뿔뿔이 흩어진 범현대가 '정씨들' 현주소

한두 군데만 멀쩡…나머진 벼랑끝

[일요시사=경제1팀] 범 현대가의 '왕회장' 고 정주영 현대그룹 창업주가 세상을 떠난 지 벌써 13년이 지났다. 그의 동생들과 자식들은 현대그룹과 직간접적인 관계를 맺고 현대그룹에서 분가해 기업을 이끌고 있다. 하지만 현재 회장님들의 표정은 다르다. 함박웃음을 짓고 있는 회장들이 있는가 하면 울상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회장들도 있다. 범 현대가의 현주소를 조명해봤다.

현대그룹은 우리나라 경제발전과 함께 비약적으로 발전했다. 하지만 2000년 이른바 '왕자의 난'으로 그룹은 쪼개졌고 옛 현대그룹을 이룬 기업들을 뭉뚱그려 '범 현대가'로 부르고 있다. 현대그룹, 현대자동차그룹, 현대중공업그룹, 현대백화점그룹, 성우그룹, 한라그룹, KCC그룹, 현대산업개발그룹, 현대해상화재보험그룹, 한국프랜지공업 등이 범 현대가로 분류되는 그룹들이다.

2000년 3월 현대그룹은 작고한 고 정주영 현대그룹 창업주의 아들들인 정몽구 회장과 고 정몽헌 회장의 정면충돌로 일대 전환기를 맞았다. 당시 정 창업주가 5남인 정몽헌 회장을 후계자로 지목하려던 것에 대해 차남인 정몽구 회장이 반발하고 나선 것이다. 이 사건을 계기로 형제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정 창업주는 2001년 3월 별세했다. 그리고 재계1위 현대그룹은 추락하기 시작했다.

잘나가는 아들
죽 쑤는 동생

정몽구 회장의 현대자동차그룹만 옛 '현대' 명성을 되찾았다. 삼성에 이어 재계 서열 2위로 올라섰고 2010년에는 시가총액 100조원을 처음으로 돌파했으며 지난해에만 매출 132조4000억원, 영업이익 9조7000억원을 올렸다.

3남 정몽근 현대백화점 명예회장은 정 창업주 아들들 중 처음으로 ‘명예회장’ 타이틀을 달았다. 현대백화점 전신인 금강산업개발 때부터 줄곧 백화점 사업에 몰두해 왔으며 1999년 현대그룹에서 현대백화점그룹을 떼어내 분가했다. 현대백화점은 장남 정지선 현대백화점그룹 회장이 이끌고 있다. 차남은 정교선 현대백화점그룹 부회장이다.


현대백화점그룹도 범 현대가에서 나름 잘나가는 그룹에 속한다. 정지선 회장이 경영을 맡은 2003년 당시 매출은 5조1148억원, 10년이 지난 2012년에는 11조2200억원으로 100% 가까이 성장했다. 150%에 달했던 부채비율은 46.4%까지 끌어내렸다. 점포는 경인지역 8개 점포를 포함, 전국에 13개를 운영 중이다.
 

정 창업주의 6남이자 최근 서울시장 출마를 선언한 정몽준 의원은 현대중공업그룹의 대주주다. 현대중공업은 2002년 2월 현대미포조선과 함께 현대그룹으로부터 분리됐다. 현대상선이던 최대주주는 정몽준 의원으로 바뀌었다. 1987년 30대의 나이에 현대중공업 회장에 오른 정몽준 의원은 88년 13대 총선 때 무소속으로 현대중공업이 있는 울산 동구에서 당선되면서 정치에 입문했고 현대중공업의 최대주주로만 이름을 올린 채 경영에서 물러났다.

이후 현대중공업그룹 계열사들은 전문경영인 체제를 유지해왔다. 그룹은 정몽준 의원의 최측근 인사인 이재성 회장이 이끌고 있다. 이 회장은 2012년 말 정 창업주의 동생인 고 정인영 한라그룹 명예회장의 차남 정몽원 한라그룹 회장과 사돈이 됐으며 정몽준 의원과 중앙고 및 서울대 경제학과 동문이다.

현대중공업그룹은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조선업황이 악화되면서 실적부진이 이어지고 있다. 선박 가격은 하락했고 수주물량도 감소했다. 지난해 매출액은 32조1000억원으로 전년대비 4.8% 줄어들었으며 영업이익은 8020억원으로 무려 60%나 급감했다. 2010년 영업이익은 5조6223억원이었다. 특히 지난해 4분기에는 871억원의 영업손실로 적자전환했다. 순손실 규모는 2300억원에 달했다.

'왕회장' 세상 떠난 지 13년째
가족들은 힘겨운 각개전투 중

7남 정몽윤 회장은 손해보험업계 2위인 현대해상화재보험그룹의 수장이다. 현대해상화재보험은 55년 3월 현대그룹이 설립한 해상보험 회사다. 99년 1월 현대그룹에서 분리해 나갔다. 정몽윤 회장은 96년 9월 분식회계혐의로 금융당국의 해임권고를 받고 대표이사직에서 물러난 이후 2004년 10년 만에 등기이사로 경영일선에 복귀했다.

현대해상화재보험그룹의 현재 상황은 그리 좋지 못하다. 자동차보험 손해율이 계속 상승하면서 영업이익이 줄었기 때문인데 현대해상은 2013회계년도(2013년 4∼12월) 기준 순이익이 2107억원으로 전년 동기보다 29% 줄었다. 이는 손해보험업계 최대 수준이다.
 


8남 정몽일 회장은 현대기업금융을 이끌고 있다. 현대기업금융은 현대중공업그룹의 일원으로 2002년 2월 현대중공업과 함께 현대그룹에서 계열 분리됐다. 여신 금융업을 주요 사업으로 하며 어음채권금융 및 매출채권금융 업무에 종사한다. 국제투자금융 부문 업무도 실시하고 있다.

유일한 딸인 정경희씨는 바깥 활동은 잘 하지 않는다. 남편은 정희영 선진종합 회장이다. 정희영 회장은 1965년 이명박 전 대통령과 함께 현대건설 공채로 입사, 조선 수주에서 수완을 보이면서 현대그룹에서 선진해운을 갖고 독립했다. 선진종합은 스타힐리조트(전 천마산스키장)을 운영하고 있다.

정 창업주의 장남과 4남, 5남은 세상을 떠났다. 장남 정몽필 전 동서산업·인천제철 회장은 82년 4월 고속도로에서 교통사고로 운전기사와 함께 그 자리에서 사망했다. 인천제철은 2001년 4월 현대자동차그룹에 편입된 뒤 INI스틸로 상호를 변경했으며 2006년 3월 현재의 상호인 현대제철로 변경했다. 

톱 중의 톱은
현대자동차그룹

정몽필 전 회장의 장녀 은희씨는 95년 8월 주현 현대IHL 대표이사와 결혼했다. 현재는 현대IHL의 2대주주(9%)에 올라있다. 차녀 유희씨는 김석원 전 쌍용그룹 회장의 장남 김지용 전 용평리조트 상무와 결혼했다.

4남 고 정몽우 전 현대알루미늄 회장은 지병에 시달리다 90년 4월 45세의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남겨진 아들들은 현대자동차그룹의 비엔지스틸에 입사했다. 장남 일선씨는 구자엽 LS산전 회장의 딸 은희씨와 결혼하고 비엔지스틸 대표이사를 맡고 있으며 차남인 문선씨는 김영무 김&장 법무법인 대표변호사의 딸 선희(제주 본태박물관 관장)씨와 결혼하고 비엔지스틸 전무로 일하고 있다.

막내 대선씨는 KBS 전 아나운서 노현정씨와 결혼했다. 대선씨는 현대BS&C 대표이사를 맡아오다가 최근 돌연 퇴진을 선언했다. 정몽우 전 회장의 부인은 이행자 본태박물관 고문이다. 이 고문의 오빠는 이진호 전 고려산업개발 회장이다.

세상등진 형제들
남은 가족들은?

5남 고 정몽헌 현대아산 회장은 2003년 8월 타계한 '비운의 황태자'다. 정몽헌 회장은 정 창업주가 명예회장이 되면서 현대그룹 회장에 취임했다. 아버지 사후에는 금강산 관광개발 사업을 주관했다. 그러나 2002년 9월 5억달러 규모의 대북 불법송금 사건이 터졌고 2003년부터 검찰 조사를 받으면서 힘든 시기를 보냈다. 같은 해 8월 서울 종로구 계동 현대 사옥 12층 화장실에서 유서를 남기고 명운을 달리했다. 이후 부인인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이 경영에 뛰어들었다.
 

현 회장은 선대 경영자들의 유지를 받들어 대북 사업을 지속했다. 그러나 2008년 금강산 피격사건을 계기로 남북관계가 악화되면서 사업 차질을 빚었고 2010년에는 현대건설 인수를 놓고 정몽구 회장과 벌인 경쟁에서 고배를 마시기도 했다. 고난은 이어졌다. 주력계열사 현대상선은 해운업 불황이 이어지면서 적자상태가 이어지고 있고 현대증권은 주식시장의 침체로 쓴맛을 보고 있다.

정 창업주의 동생들도 범 현대가를 이야기할 때 결코 빼놓을 수 없다. 이들 대부분은 '현대'라는 글자가 포함되어 있지 않은 범 현대가 그룹을 이끌고 있다.

첫째 동생인 고 정인영 전 한라그룹 명예회장은 일본에서 유학, 귀국해 언론인의 길을 잠시 걷다가 정 창업주의 요청으로 현대양행 전무이사를 맡으며 현대와 인연을 맺었다. 53년 현대건설 부사장, 61년 사장으로 승진한 정인영 전 명예회장은 76년 현대건설 대표를 맡아 현대건설을 국내 굴지의 건설사로 키웠다.


정인영 전 명예회장은 현대양행의 기계사업 분야를 만도기계로, 건설 분야를 한라자원으로 독립시켰다. 한라그룹의 탄생이다. 97년 정인영 전 명예회장이 물러나고 장남인 정몽원 회장이 경영일선에 나섰다. 같은 해 한라그룹이 부도를 냈고 지급보증을 섰던 한라건설도 함께 부도 처리됐다. 같은 해 한라건설의 기업 회생을 위한 화의 절차가 시작됐고 99년 경영이 정상화됐다.

최근 한라그룹은 창립 이래 최대 위기를 맞고 있다. 주력 계열사 ㈜한라가 부동산 경기침체로 2011년부터 심각한 경영난에 직면해 있는 것. 한라그룹이 공시한 지난해 잠정경영실적을 보면 매출 1조9992억원과 영업손실 2507억원, 당기순손실 4281억원 등을 기록했다. 매출은 전년 대비 1.5% 상승했지만 영업이익과 순이익은 각각 24%, 79.1% 줄었다.

이런 한라를 돕기 위해 팔을 걷어 부친 곳이 현대백화점과 KCC다. KCC는 정 창업주 막내동생 정상영 KCC그룹 명예회장의 장남 정몽진 회장이 오너로 있는 회사다. ㈜한라는 지난 7일 재무개선을 위한 자구책으로 1000억원 가량 공사대금을 받지 못하고 있던 서울 금천구 가산동 '하이힐' 복합쇼핑몰을 KTB자산운용이 조성한 펀드에 팔았다.

이 펀드에는 한라가 500억원을 댔고 현대백화점과 KCC도 각각 400억원씩 자금을 모아 인수에 참여했다. 현대백화점은 향후 이 쇼핑몰을 도심형 아울렛으로 위탁운영해 힘을 실어주기로 약속하기도 했다.

정상영 명예회장은 현대그룹에서 분리된 다른 그룹과는 달리 독자노선을 걸었다. 58년 직접 금강스레트공업을 창업했으며 74년 고려화학, 89년 건설 부문을 따로 분리해 금강종합건설, 89년 금강레저, 90년 고려시리카, 96년 금강화학을 신설했다.

2000년 금강스레트공업과 고려화학을 합병해 사명을 금강고려화학으로 정했다. 금강고려화학은 2005년 회사 이름을 ㈜KCC로 바꿨다. KCC는 국내 최대 종합건자재 업체로 성장했다. 정상영 명예회장은 2000년 초반 경영권을 정몽진 회장에게 물려줬다.


위기 맞은 한라 'SOS'
도와주는 현대백·KCC

KCC는 지난해 양호한 영업성과를 올렸다. 지난해 영업이익은 2317억원으로 전년 대비 16% 늘었고 매출액은 3조2330억원으로 전년 대비 0.4% 소폭 감소하는 데 그쳤다.

둘째 동생은 고 정순영 성우그룹 명예회장이다. 정순영 명예회장은 현대건설 부사장으로 일하다 70년 현대시멘트 사장을 맡으며 분가했다. 75년 현대종합금속을, 87년에는 성우오토모티브를 세웠다.

90년 성우리조트를 설립하면서 성우그룹이라는 사명을 쓰기 시작했다. 92년에는 성우종합건설, 96년 성우전자를 계열사로 편입하며 덩치를 키웠지만 외환위기를 겪으며 사세가 크게 축소됐다.

성우그룹의 오너는 장남 정몽선 회장. 주력계열사인 현대시멘트는 전액자본잠식 상태에 처해 있다. 현대시멘트는 100% 자회사인 성우종합건설에 대한 보증채무, 건설경기 침체로 인한 재고누적 등으로 경영난을 겪어왔다. 현대시멘트가 성우종합건설에게 지급보증을 서준 금액은 지난해 9월 기준 총 4863억원이다.

셋째 동생이자 유일한 여동생 정희영 여사는 고 김영주 전 한국프랜지공업 명예회장과 결혼했다. 김영주 전 명예회장은 40년대 초 정 창업주를 만나 정 여사를 소개받았으며 50년 현대건설에 입사해 부사장까지 지냈다.

이후 금강개발 사장, 현대중공업 사장, 현대엔진공업 회장 등을 역임했고 74년 자동차 부품 생산 업체인 울산철공을 창업해 76년 사명을 한국프랜지공업으로 변경했다. 2000년 장남인 김윤수 회장에게 경영권을 물려주고 명예회장직으로 물러났다.

한국프랜지공업은 지난해 매출 9692억원, 영업이익 174억원, 당기순이익 102억원으로 매출액은 전년대비 1.6% 증가, 영업이익과 당기순이익은 각각 14.3%, 20.7% 감소했다.

정 창업주의 넷째 동생은 '포니정'이라는 애칭으로 유명한 정세영 전 현대산업개발그룹 명예회장이다. 정세영 전 명예회장은 67년 현대자동차 설립 당시 초대 사장으로 취임했다 74년 우리나라 최초의 고유모델 승용차인 현대 포니를 개발, 세계 시장에 수출하면서 포니정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95년까지 현대그룹과 현대자동차 회장을 지낸 뒤 99년 자동차 업계를 떠나 현대산업개발의 명예회장으로 활동하다가 2005년 5월 폐렴으로 사망했다.
 

정세영 명예회장의 장남 정몽규 회장은 99년 4월 회장에 취임해 현대산업개발을 경영하고 있다. 현대산업개발은 토목 건축사업을 주력으로 하고 있어 부동산 경기 침체에 따른 직격탄을 맞고 있다.

2008년 5위였던 시공능력평가 순위는 지난해 9위로 하락했으며 2004년부터 2012년까지 흑자를 유지하다가 지난해 장기 미착공 사업지 분양에 따른 공사손실 등으로 적자 전환했다. 현대산업개발은 지난해 매출액 4조2169억원, 영업손실 1479억원, 당기순손실 2012억원의 잠정 영업실적을 기록했다.

뒤로 물러나 앉은
창업주 동생들

다섯째 동생 고 정신영씨는 정몽혁 현대종합상사 회장의 아버지다. 정신영씨는 동아일보 기자와 유럽특파원, 한국일보 유럽통신원으로 일한 뒤 62년 32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현대종합상사는 현대중공업그룹 계열사다. 76년 설립되어 현대그룹 수출을 전담하다가 2003년 워크아웃 후 현대그룹으로부터 분리, 2010년 현대중공업그룹에 편입됐다.

현대종합상사는 최근 몇 년간 실적 악화에 시달려 왔다. 2000년대 후반까지 이어진 공격적인 투자 때문이다. 실적 악화의 주요 원인이던 중국 청도현대조선 지분 66.25%를 신규투자자인 산동산푸·국정홀딩스 컨소시엄에 부채를 떠맡기는 조건으로 단돈 '1달러'에 매각하면서 인수대금과 유상증자 지원금 등으로 1855억원을 허공에 날렸다.

2012년 244억원의 순손실, 지난해 상반기에만 84억원의 순손실을 냈다. 2012년 자본총계는 -666억원, 지난해 상반기에는 -812억원을 기록했다.

정신영씨의 부인인 장정자씨는 현대학원 이사장을 맡고 있다. 현대학원은 현대중공업그룹의 비영리법인이다. 딸인 일경씨는 미국 펜실베니아주 블룸버그 대학 교수인 임광수씨와 결혼해 미국에서 살고 있다.

 

한종해 기자 <han1028@ilyosis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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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세보다 무서운 산재와의 전쟁

탈세보다 무서운 산재와의 전쟁

[일요시사 취재1팀] 장지선 기자 = 이재명 대통령이 ‘산재와의 전쟁’을 선포했다. 건설 현장에서 근로자가 사망하는 사건을 줄이겠다는 취지다. 이 대통령이 칼을 휘두르자 기업은 납작 엎드렸다. 이 대통령의 행보를 보는 시각은 엇갈린다. 산재 사망사고가 끊이지 않는 만큼 단호한 조치가 필요하다며 환영하는 의견과 구조적 문제를 뒤로하고 기업 ‘잡도리’만 하고 있다는 의견 등이다. 건설업계에 칼바람이 불고 있다. 미국발 관세나 국내 경기 문제가 아니다. 산업재해(이하 산재)가 건설 현장을 뒤흔드는 중이다. 대통령은 여러 현안 중 산재로 인한 사망사고 근절을 국정 과제 첫머리에 올린 듯한 모습이다. 대통령 한마디 이재명 대통령이 반복되는 산재 사망사고의 고리를 끊겠다고 나섰다. 산재 사망사고가 발생한 기업을 법과 제도를 통해 처벌하겠다고 선언했다. 발언 수위도 나날이 세지고 있다. 본보기가 된 기업은 대통령이 일으킨 칼바람을 온몸으로 맞는 모양새다. 지난 5월 고용노동부가 발표한 1분기 ‘산업재해 현황 부가 통계’에 따르면 올해 1~3월 재해 조사 대상 사고 사망자는 총 137명(잠정)으로 지난해 같은 기간(138명)보다 1명(0.7%) 줄었다. 사망사고 건수도 같은 기간 136건에서 129건으로 7건(5.1%) 감소했다. 업종별로는 제조업이 29명으로 지난해보다 2명, 기타 업종(건설업과 제조업 이외 업종)이 38명으로 6명 감소했지만 건설업은 71명으로 오히려 7명 늘었다. 노동부는 부산 기장군 건설 현장 화재와 서울-세종고속도로 교량 붕괴 등 대형 사고의 영향으로 건설업 사망자 수가 증가했다고 분석했다. 지난 2월14일 부산 기장군 반얀트리 리조트 신축 공사장에서 불이 나 6명이 숨졌다. 또 같은 달 25일, 경기도 안성시 서울-세종고속도로 건설 현장 교량 상판 구조물이 붕괴해 4명이 목숨을 잃는 사고가 일어났다. 규모별로는 상시 근로자 50인(건설 업종은 공사 금액 50억원) 미만 사업장에서 올해 1분기 사망자는 83명으로 지난해보다 5명(6.4%), 사망사고 건수는 83건으로 7건(9.2%) 늘었다. 반면 50인 이상 대형 사업장과 대규모 공사 현장에선 사망자 54명, 사고 건수 46건으로 각각 6명, 14건 줄었다. 사망사고 유형별로는 ‘추락’ 62명, ‘끼임’ 11명, ‘물체에 맞음’ 16명으로 지난해와 비교해 각각 1명, 7명, 5명 감소했다. 화재와 폭발로는 10명, ‘붕괴’ 사고로는 11명이 목숨을 잃었다. 지자체별로는 경기(31명), 서울(17명), 경북(15명), 부산·전남(12명), 경남(11명), 충남(9명), 강원·울산(6명) 순으로 많았다. 산재로 인한 사망은 건설 현장에서 일어날 수 있는 최악의 사고다. 정부는 산재 사망사고를 줄이기 위한 각종 대책을 내놨다. 2022년 1월부터 시행된 중대재해처벌법(이하 중처법)도 그중 하나다. 중처법은 근로자의 사망사고 등 중대 재해가 발생했을 때 기업의 경영 책임자 등이 안전 보건 관리 체계 구축 등 의무를 위반한 것으로 확인되면 처벌하도록 하는 내용이 골자다. 취임 이후부터 직접 챙겨 국정 운영 계획에도 포함 문제는 실효성이다. 중처법이 시행된 이후에도 건설 현장에서 근로자가 죽는 일이 계속 일어나고 처벌은 ‘솜방망이’ 수준에 그친다는 지적이 끊이지 않았다. 결국 이 대통령이 칼을 빼 들었다. 이 대통령은 지난 12일 “비용을 아끼기 위해 누군가의 목숨을 빼앗는 것은 일종의 미필적 고의에 의한 살인, 또는 사회적 타살”이라고 비판했다. 필요하면 법을 개정해서라도 ‘산재 공화국’이라는 오명을 벗겠다는 뜻도 밝혔다. 이 대통령은 이날 국무회의에서 “일상적으로 산업 현장을 점검해서 필요한 안전조치를 하지 않고 작업하면 엄정하게 제지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며 “제도가 있는 범위 내에서 할 수 있는 최대의 조치를 해달라”고 주문했다. 사고 위험이 큰 업무를 하청과 외주를 통해 해결하는 ‘위험의 외주화’ 현상에 대해서도 지적했다. 이 대통령의 산재 사망사고 근절 ‘드라이브’는 점진적으로 거세지고 있다. 초기에는 주무 부처에 대책을 요구했다면 최근에는 직접 목소리를 내고 움직이는 식이다. 대통령이 직접 나서서 산재를 줄이라고 지시했는데도 불구하고 사망사고가 이어지자 특유의 행동력을 보이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실제 이 대통령이 고용노동부에 산재 관련 종합 대책을 주문한 뒤에도 ▲인천 맨홀 작업 노동자 질식사 ▲포스코이앤씨 노동자 끼임사 ▲경기 의정부 아파트 신축 현장 노동자 추락사 등의 사고가 일어났다. 불과 한 달 새 일어난 일이다. 지난달 6일 인천 계양구 병방동의 한 도로 맨홀 안에서 지하 시설물 조사 작업 중이던 노동자 1명이 의식을 잃고 1명은 실종됐다. 이들은 결국 사망했다. 조사 결과 이 사고는 용역 계약 위반에 따라 허가 절차 없이 진행하다가 발생한 인재로 드러났다. 법으로도 안 됐는데… 숨진 근로자는 산소 마스크 등 안전 장비를 제대로 착용하지 않은 채 작업하다 유독가스에 중독된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 이 대통령은 “현장 안전 관리에 미흡한 점이 있었는데 철저히 밝히고 법령 위반 여부가 있었는지를 조사해 책임자를 엄중히 조치하라”며 “후진국형 산업재해가 다시는 발생하지 않도록 현장 안전관리를 정비하고 사전 지도·감독을 강화하는 등 관련 부처도 특단의 조처를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지난달 28일 포스코이앤씨가 시공하는 경남 함양-울산고속도로 의령나들목 공사 현장에서 사면 보강 작업을 하던 60대 근로자가 천공기(지반을 뚫는 건설기계)에 끼어 숨지는 사고가 일어났다. 포스코이앤씨 시공 현장에서만 올해 들어 4번째 일어난 사망사고다. 지난 1월 경남 김해 아파트 신축 현장 추락사고, 경기도 광명 신안산선 건설 현장 붕괴사고, 대구 주상복합 신축 현장 추락사고 등도 줄을 이었다. 이 대통령은 “똑같은 방식으로 사망사고가 나는 것은 결국 죽음을 용인하는 것이고 아주 심하게 얘기하면 법률적 용어로 미필적 고의에 의한 살인”이라고 질타했다. 그러면서 “(산재 사망사고가 나면) 여러 차례 공시하도록 해서 투자를 안 하고 주가가 폭락하게 (해야 한다)”고도 말했다. 여름휴가를 마치고 복귀 첫 일성도 산재 관련 발언이었다. 이 대통령은 “앞으로 모든 산업재해 사망사고는 최대한 빠른 속도로 대통령에게 직보하라”고 지시했다. 산재 사망사고를 직접 챙기겠다는 의지를 다시 한번 천명한 것이다. 사과문 내고 또 반복되다 지난 9일 강유정 대통령실 대변인을 통해 전해진 이 대통령의 발언은 전날인 8일 경기 의정부 신축 아파트 공사 현장에서 안전망 철거 작업을 하던 50대 근로자가 6층 높이에서 떨어져 숨진 사고가 영향을 미쳤다. 이 대통령이 선포한 ‘산재와의 전쟁’에 기업은 바짝 얼어붙은 상황이다. 지난달 25일 경기 시흥 SPC 삼립 공장을 방문해 ‘중대산업재해 발생 사업장 현장 간담회’를 열었다. 해당 공장은 지난 5월 50대 여성 노동자가 작동 중인 컨베이어벨트에 끼어 사망했고 2022년과 2023년에도 여성 노동자가 각각 소스 교반기와 반죽 기계에 끼어 숨지는 등 중대 산재가 빈번하게 일어났던 곳이다. 이 대통령은 이날 간담회에서 SPC 근로자의 노동 시간 등을 자세히 물었다. 그러면서 “(산재가) 심야에 대체적으로 발생하고 12시간씩 4일간 일하다 보면 사실 심야 시간에 힘들다. 주의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며 “심야 장시간 노동 때문에 생긴 일로 보여진다”고 말했다. 이 대통령의 지적에 SPC 회장을 비롯해 그룹 관계자들이 쩔쩔맨 것으로 전해졌다. SPC그룹은 이 대통령이 다녀간 지 이틀 만인 지난달 27일, 8시간 초과 야근을 폐지하겠다는 대책을 내놨다. 제품 특성상 필수적인 품목 외에는 야간 생산을 최대한 없애 공장 가동 시간을 축소하겠다는 것이다. 또 주간 근무 시간도 점진적으로 줄여 장시간 근무로 인한 피로 누적, 집중력 저하, 사고 위험 등을 사전에 차단하겠다고 밝혔다. 포스코이앤씨는 지난달 29일 담화문을 내고 고개를 숙였다. 정희민 전 대표이사는 “어제(28일) 사고 직후 모든 현장에서 즉시 모든 작업을 중단했고 전사적 긴급 안전 점검을 실시해 안전히 확실하게 확인되기 전까지 무기한 작업을 중지하도록 했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협력업체를 포함한 모든 근로자의 안전이 최우선 가치가 되도록 필요한 자원과 역량을 총동원해 근본적인 쇄신 계기로 삼겠다”며 “또다시 이런 비극이 발생하는 일이 없도록 사즉생의 각오와 회사의 명운을 걸고 안전 체계의 전환을 이뤄내겠다”고 말했다. 하지만 정 전 대표의 사과는 엿새 만에 또다시 일어난 사고로 빛이 바랬다. 지난 4일 오후 경기 광명시 옥길동 광명-서울고속도로 민간투자사업 제1공구 현장에서 미얀마 국적 30대 근로자가 감전돼 심정지 상태로 발견됐다. 이 근로자는 병원으로 이송된 지 8일 만인 지난 12일 의식을 회복했다. 높아진 발언 수위·제재 조치 “왜 기업만 잡도리?” 의견도 정 전 대표는 사의를 표명하고 물러났다. 연이어 산재사고가 일어난 포스코이앤씨는 ‘본보기’가 될 가능성이 커진 상황이다. 일단 이 대통령은 포스코이앤씨에 대한 건설 면허 취소, 공공 입찰 금지 등 법률상 가능한 방안을 모두 찾아서 보고하라는 지시를 내린 바 있다. 국내 건설 면허 취소는 현행 건설산업기본법상 최고 수위의 징계다. 1994년 성수대교 붕괴 책임이 있던 동아건설산업에 내려진 사례가 유일하다. 건설 면허가 취소되면 신규 사업을 할 수 없고, 다시 면허를 취득한다고 해도 수주 이력이 없기 때문에 관급공사를 따내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하다. 경찰은 사고 관련 수사 전담팀을 만들고 고용노동부 안양지청과 함께 포스코이앤씨와 하청업체에 대한 압수수색에 돌입했다. DL건설도 대표이사를 비롯한 임원진 전원이 공사 현장에서 발생한 사망사고에 책임을 지고 일괄 사표를 제출하는 등 납작 엎드렸다. 특히 이 대통령이 휴가에서 돌아와 산재 관련 발언을 한 직후 터진 사고여서 충격파가 더 컸다. DL건설에서 사표를 제출한 임직원은 80여명, 공사를 중단한 현장은 44곳에 이른다. 이재명정부는 산재사고로 인한 사망자 비율을 2030년까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 수준인 1만명당 0.29명까지 끌어내리는 방안을 추진하기로 했다. 지난해 우리나라에서 발생한 산재로 인한 사망자 비율은 1만명당 0.39명으로 OECD 평균을 크게 웃도는 실정이다. 이 같은 내용은 ‘이재명정부 국정 운영 5개년 계획’에 포함됐다. 이 대통령이 지난달 수석보좌관 회의에서 “전 세계에서 또는 OECD 국가 중 산업재해율, 사망재해율이 가장 높다는 불명예를 이번 정부에서 반드시 끊어내겠다”고 의지를 드러낸 부분을 국정과제로 담은 것이다. 구조 문제 나 몰라라 일각에서는 이 대통령이 지나치게 건설업계만 잡고 있다는 지적도 제기된다. 관련 법과 제도가 시행되고 있는데도 사망사고가 끊이지 않는다면 구조적인 문제도 살펴봐야 한다는 것이다. 수주 경쟁이 과열되면서 저가 입찰이 늘고 안전관리에 소홀해지는 점이 산재로 이어지는 식의 고리를 끊어야 진정한 의미의 ‘근절’이 이뤄질 것이라는 분석도 있다. <jsjang@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