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시사=사회팀] 하반기 채용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9월. 취업준비생들은 서류전형을 통과할 스펙을 만들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특히 토익은 스펙의 ‘필수요소’로 꼽힌다. 그런데 이 토익점수를 날로 먹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은 돈으로 원하는 점수를 산다.
채용의 계절이 돌아왔다. 대부분의 기업들이 제시하는 토익 점수는 700∼800점 이상이다. 기업의 채용 기준이 유연해지고 있다지만 토익이 차지하는 비중은 여전히 높다. 토익위원회의 자료를 보면 2012년 토익 정기시험 응시인원은 약 208만명이고, 시험 응시목적으로는 50%의 수험자가 취업이라고 밝혔다.
950점=600만원
졸업을 앞둔 취업준비생들은 대기업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최소 토익점수가 900점 이상은 돼야 경쟁력이 있다고 생각한다. 취업 준비생들은 취업난으로 치열해진 스펙 경쟁 탓에 토익 점수에 열을 올린다. 일종의 강박관념이다. 이러한 수험생들의 간절한 심리를 악용한 토익 대리시험이 기승을 부리고 있다.
대리시험 관계자에 따르면 대리시험을 치기 위해서는 전문 브로커를 만나야 한다. 브로커는 기본적으로 대리시험 의뢰자에게 나이와 기존 토익점수 등을 간단히 물어보고 업체가 사용하는 방식에 대해 설명한다. 그리고 이들은 자체 개발한 고막 진동기를 사용한다. 스마트폰 전송 작업은 전파탐지기에 걸릴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반면 고막 진동기는 귀에 살짝 붙이기 때문에 절대 걸리지 않는다고 한다.
사실 장비보다 더 중요한 게 고사장이다. 대리시험 브로커 A씨는 “서울이 아닌, 대구, 부산 등 지정 고사장에서 시험을 봐야 안전하다”고 말했다. 이유는 간단하다. 지방이 서울보다 관리 감독이 부실하기 때문이다. 또한 그는 “완벽한 대리시험을 위해서 시험 전날 합숙을 통해 충분한 예행연습을 한다”고 덧붙였다.
대리시험 의뢰로 알선된 토익 고수들은 대부분 해외에서 오래 거주한 한국인이다. 이들은 토익 독해평가(R/C)를 20분 만에 다 풀고 답을 미리 전송한다고 전해진다. 그리고 950점 이상을 원한다면 600만원이라며 조금 비싸지만 취업을 위해 준비하는 게 좋다고 조언한다고. 의뢰인과의 통화는 대포폰을 이용하기 때문에 의뢰인이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고막 진동기 대리시험 외에도 의뢰자와 닮은 대리시험자가 직접 토익을 치르는 수법도 있다.
전문브로커 활개…전날 합숙하면서 예행연습
고막 진동기 사용하거나 신분증 위조해 대타
문제는 토익시험뿐만이 아니라 국가기술자격증 및 민간자격증도 대리시험이 가능하다는 점이다. 대리자와 계약 후 신분증만 새로 만들면 된다.
한국토익위원회 관계자는 “수험자의 휴대전화를 반드시 거둬가고 있다”며 “수험자가 시험 도중 화장실을 갈 땐 금속 탐지기로 점검해 휴대전화 사용을 막는 데 노력하고 있다”고 밝혔다. 그러나 현 대책의 맹점은 휴대전화 부정시험에만 유효하다는 것. 기타 장비를 이용한 신종범죄는 막을 수 없다.
경기경찰청 국제범죄수사대 관계자는 “작년 토익 대리 시험 사건이 터지고 난 후 6개월 정도 인터넷 모니터링을 했지만 지금은 바빠서 계속하고 있지는 않다”며 “인터넷에서 워낙 광범위하게 토익 대리시험 광고가 있어서 다 찾아내기는 어려운 상황”이라고 말했다.
취업 준비생 이모(25)씨는 “방학 동안 토익 공부에 모든 시간을 올인했다”며 “학원에서 밤낮으로 토익 공부를 했는데 대리 토익을 보는 사람이 있다고 생각하면 화가 치민다”고 토로했다.
최근 대리시험을 봐준다고 속여 2억원을 가로챈 40대 남성이 경찰에 붙잡혔다. 지난 11일 서울지방경찰청 사이버범죄수사대는 토익, 토플, HSK 등 각종 외국어 시험 및 국가고시 자격시험을 대신 봐준다고 광고해 지난 2011년 4월부터 최근까지 88명으로부터 2억300만원을 챙긴 혐의(사기)로 K씨(41)를 구속했다고 밝혔다. 또 K씨를 도와 미국 캘리포니아 서버에 인터넷 홈페이지를 만든 C씨(25)도 사기 방조 혐의로 불구속 입건됐다.
경찰에 따르면 K씨는 경찰의 추적을 피하기 위해 일부러 해외 서버에 홈페이지를 개설하고 허위광고, 스팸메일을 통해 대리시험 및 성적표 위조 의뢰자를 모은 것으로 조사됐다.
외국어 시험, 컴퓨터 관련 자격증, 공인중개사, 국가고시 자격시험, 대학 입학·편입시험 등 각종 다양한 시험을 대신 봐준다는 K씨의 사기 행각에 넘어간 피해자들은 “선금 200만원, 성적확인 후 200만원 입금”이라는 조건을 믿고 대리시험을 의뢰했다.
그러나 K씨는 선금만 받아 챙기는 방식으로 돈을 빼돌렸고, 챙긴 돈은 중국에서 업자를 통해 세탁한 후 추적을 피해온 것으로 경찰 조사 결과 확인됐다. 또 K씨는 선금을 받은 뒤에는 해당 피해자의 IP 접속을 차단하고 도메인 주소도 주기적으로 변경하는 치밀함을 보였다.
관리감독 부실한 지방 고사장서 기승
건당 200만∼300만원…점수마다 달라
시험 의뢰인들의 직업은 직장인, 대학생, 대학원생, 취업준비생, 자영업자 등으로 다양했다. 피해 금액은 수백만원에서 많게는 1000여만원에 달했다. 경기도에 사는 A씨는 의사 국가시험을 의뢰했다가 강씨에게 1000만원을 떼였다. 충북 지역의 직장인 B(36)씨는 전기기사 자격증 시험을 의뢰했다가 선수금 명목의 250만원을 날렸다. 서울 노원구에 사는 대기업 직원 C(40)씨는 토익 성적표를 위조해 주겠다는 말을 믿고 80만원을 보냈으나 조악한 수준의 성적표가 배달되자 항의를 했다. 그리고 “이번에는 실제 대리시험을 쳐 주겠다”라는 제안에 다시 넘어가 200만원을 더 뜯겼다.
피해자의 직업군을 살펴보면 직장인이 51명으로 가장 많았고 대학원생 17명, 취업준비생 10명, 자영업자 3명으로 나타났다. 의뢰인이 가장 많이 의뢰한 시험은 토익이 44건, 텝스 7건, 토플 7건 등이었다.
하지만 K씨는 실제로 시험을 대리할 의사가 전혀 없었기 때문에 컴퓨터 관련 자격증, 공인중개사, 국가기술자격, 대학 입학·편입 등 종류를 가리지 않고 신청을 받았다. 실제 피해로 이어지지 않았지만 미국 뉴욕주 변호사 자격시험 대리를 상담한 사례도 있었다.
공부하면 바보?
경찰 관계자는 “의뢰인도 위계에 의한 업무방해죄(형법 제134조 제1항)로 5년 이하의 징역 또는 1500만원 이하의 벌금형에 처해질 수 있는 만큼, 잘못된 선택을 해 범죄자로 전락하는 일이 없어야 할 것”이라며 “심각한 취업난과 직장 내 치열해진 ‘스펙’ 경쟁 속에서 절박한 상황의 수험생들을 노린 대리시험 관련 범죄가 끊임없이 발생하고 있다”고 말했다. 경찰에 따르면 만일 의뢰한 대리시험이 실제로 이루어진 경우에는 의뢰자 또한 ‘위계에 의한 업무방해죄’로 처벌받을 수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광호 기자 <khlee@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