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시사=사회팀] 사법·입법·행정기관 가릴 것 없이 악성 민원을 넣는 이른바 '진상 민원인'이 늘고 있다. '슈퍼 갑'의 상징인 이들은 일선 공무원들을 상대로 실력(?)을 행사하며 눈살을 찌푸리게 한다. 각종 청탁과 협박, 감정노동 강요까지 하는 이들. 공무원도 사람인데 이래서야 되겠냐는 말이 나온다.
우리 사회에는 말끔히 풀리지 않는 문제가 있다. 부정적 의미를 지닌 '진상'의 어원도 그 중 하나다. 일부 학자들은 "임금에게 올리다"라는 뜻에서 진상이 파생됐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일각에서는 진상이 "진짜 밉상"의 줄임말이라고 반박한다. 명확한 답은 없다. 다만 최근 들어 진상은 '보기 흉하고 나쁜 것(또는 사람)을 속되게 이르는 말' 정도로 그 쓰임이 합의됐다.
갑질과 밉상짓
하지만 진상과 관련해서 풀리지 않는 의문은 여전히 남아있다. 임금처럼 소위 '갑질'을 하거나 '밉상짓'만 골라서 하는 이들이 활개를 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중 국가기관을 상대로 악성 민원을 넣는 사람들을 일컬어 한 관계자는 '진상 민원인'이란 신조어를 소개했다.
'진상 민원인' 다른 말로 악성 민원인은 우리 공공기관을 멍들게 하는 한 원인으로 지목됐다. 기자가 만난 복수 공무원은 진상 민원인과 관련한 얘기를 꺼내자 손사래를 쳤다. 직급이 낮을수록 거부감은 더했다. 이들이 말한 진상 민원인들은 대체로 자신의 주장을 관철시키는 과정에서 일선 공무원과 마찰을 빚는 것으로 전해졌다.
하지만 하위직 공무원은 늘 '을'의 입장이다. 나서서 싸우는 사람은 극히 드물다. 보수적인 공무원 사회에서 한 번 찍히면 그에 준하는 불이익을 감내해야 한다.
때문에 일선 공무원들에게 진상 민원인은 공포의 대상이다. 익명의 공무원은 "공무원도 사람인데 인간적으로 너무할 때가 많다"며 "직원들을 하인 부리듯이 하는데 입장 바꿔 놓고 생각해도 이해되지 않는다"고 푸념했다. 그렇다면 이들 주장의 근거는 과연 타당한 것일까.
모 지방법원 민원실에서 근무하고 있는 A씨는 최근 상급기관으로부터 내부 감사를 받았다. 한 민원인을 불친절하게 응대했다는 이유다. 해당 민원인은 A씨가 불쾌한 표정을 지었고, 막말을 했으며, 나중에는 폭력을 행사하려 했다고 주장했다. 사실일까.
A씨의 입장을 들어봤다. 먼저 민원인은 A씨에게 업무 밖의 일을 요구했다고 한다. 서류를 발급하는 과정에서 민원인은 A씨에게 소관 밖의 일을 요구했다. 이에 A씨는 담당 부서를 소개하며 해당 창구에서 관련한 업무를 처리하라고 말했다. 하지만 민원인은 "담당 부서가 어디 있는지 모른다"며 "A씨가 자신의 업무를 처리해야 한다"고 고집했다. 이 과정에서 민원인은 "A씨의 표정이 불쾌하고 반응이 퉁명스럽다"며 불만을 제기했다.
A씨는 꾹 참고 절차를 설명했다. 소용없었다. 민원인은 "A씨의 인성이 글러먹었다"는 등의 인신공격을 퍼부었다. 그런데 이 민원인의 뒤에는 또 다른 민원인이 대기하고 있었다. 눈치를 본 A씨는 "남은 업무를 봐야 한다"며 민원인의 말을 끊었다. 소용없었다. 민원인은 작정한 듯 A씨를 공격했다.
마침내 A씨가 인내심을 잃었다. 언성을 높이며 민원인의 말에 대꾸한 것이다. 이를 본 다른 직원이 달려와 이들을 중재했다. 민원인은 분개했고, A씨 역시 고개를 숙이지 않았다. 이것이 A씨가 밝힌 사건의 전말이다. 그러나 해당 사건과 관련한 글은 인터넷에 게재됐고, A씨는 '천하의 나쁜 놈'으로 채색됐다.
"공무원도 사람인데…" 스트레스에 시달려
투서·협박 기본…폭행에 고소·고발까지
국회로 눈을 돌리면 또 다른 민원인들의 활약상(?)이 눈길을 끈다. 복수 국회 관계자는 "일부 민원인들이 들어주기 힘든 부탁을 하는 경우가 있다"고 털어놨다.
이들에 따르면 악성 민원인들은 자신들의 요구가 관철될 때까지 보좌진에게 전화를 건다. 아침·점심·저녁은 물론이고 한밤중에도 전화벨은 그칠 줄 모른다. 전화를 받지 않으면 지인들을 동원해 문자폭탄을 안긴다. 그러나 보좌진 입장에서 타이르는 것밖에 방법이 없다. 진상 민원인들은 폭언은 기본이고 심한 경우 협박도 불사한다. 국회에서 근무한 한 여성 인턴은 이 같은 욕설 민원이 반복되자 울음을 터뜨리기도 했다.
"자녀의 일자리를 알아봐 달라"는 요구와 "누구의 뒷조사를 해 달라"는 부탁도 민원 형태로 접수된다. 이에 한 공무원은 "말이 좋아 민원이지 사실상 청탁이 아니냐"고 지적했다. 하지만 합법과 위법의 경계를 아슬아슬하게 넘나드는 위험한 민원은 지금 이 시간에도 의원실의 문을 두드리고 있다.
광역자치단체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지방선거를 눈앞에 두면서 그린벨트를 풀어달라는 민원과 사업 자금을 융통해달라는 등의 민원이 증가하는 추세다. 또 정체를 알 수 없는 일부 시민단체들은 자신들이 쓸 사무실을 내어달라며 떼를 썼다는 후문이다.
다른 공공기관과 마찬가지로 광역자치단체를 타깃으로 삼은 민원인들은 자신들의 주장을 막무가내로 밀어붙이며, 공무원들의 진을 빼놓는 것으로 전해졌다.
특히 각 시·도청에 소속된 전화상담원들은 한 사람과 5분이면 끝날 통화를 1시간이고 2시간이고 되풀이하면서 민원인 응대에 고충을 호소하는 실정이다. 대부분의 장시간 민원은 사안의 본질과는 전혀 상관없는 감정싸움으로 비화되기 십상. 통화 중 상담원이 웃으면 비웃느냐고 따져 묻고, 웃지 않으면 불친절하다고 성을 내는 식이다.
통화 과정에서 폭언과 욕설은 기본, 협박까지 가미된다. 하지만 상담원들은 전화를 끊어서도 안 되고, 화를 내서도 안 된다.
이 같은 민원 제기 과정에서 갈등의 골이 깊어지면 당사자 간 소송으로 이어지는 사례가 있다. 과거에는 민원인이 공무원을 송사로 옭아맸지만 최근에는 명예훼손을 당했다고 생각한 일부 공무원이 민원인을 고소하기도 한다. 그런데 최소한의 자기 구제마저 할 수 없는 공무원이 있다.
소송도 불사
일선에서 대민 지원을 맡고 있는 사회복지 공무원들은 술에 취해 대낮부터 행패를 부리는 민원인들을 어르고 달래느라 여념 없다. 가장 상습적인 진상 민원인으로 알려진 이들은 옷을 벗고, 소리를 지르며, 흉기를 휘두르는 등의 수법으로 분노를 표출한다.
이 과정에서 일부 여성 공무원들은 민원인으로부터 성적인 폭언을 듣는 게 일상화되다시피 했다고 한다. 하지만 사회적으로 어려운 상황에 처한 사람들이 많아 맞대응하기 꺼림칙한 게 사실이다.
여기서 중요한 문제가 제기된다. 공무원이 보기에는 '슈퍼 갑'인 이들이 정작 사회에서는 '갑'으로 인정받고 있을까. 때문에 "진짜 갑은 따로 있는데 을끼리만 치고받는다"는 웃지 못할 말이 공감을 자아낸다.
강현석 기자 <angeli@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