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의 검란' 검찰 수뇌부 파워게임

  • 강현석 angeli@ilyosisa.co.kr
  • 등록 2013.10.28 11:5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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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와대 역풍 맞을라…벌집 건드렸다

[일요시사=취재2팀] 국정원 대선개입 의혹 사건을 수사 중인 검찰이 또다시 '검란(檢亂)'의 소용돌이에 빠져들었다. 검란의 근원지는 바로 서울중앙지검. 박근혜정부 들어 중수부의 기능을 이관 받았던 서울중앙지검은 쏟아지는 외풍에 휘청거리고 있다.




지난 18일 속보가 떴다. 국정원 대선개입 의혹 사건과 관련 수사 지휘라인에 있던 윤석열 여주지청장(특별수사팀장)이 내규를 어겨 직무배제 됐다는 믿기 힘든 소식이었다. '채동욱 사건' 이후 뒤숭숭했던 검찰은 또다시 벌집이 됐다.

서울중앙지검
정치권력에 휘청

그간 국정원 대선개입 의혹 수사는 현 정권의 정통성을 건드리는 민감한 수사로 여겨졌다. 수사 과정에서 청와대와 검찰의 엇박자는 여러 차례 감지됐고, 이 과정에서 김기춘 청와대 비서실장으로 청와대 측 컨트롤타워가 교체됐다는 게 정설이다. 그리고 김 실장의 등장과 함께 '제2의 검란' 사태를 예고하는 징후가 포착되기 시작했다.

지난 8월 서울 강남의 한 유명 일식집. 곽상도 당시 청와대 민정수석과 강효상 <조선일보> 편집국장이 비밀 회동을 가졌다는 소문이 퍼졌다. '채동욱 총장을 몰아내기 위해 청와대와 <조선일보>가 합작을 했다'는 의혹은 정가를 중심으로 빠르게 확산됐다.

지난 1일 민주당 신경민 의원은 채동욱 전 검찰총장의 혼외자 논란 및 사퇴와 관련, '김기춘 배후설'을 제기했다.
신 의원은 이날 오전 국회에서 열린 긴급현안질문에서 "8월5일 김 실장이 검찰 출신 정치인을 만나 '이 두 사람은 날려야 한다. 채동욱을 허수아비로 만들 방법이 뭐냐'고 물었다"며 관련 의혹을 폭로했다. 그리고 신 의원이 언급한 두 사람 중 한 명은 조영곤 서울중앙지검장이었다.


조 지검장은 채 전 총장의 신임을 받고 있던 인물이었다. 특히 국정원 댓글 사건 등 검찰의 광폭 수사가 속도를 낼 수 있었던 배경에는 조 지검장의 헌신이 있었다. 30개의 관할 부서 및 200여 명의 검사를 지휘했던 조 지검장은 정해진 휴가 한 번 써보지 못할 정도로 바쁜 나날을 보냈다.

국정원 댓글 사건 수사하다 조직 풍비박산
김기춘 등장부터…윤석열 폭로도 시나리오?

채 전 총장도 조 지검장에게 신뢰를 보냈다. 자신이 취임사에서 강조했던 '권한의 위임과 결과에 대한 책임'을 강화하기 위해 20년 넘게 이어지던 관행을 폐기했다. 채 전 총장은 매주 화요일 서울중앙지검장이 독대형식으로 검찰총장에게 모든 수사 진행상황을 면담 보고하던 일정을 없앴다.

그러나 서울중앙지검 특수부가 사실상 중수부의 역할을 대행하고 있었기 때문에 채 전 총장의 지시를 서울중앙지검이 이행하게 되는 일도 많았다. 결국 채 전 총장과 조 지검장은 긴밀히 소통할 수밖에 없었고 둘 사이의 이견은 부각되지 않았다.

하지만 채 전 총장이 물러나면서 상황은 급변했다. 외풍을 막던 채 전 총장이 현 정권의 눈 밖에 나면서 국정원 대선개입 의혹 사건 특별수사팀을 운영하고 있던 서울중앙지검은 위축됐다. 이 과정에서 "조 지검장이 고무신을 거꾸로 신었다"는 얘기가 들리는 등 검찰 안팎의 분위기는 심상치 않았다.

윤 지청장은 이 같은 분위기를 포착하고 '항명'이란 승부수를 던지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조 지검장은 윤 지청장을 수사팀에서 제외하는 강수로 맞섰다.

윤석열 항명
조영곤 눈물


그런데 사건은 예상치 못한 국면으로 전개됐다. 국회 법제사법위원회(이하 법사위) 국정감사 자리에 윤 지청장이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이 자리에서 윤 지청장은 "조 지검장이 수사를 방해했다"는 내용의 폭로를 했다.

윤 지청장의 발언에 따르면 윤 지청장은 지난 15일 밤 조 지검장의 자택을 방문했다. 평소 호형호제하던 둘의 분위기는 화기애애했다. 하지만 윤 지청장은 조 지검장과 맥주를 마시던 중 국정원 심리전단 직원들에 대한 체포·압수수색 영장 등 강제 수사 필요성을 역설했다. 또 향후 수사계획을 밝히며 조 지검장의 재가를 받아내려 했다.

그러나 조 지검장은 격노한 뒤 "야당 도와 줄 일 있나. 야당이 이걸(중간수사 결과) 가지고 정치적으로 얼마나 이용하겠냐"고 만류했다. 또 "내가 사표내면 해라. 우리 국정원 수사의 순수성이 얼마나 의심받겠냐"고 윤 지청장을 질책했다.




조 지검장의 반응을 본 윤 지청장은 조 지검장의 동의하에 사건을 수사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특별수사팀의 운명이 위태하자 윤 지청장은 독자 행동을 개시했다.

조 지검장을 만난 다음날인 16일 윤 지청장은 박형철 부장(부팀장)의 전결로 체포·압수수색 영장을 청구했다. 그리고 17일 윤 지청장은 조 지검장을 만나 영장집행을 사후 보고했다.

보고를 들은 조 지검장은 대노했다. 특별수사팀을 총괄·지휘하는 자신에게 정식 결재나 승인을 받지 않았다는 이유였다. 조 지검장은 지휘체계를 무시한 윤 지청장에게 직무배재란 중징계를 내렸다.

하지만 윤 지청장은 이를 부당하게 생각했다. 그는 국정감사 자리에 나와 "검사가 중대범죄를 포착해 상관에 보고할 경우 특별한 사유가 없으면 수사를 하도록 하는 것이 맞다"며 "처음부터 (내가) 보고했을 때 수사하라고 했으면 이런 일이 있었겠느냐"고 불만을 토로했다.

윤 지청장의 폭로는 이게 끝이 아니었다. 그는 "(국정원) 수사 초기부터 외압이 계속 되어 왔다"며 "사실상 수사팀을 힘들게 하고 수사하는 사람들이 느끼기에 정당하거나 합당하지 않고, 도가 지나쳤다면 그것을 외압이라고 느낀다"고 설명했다. 윤 지청장이 암시한 외압의 배후로는 황교안 법무부장관 등이 지목되고 있다.

윤 지청장의 연이은 폭로와 국회 법사위 위원들의 질타가 쏟아지자 조 지검장은 결국 눈물을 흘렸다. 그는 "수사팀을 신뢰하면서 많은 힘을 실어줬다"며 "보고나 협의 과정에서 충분히 의견을 개진할 수 있도록 했다"고 항변했다. 하지만 조 지검장의 권위와 공정성은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잇따른 폭로전에
초유의 셀프감찰

국정감사에서 돌아온 조 지검장은 22일 본인에 대한 감찰을 대검에 정식 요청했다. 현직 검사장이 자신에 대한 감찰을 자발적으로 요청한 건 전례가 없는 일이다.

대검 감찰본부는 조 지검장과 윤 지청장을 비롯해 박 부장, 이진한 서울중앙지검2차장 등 주요 지휘라인 뿐만 아니라 특별수사팀에 대해서도 조사를 벌일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지휘라인 내에서도 각기 다른 입장을 갖고 있는 이들의 진술이 엇갈릴 경우 자칫 감찰이 장기화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사상 초유의 '셀프감찰'이 현실화되자 일선 검사들과 수사관들은 사석에서 이번 '검란 사태'에 대한 의견을 개진하는 등 답답함을 토로하고 있다. 특히 이번 사태가 검찰의 향후 수사 방향 및 검찰 조직의 명운과 직결된 문제란 생각에 시름은 더욱 깊어지는 모양새다.

부장급 이하 검사들은 대체로 윤 지청장의 행동을 두고 '이유 있는 항명'이란 평가를 내놓고 있다. 익명을 요구한 한 검사는 "이번 사건은 윤 지청장 말대로 해석에 대한 입장차이가 아니라 부당한 지시에 대한 소신 있는 결단으로 봐야 한다"며 "치열한 설득의 과정을 거쳐야 했지만 끝내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면 나라도 그렇게 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또 다른 검사도 윤 지청장의 항명에 힘을 실어줬다. 그는 "채 전 총장이 남았더라면 아마 수사팀의 방침대로 하라고 했을 것"이라며 "외풍을 막아줄 사람이 없는 상황에서 앞으로 법과 원칙에 따른 수사가 가능할지 의문"이라고 우려했다.

하지만 서울에서 근무 중인 한 검사는 윤 지청장의 행동에 아쉬움을 드러냈다. 그는 "'외압을 행사했다'는 황 장관이나 '고무신을 거꾸로 신었다'는 조 지검장이나 평소에는 인품이 훌륭하고 후배들의 지지를 받는 선배였다"며 "이분들이 외압의 실체로 지목되니 검찰 조직이 흔들리는 것"이라고 안타까워했다.

채동욱-조영곤 라인 외풍으로 무너져
공안통·특수통 우두머리 줄줄이 저격

한 부장급 검사 역시 "중요한 사안일수록 정식 절차를 밟아 논란의 여지를 남기지 않았어야 했다"며 "신중하지 못한 처사였다"고 지적했다.


실제로 윤 지청장은 지난해 검란 사태의 지분이 있는 사람이다. 당시 한상대 검찰총장은 이명박 대통령의 측근으로 불렸던 최재경 특별수사부장(현 대구지검장)에 대한 감찰을 지시했다. 이에 특수부 검사들은 일제히 반발했는데 이때 소매를 걷어붙인 검사 중 한 명이 바로 윤 지청장이다.

때문에 윤 지청장은 평소 검찰 내에서도 보수파로 이름이 높다. 한 검사의 증언은 이를 뒷받침한다. 그는 "보수주의자인 윤 지청장이 좌파검사로 매도되고 그간의 수사성과까지 의심받는 상황을 보면 무섭다는 생각이 든다"며 "이런 분위기에서 그 누가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있겠냐"라고 탄식했다. 아울러 그는 "검찰 구성원이 패배주의에 빠지고 또 다시 정치검찰이라는 오명을 뒤집어써야 하는 것인지 모르겠다"고 자책했다.

그런데 더 큰 문제는 이번 '검란 사태'가 좀처럼 봉합될 여지를 보이지 않는다는 것에 있다. 복수 언론에 따르면 조 지검장은 윤 지청장에게 국정감사 불출석을 종용했다. '아프다는 핑계를 대고 국감에 나오지 마라'고 조 지검장이 지시했다는 것이다. 더불어 윤 지청장은 윤상현 새누리당 원내부대표가 수사팀만 아는 기밀을 언론에 발설한 사실을 언급하며 "수사가 (외부세력에 의해) 방해받고 있다"고 주장했다.

갈등봉합
누가할까

사태가 점차 진실게임 양상으로 비화하자 한 검찰 관계자는 이번 '검란 사태'를 특수통과 공안통의 갈등으로 풀이하기도 했다. "공안통이었던 한상대를 쫓아낸 게 특수통이고, 특수통인 채동욱을 쫓아낸 게 공안통이라 이번 사건은 (조 지검장이 아닌) 권력을 쥐고 있는 공안통에 대한 특수통의 반란으로 봐야한다"는 설명.

지난 주말 청와대가 김진태 검찰총장 후보를 내정한 가운데 이번 검란 사태가 더욱 확대될 것이란 시각도 있다. 검찰 주변에선 "특수통 출신이지만 공안통과 더 가까운 김 후보가 주류 특수통에 대해 좋지 않은 감정을 갖고 있다"는 얘기도 들린다.  궁극적으로 '검찰의 독립성'을 바라보는 공안통과 특수통의 다른 시각이 있는 한 이번 항명 사태는 언제든 재현될 수 있다는 설명이다.


강현석 기자<angeli@ilyosis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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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세보다 무서운 산재와의 전쟁

탈세보다 무서운 산재와의 전쟁

[일요시사 취재1팀] 장지선 기자 = 이재명 대통령이 ‘산재와의 전쟁’을 선포했다. 건설 현장에서 근로자가 사망하는 사건을 줄이겠다는 취지다. 이 대통령이 칼을 휘두르자 기업은 납작 엎드렸다. 이 대통령의 행보를 보는 시각은 엇갈린다. 산재 사망사고가 끊이지 않는 만큼 단호한 조치가 필요하다며 환영하는 의견과 구조적 문제를 뒤로하고 기업 ‘잡도리’만 하고 있다는 의견 등이다. 건설업계에 칼바람이 불고 있다. 미국발 관세나 국내 경기 문제가 아니다. 산업재해(이하 산재)가 건설 현장을 뒤흔드는 중이다. 대통령은 여러 현안 중 산재로 인한 사망사고 근절을 국정 과제 첫머리에 올린 듯한 모습이다. 대통령 한마디 이재명 대통령이 반복되는 산재 사망사고의 고리를 끊겠다고 나섰다. 산재 사망사고가 발생한 기업을 법과 제도를 통해 처벌하겠다고 선언했다. 발언 수위도 나날이 세지고 있다. 본보기가 된 기업은 대통령이 일으킨 칼바람을 온몸으로 맞는 모양새다. 지난 5월 고용노동부가 발표한 1분기 ‘산업재해 현황 부가 통계’에 따르면 올해 1~3월 재해 조사 대상 사고 사망자는 총 137명(잠정)으로 지난해 같은 기간(138명)보다 1명(0.7%) 줄었다. 사망사고 건수도 같은 기간 136건에서 129건으로 7건(5.1%) 감소했다. 업종별로는 제조업이 29명으로 지난해보다 2명, 기타 업종(건설업과 제조업 이외 업종)이 38명으로 6명 감소했지만 건설업은 71명으로 오히려 7명 늘었다. 노동부는 부산 기장군 건설 현장 화재와 서울-세종고속도로 교량 붕괴 등 대형 사고의 영향으로 건설업 사망자 수가 증가했다고 분석했다. 지난 2월14일 부산 기장군 반얀트리 리조트 신축 공사장에서 불이 나 6명이 숨졌다. 또 같은 달 25일, 경기도 안성시 서울-세종고속도로 건설 현장 교량 상판 구조물이 붕괴해 4명이 목숨을 잃는 사고가 일어났다. 규모별로는 상시 근로자 50인(건설 업종은 공사 금액 50억원) 미만 사업장에서 올해 1분기 사망자는 83명으로 지난해보다 5명(6.4%), 사망사고 건수는 83건으로 7건(9.2%) 늘었다. 반면 50인 이상 대형 사업장과 대규모 공사 현장에선 사망자 54명, 사고 건수 46건으로 각각 6명, 14건 줄었다. 사망사고 유형별로는 ‘추락’ 62명, ‘끼임’ 11명, ‘물체에 맞음’ 16명으로 지난해와 비교해 각각 1명, 7명, 5명 감소했다. 화재와 폭발로는 10명, ‘붕괴’ 사고로는 11명이 목숨을 잃었다. 지자체별로는 경기(31명), 서울(17명), 경북(15명), 부산·전남(12명), 경남(11명), 충남(9명), 강원·울산(6명) 순으로 많았다. 산재로 인한 사망은 건설 현장에서 일어날 수 있는 최악의 사고다. 정부는 산재 사망사고를 줄이기 위한 각종 대책을 내놨다. 2022년 1월부터 시행된 중대재해처벌법(이하 중처법)도 그중 하나다. 중처법은 근로자의 사망사고 등 중대 재해가 발생했을 때 기업의 경영 책임자 등이 안전 보건 관리 체계 구축 등 의무를 위반한 것으로 확인되면 처벌하도록 하는 내용이 골자다. 취임 이후부터 직접 챙겨 국정 운영 계획에도 포함 문제는 실효성이다. 중처법이 시행된 이후에도 건설 현장에서 근로자가 죽는 일이 계속 일어나고 처벌은 ‘솜방망이’ 수준에 그친다는 지적이 끊이지 않았다. 결국 이 대통령이 칼을 빼 들었다. 이 대통령은 지난 12일 “비용을 아끼기 위해 누군가의 목숨을 빼앗는 것은 일종의 미필적 고의에 의한 살인, 또는 사회적 타살”이라고 비판했다. 필요하면 법을 개정해서라도 ‘산재 공화국’이라는 오명을 벗겠다는 뜻도 밝혔다. 이 대통령은 이날 국무회의에서 “일상적으로 산업 현장을 점검해서 필요한 안전조치를 하지 않고 작업하면 엄정하게 제지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며 “제도가 있는 범위 내에서 할 수 있는 최대의 조치를 해달라”고 주문했다. 사고 위험이 큰 업무를 하청과 외주를 통해 해결하는 ‘위험의 외주화’ 현상에 대해서도 지적했다. 이 대통령의 산재 사망사고 근절 ‘드라이브’는 점진적으로 거세지고 있다. 초기에는 주무 부처에 대책을 요구했다면 최근에는 직접 목소리를 내고 움직이는 식이다. 대통령이 직접 나서서 산재를 줄이라고 지시했는데도 불구하고 사망사고가 이어지자 특유의 행동력을 보이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실제 이 대통령이 고용노동부에 산재 관련 종합 대책을 주문한 뒤에도 ▲인천 맨홀 작업 노동자 질식사 ▲포스코이앤씨 노동자 끼임사 ▲경기 의정부 아파트 신축 현장 노동자 추락사 등의 사고가 일어났다. 불과 한 달 새 일어난 일이다. 지난달 6일 인천 계양구 병방동의 한 도로 맨홀 안에서 지하 시설물 조사 작업 중이던 노동자 1명이 의식을 잃고 1명은 실종됐다. 이들은 결국 사망했다. 조사 결과 이 사고는 용역 계약 위반에 따라 허가 절차 없이 진행하다가 발생한 인재로 드러났다. 법으로도 안 됐는데… 숨진 근로자는 산소 마스크 등 안전 장비를 제대로 착용하지 않은 채 작업하다 유독가스에 중독된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 이 대통령은 “현장 안전 관리에 미흡한 점이 있었는데 철저히 밝히고 법령 위반 여부가 있었는지를 조사해 책임자를 엄중히 조치하라”며 “후진국형 산업재해가 다시는 발생하지 않도록 현장 안전관리를 정비하고 사전 지도·감독을 강화하는 등 관련 부처도 특단의 조처를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지난달 28일 포스코이앤씨가 시공하는 경남 함양-울산고속도로 의령나들목 공사 현장에서 사면 보강 작업을 하던 60대 근로자가 천공기(지반을 뚫는 건설기계)에 끼어 숨지는 사고가 일어났다. 포스코이앤씨 시공 현장에서만 올해 들어 4번째 일어난 사망사고다. 지난 1월 경남 김해 아파트 신축 현장 추락사고, 경기도 광명 신안산선 건설 현장 붕괴사고, 대구 주상복합 신축 현장 추락사고 등도 줄을 이었다. 이 대통령은 “똑같은 방식으로 사망사고가 나는 것은 결국 죽음을 용인하는 것이고 아주 심하게 얘기하면 법률적 용어로 미필적 고의에 의한 살인”이라고 질타했다. 그러면서 “(산재 사망사고가 나면) 여러 차례 공시하도록 해서 투자를 안 하고 주가가 폭락하게 (해야 한다)”고도 말했다. 여름휴가를 마치고 복귀 첫 일성도 산재 관련 발언이었다. 이 대통령은 “앞으로 모든 산업재해 사망사고는 최대한 빠른 속도로 대통령에게 직보하라”고 지시했다. 산재 사망사고를 직접 챙기겠다는 의지를 다시 한번 천명한 것이다. 사과문 내고 또 반복되다 지난 9일 강유정 대통령실 대변인을 통해 전해진 이 대통령의 발언은 전날인 8일 경기 의정부 신축 아파트 공사 현장에서 안전망 철거 작업을 하던 50대 근로자가 6층 높이에서 떨어져 숨진 사고가 영향을 미쳤다. 이 대통령이 선포한 ‘산재와의 전쟁’에 기업은 바짝 얼어붙은 상황이다. 지난달 25일 경기 시흥 SPC 삼립 공장을 방문해 ‘중대산업재해 발생 사업장 현장 간담회’를 열었다. 해당 공장은 지난 5월 50대 여성 노동자가 작동 중인 컨베이어벨트에 끼어 사망했고 2022년과 2023년에도 여성 노동자가 각각 소스 교반기와 반죽 기계에 끼어 숨지는 등 중대 산재가 빈번하게 일어났던 곳이다. 이 대통령은 이날 간담회에서 SPC 근로자의 노동 시간 등을 자세히 물었다. 그러면서 “(산재가) 심야에 대체적으로 발생하고 12시간씩 4일간 일하다 보면 사실 심야 시간에 힘들다. 주의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며 “심야 장시간 노동 때문에 생긴 일로 보여진다”고 말했다. 이 대통령의 지적에 SPC 회장을 비롯해 그룹 관계자들이 쩔쩔맨 것으로 전해졌다. SPC그룹은 이 대통령이 다녀간 지 이틀 만인 지난달 27일, 8시간 초과 야근을 폐지하겠다는 대책을 내놨다. 제품 특성상 필수적인 품목 외에는 야간 생산을 최대한 없애 공장 가동 시간을 축소하겠다는 것이다. 또 주간 근무 시간도 점진적으로 줄여 장시간 근무로 인한 피로 누적, 집중력 저하, 사고 위험 등을 사전에 차단하겠다고 밝혔다. 포스코이앤씨는 지난달 29일 담화문을 내고 고개를 숙였다. 정희민 전 대표이사는 “어제(28일) 사고 직후 모든 현장에서 즉시 모든 작업을 중단했고 전사적 긴급 안전 점검을 실시해 안전히 확실하게 확인되기 전까지 무기한 작업을 중지하도록 했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협력업체를 포함한 모든 근로자의 안전이 최우선 가치가 되도록 필요한 자원과 역량을 총동원해 근본적인 쇄신 계기로 삼겠다”며 “또다시 이런 비극이 발생하는 일이 없도록 사즉생의 각오와 회사의 명운을 걸고 안전 체계의 전환을 이뤄내겠다”고 말했다. 하지만 정 전 대표의 사과는 엿새 만에 또다시 일어난 사고로 빛이 바랬다. 지난 4일 오후 경기 광명시 옥길동 광명-서울고속도로 민간투자사업 제1공구 현장에서 미얀마 국적 30대 근로자가 감전돼 심정지 상태로 발견됐다. 이 근로자는 병원으로 이송된 지 8일 만인 지난 12일 의식을 회복했다. 높아진 발언 수위·제재 조치 “왜 기업만 잡도리?” 의견도 정 전 대표는 사의를 표명하고 물러났다. 연이어 산재사고가 일어난 포스코이앤씨는 ‘본보기’가 될 가능성이 커진 상황이다. 일단 이 대통령은 포스코이앤씨에 대한 건설 면허 취소, 공공 입찰 금지 등 법률상 가능한 방안을 모두 찾아서 보고하라는 지시를 내린 바 있다. 국내 건설 면허 취소는 현행 건설산업기본법상 최고 수위의 징계다. 1994년 성수대교 붕괴 책임이 있던 동아건설산업에 내려진 사례가 유일하다. 건설 면허가 취소되면 신규 사업을 할 수 없고, 다시 면허를 취득한다고 해도 수주 이력이 없기 때문에 관급공사를 따내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하다. 경찰은 사고 관련 수사 전담팀을 만들고 고용노동부 안양지청과 함께 포스코이앤씨와 하청업체에 대한 압수수색에 돌입했다. DL건설도 대표이사를 비롯한 임원진 전원이 공사 현장에서 발생한 사망사고에 책임을 지고 일괄 사표를 제출하는 등 납작 엎드렸다. 특히 이 대통령이 휴가에서 돌아와 산재 관련 발언을 한 직후 터진 사고여서 충격파가 더 컸다. DL건설에서 사표를 제출한 임직원은 80여명, 공사를 중단한 현장은 44곳에 이른다. 이재명정부는 산재사고로 인한 사망자 비율을 2030년까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 수준인 1만명당 0.29명까지 끌어내리는 방안을 추진하기로 했다. 지난해 우리나라에서 발생한 산재로 인한 사망자 비율은 1만명당 0.39명으로 OECD 평균을 크게 웃도는 실정이다. 이 같은 내용은 ‘이재명정부 국정 운영 5개년 계획’에 포함됐다. 이 대통령이 지난달 수석보좌관 회의에서 “전 세계에서 또는 OECD 국가 중 산업재해율, 사망재해율이 가장 높다는 불명예를 이번 정부에서 반드시 끊어내겠다”고 의지를 드러낸 부분을 국정과제로 담은 것이다. 구조 문제 나 몰라라 일각에서는 이 대통령이 지나치게 건설업계만 잡고 있다는 지적도 제기된다. 관련 법과 제도가 시행되고 있는데도 사망사고가 끊이지 않는다면 구조적인 문제도 살펴봐야 한다는 것이다. 수주 경쟁이 과열되면서 저가 입찰이 늘고 안전관리에 소홀해지는 점이 산재로 이어지는 식의 고리를 끊어야 진정한 의미의 ‘근절’이 이뤄질 것이라는 분석도 있다. <jsjang@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