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꽂히면 미치는' 오타쿠의 세계 대해부

  • 이광호 khlee@ilyosisa.co.kr
  • 등록 2013.11.19 10:33:30
  • 댓글 0개

광적인 집착 변태? 폭발적 집중 천재?

[일요시사=사회팀] ‘오타쿠’에 대해 한 번쯤은 들어봤을 것이다. 오타쿠는 일본에서 제 3자의 집을 높여 부르는 말 ‘귀댁’에서 유래됐다. 가타카나로 쓰면 ‘이상한 것에 몰두하는 사람’이란 뜻이 된다. 이들은 애니메이션, 게임 등에 푹 빠져 현실과 다소 동떨어진 모습을 보인다. 사람들이 오타쿠를 바라보는 시각은 대부분 부정적이지만 일본의 젊은 층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현상으로 한국도 예외는 아니다. 오타쿠 시장은 점점 블루오션으로 자리 잡고 있다.




‘오타쿠’는 1970년대 일본을 중심으로 나타난 서브컬처(하위문화)의 팬들을 총칭한다. 서브컬처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이 오타쿠 문화는 주류 문화와 대비되는 비주류 문화다. 이들은 독특한 행동방식을 갖고 있다. 오타쿠 문화 초기에는 애니메이션·SF 팬에 한정해 불렀지만 지금은 명확한 정의가 없이 보다 폭넓게 사용되고 있다. 일반적으로 한국에선 ‘오덕후’ ‘십덕’ ‘덕후’ 등의 표현을 주로 사용한다. 영미권에는 ‘Geek’이 대표적이다. 주로 애니메이션광을 비하하는 말로 쓰이다가, 최근에는 ‘게을러 보이는 외모’를 빗댄 말로 쓰이기도 한다.

이상한 것에
몰두하는 사람

‘팬’ ‘마니아’ 단계를 넘어서 자기의 관심분야에 미친 듯이 열광하는 사람들을 흔히 ‘오타쿠’라 부른다. 이들은 자기만족을 위해 관심대상에 대해 순수한 호기심을 갖고 깊게 파고든다. 수집가적 기질과 함께 자신만의 문화를 창조할 수 있는 극도의 경지까지 이르고 있다. 좋게 말하자면 ‘전문가적 시각을 초월한 사람’을 뜻한다. 이들은 약간 외골수적인 성향을 갖고 있다. 그리고 자신의 행동에 대한 타인의 시선은 개의치 않고 주관적인 가치관으로 사유하고 행동한다.

일본 젊은이들의 문화는 마니아 문화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만큼 자신의 취미와 관심사에만 몰입하고 심취하는 이들이 많다. 한 분야에 대해 많은 지식과 정보를 소유한 마니아의 종류는 다양하다. 파친코 마니아, 컴퓨터 마니아, 게임 마니아, 애완동물 마니아, 소형차 마니아, 전쟁 마니아(실제로 전쟁에서 사용한 물품 등을 수집하는 마니아), 히트상품 마니아, 아세아대 마니아족(자신의 관심분야에서 개발한 발명품으로 대학 진학), 스쿠프족(관심거리의 기사만을 전문적으로 찍으러 다니는 마니아), 점술 마니아, 나비 컬렉션족, 발굴사진 마니아, 자동차 마니아, 골프 마니아, 더스트 헌터(쓰레기더미를 뒤져 남의 사생활을 엿보는 마니아), 완전자살 마니아(관심사가 자살에 있고 자살만을 생각하고 심취해 완전자살 마니아가 돼 전문 책자와 비디오까지 만들어냄) 등이 있다. 그런데 오타쿠 중 완전자살 마니아는 극소수다. 오타쿠 자살과 관련해 재밌는 이야기가 있다. “오타쿠는 자살 따위 하지 않아” “다음주에 나오는 애니 봐야 되거든” “분기별 신작을 놓칠 수 없어” 오타쿠들에게 자살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신작 애니를 놓칠 수 없기 때문이다. 이처럼 오타쿠들은 애니에 대한 집착이 강하다.

팬·마니아 넘어 관심분야에 미친 듯 열광
타인들 시선 개의치 않는 외골수적 성향


오타쿠들은 자신이 관심을 가진 분야에 대해서는 전문지식 책자를 써내기도 한다. 또 나아가 직업으로도 삼는 마니아들도 있다.

처음 오타쿠라는 말이 사용되기 시작할 때는 2인칭 표현이었다. 그 시작에는 동호인들이 취미 등에 대해 이야기할 때, 서로 예의를 지키고 존중하는 의미에서 상대를 오타쿠라고 부르면서 생겨났다는 설이 있다.

사람에 대한 분류로 오타쿠라는 말이 일반화된 것은 1983년 일본의 칼럼니스트 나카모리 아키오가 만화 월간지 <망가 브릿코>에 칼럼 ‘오타쿠의 연구’를 연재하면서부터다. 나카모리 아키오는 이 칼럼에서 오타쿠를 비칭으로 사용했다.

하지만 때로는 특정 관심사에 대해 극도로 깊이 빠져들어 직업으로 삼는 프로는 아니지만 전문가 수준의 지식을 소유한 아마추어나, 혹은 너무 한 가지 분야에 빠져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일컫기도 한다.

따라서 누군가가 오타쿠라는 말을 하면 ‘일본 애니메이션 광’이나 ‘특정 분야에 대한 지식이 풍부하다’는 의미가 될 수 있다. 한국에서는 특히 ‘만화에 등장하는 미소녀 캐릭터나 좋아하는 변종’이나 심지어 ‘생김새가 안여돼(안경 쓴 여드름 돼지)’라는 말로도 해석할 수 있다.

이처럼 오타쿠에 대한 의미가 모호한 이유는 일단 기준과 의미가 분명하게 정의되지 않은 채 생긴 신조어기 때문이다. 거기에 점점 여러 의미가 덧붙여지고 이로 인해 뜻이 변해버렸다.

그 범위로는 오타쿠란 모두 ‘한 분야에 심취한 사람’을 뜻할 수 있지만, 그렇게 되면 마니아와 구분하기 어려워진다. 전문가들의 말에 따르면 오타쿠와 마니아의 차이점은 분야와 강도의 관점에서 분류할 수 있다고 한다. 현재 여행, 카메라, 패션 등 현실적인 것을 제외하고 크리에이터가 창조한 것에 열중하는 사람들, 특히 서브컬처에 몰두하는 사람들을 한정해 구분한다.


자기만의 세계에 빠져 산다는 점에서 보면 오타쿠와 히키코모리는 같은 선상에 있는 것 같아 보인다. 하지만 오타쿠와 히키코모리는 조금 다르다. 히키코모리는 철저하게 자기만의 세계에 빠진 것에 비해 오타쿠는 자신과 같은 취향이나 취미를 가진 사람들과는 어울리거나 일종의 친목을 형성한다는 점이 히키코모리와의 차이점이다.

그렇지만 한국에서 오타쿠가 갖고 있는 의미는 히키코모리, 은둔형 외톨이라는 의미까지 함축된다. 다소 부정적인 이미지가 지배적인 게 사실이다.




한국에서 오타쿠에 대한 인식은 분명 일본에 비해 좋지 않다. 일본에서는 불경기 시기 오타쿠의 활약이 있으면서 이미지의 전환이 이뤄진 적도 있지만 한국에서는 그러한 계기가 없었고 히키코모리와 동일한 존재나 오타쿠가 소비하는 콘텐츠 대부분이 일본 작품이여서 타문화에 대한 추종으로 비춰질 수 있다는 거부감도 있다.

한때 tvN <화성인 바이러스>에 출연해 애니메이션 등장인물 ‘페이트’에 대한 진심어린 사랑을 공개했던 A씨는 당시 캐릭터가 그려져 있는 베개를 껴안으며 비상식적인 모습을 연출해 많은 사람들의 시선을 집중시킨 바 있다. 당시 시청자들의 반응은 매우 뜨거웠다. 오타쿠에 대한 일반적인 인식을 확인할 수 있었던 방송이었다.
이후 A씨는 한 커뮤니티를 통해 한 여성과 데이트 하는 모습의 사진을 올리며 수많은 오타쿠들의 부러움을 샀다. “아니 저 사람이 어떻게 여자와 데이트를 할 수 있지?” 등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반응이 대부분이었다.

여친 필요없다
신작 애니 사수

1960년대부터 80년대에 이르기까지의 일본은 여러 차례의 위기를 극복하고 경제 성장의 과업을 달성했다. 산업의 발달과 더불어 일본의 대중문화도 괄목 성장했다. TV보급 전 세대별 맞춤 만화들이 다수 등장하면서 애니메이션 시장도 활기를 띠었다. 특히 ‘고질라’ ‘울트라맨’ 등의 작품들이 쏟아지며 각종 만화 관련 프라모델(피규어)이 붐을 이뤘다. 오타쿠 예비군 양성의 시작이었다.

당시 오타쿠는 존재 자체의 명명이 이루어지지 않았던 시기였다. 특별히 사회적으로 이슈가 될 만한 존재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저 유별난 취미생활을 즐기는 사람들이었다. 수동적인 형태 속에서 스스로가 콘텐츠를 발굴한 것이다.

80년대 말 세상 밖으로
2000년대 들어 양성화

이후 오타쿠가 세상 밖으로 드러난 계기가 있다. 89년 6월, 사이타마와 도쿄 등지에서 발생한 연속 유아 납치살인사건이 발생해 여아가 납치·살해된 것. 당시 유아연쇄살해사건의 피의자 미야자키 쯔토무의 방에서 6000개 이상의 비디오테이프와 많은 잡지들이 나왔다. 매체들은 일제히 이 사건을 두고 ‘오타쿠에 의한 범죄’ ‘오타쿠식 범죄’라고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이후 오타쿠는 전국적인 이슈로 떠오르게 되며 오타쿠 전체에 대한 비난으로 화살의 방향이 틀어졌다.

이처럼 오타쿠는 시작부터 차별적으로 비추어졌다. 자신들의 부정적 이미지를 숨길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2000년대 들어서면서 오타쿠를 바라보는 사회적 시선은 조금씩 달라졌다. 만화 및 게임과 같은 분야에서 오타쿠들의 활약이 눈에 띄게 늘어나며 각 분야의 시장에서 두각을 나타내게 된 것이다. 비로소 일본 내 재평가가 이뤄지게 됐다. 그리고 세계 시장에도 영향을 미치면서 오타쿠는 수동형에서 능동형으로 진화하는 모습을 보였다. 지금의 오타쿠는 넘쳐나는 정보를 최대한 효율적인 방법으로 좀 더 유용하게 자신의 것으로 활용하는 능력을 갖고 있다.

불황 속 블루오션
주목받는 키덜트

최근에는 아이 같은 감성과 취향을 가진 어른을 뜻하는 ‘키덜트’(kid와 adult의 합성어) 문화가 주목받고 있다. 한마디로 ‘어른아이’, 장난감 사는 어른을 뜻한다. 다 큰 성인이 무슨 장난감이냐 비아냥댈 수도 있지만 건담이나 피규어 등 성인용 장난감을 전혀 거리낌없이 구입하는 사람들을 이제는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다.


키덜트 산업은 매해 급성장하고 있다. 업계에 따르면 키덜트 관련 제품 시장 규모는 현재 5000억원에 이른다.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는 20∼40대 키덜트들은 수십만원에서 수백만원에 이르는 키덜트 장난감을 사기 위해 기꺼이 지갑을 연다. 이들의 구매력에 힘입어 키덜트 시장은 불황 속 블루오션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이러한 키덜트 문화의 시장성을 눈여겨본 갤러리아백화점은 서울 강남의 압구정 명품관에 키덜트 장난감 매장 두 곳을 입점시켰다. 키덜트 장난감 매장은 잘 빼입은 남성들로 북적인다.




키덜트 문화를 즐기는 사람들은 수십만명에 이를 것으로 추산된다. 오리지널 키덜트 장난감인 건담과 피규어 마니아에 이어 최근에는 무선조종용품이 인기를 끌고 있다. 특이한 취향을 가진 소수의 비주류 문화로 취급받던 때와는 비교할 수도 없다. 이제는 당당하게 대중문화의 한 축으로 자리 잡으면서 자신만의 방법으로 키덜트 문화를 즐기는 이들이 늘고 있다.

만화, 애니메이션, 장난감…
‘그들의 문화’블루오션 부상

16년차 피규어 마니아인 김성재(26)씨. 그는 현재 취업준비에 한창인 경영학도다. 공부면 공부, 운동이면 운동, 자기관리에 철저한 멋진 대학생이다. 그러나 반전이 있었다. 평범한 외모와 달리 그의 방은 온갖 피규어로 가득했다. 울트라맨, 가면라이더 등 피규어만 모아둔 진열장이 있을 정도였다. 어려서부터 일본문화에 심취한 그는 일본 관련 콘텐츠에 해박했다. 심지어 일본어로 회화도 가능하다. 그리고 방에 있는 피규어 대부분은 일본에서 직접 사온 것들이었다. 김씨는 “누가 보면 오타쿠라고 손가락질 할 수 있지만 이렇게 피규어를 모으는 게 소소한 행복이다”며 “하나하나 모을 때마다 뿌듯하다”며 자랑스러워했다.

피규어에 대한 애정을 노래에 담은 이도 있다. 스토리텔링 음악으로 독보적인 위치에 있는 랩퍼 팻두는 음악만큼이나 피규어에 대한 사랑이 각별한 마니아로 알려졌다. 곰인형 모양의 일본산 아트토이 베어브(BearBrick)이 그의 주요 수집품이다. “피규어 수집 취미가 다양한 주제의 이야기를 담은 스토리텔링 음악을 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고 밝힌 팻두는 실제로 자신이 좋아하는 베어브릭에 관한 음반을 발표한 바 있다.

2011년 베어브릭을 소재로 7곡의 노래가 담긴 ‘베어브릭 인 러브’라는 음반을 만들었다. 베어브릭을 좋아하는 이들과 사연을 나누고 싶어 자비를 들여 음반 3000장을 찍은 뒤 이 가운데 2500장을 한 아트토이 판매점을 통해 베어브릭 애호가들에게 무료로 배포하기도 했다. 또한 용인송담대에는 토이캐릭터창작과가 생길 만큼 피규어 시장이 산업적으로 주목받고 있기도 하다.


현대사회는
오타쿠 원한다

오늘날 오타쿠 문화는 일본이라는 나라에 국한되지 않고 전 세계인이 함께 즐기고 활용할 수 있는 새로운 문화로 부상했다. 오타쿠 관련 시장은 매해 성장을 거듭하고 있다. 오타쿠에 대한 편견이 점점 희석되면서 새로운 문화 콘텐츠가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받고 있다. 이제 오타쿠 문화는 현대사회에 있어 결코 간과할 수 없는 저력 있는 비주류 문화로 자리 잡게 됐다.


이광호 기자 <khlee@ilyosisa.co.kr>

 

<기사 속 기사>

‘오타쿠 천국’일본에선…
섹스보다 만화 “출산률 저하”

지난달 24일 영국 BBC 방송은 2060년 일본 인구가 현재보다 3분의 1이나 감소할 것으로 우려된다고 보도했다. 일본의 출생률이 이처럼 감소하는 원인 중 하나는 아기를 낳기 위한 성관계보다는 만화나 애니메이션, 컴퓨터 게임 등에 더 열광하는 ‘오타쿠의 급증’이다. 오타쿠는 취업 등에 관심을 보이지 않으며 인간관계, 특히 여성과 관계를 맺는 데에도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고 있다.

지난 2010년 일본 후생노동성 조사에 따르면 16∼19세의 일본 남성 가운데 36%가 오타쿠였다. 이는 불과 2년 새에 두 배로 늘어난 수치인데 문제는 이러한 증가세가 더욱 빨라지고 있다는 것이다.

16∼19세 남 36% 오타쿠
불과 2년새 2배로 늘어

누리칸(38)과 유게(39)라는 오타쿠는 실제 여성이 아니라 게임 속의 여주인공인 린코와 네네를 자신의 여자친구로 생각하고 있다. 누리칸과 유게는 모두 30대 후반이지만 게임을 할 때는 자신들이 10대 중반의 청소년이라고 생각한다. 누리칸은 “게임 속에서는 언제나 고등학생이 될 수 있고 어린 애인과 관계를 맺을 수 있다”고 말했다. 유게 역시 “게임 속에서는 내가 원하기만 하면 관계를 영원히 지속할 수 있다”고 말한다.

일본 남성들 가운데 이처럼 오타쿠가 점점 늘어나는 원인은 아직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았다. 그러나 많은 일본의 젊은 남성들이 미래에 대해 비관적으로 생각하는 것이 한 원인일 수 있는 것으로 지적되고 있다. 일본의 젊은이들은 자신들의 부모 세대만큼 부를 축적할 가능성이 없다고 생각하고 있고, 부양해야 할 자식을 낳아야 할 결혼과 같은 인간관계에 부담을 느끼고 있다는 것.

남녀가 만나 교제를 하더라도 섹스를 하거나 결혼하는 비율도 점점 감소하고 있다. 최근 한 조사 결과에 의하면 교제하는 일본 커플 가운데 1주일에 한번이라도 성관계를 갖는 커플은 27%에 불과했다. 일본에서 태어나는 신생아 가운데 혼외 출생아의 비율은 2%에 불과하다. <광>



배너






설문조사

진행중인 설문 항목이 없습니다.



‘검머외 쿠팡’ 막가는 싸가지 행보

‘검머외 쿠팡’ 막가는 싸가지 행보

[일요시사 취재1팀] 장지선 기자 = 고객 개인정보 유출에 대한 쿠팡의 태도가 도마 위에 올랐다. 현재까지 대응만 봐서는 국민은 물론, 정부와도 전면전을 벌일 기세다. 새어나간 정보의 범위와 규모가 ‘역대급’이라는 말이 나올 만큼 최악의 사태임에도 불구하고 쿠팡의 고개는 꺾일 줄 모르고 있다. 일각에서는 ‘뭘 믿고 저러나’ 소리가 나오는 중이다. 쿠팡의 고객 개인정보 유출 사건, 이른바 쿠팡 사태가 점입가경이다. 사태가 일어난 지 한 달이 지났지만 수습은커녕 국민의 화만 돋우고 있다. 쿠팡의 대응 태도가 미지근한 수준을 넘어 뻔뻔한 지경에 이르렀기 때문. 김범석 의장은 모습을 비추지 않고 보상안은 꼼수로 가득하다. 국민을 조롱하는 게 아니냐는 말이 나올 정도다. 한 달 만에 고개 숙여 지난해 11월 말 3370만명에 이르는 쿠팡 고객의 개인정보가 ‘탈탈’ 털렸다. 앞서 쿠팡은 4500여건의 고객 정보가 유출됐다고 정부 당국에 신고했지만 2주 만에 그 수치는 7500배까지 늘어났다. 전 국민의 65% 수준이며 지난해 4월 SKT 개인정보 유출 사태 범위(2300만명)를 훌쩍 넘는 사태였다. 쿠팡은 이커머스 시장에서 독점적 지위를 갖고 있다. 대형마트 등이 규제에 막혀 뒷걸음질 칠 때 쿠팡은 로켓배송으로 시장을 싹쓸이했다. 전날 저녁에 주문해도 새벽이면 물건이 문 앞에 와 있는 총알 배송에 소비자는 쿠팡으로 몰렸다. ‘밑 빠진 독에 물 붓기’라는 비판을 받던 물류센터는 거점 역할을 하고 있다. 이번 사태는 아이러니하게도 쿠팡이 국민의 실생활에 얼마나 스며들어있는지를 바로 보여줬다. 쿠팡 사태가 터지고 얼마 지나지 않아 글로벌 투자은행 JP모건은 “쿠팡이 경쟁자가 없는 시장 지위를 누리고 있고 한국 고객이 데이터 유출에 덜 민감해 보인다”며 “잠재적 고객의 이탈은 제한적일 것”이라는 내용의 보고서를 내놨다. 그래서일까? 쿠팡은 역대 최악의 정보 유출 사태라는 오명을 뒤집어쓰고도 제대로 된 대응을 하지 않고 있다. 심지어 대통령이 언급하고 정부 차원의 TF가 꾸려졌는데도 불구하고 오히려 ‘힘겨루기’를 하는 태도를 보이는 중이다. 최근에는 정부의 반박에도 자체 조사 결과를 고집하는 등 이해할 수 없는 행보로 눈살을 찌푸리게 하고 있다. 쿠팡은 지난달 25일 ‘정보 유출자는 3300만개 계정에 접근했으나 실제 저장한 정보는 3000여개에 불과하며 제3자 유출 정황은 없는 등 피해가 미미하다’는 내용의 자체 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그러면서 “(유출자는) 개인정보 유출에 대한 언론 보도를 접한 이후 저장했던 정보를 모두 삭제하고 범죄에 사용한 노트북을 파손해 하천에 던졌다”고 주장했다. 쿠팡은 “잠수부들이 벽돌에 담긴 쿠팡 가방에 든 노트북을 하천에서 회수했고 유출자가 클라우드 계정에 등록한 일련번호와 해당 노트북의 일련번호가 일치하는 것을 확인했다”고 밝혔다. 이어 “범행에 사용된 PC 와 노트북 등 모든 장치를 회수해 안전하게 확보했고 글로벌 보안업체들의 조사 결과도 진술 내용과 같았다”고 설명했다. 국내에서 매출 90% 나오는데 정보 유출 태도·대응 낙제점 쿠팡이 발표한 대로라면 고객 정보 유출 피해 규모는 기하급수적으로 줄어든다. 또 유출자와 접촉해 장치를 확보했으니 추가 피해는 없다. 전체적으로 사건이 축소되는 것이다. 쿠팡의 발표에 정부는 강하게 반발했다. 쿠팡의 조사 내용은 사전에 정부와 어떤 논의도 없이 일방적으로 진행됐다는 설명이다. 과학기술정보통신부(이하 과기부)는 “정보 유출 종류와 규모, 경위 등은 민관합동조사단이 조사 중인 사안”이라며 “쿠팡이 발표한 내용은 조사단에 의해 확인된 바 없다”고 밝혔다. 서울경찰청 사이버수사과도 “쿠팡 측이 제출한 진술서와 노트북 등 증거물을 분석 중”이라며 “사실관계를 면밀하게 확인하겠다”고 했다. 논란이 계속되자 쿠팡은 정부의 지시를 받아 조사를 진행했다고 해명했다. 하지만 경찰은 사전 협의가 없었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사실관계가 엇갈리고 있는 것이다. 쿠팡은 지난달 26일 내놓은 입장문에서 “정부의 지시에 따라 수주간 진행한 조사였다”고 선을 그었다. 같은 달 9일 정부가 쿠팡 측에 유출자와 접촉할 것을 제안했고 14일 쿠팡은 유출자를 처음 만난 뒤 해당 사실을 정부에 보고했으며 16일에는 정부 지시에 따라 유출자의 데스크톱과 하드드라이브를 정부에 제공했다는 게 쿠팡 측 주장이다. 하지만 국가정보원(이하 국정원)도 “쿠팡의 입장문 형식의 보도자료에서 정부와 협력했다는 내용 중 일부 국정원으로 추정되는 부분도 사실과 다르거나 왜곡된 부분이 있다”고 반박했다. 쿠팡이 자체 조사와 관련해 정부와 사실 공방을 벌이고 있는 와중에 김범석 쿠팡 의장이 사건 발생 한 달여 만에 사과했다. 그동안 박대준 전 대표가 청문회 등에서 뭇매를 맞고 있는 동안에도 김 의장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랬던 그가 정부의 압박이 거세지자 처음으로 입을 연 것이다. 5만원 상당 속사정은? 김 의장은 지난달 28일 “쿠팡의 창업자이자 이사회 의장으로서, 쿠팡 전체 임직원을 대표해 진심으로 사과드린다”고 밝혔다. 이어 “저희의 책임으로 발생한 이번 데이터 유출로 인해 많은 분께서 자신의 개인정보가 안전하지 않다는 두려움과 불안을 느꼈고 사고 초기부터 명확하게 직접적으로 소통하지 못한 점으로 인해 큰 좌절감과 실망을 안겨 드렸다”며 “사고 직후 미흡했던 초기 대응과 소통 부족에 대해 진심으로 사과드린다”고 말했다. 김 의장은 한 달 만에야 입을 연 부분에 대해 “무엇보다 제 사과가 늦었다”면서 “모든 사실이 확인된 이후에 공개적으로 소통하고 사과하는 것이 최선이라고 판단했다. 돌이켜보면 이는 잘못된 판단”이라고 고개를 숙였다. 비판과 질책을 겸허히 받아들인다고도 했다. 하지만 자체 조사 논란에 대해서는 기존 입장을 고수했다. 김 의장은 “쿠팡은 조사 초기부터 정부에 전면적으로 협력해 왔다”며 “일련의 과정에서 많은 오정보가 확산하는 상황에서도 정부의 ‘기밀 유지’ 요청을 엄격히 준수했다”고 주장했다. 김 의장의 사과는 국회 6개 상임위원회가 참여하는 대규모 연석 청문회를 이틀 앞두고 나왔다. 정부가 범부처 TF를 과기부 총리 산하로 확대하고 다각도로 압수수색과 조사를 진행하는 등 대응 수위를 높이는 상황에 압박을 느꼈을 것이라는 분석이 제기된다. 그러나 사과와는 별개로 김 의장은 청문회에 불출석하겠다고 밝혔다. 김 의장뿐만 아니라 동생인 김유석 쿠팡 부사장, 강한승 전 쿠팡 대표 등이 불출석 사유서를 제출하면서 쿠팡에 대한 부정적 여론에 기름을 부었다. 여기에 쿠팡이 내놓은 보상안도 도마 위에 올랐다. 쿠팡은 지난달 29일 고객 정보 유출 사태와 관련해 총 1조6850억원 규모의 보상안을 시행하겠다고 밝혔다. 전체적으로 보면 1인당 5만원 상당이다. 하지만 세부적으로 뜯어보면 쿠팡의 ‘꼼수’가 보인다. 청문회는 나 몰라라 보상안은 ▲쿠팡 전 상품 구매 이용권 5000원 ▲쿠팡이츠 5000원 ▲쿠팡트래블 2만원 ▲명품 플랫폼 알럭스 2만원 등으로 구성됐다. 소비자들은 보상금의 상당 부분이 쿠팡트래블과 알럭스 등 평소 이용 빈도가 낮은 서비스 이용권 위주로 구성된 점을 지적했다. 실제 이번 보상안을 통해 쿠팡트래블과 알럭스를 처음 알게 됐다는 소비자도 있다. 시민단체도 쿠팡의 보상안에 반발했다. 참여연대는 “1인당 5만원 보상이라고 했지만 현금이 아닌 구매 이용권으로 사실상 강제 소비를 유도하는 방식”이라며 “보상이 아니라 매출 확대를 위한 마케팅에 불과하다”는 내용의 논평을 발표했다. 쿠팡의 행보는 사사건건 비판의 대상이 되고 있다. 일각에서는 국민을 조롱하고 정부를 기만하는 게 아니냐는 말까지 나오고 있다. 쿠팡이 미국 시장에 상장한 기업이지만 매출 대부분을 우리나라에서 벌어들이는 상황인데도 이 같은 태도를 보이는 것에 분노하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회원 탈퇴, 보상안 거부, 집단소송 참여 움직임이 거세지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심지어 이재명 대통령도 쿠팡 사태에 대해 여러 차례 언급했다. 이 대통령은 쿠팡 사태가 일어나고 사흘 뒤인 지난달 2일 “쿠팡 때문에 국민의 걱정이 많다”면서 “사고 원인을 규명하고 엄중하게 책임을 물어야 한다”고 주문했다. 그러면서 “관계부처는 해외 사례를 참고해 과징금을 강화하고 징벌적 손해배상 제도도 현실화하는 등 실질적인 실효적 대책에 나서주길 바란다”고 강조했다. 뒤늦은 사과·꼼수 보상안 도마 위에 이래서 정치권 인사 영입했나? 의혹 12일에도 개인정보 유출 사고가 반복되는 것에 대해 “경제 제재가 너무 약해서 규정 위반을 밥 먹듯이 한다”며 “앞으로는 규정을 위반해 국민에게 피해를 주면 엄청난 경제 제재를 당해서 ‘회사가 망한다’는 생각이 들도록 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 “규정을 위반하면 난리가 나야 하는 것 아니냐”며 “그런데 위반해도 태도를 보면 ‘그래서 어쩔 건데’ 이런 느낌이 든다”고 지적했다. 정부도 쿠팡에 강력하게 경고하며 전방위 대응을 예고했다. 실제로 같은 달 29일, 배경훈 부총리 겸 과기부 장관 주재로 ‘쿠팡 사태 범정부TF’ 회의를 개최했다. 이 자리에서 과기부와 경찰청, 개인정보위원회, 금융위원회 등은 역할을 분담해 신속한 조사를 진행한다는 방침을 세웠다. 배 부총리는 “쿠팡이 국내 고객 정보 3000만건 이상을 유출한 것은 명백한 국내법 위반 사항으로 정부는 쿠팡이 관련 법령을 위반한 사실이 확인될 경우, 다른 기업과 동일하게 법과 원칙에 따라 엄정하게 조치할 것”이라고 말했다. 상황에 따라서는 영업정지 여부도 판단할 것으로 보인다. 사방에서 몰아치는 압박에도 쿠팡이 연달아 이상한 행보를 보이자 ‘믿는 구석’이 있는 게 아니냐는 의혹도 제기됐다. 그 정도로 쿠팡의 현재 대응 방식을 이해할 수 없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일각에서는 쿠팡이 미국 기업인 것에 주목하고 있다. 미국 증시가 쿠팡의 모든 결정에 가장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요소라는 것이다. 실제 쿠팡이 자체 조사 결과를 발표한 다음 날 미국 뉴욕 증시에서 쿠팡의 주가는 6% 급등했다. 국내에서는 쿠팡의 ‘셀프 조사’에 분통을 터트리고 있는데 미국 시장에는 호재로 작용한 것이다. 쿠팡이 정치·국회 인사를 대거 영입한 게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게 아니냐는 분석도 나온다. 정치권 인사를 영입해 쿠팡 관련 각종 논란을 틀어막고 있다는 의혹이다. 해당 의혹은 ‘강력 경고’ ‘전방위적 대응’ 등의 수사를 사용하고 있지만 실제 조사는 흐지부지될 것이라는 관측이 조심스럽게 나오는 배경으로도 꼽힌다. 변죽 울리다 무사통과? 실제 최근 원내대표직에서 사퇴한 더불어민주당 김병기 의원이 국정감사를 한 달여 앞둔 시점에 박대준 전 쿠팡 대표 및 대관 총괄과 오찬을 한 사실이 드러났다. 당시 쿠팡이 일용직 퇴직금 미지급 사건에서 검찰 외압 의혹, 물류센터·배송 기사의 과로 및 산재 사망 문제가 제기된 상황이었던 만큼 적절성 논란이 불거졌다. 김 의원은 그달 16일 자신의 SNS에 “공개 일정이고 적어도 5명이 (함께) 식사했다”고 적었다. 그러면서 “만남보다 대화의 내용이 중요한 것 아니냐? 참고로 지난해 7월16일 쿠팡 물류센터도 방문했었다”고 적었다. <jsjang@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