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시사=사회팀] 강현석 기자 = 서울 북촌에서 작은 소품샵을 운영 중인 김유하 작가. 전직 영화감독이라는 독특한 이력의 소유자인 그는 한국보다 일본에서 더 조명 받는 작가다. 현대적인 디자인과 동양적인 색감을 조합한 그의 섬유 작품들은 오늘도 진열장 곳곳에서 수줍은 고개를 내밀고 있다.
예나 지금이나 예술가 고유의 특질은 달라지지 않았다. 심상을 상징적으로 표현하는 것이다. 그리고 심상을 배제한 표현물들은 자본주의 시대에 이르러 '상품'이 됐다. 작가주의니 작가정신이니 하는 말 등은 결국 예술가가 지닌 고유의 정체성, 즉 오리지널리티와 연관이 있다.
카메라 대신 바늘
자수공예가 김유하 작가는 엄밀한 기준에서 '장인'으로 볼 수 없다. 대신 그는 '예술가' 집단에 가깝다. 촉망받는 영화감독이었던 그는 한 방송국을 거쳐 서울 북촌에 자리를 잡게 됐다. 부모님의 골동품 가게를 물려받은 이 예술가는 배우 대신 바늘을 자신의 '페르소나'로 삼았다.
"독립영화 연출은 2006년까지 했고요. 다수 영화제 수상 경력이 있고요(웃음). 하루는 방송국에 있는 선배가 미술감독을 해달라고 해서 잠시 일한다는 게 2010년까지 했어요. 돌아보니 드라마 스크립터가 돼 있었죠. 당연히 제 시간은 없었어요. 그때에 비하면 요즘은 여유로워졌죠. 늘 바쁘게 살았거든요. 합리화일 수 있겠지만 혼자 수를 놓거나 바느질을 하는 게 저한테 더 맞는 것 같다는 생각도 해요."
고대 철학자인 아리스토텔레스가 쓴 소고 중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예술에서 특출한 재능을 보이는 사람은 여지없이 '멜랑콜리'한 기질을 갖고 있다." 꽃이나 물고기 등이 그려진 김 작가의 작품은 얼핏 유토피아적인 세계관의 확장으로 해석된다. 그러나 앞서 밝혔듯 김 작가의 작품은 멜랑콜리한 정서의 연장선상에서 이해될 필요가 있다. 다른 상품과 달리 그가 만든 공예품이 이질적으로 느껴지는 이유다.
현대적 디자인·동양적 색감
다양한 섬유 작품들 선보여
영화감독 등 독특 이력 눈길
"전 미술을 전공하진 않았는데요. 영화를 배우면서 미장센을 공부했고, 미적 감각이 늘었죠. 그때는 좀 더 강렬한 걸 좋아했어요. 촬영에 쓰이는 유화 같은 것도 제가 그렸는데 지금 작업과 비슷한 부분이 있고요. 오만하게 들릴 수 있지만 전 어떤 물건이나 소품을 보면 머릿속에 도안이 짜져요. '이건 이렇게 만들면 되겠구나' 하고요. 시나리오를 영상으로 옮길 때 현장에서 동선을 짜고, 비어있는 공간(영상)을 구성하는 일을 7년 넘게 해서 그런지 구상에는 꽤 자신이 있는 편이죠."
김 작가는 파우치나 가방 등은 물론 컵받침 등 일상생활에서 쓰이는 공예품을 선보이고 있다. 워낙 패턴이 다양하고 조형적인 완성도가 높은 탓에 시장의 반응이 좋다고 한다.
그러나 정작 김 작가가 하고 싶은 작업은 덩치가 큰 것들이다. 일례로 김 작가는 '대형 삼베발'을 제작했는데 바늘로 천 위에 그림을 그리는 일이 그렇게 재미있었다고 한다.
"한 영화계 선배 중에 저처럼 자수를 하는 분을 봤는데요. '어떤 일을 하냐'고 물으니까 '실그림을 한다'고 하는 거예요. 말이 예쁘잖아요? 저도 하나 만들어보려고 했는데 마땅한 게 없더라고요(웃음). 그런데 제가 이 가게를 처음 맡았을 때만 해도 자수로 추상화처럼 표현하는 작업을 해보고 싶었어요.
하지만 판매를 해야 하니까 제 고집만 부릴 수는 없었죠. 그러다보니 오히려 대중의 기호에 맞추게 됐죠. 그렇지만 앞으로는 차근차근 제 작업에 필요한 기초를 다져야 하지 않을까 생각해요."
실로 그리는 그림
가령 김 작가는 병풍을 만든다고 했을 때 자수를 이용, 병풍 위에 이미지를 흘려 넣는 작업을 기획하고 있다. 그의 오랜 지인은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해 '잭슨 폴락'을 언급하기도 했다. 사람들의 시각을 제한하는 작업이 아닌 확장하는 형태의 작업이란 것이다. 김 작가 역시 "꽃을 보여주고 싶으면 직접 꽃을 그리는 게 아니라 사람들이 보고 '어, 꽃이네' 할 수 있는 그림을 그리고 싶다"고 포부를 밝혔다.
어린 시절부터 자신만의 고유한 영상 언어로 정체성을 표현해 온 김 작가. 앞으로 그가 구현할 '실로 된 조형언어'에 특별한 관심이 쏠린다.
[김유하 작가는?]
▲1998~2006 독립영화 감독 <몰락 취미를 꿈꾸다> 등
▲2009~2014 핸드메이드 편집샵 SSIAT 운영
▲2013 개인전 '초록실과 조각들'
▲불교문화대전(2013) 특선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