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꽂히면 미치는' 오타쿠의 세계 대해부

  • 이광호 khlee@ilyosisa.co.kr
  • 등록 2013.11.19 10:3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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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적인 집착 변태? 폭발적 집중 천재?

[일요시사=사회팀] ‘오타쿠’에 대해 한 번쯤은 들어봤을 것이다. 오타쿠는 일본에서 제 3자의 집을 높여 부르는 말 ‘귀댁’에서 유래됐다. 가타카나로 쓰면 ‘이상한 것에 몰두하는 사람’이란 뜻이 된다. 이들은 애니메이션, 게임 등에 푹 빠져 현실과 다소 동떨어진 모습을 보인다. 사람들이 오타쿠를 바라보는 시각은 대부분 부정적이지만 일본의 젊은 층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현상으로 한국도 예외는 아니다. 오타쿠 시장은 점점 블루오션으로 자리 잡고 있다.




‘오타쿠’는 1970년대 일본을 중심으로 나타난 서브컬처(하위문화)의 팬들을 총칭한다. 서브컬처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이 오타쿠 문화는 주류 문화와 대비되는 비주류 문화다. 이들은 독특한 행동방식을 갖고 있다. 오타쿠 문화 초기에는 애니메이션·SF 팬에 한정해 불렀지만 지금은 명확한 정의가 없이 보다 폭넓게 사용되고 있다. 일반적으로 한국에선 ‘오덕후’ ‘십덕’ ‘덕후’ 등의 표현을 주로 사용한다. 영미권에는 ‘Geek’이 대표적이다. 주로 애니메이션광을 비하하는 말로 쓰이다가, 최근에는 ‘게을러 보이는 외모’를 빗댄 말로 쓰이기도 한다.

이상한 것에
몰두하는 사람

‘팬’ ‘마니아’ 단계를 넘어서 자기의 관심분야에 미친 듯이 열광하는 사람들을 흔히 ‘오타쿠’라 부른다. 이들은 자기만족을 위해 관심대상에 대해 순수한 호기심을 갖고 깊게 파고든다. 수집가적 기질과 함께 자신만의 문화를 창조할 수 있는 극도의 경지까지 이르고 있다. 좋게 말하자면 ‘전문가적 시각을 초월한 사람’을 뜻한다. 이들은 약간 외골수적인 성향을 갖고 있다. 그리고 자신의 행동에 대한 타인의 시선은 개의치 않고 주관적인 가치관으로 사유하고 행동한다.

일본 젊은이들의 문화는 마니아 문화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만큼 자신의 취미와 관심사에만 몰입하고 심취하는 이들이 많다. 한 분야에 대해 많은 지식과 정보를 소유한 마니아의 종류는 다양하다. 파친코 마니아, 컴퓨터 마니아, 게임 마니아, 애완동물 마니아, 소형차 마니아, 전쟁 마니아(실제로 전쟁에서 사용한 물품 등을 수집하는 마니아), 히트상품 마니아, 아세아대 마니아족(자신의 관심분야에서 개발한 발명품으로 대학 진학), 스쿠프족(관심거리의 기사만을 전문적으로 찍으러 다니는 마니아), 점술 마니아, 나비 컬렉션족, 발굴사진 마니아, 자동차 마니아, 골프 마니아, 더스트 헌터(쓰레기더미를 뒤져 남의 사생활을 엿보는 마니아), 완전자살 마니아(관심사가 자살에 있고 자살만을 생각하고 심취해 완전자살 마니아가 돼 전문 책자와 비디오까지 만들어냄) 등이 있다. 그런데 오타쿠 중 완전자살 마니아는 극소수다. 오타쿠 자살과 관련해 재밌는 이야기가 있다. “오타쿠는 자살 따위 하지 않아” “다음주에 나오는 애니 봐야 되거든” “분기별 신작을 놓칠 수 없어” 오타쿠들에게 자살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신작 애니를 놓칠 수 없기 때문이다. 이처럼 오타쿠들은 애니에 대한 집착이 강하다.

팬·마니아 넘어 관심분야에 미친 듯 열광
타인들 시선 개의치 않는 외골수적 성향


오타쿠들은 자신이 관심을 가진 분야에 대해서는 전문지식 책자를 써내기도 한다. 또 나아가 직업으로도 삼는 마니아들도 있다.

처음 오타쿠라는 말이 사용되기 시작할 때는 2인칭 표현이었다. 그 시작에는 동호인들이 취미 등에 대해 이야기할 때, 서로 예의를 지키고 존중하는 의미에서 상대를 오타쿠라고 부르면서 생겨났다는 설이 있다.

사람에 대한 분류로 오타쿠라는 말이 일반화된 것은 1983년 일본의 칼럼니스트 나카모리 아키오가 만화 월간지 <망가 브릿코>에 칼럼 ‘오타쿠의 연구’를 연재하면서부터다. 나카모리 아키오는 이 칼럼에서 오타쿠를 비칭으로 사용했다.

하지만 때로는 특정 관심사에 대해 극도로 깊이 빠져들어 직업으로 삼는 프로는 아니지만 전문가 수준의 지식을 소유한 아마추어나, 혹은 너무 한 가지 분야에 빠져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일컫기도 한다.

따라서 누군가가 오타쿠라는 말을 하면 ‘일본 애니메이션 광’이나 ‘특정 분야에 대한 지식이 풍부하다’는 의미가 될 수 있다. 한국에서는 특히 ‘만화에 등장하는 미소녀 캐릭터나 좋아하는 변종’이나 심지어 ‘생김새가 안여돼(안경 쓴 여드름 돼지)’라는 말로도 해석할 수 있다.

이처럼 오타쿠에 대한 의미가 모호한 이유는 일단 기준과 의미가 분명하게 정의되지 않은 채 생긴 신조어기 때문이다. 거기에 점점 여러 의미가 덧붙여지고 이로 인해 뜻이 변해버렸다.

그 범위로는 오타쿠란 모두 ‘한 분야에 심취한 사람’을 뜻할 수 있지만, 그렇게 되면 마니아와 구분하기 어려워진다. 전문가들의 말에 따르면 오타쿠와 마니아의 차이점은 분야와 강도의 관점에서 분류할 수 있다고 한다. 현재 여행, 카메라, 패션 등 현실적인 것을 제외하고 크리에이터가 창조한 것에 열중하는 사람들, 특히 서브컬처에 몰두하는 사람들을 한정해 구분한다.


자기만의 세계에 빠져 산다는 점에서 보면 오타쿠와 히키코모리는 같은 선상에 있는 것 같아 보인다. 하지만 오타쿠와 히키코모리는 조금 다르다. 히키코모리는 철저하게 자기만의 세계에 빠진 것에 비해 오타쿠는 자신과 같은 취향이나 취미를 가진 사람들과는 어울리거나 일종의 친목을 형성한다는 점이 히키코모리와의 차이점이다.

그렇지만 한국에서 오타쿠가 갖고 있는 의미는 히키코모리, 은둔형 외톨이라는 의미까지 함축된다. 다소 부정적인 이미지가 지배적인 게 사실이다.




한국에서 오타쿠에 대한 인식은 분명 일본에 비해 좋지 않다. 일본에서는 불경기 시기 오타쿠의 활약이 있으면서 이미지의 전환이 이뤄진 적도 있지만 한국에서는 그러한 계기가 없었고 히키코모리와 동일한 존재나 오타쿠가 소비하는 콘텐츠 대부분이 일본 작품이여서 타문화에 대한 추종으로 비춰질 수 있다는 거부감도 있다.

한때 tvN <화성인 바이러스>에 출연해 애니메이션 등장인물 ‘페이트’에 대한 진심어린 사랑을 공개했던 A씨는 당시 캐릭터가 그려져 있는 베개를 껴안으며 비상식적인 모습을 연출해 많은 사람들의 시선을 집중시킨 바 있다. 당시 시청자들의 반응은 매우 뜨거웠다. 오타쿠에 대한 일반적인 인식을 확인할 수 있었던 방송이었다.
이후 A씨는 한 커뮤니티를 통해 한 여성과 데이트 하는 모습의 사진을 올리며 수많은 오타쿠들의 부러움을 샀다. “아니 저 사람이 어떻게 여자와 데이트를 할 수 있지?” 등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반응이 대부분이었다.

여친 필요없다
신작 애니 사수

1960년대부터 80년대에 이르기까지의 일본은 여러 차례의 위기를 극복하고 경제 성장의 과업을 달성했다. 산업의 발달과 더불어 일본의 대중문화도 괄목 성장했다. TV보급 전 세대별 맞춤 만화들이 다수 등장하면서 애니메이션 시장도 활기를 띠었다. 특히 ‘고질라’ ‘울트라맨’ 등의 작품들이 쏟아지며 각종 만화 관련 프라모델(피규어)이 붐을 이뤘다. 오타쿠 예비군 양성의 시작이었다.

당시 오타쿠는 존재 자체의 명명이 이루어지지 않았던 시기였다. 특별히 사회적으로 이슈가 될 만한 존재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저 유별난 취미생활을 즐기는 사람들이었다. 수동적인 형태 속에서 스스로가 콘텐츠를 발굴한 것이다.

80년대 말 세상 밖으로
2000년대 들어 양성화

이후 오타쿠가 세상 밖으로 드러난 계기가 있다. 89년 6월, 사이타마와 도쿄 등지에서 발생한 연속 유아 납치살인사건이 발생해 여아가 납치·살해된 것. 당시 유아연쇄살해사건의 피의자 미야자키 쯔토무의 방에서 6000개 이상의 비디오테이프와 많은 잡지들이 나왔다. 매체들은 일제히 이 사건을 두고 ‘오타쿠에 의한 범죄’ ‘오타쿠식 범죄’라고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이후 오타쿠는 전국적인 이슈로 떠오르게 되며 오타쿠 전체에 대한 비난으로 화살의 방향이 틀어졌다.

이처럼 오타쿠는 시작부터 차별적으로 비추어졌다. 자신들의 부정적 이미지를 숨길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2000년대 들어서면서 오타쿠를 바라보는 사회적 시선은 조금씩 달라졌다. 만화 및 게임과 같은 분야에서 오타쿠들의 활약이 눈에 띄게 늘어나며 각 분야의 시장에서 두각을 나타내게 된 것이다. 비로소 일본 내 재평가가 이뤄지게 됐다. 그리고 세계 시장에도 영향을 미치면서 오타쿠는 수동형에서 능동형으로 진화하는 모습을 보였다. 지금의 오타쿠는 넘쳐나는 정보를 최대한 효율적인 방법으로 좀 더 유용하게 자신의 것으로 활용하는 능력을 갖고 있다.

불황 속 블루오션
주목받는 키덜트

최근에는 아이 같은 감성과 취향을 가진 어른을 뜻하는 ‘키덜트’(kid와 adult의 합성어) 문화가 주목받고 있다. 한마디로 ‘어른아이’, 장난감 사는 어른을 뜻한다. 다 큰 성인이 무슨 장난감이냐 비아냥댈 수도 있지만 건담이나 피규어 등 성인용 장난감을 전혀 거리낌없이 구입하는 사람들을 이제는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다.


키덜트 산업은 매해 급성장하고 있다. 업계에 따르면 키덜트 관련 제품 시장 규모는 현재 5000억원에 이른다.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는 20∼40대 키덜트들은 수십만원에서 수백만원에 이르는 키덜트 장난감을 사기 위해 기꺼이 지갑을 연다. 이들의 구매력에 힘입어 키덜트 시장은 불황 속 블루오션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이러한 키덜트 문화의 시장성을 눈여겨본 갤러리아백화점은 서울 강남의 압구정 명품관에 키덜트 장난감 매장 두 곳을 입점시켰다. 키덜트 장난감 매장은 잘 빼입은 남성들로 북적인다.




키덜트 문화를 즐기는 사람들은 수십만명에 이를 것으로 추산된다. 오리지널 키덜트 장난감인 건담과 피규어 마니아에 이어 최근에는 무선조종용품이 인기를 끌고 있다. 특이한 취향을 가진 소수의 비주류 문화로 취급받던 때와는 비교할 수도 없다. 이제는 당당하게 대중문화의 한 축으로 자리 잡으면서 자신만의 방법으로 키덜트 문화를 즐기는 이들이 늘고 있다.

만화, 애니메이션, 장난감…
‘그들의 문화’블루오션 부상

16년차 피규어 마니아인 김성재(26)씨. 그는 현재 취업준비에 한창인 경영학도다. 공부면 공부, 운동이면 운동, 자기관리에 철저한 멋진 대학생이다. 그러나 반전이 있었다. 평범한 외모와 달리 그의 방은 온갖 피규어로 가득했다. 울트라맨, 가면라이더 등 피규어만 모아둔 진열장이 있을 정도였다. 어려서부터 일본문화에 심취한 그는 일본 관련 콘텐츠에 해박했다. 심지어 일본어로 회화도 가능하다. 그리고 방에 있는 피규어 대부분은 일본에서 직접 사온 것들이었다. 김씨는 “누가 보면 오타쿠라고 손가락질 할 수 있지만 이렇게 피규어를 모으는 게 소소한 행복이다”며 “하나하나 모을 때마다 뿌듯하다”며 자랑스러워했다.

피규어에 대한 애정을 노래에 담은 이도 있다. 스토리텔링 음악으로 독보적인 위치에 있는 랩퍼 팻두는 음악만큼이나 피규어에 대한 사랑이 각별한 마니아로 알려졌다. 곰인형 모양의 일본산 아트토이 베어브(BearBrick)이 그의 주요 수집품이다. “피규어 수집 취미가 다양한 주제의 이야기를 담은 스토리텔링 음악을 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고 밝힌 팻두는 실제로 자신이 좋아하는 베어브릭에 관한 음반을 발표한 바 있다.

2011년 베어브릭을 소재로 7곡의 노래가 담긴 ‘베어브릭 인 러브’라는 음반을 만들었다. 베어브릭을 좋아하는 이들과 사연을 나누고 싶어 자비를 들여 음반 3000장을 찍은 뒤 이 가운데 2500장을 한 아트토이 판매점을 통해 베어브릭 애호가들에게 무료로 배포하기도 했다. 또한 용인송담대에는 토이캐릭터창작과가 생길 만큼 피규어 시장이 산업적으로 주목받고 있기도 하다.


현대사회는
오타쿠 원한다

오늘날 오타쿠 문화는 일본이라는 나라에 국한되지 않고 전 세계인이 함께 즐기고 활용할 수 있는 새로운 문화로 부상했다. 오타쿠 관련 시장은 매해 성장을 거듭하고 있다. 오타쿠에 대한 편견이 점점 희석되면서 새로운 문화 콘텐츠가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받고 있다. 이제 오타쿠 문화는 현대사회에 있어 결코 간과할 수 없는 저력 있는 비주류 문화로 자리 잡게 됐다.


이광호 기자 <khlee@ilyosisa.co.kr>

 

<기사 속 기사>

‘오타쿠 천국’일본에선…
섹스보다 만화 “출산률 저하”

지난달 24일 영국 BBC 방송은 2060년 일본 인구가 현재보다 3분의 1이나 감소할 것으로 우려된다고 보도했다. 일본의 출생률이 이처럼 감소하는 원인 중 하나는 아기를 낳기 위한 성관계보다는 만화나 애니메이션, 컴퓨터 게임 등에 더 열광하는 ‘오타쿠의 급증’이다. 오타쿠는 취업 등에 관심을 보이지 않으며 인간관계, 특히 여성과 관계를 맺는 데에도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고 있다.

지난 2010년 일본 후생노동성 조사에 따르면 16∼19세의 일본 남성 가운데 36%가 오타쿠였다. 이는 불과 2년 새에 두 배로 늘어난 수치인데 문제는 이러한 증가세가 더욱 빨라지고 있다는 것이다.

16∼19세 남 36% 오타쿠
불과 2년새 2배로 늘어

누리칸(38)과 유게(39)라는 오타쿠는 실제 여성이 아니라 게임 속의 여주인공인 린코와 네네를 자신의 여자친구로 생각하고 있다. 누리칸과 유게는 모두 30대 후반이지만 게임을 할 때는 자신들이 10대 중반의 청소년이라고 생각한다. 누리칸은 “게임 속에서는 언제나 고등학생이 될 수 있고 어린 애인과 관계를 맺을 수 있다”고 말했다. 유게 역시 “게임 속에서는 내가 원하기만 하면 관계를 영원히 지속할 수 있다”고 말한다.

일본 남성들 가운데 이처럼 오타쿠가 점점 늘어나는 원인은 아직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았다. 그러나 많은 일본의 젊은 남성들이 미래에 대해 비관적으로 생각하는 것이 한 원인일 수 있는 것으로 지적되고 있다. 일본의 젊은이들은 자신들의 부모 세대만큼 부를 축적할 가능성이 없다고 생각하고 있고, 부양해야 할 자식을 낳아야 할 결혼과 같은 인간관계에 부담을 느끼고 있다는 것.

남녀가 만나 교제를 하더라도 섹스를 하거나 결혼하는 비율도 점점 감소하고 있다. 최근 한 조사 결과에 의하면 교제하는 일본 커플 가운데 1주일에 한번이라도 성관계를 갖는 커플은 27%에 불과했다. 일본에서 태어나는 신생아 가운데 혼외 출생아의 비율은 2%에 불과하다. <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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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세보다 무서운 산재와의 전쟁

탈세보다 무서운 산재와의 전쟁

[일요시사 취재1팀] 장지선 기자 = 이재명 대통령이 ‘산재와의 전쟁’을 선포했다. 건설 현장에서 근로자가 사망하는 사건을 줄이겠다는 취지다. 이 대통령이 칼을 휘두르자 기업은 납작 엎드렸다. 이 대통령의 행보를 보는 시각은 엇갈린다. 산재 사망사고가 끊이지 않는 만큼 단호한 조치가 필요하다며 환영하는 의견과 구조적 문제를 뒤로하고 기업 ‘잡도리’만 하고 있다는 의견 등이다. 건설업계에 칼바람이 불고 있다. 미국발 관세나 국내 경기 문제가 아니다. 산업재해(이하 산재)가 건설 현장을 뒤흔드는 중이다. 대통령은 여러 현안 중 산재로 인한 사망사고 근절을 국정 과제 첫머리에 올린 듯한 모습이다. 대통령 한마디 이재명 대통령이 반복되는 산재 사망사고의 고리를 끊겠다고 나섰다. 산재 사망사고가 발생한 기업을 법과 제도를 통해 처벌하겠다고 선언했다. 발언 수위도 나날이 세지고 있다. 본보기가 된 기업은 대통령이 일으킨 칼바람을 온몸으로 맞는 모양새다. 지난 5월 고용노동부가 발표한 1분기 ‘산업재해 현황 부가 통계’에 따르면 올해 1~3월 재해 조사 대상 사고 사망자는 총 137명(잠정)으로 지난해 같은 기간(138명)보다 1명(0.7%) 줄었다. 사망사고 건수도 같은 기간 136건에서 129건으로 7건(5.1%) 감소했다. 업종별로는 제조업이 29명으로 지난해보다 2명, 기타 업종(건설업과 제조업 이외 업종)이 38명으로 6명 감소했지만 건설업은 71명으로 오히려 7명 늘었다. 노동부는 부산 기장군 건설 현장 화재와 서울-세종고속도로 교량 붕괴 등 대형 사고의 영향으로 건설업 사망자 수가 증가했다고 분석했다. 지난 2월14일 부산 기장군 반얀트리 리조트 신축 공사장에서 불이 나 6명이 숨졌다. 또 같은 달 25일, 경기도 안성시 서울-세종고속도로 건설 현장 교량 상판 구조물이 붕괴해 4명이 목숨을 잃는 사고가 일어났다. 규모별로는 상시 근로자 50인(건설 업종은 공사 금액 50억원) 미만 사업장에서 올해 1분기 사망자는 83명으로 지난해보다 5명(6.4%), 사망사고 건수는 83건으로 7건(9.2%) 늘었다. 반면 50인 이상 대형 사업장과 대규모 공사 현장에선 사망자 54명, 사고 건수 46건으로 각각 6명, 14건 줄었다. 사망사고 유형별로는 ‘추락’ 62명, ‘끼임’ 11명, ‘물체에 맞음’ 16명으로 지난해와 비교해 각각 1명, 7명, 5명 감소했다. 화재와 폭발로는 10명, ‘붕괴’ 사고로는 11명이 목숨을 잃었다. 지자체별로는 경기(31명), 서울(17명), 경북(15명), 부산·전남(12명), 경남(11명), 충남(9명), 강원·울산(6명) 순으로 많았다. 산재로 인한 사망은 건설 현장에서 일어날 수 있는 최악의 사고다. 정부는 산재 사망사고를 줄이기 위한 각종 대책을 내놨다. 2022년 1월부터 시행된 중대재해처벌법(이하 중처법)도 그중 하나다. 중처법은 근로자의 사망사고 등 중대 재해가 발생했을 때 기업의 경영 책임자 등이 안전 보건 관리 체계 구축 등 의무를 위반한 것으로 확인되면 처벌하도록 하는 내용이 골자다. 취임 이후부터 직접 챙겨 국정 운영 계획에도 포함 문제는 실효성이다. 중처법이 시행된 이후에도 건설 현장에서 근로자가 죽는 일이 계속 일어나고 처벌은 ‘솜방망이’ 수준에 그친다는 지적이 끊이지 않았다. 결국 이 대통령이 칼을 빼 들었다. 이 대통령은 지난 12일 “비용을 아끼기 위해 누군가의 목숨을 빼앗는 것은 일종의 미필적 고의에 의한 살인, 또는 사회적 타살”이라고 비판했다. 필요하면 법을 개정해서라도 ‘산재 공화국’이라는 오명을 벗겠다는 뜻도 밝혔다. 이 대통령은 이날 국무회의에서 “일상적으로 산업 현장을 점검해서 필요한 안전조치를 하지 않고 작업하면 엄정하게 제지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며 “제도가 있는 범위 내에서 할 수 있는 최대의 조치를 해달라”고 주문했다. 사고 위험이 큰 업무를 하청과 외주를 통해 해결하는 ‘위험의 외주화’ 현상에 대해서도 지적했다. 이 대통령의 산재 사망사고 근절 ‘드라이브’는 점진적으로 거세지고 있다. 초기에는 주무 부처에 대책을 요구했다면 최근에는 직접 목소리를 내고 움직이는 식이다. 대통령이 직접 나서서 산재를 줄이라고 지시했는데도 불구하고 사망사고가 이어지자 특유의 행동력을 보이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실제 이 대통령이 고용노동부에 산재 관련 종합 대책을 주문한 뒤에도 ▲인천 맨홀 작업 노동자 질식사 ▲포스코이앤씨 노동자 끼임사 ▲경기 의정부 아파트 신축 현장 노동자 추락사 등의 사고가 일어났다. 불과 한 달 새 일어난 일이다. 지난달 6일 인천 계양구 병방동의 한 도로 맨홀 안에서 지하 시설물 조사 작업 중이던 노동자 1명이 의식을 잃고 1명은 실종됐다. 이들은 결국 사망했다. 조사 결과 이 사고는 용역 계약 위반에 따라 허가 절차 없이 진행하다가 발생한 인재로 드러났다. 법으로도 안 됐는데… 숨진 근로자는 산소 마스크 등 안전 장비를 제대로 착용하지 않은 채 작업하다 유독가스에 중독된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 이 대통령은 “현장 안전 관리에 미흡한 점이 있었는데 철저히 밝히고 법령 위반 여부가 있었는지를 조사해 책임자를 엄중히 조치하라”며 “후진국형 산업재해가 다시는 발생하지 않도록 현장 안전관리를 정비하고 사전 지도·감독을 강화하는 등 관련 부처도 특단의 조처를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지난달 28일 포스코이앤씨가 시공하는 경남 함양-울산고속도로 의령나들목 공사 현장에서 사면 보강 작업을 하던 60대 근로자가 천공기(지반을 뚫는 건설기계)에 끼어 숨지는 사고가 일어났다. 포스코이앤씨 시공 현장에서만 올해 들어 4번째 일어난 사망사고다. 지난 1월 경남 김해 아파트 신축 현장 추락사고, 경기도 광명 신안산선 건설 현장 붕괴사고, 대구 주상복합 신축 현장 추락사고 등도 줄을 이었다. 이 대통령은 “똑같은 방식으로 사망사고가 나는 것은 결국 죽음을 용인하는 것이고 아주 심하게 얘기하면 법률적 용어로 미필적 고의에 의한 살인”이라고 질타했다. 그러면서 “(산재 사망사고가 나면) 여러 차례 공시하도록 해서 투자를 안 하고 주가가 폭락하게 (해야 한다)”고도 말했다. 여름휴가를 마치고 복귀 첫 일성도 산재 관련 발언이었다. 이 대통령은 “앞으로 모든 산업재해 사망사고는 최대한 빠른 속도로 대통령에게 직보하라”고 지시했다. 산재 사망사고를 직접 챙기겠다는 의지를 다시 한번 천명한 것이다. 사과문 내고 또 반복되다 지난 9일 강유정 대통령실 대변인을 통해 전해진 이 대통령의 발언은 전날인 8일 경기 의정부 신축 아파트 공사 현장에서 안전망 철거 작업을 하던 50대 근로자가 6층 높이에서 떨어져 숨진 사고가 영향을 미쳤다. 이 대통령이 선포한 ‘산재와의 전쟁’에 기업은 바짝 얼어붙은 상황이다. 지난달 25일 경기 시흥 SPC 삼립 공장을 방문해 ‘중대산업재해 발생 사업장 현장 간담회’를 열었다. 해당 공장은 지난 5월 50대 여성 노동자가 작동 중인 컨베이어벨트에 끼어 사망했고 2022년과 2023년에도 여성 노동자가 각각 소스 교반기와 반죽 기계에 끼어 숨지는 등 중대 산재가 빈번하게 일어났던 곳이다. 이 대통령은 이날 간담회에서 SPC 근로자의 노동 시간 등을 자세히 물었다. 그러면서 “(산재가) 심야에 대체적으로 발생하고 12시간씩 4일간 일하다 보면 사실 심야 시간에 힘들다. 주의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며 “심야 장시간 노동 때문에 생긴 일로 보여진다”고 말했다. 이 대통령의 지적에 SPC 회장을 비롯해 그룹 관계자들이 쩔쩔맨 것으로 전해졌다. SPC그룹은 이 대통령이 다녀간 지 이틀 만인 지난달 27일, 8시간 초과 야근을 폐지하겠다는 대책을 내놨다. 제품 특성상 필수적인 품목 외에는 야간 생산을 최대한 없애 공장 가동 시간을 축소하겠다는 것이다. 또 주간 근무 시간도 점진적으로 줄여 장시간 근무로 인한 피로 누적, 집중력 저하, 사고 위험 등을 사전에 차단하겠다고 밝혔다. 포스코이앤씨는 지난달 29일 담화문을 내고 고개를 숙였다. 정희민 전 대표이사는 “어제(28일) 사고 직후 모든 현장에서 즉시 모든 작업을 중단했고 전사적 긴급 안전 점검을 실시해 안전히 확실하게 확인되기 전까지 무기한 작업을 중지하도록 했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협력업체를 포함한 모든 근로자의 안전이 최우선 가치가 되도록 필요한 자원과 역량을 총동원해 근본적인 쇄신 계기로 삼겠다”며 “또다시 이런 비극이 발생하는 일이 없도록 사즉생의 각오와 회사의 명운을 걸고 안전 체계의 전환을 이뤄내겠다”고 말했다. 하지만 정 전 대표의 사과는 엿새 만에 또다시 일어난 사고로 빛이 바랬다. 지난 4일 오후 경기 광명시 옥길동 광명-서울고속도로 민간투자사업 제1공구 현장에서 미얀마 국적 30대 근로자가 감전돼 심정지 상태로 발견됐다. 이 근로자는 병원으로 이송된 지 8일 만인 지난 12일 의식을 회복했다. 높아진 발언 수위·제재 조치 “왜 기업만 잡도리?” 의견도 정 전 대표는 사의를 표명하고 물러났다. 연이어 산재사고가 일어난 포스코이앤씨는 ‘본보기’가 될 가능성이 커진 상황이다. 일단 이 대통령은 포스코이앤씨에 대한 건설 면허 취소, 공공 입찰 금지 등 법률상 가능한 방안을 모두 찾아서 보고하라는 지시를 내린 바 있다. 국내 건설 면허 취소는 현행 건설산업기본법상 최고 수위의 징계다. 1994년 성수대교 붕괴 책임이 있던 동아건설산업에 내려진 사례가 유일하다. 건설 면허가 취소되면 신규 사업을 할 수 없고, 다시 면허를 취득한다고 해도 수주 이력이 없기 때문에 관급공사를 따내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하다. 경찰은 사고 관련 수사 전담팀을 만들고 고용노동부 안양지청과 함께 포스코이앤씨와 하청업체에 대한 압수수색에 돌입했다. DL건설도 대표이사를 비롯한 임원진 전원이 공사 현장에서 발생한 사망사고에 책임을 지고 일괄 사표를 제출하는 등 납작 엎드렸다. 특히 이 대통령이 휴가에서 돌아와 산재 관련 발언을 한 직후 터진 사고여서 충격파가 더 컸다. DL건설에서 사표를 제출한 임직원은 80여명, 공사를 중단한 현장은 44곳에 이른다. 이재명정부는 산재사고로 인한 사망자 비율을 2030년까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 수준인 1만명당 0.29명까지 끌어내리는 방안을 추진하기로 했다. 지난해 우리나라에서 발생한 산재로 인한 사망자 비율은 1만명당 0.39명으로 OECD 평균을 크게 웃도는 실정이다. 이 같은 내용은 ‘이재명정부 국정 운영 5개년 계획’에 포함됐다. 이 대통령이 지난달 수석보좌관 회의에서 “전 세계에서 또는 OECD 국가 중 산업재해율, 사망재해율이 가장 높다는 불명예를 이번 정부에서 반드시 끊어내겠다”고 의지를 드러낸 부분을 국정과제로 담은 것이다. 구조 문제 나 몰라라 일각에서는 이 대통령이 지나치게 건설업계만 잡고 있다는 지적도 제기된다. 관련 법과 제도가 시행되고 있는데도 사망사고가 끊이지 않는다면 구조적인 문제도 살펴봐야 한다는 것이다. 수주 경쟁이 과열되면서 저가 입찰이 늘고 안전관리에 소홀해지는 점이 산재로 이어지는 식의 고리를 끊어야 진정한 의미의 ‘근절’이 이뤄질 것이라는 분석도 있다. <jsjang@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