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시사=경제1팀] 김성수 기자 = 윤석금 웅진 회장과 정휘동 청호 회장. 정수기 시장에서 라이벌이었던 두 사람의 희비가 엇갈렸다. 게임이 되지 않았지만 이제 전세가 역전됐다. 신세가 완전히 뒤바뀌었다. 윤 회장과 정 회장의 길고 긴 인연과 악연, 그 시작인 1991년으로 거슬러 올라가 봤다.
'정수기 라이벌' 청호나이스와 코웨이가 전쟁을 시작했다. 청호나이스는 지난달 14일 자사 얼음정수기 특허 기술을 침해했다며 코웨이를 상대로 100억원 상당의 손해배상청구 소송을 냈다. 청호나이스는 "코웨이의 특허 침해로 약 660억원의 손해액이 발생한 것으로 추정된다"며 "이중 우선 손해액의 일부인 100억원을 청구했다"고 밝혔다.
600억대로 확대?
청호나이스는 2006년 이과수 얼음정수기를 출시하면서 개발한 하나의 증발기로 얼음과 냉수를 동시에 만드는 시스템을 특허 등록했다. 주요 수출 국가인 미국과 중국, 일본 등에서도 특허 등록을 마쳤다. 6년 뒤인 2012년 코웨이는 '스스로 살균' 얼음정수기를 출시했는데, 이 제품이 자사 특허 기술을 침해했다는 게 청호나이스의 주장이다.
반면 코웨이 측은 "얼음·냉수를 동시에 생성하는 청호 기술과 달리 우리 기술은 얼음·냉수 생성이 분리돼 있다"며 기술적으로 문제될 것이 없다는 입장이다. 업계 관계자는 "상황에 따라 100억대에서 600억대 소송으로 확대될 수 있다"며 "양측의 주장이 완강히 맞서고 있어 당장은 접점을 찾기 힘들 것으로 보인다. 자존심을 건 총력전을 예고해 앞으로 치열한 법정다툼이 불가피하다"고 말했다.
업계는 이번 소송을 두고 한 가지 의문을 제기한다. 왜 2년이나 지나서 소송을 제기했냐는 것이다. 이에 대해 청호나이스 측은 "2012년 특허 침해를 인지한 이후 지금까지 검증·자문 등 신중을 기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표면적으론 만년 2인자 꼬리표를 달고 있는 청호나이스가 분위기 반전용으로 꺼낸 카드가 아니냐는 분석이 나온다. 그도 그럴 게 코웨이는 정수기 시장에서 압도적인 점유율을 기록하고 있는 반면 청호나이스는 10%대에 그치고 있다. 더구나 코웨이를 비롯해 LG전자, 쿠쿠전자 등 후발주자들이 잇달아 얼음정수기를 출시하면서 청호나이스의 입지는 더욱 좁아진 상황이다.
'뒷북 경영' 꽁무니 따라가다
"따라했다" 100억대 소송 제기
일각에선 다른 의견도 나온다. '윤석금 회장이 코웨이를 끼고 있었더라면…'하는 가정이다. 이번 소송은 정휘동 청호 회장이 직접 결정할 정도로 의지가 강했다는 후문이다. 반대로 이번 소송을 지켜보는 윤 회장으로선 안타까울 수밖에 없다.
사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정 회장은 윤 회장 따라가기에 급급했었다. 사업 타이밍이 한 박자 느려 '뒷북 경영'이란 지적까지 나왔다. 내부 조직이 그랬고, 각종 서비스도 그랬다. 닮은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둘의 인연은 1991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윤 회장은 1989년 웅진코웨이를 설립해 정수기, 공기청정기, 비데, 연수기 등을 판매하기 시작했다. 1970년대 후반 미국으로 건너가 미네소타주립대학에서 화학공학을 전공한 정 회장은 1980년대 중반부터 미국 환경관리 업체에서 개발 엔지니어로 근무하다 윤 회장으로부터 스카우트 제의를 받고 1991년 파견근무 형태로 코웨이(당시 웅진코웨이) 제품개발팀에 합류했다.
정 회장은 2년 계약이 끝나자마자 1993년 청호나이스를 세웠다. 정 회장은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코웨이와 계약이 끝난 후 미국으로 돌아가려 했으나 함께 일하다 퇴사한 연구원들로부터 창업 제의를 받고 청호나이스를 설립했다"고 회고한 바 있다.
얼음정수기 전쟁 서막
자존심 건 총력전 양상
이때부터 두 사람의 악연이 시작됐다. 코웨이는 1998년 업계 최초로 '렌탈' 마케팅을 도입했다. 외환위기 당시 렌탈은 파격적인 방법이 아닐 수 없었다. 코웨이는 이와 함께 렌탈 영업과 제품을 정기적으로 관리해주는 '코디'제도도 새로 도입했다.
청호나이스는 출범 이후 정수기 시장에서 코웨이와 대등한 경쟁을 벌였지만, 코웨이가 렌탈·코디 마케팅을 도입한 뒤 격차가 확 벌어졌다. 코웨이의 새 서비스가 인기를 끌자 청호나이스도 그로부터 2년 뒤 '오너십'서비스란 새로운 렌탈 제도를 선보였다. 오너십이란 정수기 소유권을 고객에게 넘겨주고 대신 매월 일정 회비를 지급하도록 하는 판매 제도로, 코웨이의 렌탈과 크게 다르지 않다. 청호나이스는 그전까지 일시불 판매에 주력했었다.
청호나이스는 오너십을 도입하면서 '플래너'조직도 신설했다. 플래너는 렌탈 제품 정기점검, 필터 교환, 렌탈요금 관리 등의 업무를 수행하는 관리전문 주부사원이다. 역시 웅진코웨이의 코디와 동일한 개념이다.
우연일까. 2008년에도 양사의 프로젝트가 묘하게 오버랩 됐다. 코웨이는 그해 10월 새 판매 기법을 들고 나왔다. 정수기 등을 무료로 빌려주는 '페이프리'서비스를 도입한 것. 이른바 '공짜마케팅'이다. 이 서비스는 렌탈 고객이 페이프리 카드로 일정 금액 이상을 사용하면 월 렌탈료와 맞먹는 금액을 현금으로 고객 통장에 입금시켜 주는 방식이다.
청호나이스도 곧바로 새로운 사업모델을 발표했다. 청호나이스는 한 달 뒤인 11월 코웨이의 페이프리와 유사한 '머니백 개런티'서비스를 실시한다고 밝혔다. 이 서비스 역시 고객이 제휴카드로 결제하면 사용실적에 따라 적립되는 포인트 또는 현금으로 정수기 구입 및 렌탈 비용을 내는 방식이다.
뒤바뀐 운명
당시 코웨이는 "(청호나이스가) 상대가 되지 않기 때문에 크게 신경 쓰지 않는다"며 대수롭지 않게 넘어갔다. 청호나이스는 "모방이 아니다. 삼성과 LG 같이 서로 벤치마킹하는 '미투'경영기법으로 봐야 한다"고 불쾌한 기색을 감추지 않았다. 지금의 100억대 소송을 두고 당황한 코웨이와 의기양양한 청호나이스 모습과는 사뭇 다른 반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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