후진국형 산업재해가 다시는 발생하지 않도록 현장 안전관리를 정비하고 사전 지도·감독을 강화하는 등 관련 부처도 특단의 조처를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지난달 28일 포스코이앤씨가 시공하는 경남 함양-울산고속도로 의령나들목 공사 현장에서 사면 보강 작업을 하던 60대 근로자가 천공기(지반을 뚫는 건설기계)에 끼어 숨지는 사고가 일어났다. 포스코이앤씨 시공 현장에서만 올해 들어 4번째 일어난 사망사고다. 지난 1월 경남 김해 아파트 신축 현장 추락사고, 경기도 광명 신안산선 건설 현장 붕괴사고, 대구 주상복합 신축 현장 추락사고 등도 줄을 이었다. 이 대통령은 “똑같은 방식으로 사망사고가 나는 것은 결국 죽음을 용인하는 것이고 아주 심하게 얘기하면 법률적 용어로 미필적 고의에 의한 살인”이라고 질타했다. 그러면서 “(산재 사망사고가 나면) 여러 차례 공시하도록 해서 투자를 안 하고 주가가 폭락하게 (해야 한다)”고도 말했다. 여름휴가를 마치고 복귀 첫 일성도 산재 관련 발언이었다. 이 대통령은 “앞으로 모든 산업재해 사망사고는 최대한 빠른 속도로 대통령에게 직보하라”고 지시했다. 산재 사망사고를 직접 챙기겠다는 의지를 다시 한번 천명한 것이다. 사과문 내고 또 반복되다 지난 9일 강유정 대통령실 대변인을 통해 전해진 이 대통령의 발언은 전날인 8일 경기 의정부 신축 아파트 공사 현장에서 안전망 철거 작업을 하던 50대 근로자가 6층 높이에서 떨어져 숨진 사고가 영향을 미쳤다. 이 대통령이 선포한 ‘산재와의 전쟁’에 기업은 바짝 얼어붙은 상황이다. 지난달 25일 경기 시흥 SPC 삼립 공장을 방문해 ‘중대산업재해 발생 사업장 현장 간담회’를 열었다. 해당 공장은 지난 5월 50대 여성 노동자가 작동 중인 컨베이어벨트에 끼어 사망했고 2022년과 2023년에도 여성 노동자가 각각 소스 교반기와 반죽 기계에 끼어 숨지는 등 중대 산재가 빈번하게 일어났던 곳이다. 이 대통령은 이날 간담회에서 SPC 근로자의 노동 시간 등을 자세히 물었다. 그러면서 “(산재가) 심야에 대체적으로 발생하고 12시간씩 4일간 일하다 보면 사실 심야 시간에 힘들다. 주의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며 “심야 장시간 노동 때문에 생긴 일로 보여진다”고 말했다. 이 대통령의 지적에 SPC 회장을 비롯해 그룹 관계자들이 쩔쩔맨 것으로 전해졌다. SPC그룹은 이 대통령이 다녀간 지 이틀 만인 지난달 27일, 8시간 초과 야근을 폐지하겠다는 대책을 내놨다. 제품 특성상 필수적인 품목 외에는 야간 생산을 최대한 없애 공장 가동 시간을 축소하겠다는 것이다. 또 주간 근무 시간도 점진적으로 줄여 장시간 근무로 인한 피로 누적, 집중력 저하, 사고 위험 등을 사전에 차단하겠다고 밝혔다. 포스코이앤씨는 지난달 29일 담화문을 내고 고개를 숙였다. 정희민 전 대표이사는 “어제(28일) 사고 직후 모든 현장에서 즉시 모든 작업을 중단했고 전사적 긴급 안전 점검을 실시해 안전히 확실하게 확인되기 전까지 무기한 작업을 중지하도록 했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협력업체를 포함한 모든 근로자의 안전이 최우선 가치가 되도록 필요한 자원과 역량을 총동원해 근본적인 쇄신 계기로 삼겠다”며 “또다시 이런 비극이 발생하는 일이 없도록 사즉생의 각오와 회사의 명운을 걸고 안전 체계의 전환을 이뤄내겠다”고 말했다. 하지만 정 전 대표의 사과는 엿새 만에 또다시 일어난 사고로 빛이 바랬다. 지난 4일 오후 경기 광명시 옥길동 광명-서울고속도로 민간투자사업 제1공구 현장에서 미얀마 국적 30대 근로자가 감전돼 심정지 상태로 발견됐다. 이 근로자는 병원으로 이송된 지 8일 만인 지난 12일 의식을 회복했다. 높아진 발언 수위·제재 조치 “왜 기업만 잡도리?” 의견도 정 전 대표는 사의를 표명하고 물러났다. 연이어 산재사고가 일어난 포스코이앤씨는 ‘본보기’가 될 가능성이 커진 상황이다. 일단 이 대통령은 포스코이앤씨에 대한 건설 면허 취소, 공공 입찰 금지 등 법률상 가능한 방안을 모두 찾아서 보고하라는 지시를 내린 바 있다. 국내 건설 면허 취소는 현행 건설산업기본법상 최고 수위의 징계다. 1994년 성수대교 붕괴 책임이 있던 동아건설산업에 내려진 사례가 유일하다. 건설 면허가 취소되면 신규 사업을 할 수 없고, 다시 면허를 취득한다고 해도 수주 이력이 없기 때문에 관급공사를 따내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하다. 경찰은 사고 관련 수사 전담팀을 만들고 고용노동부 안양지청과 함께 포스코이앤씨와 하청업체에 대한 압수수색에 돌입했다. DL건설도 대표이사를 비롯한 임원진 전원이 공사 현장에서 발생한 사망사고에 책임을 지고 일괄 사표를 제출하는 등 납작 엎드렸다. 특히 이 대통령이 휴가에서 돌아와 산재 관련 발언을 한 직후 터진 사고여서 충격파가 더 컸다. DL건설에서 사표를 제출한 임직원은 80여명, 공사를 중단한 현장은 44곳에 이른다. 이재명정부는 산재사고로 인한 사망자 비율을 2030년까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 수준인 1만명당 0.29명까지 끌어내리는 방안을 추진하기로 했다. 지난해 우리나라에서 발생한 산재로 인한 사망자 비율은 1만명당 0.39명으로 OECD 평균을 크게 웃도는 실정이다. 이 같은 내용은 ‘이재명정부 국정 운영 5개년 계획’에 포함됐다. 이 대통령이 지난달 수석보좌관 회의에서 “전 세계에서 또는 OECD 국가 중 산업재해율, 사망재해율이 가장 높다는 불명예를 이번 정부에서 반드시 끊어내겠다”고 의지를 드러낸 부분을 국정과제로 담은 것이다. 구조 문제 나 몰라라 일각에서는 이 대통령이 지나치게 건설업계만 잡고 있다는 지적도 제기된다. 관련 법과 제도가 시행되고 있는데도 사망사고가 끊이지 않는다면 구조적인 문제도 살펴봐야 한다는 것이다. 수주 경쟁이 과열되면서 저가 입찰이 늘고 안전관리에 소홀해지는 점이 산재로 이어지는 식의 고리를 끊어야 진정한 의미의 ‘근절’이 이뤄질 것이라는 분석도 있다. <jsjang@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