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붙은 공기업 ‘낙하산 전쟁’ 백태

  • 김설아 sasa7088@ilyosisa.co.kr
  • 등록 2013.09.23 10:56: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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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떨어진 그 나물에 그 밥들

[일요시사=경제1팀] 공기업 인사 시즌이 개막됐다. ‘관치 인사’ 논란이 불거진 지 3개월여 만이다. 우선, 수장 자리가 공석이거나 전임이 계속 일하고 있는 공기업을 필두로 공모 절차 진행속도가 빨라지고 있다. 하지만 후보자 면접도 하기 전에 또다시 특정인물 내정설이 나돌면서 정부의 ‘낙하산 배제’ 약속은 공염불이 될 가능성이 커 보인다.




박근혜정부 출범 이후 반년 가까이 자리가 공석인 공기업은 수십 곳에 달한다. 집권 초 ‘인사참사’와 ‘윤창중 성추문 사건’을 겪은 박근혜 대통령이 온갖 변수를 꼼꼼히 따지다 보니 정작 중요한 타이밍을 놓쳤다는 분석이다. 최근 청와대 인사위원장이 김기춘 비서실장으로 바뀐 뒤 인선작업이 재가동됐지만 ‘낙하산 인사’논란은 여전히 재연되고 있다.

내부출신이냐
외부출신이냐

최근 정치권과 금융권에 따르면 김 비서실장은 지난달 초 취임 직후 전임 비서실장이 올린 공공기관 인사 방안을 전면 재검토해 박 대통령에게 보고했다. 이미 공모를 시작했거나 임원추천위원회 등이 소집되는 공공기관은 사실상 청와대 재가가 떨어진 상태라는 해석이다. 이에 따라 6월 관치 논란으로 잠정 중단된 신용보증기금 한국거래소 한국수력원자력 등의 사장 인선작업이 재개됐다.

‘낙하산 요람’으로 불리는 한국거래소(KRX) 이사장 인선은 어렵사리 5부 능선을 넘었다. 한국거래소 임원추천위원회(이하 임추위)는 서류심사 결과를 바탕으로 11명 중 6명을 탈락시키고, 5명으로 후보를 압축했다.

탈락자 6명에는 황건호 전 금융투자협회 회장과 임기영 전 대우증권 사장 등이 포함됐다. 거래소와는 별 인연이 없는데도 공모에 참가했던 우기종 전 통계청장도 탈락했다.


눈치보고 떠난 사장 빈자리 공모전 급물살
후보자 면접도 전에 특정인물 내정설 돌아

합격자 5명은 최경수 전 현대증권 사장, 유정준 전 한양증권 사장, 이철환 전 거래소 시장감시위원장, 우영호 전 거래소 파생상품시장 본부장, 장범식 숭실대 교수다. 임추위는 이들을 대상으로 면접을 거친 뒤 26일 주주총회에서 3명의 최종후보를 상정할 계획이다.

하지만 재개된 사장 선임과정도 순탄치 않을 것으로 보인다. 박근혜 정부가 “공기업의 낙하산 인사를 배제하는 것이 원칙”이라고 공언한 것과 달리, 이 원칙에서 벗어난 경우가 눈에 띄기 때문이다.

가장 유력한 후보로 꼽히는 최경수 전 현대증권 사장은 공모전부터 유력 후보로 거론됐던 인물이다. 금융투자업계에는 ‘내정 과정에서 금융위원회 부위원장의 지원을 받았다’는 이야기가 나오는 등 최 전 사장의 이사장직 선임을 기정사실화하는 분위기다.

최 전 사장은 행정고시 14회 출신으로 재정경제부 세제실장과 조달청장 등을 지냈다. 지난해 당시 박근혜 대통령 후보의 대선 캠프에서 활동한 경력도 있다.

최 전 사장 내정설이 불거지자 임추위와 공모제가 허울에 불과하다는 비판이 쏟아지고 있다. 공모절차라는 형식만 취했을 뿐 권력 실세가 특정 인사를 낙점한 것 아니냐는 관측에 무게가 실리는 것이다.

이 같은 논란은 3개월 전을 그대로 반복하고 있다. 당시 후보 공모가 끝나기도 전에 친박근혜 계열인 김영선 전 새누리당 의원 내정설이 유력하게 제기되면서 홍역을 치른 바 있다.


내정설에 멍든
신보·기보…

신용보증기금(신보)과 기술보증기금(기보)도 수장을 뽑는 공모절차가 시작되기도 전에 ‘차기 이사장 내정설’에 휩싸였다. 신보 이사장으로 유력한 것으로 알려진 서근우 금융연구원 기획협력실장이 대표적이다.

서 실장은 연구원과 마피아의 합성어인 ‘연피아’로 분류되는 인물로, 서울대에서 경제학 박사 학위를 받았고, 금융감독위원회 자문관, 하나금융지주 부사장 등을 지냈다.

서 실장은 김대중 정부 환란 위기 때 이헌재 당시 금감위원장 밑에서 부실기업을 처리하며 많은 지식과 경험을 쌓은 이로 평가받는다. 서 실장은 이 전 위원장이 한국신용평가 사장이었을 때 같이 일했는데 그가 “DJ정권에서 금감위원장을 맡으면서 데려간 이는 딱 두 명이었다. 한신평에서 함께 일했던 서근우와 이성규”라고 말하는 등 널리 알려진 ‘이헌재사단’의 일원이다.

이런 이유로 서 실장은 원래 유력한 신보 이사장 후보였는데 내정설은 심각한 문제가 있다는 지적이 제기된다. 서 실장이 이사장으로 선임되면 금융연구원 출신이 금융당국과 은행권에 이어 공기업의 요직까지 진출하게 된다.

서 실장은 박근혜 정부 들어 유력 금융유관기관장 등으로 자주 거론됐다. 지난 3월에는 보험연구원장, 지난달에는 한국은행 부총재보의 유력 후보자로 거론되기도 했다.

신보는 지난 6월 초 임추위를 구성했지만 BS금융지주 등의 잇단 ‘관치논란’에 휩싸이면서 임추위 가동이 사실상 중단된 바 있다. 안택수 이사장은 지난달 17일 임기가 만료됐지만 한달 넘게 이사장직을 수행하고 있는 상태다.

기보 역시 홍영만 금융위원회 상임위원의 내정설에 휩싸였다. 홍영만 기보 이사장 후보는 행정고시 25회로 재무부 증권보험국과 세제국, 재정경제원 경제협력국, 재정경제부를 거쳐 2005년 금융위로 복귀해 자본시장국장 및 금융서비스국장 등을 지냈다.

홍 위원의 경우 지난해와 올해 유력한 신보 이사장 후보로 거론되는 등 관치논란을 낳았던 인물이다.

앞서 김정국 기보 이사장은 임기를 1년 남기고 지난달 말 돌연 사의를 표명했다. 김 이사장은 건강상의 사유라고 밝혔지만, 금융권에서는 정부가 내정자를 언론에 흘린 것이 사퇴에 영향을 준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관치·낙하산
끝없는 잡음

이 밖에도 한국수력원자력을 비롯해 서부발전, 남동발전, 대한석탄공사 등 에너지공기업들도 사장 공모를 마무리하고 서류, 면접절차 등을 진행하고 있다. 한수원 차기 사장으로는 조석 전 지식경제부 2차관이 유력하고, 보험개발원장에는 김수봉 전 금감원 부원장보가 물망에 올라 있다는 관측이다.

한국공항공사와 코레일 등도 사장 공모절차를 다시 시작했다. ‘낙하산 압력’ 논란으로 중단됐던 코레일 사장 재공모에는 총 19명이 지원한 것으로 확인됐다.


코레일은 정창영 사장 후임 선임을 위해 당초 지난 7월 말에 공모 절차를 진행했으나 국토교통부가 인원추천위원회 위원들을 상대로 인사 청탁을 했다는 논란이 불거지면서 재공모가 결정됐다.

지난 10일 마감된 재공모에는 지난 7월 공모에서 3배수에 뽑혔던 이재붕 국토교통과학기술진흥원장, 팽정광 현 코레일 부사장이 다시 한 번 출사표를 던졌다.

또한 새누리당 당협위원장과 한국교통대 교수로 재직 중인 최연혜 전 한국철도대학 총장도 지원했다. 최연혜 교수는 코레일 부사장 출신이다. 업계에서는 정치권의 변수만 없다면 이들 3명이 최종 사장 자리를 두고 경합을 벌일 것으로 보고 있다.

곳곳서 인선작업 잡음
‘MB맨’→‘박의 남자’
대선캠프 출신들 포진

한국공항공사 사장 후보에는 지난 2009년 ‘용산 참사’의 무리한 진압을 지휘한 김석기 전 서울지방경찰청장이 포함되면서 잡음이 일고 있다. 공항공사는 지난 9일 사장 후보자로 김 전 서울지방경찰청장과 오창환 전 공군사관학교장, 유한준 전 국토교통부 중앙토지수용위원회 상임위원 등을 결정해 기획재정부 공공기관운영위원회에 제출했다.

이 소식을 들은 용산참사 진상규명위원회는 기자회견을 열고 “용산참사로 경찰공직에서 물러나 책임을 면피하려 했던 김석기가 다시 공기업 사장으로 거론되는 것은 있을 수 없다”고 분노하고 있다.


이 같은 공기업 인사 잡음의 근원지는 결국 최종적인 임명권을 가진 청와대라는 게 업계의 공통된 지적이다. 박 대통령이 지난 3월 첫 국무회의에서 “새 정부의 국정 철학을 공유할 수 있는 사람”으로 인선 원칙을 천명한 이후 내정설이 끊이지 않으면서 주요 기관장 인선 공식절차가 힘을 잃고 청와대 눈치만 보는 현상이 심화됐다는 것이다.

청와대 눈치보기는 ‘MB맨’들의 사퇴로도 이어지고 있다. 이명박 정부의 청와대 대통령실장 출신인 정정길 한국학중앙연구원 원장은 임기를 8개월 남겨 놓고 지난달 30일 사의를 표명했고, 농림부장관 출신의 장태평 한국마사회 회장은 지난 2일 임기가 1년 2개월여 남은 상태에서 돌연 사퇴했다.

앞서 언급한 기보 이사장의 사퇴도 같은 맥락으로 해석된다. 김 이사장은 행시 9회로 공직생활을 시작, 공정거래위원회 국장, 대통령비서실 경제비서관, 재정경제원 차관보 등을 거쳐 지난 2011년 기보 이사장에 임명됐다.

MB맨 물갈이
교체 본격화

MB 정권에서 임명됐다는 이력 때문에 올 초부터 꾸준히 교체설이 흘러나왔다. 이와 함께 대표적인 ‘MB맨’으로 꼽히는 이석채 KT 회장과 정준양 포스코 회장의 거취도 큰 관심을 끌고 있다.

이에 대해 시민연대 한 관계자는 “공기업 사장 인선엔 특정 인물의 낙하산보다 바닥에 곤두박질 친 자본시장 현안을 잘 짚어 낼 수 있는 전문가가 필요하다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다”며 “그러나 이번에도 과거와 마찬가지로 관료 출신이나 특정 후보의 낙하산이 될 것이 뻔하다는 푸념이 나오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어 이 관계자는 “또다시 중앙정부의 뜻대로 좌지우지하려는, 낙하산을 솎아낸 자리에 다시 낙하산을 앉히려는 작태를 되풀이해선 안 된다”고 강조했다.


김설아 기자 <sasa7088@ilyosisa.co.kr>


 

<기사 속 기사> 원세훈 한전 인사 개입 의혹

 

김중겸도 윗사람 의중?

원세훈 전 국가정보원장이 김중겸 전 한국전력 사장의 선임 과정에 개입한 정황이 드러났다. 국정원장이 사용하는 안가에 외부인이 수시로 드나들며 인사청탁을 한 사실도 공개됐다.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21부(이범균 부장판사) 심리로 11일 열린 원 전 원장의 알선수재 사건 첫 공판에서 황보연 황보건설 대표는 “2011년 2월 당시 김중겸 현대건설 사장이 회사 내에서 자신의 입지가 좁아지자 한국전력공사 사장이 되고 싶다는 뜻을 밝히며 원 전 원장과의 만남을 주선해달라고 부탁했다”고 진술하며 금품제공과 인사 청탁 사실 등을 시인했다. 

검찰은 원세훈과 황 대표 사이에 오간 문자메시지 등을 관련 증거로 제시했다. 원 전 원장은 김중겸 전 현대건설 사장이 한전 사장으로 내정되기 한 달여 전인 2011년 7월18일 “지금 김사장 접촉 노출하면 좋지 않음”이라는 문자메시지를 황 대표에게 보냈고, 황 대표는 이후 자신의 부인에게 “내일은 김중겸 한전 사장 될 것”이라는 문자를 발송했다. 황 대표는 “원장님이 그렇게 얘기해서 문자를 보낸 것 같다”고 말했다.

이들 세 사람은 이같은 문자를 주고받기에 앞서 함께 골프를 쳤다. 김 전 사장은 이 자리에서 한전 사장으로 가고 싶다는 뜻을 밝혔다고 황 대표는 진술했다. 현대차그룹이 현대건설을 인수하면서 김 전 사장의 입지가 좁아진 상황이었다.

김 전 사장은 2011년 7월 한전 사장직에 응모, 같은 해 9월부터 지난해 11월까지 사장으로 일했다. 공모 당시 김 전 사장을 포함해 3명이 지원했지만 그가 미리 내정됐다는 얘기가 돌았다. <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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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세보다 무서운 산재와의 전쟁

탈세보다 무서운 산재와의 전쟁

[일요시사 취재1팀] 장지선 기자 = 이재명 대통령이 ‘산재와의 전쟁’을 선포했다. 건설 현장에서 근로자가 사망하는 사건을 줄이겠다는 취지다. 이 대통령이 칼을 휘두르자 기업은 납작 엎드렸다. 이 대통령의 행보를 보는 시각은 엇갈린다. 산재 사망사고가 끊이지 않는 만큼 단호한 조치가 필요하다며 환영하는 의견과 구조적 문제를 뒤로하고 기업 ‘잡도리’만 하고 있다는 의견 등이다. 건설업계에 칼바람이 불고 있다. 미국발 관세나 국내 경기 문제가 아니다. 산업재해(이하 산재)가 건설 현장을 뒤흔드는 중이다. 대통령은 여러 현안 중 산재로 인한 사망사고 근절을 국정 과제 첫머리에 올린 듯한 모습이다. 대통령 한마디 이재명 대통령이 반복되는 산재 사망사고의 고리를 끊겠다고 나섰다. 산재 사망사고가 발생한 기업을 법과 제도를 통해 처벌하겠다고 선언했다. 발언 수위도 나날이 세지고 있다. 본보기가 된 기업은 대통령이 일으킨 칼바람을 온몸으로 맞는 모양새다. 지난 5월 고용노동부가 발표한 1분기 ‘산업재해 현황 부가 통계’에 따르면 올해 1~3월 재해 조사 대상 사고 사망자는 총 137명(잠정)으로 지난해 같은 기간(138명)보다 1명(0.7%) 줄었다. 사망사고 건수도 같은 기간 136건에서 129건으로 7건(5.1%) 감소했다. 업종별로는 제조업이 29명으로 지난해보다 2명, 기타 업종(건설업과 제조업 이외 업종)이 38명으로 6명 감소했지만 건설업은 71명으로 오히려 7명 늘었다. 노동부는 부산 기장군 건설 현장 화재와 서울-세종고속도로 교량 붕괴 등 대형 사고의 영향으로 건설업 사망자 수가 증가했다고 분석했다. 지난 2월14일 부산 기장군 반얀트리 리조트 신축 공사장에서 불이 나 6명이 숨졌다. 또 같은 달 25일, 경기도 안성시 서울-세종고속도로 건설 현장 교량 상판 구조물이 붕괴해 4명이 목숨을 잃는 사고가 일어났다. 규모별로는 상시 근로자 50인(건설 업종은 공사 금액 50억원) 미만 사업장에서 올해 1분기 사망자는 83명으로 지난해보다 5명(6.4%), 사망사고 건수는 83건으로 7건(9.2%) 늘었다. 반면 50인 이상 대형 사업장과 대규모 공사 현장에선 사망자 54명, 사고 건수 46건으로 각각 6명, 14건 줄었다. 사망사고 유형별로는 ‘추락’ 62명, ‘끼임’ 11명, ‘물체에 맞음’ 16명으로 지난해와 비교해 각각 1명, 7명, 5명 감소했다. 화재와 폭발로는 10명, ‘붕괴’ 사고로는 11명이 목숨을 잃었다. 지자체별로는 경기(31명), 서울(17명), 경북(15명), 부산·전남(12명), 경남(11명), 충남(9명), 강원·울산(6명) 순으로 많았다. 산재로 인한 사망은 건설 현장에서 일어날 수 있는 최악의 사고다. 정부는 산재 사망사고를 줄이기 위한 각종 대책을 내놨다. 2022년 1월부터 시행된 중대재해처벌법(이하 중처법)도 그중 하나다. 중처법은 근로자의 사망사고 등 중대 재해가 발생했을 때 기업의 경영 책임자 등이 안전 보건 관리 체계 구축 등 의무를 위반한 것으로 확인되면 처벌하도록 하는 내용이 골자다. 취임 이후부터 직접 챙겨 국정 운영 계획에도 포함 문제는 실효성이다. 중처법이 시행된 이후에도 건설 현장에서 근로자가 죽는 일이 계속 일어나고 처벌은 ‘솜방망이’ 수준에 그친다는 지적이 끊이지 않았다. 결국 이 대통령이 칼을 빼 들었다. 이 대통령은 지난 12일 “비용을 아끼기 위해 누군가의 목숨을 빼앗는 것은 일종의 미필적 고의에 의한 살인, 또는 사회적 타살”이라고 비판했다. 필요하면 법을 개정해서라도 ‘산재 공화국’이라는 오명을 벗겠다는 뜻도 밝혔다. 이 대통령은 이날 국무회의에서 “일상적으로 산업 현장을 점검해서 필요한 안전조치를 하지 않고 작업하면 엄정하게 제지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며 “제도가 있는 범위 내에서 할 수 있는 최대의 조치를 해달라”고 주문했다. 사고 위험이 큰 업무를 하청과 외주를 통해 해결하는 ‘위험의 외주화’ 현상에 대해서도 지적했다. 이 대통령의 산재 사망사고 근절 ‘드라이브’는 점진적으로 거세지고 있다. 초기에는 주무 부처에 대책을 요구했다면 최근에는 직접 목소리를 내고 움직이는 식이다. 대통령이 직접 나서서 산재를 줄이라고 지시했는데도 불구하고 사망사고가 이어지자 특유의 행동력을 보이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실제 이 대통령이 고용노동부에 산재 관련 종합 대책을 주문한 뒤에도 ▲인천 맨홀 작업 노동자 질식사 ▲포스코이앤씨 노동자 끼임사 ▲경기 의정부 아파트 신축 현장 노동자 추락사 등의 사고가 일어났다. 불과 한 달 새 일어난 일이다. 지난달 6일 인천 계양구 병방동의 한 도로 맨홀 안에서 지하 시설물 조사 작업 중이던 노동자 1명이 의식을 잃고 1명은 실종됐다. 이들은 결국 사망했다. 조사 결과 이 사고는 용역 계약 위반에 따라 허가 절차 없이 진행하다가 발생한 인재로 드러났다. 법으로도 안 됐는데… 숨진 근로자는 산소 마스크 등 안전 장비를 제대로 착용하지 않은 채 작업하다 유독가스에 중독된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 이 대통령은 “현장 안전 관리에 미흡한 점이 있었는데 철저히 밝히고 법령 위반 여부가 있었는지를 조사해 책임자를 엄중히 조치하라”며 “후진국형 산업재해가 다시는 발생하지 않도록 현장 안전관리를 정비하고 사전 지도·감독을 강화하는 등 관련 부처도 특단의 조처를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지난달 28일 포스코이앤씨가 시공하는 경남 함양-울산고속도로 의령나들목 공사 현장에서 사면 보강 작업을 하던 60대 근로자가 천공기(지반을 뚫는 건설기계)에 끼어 숨지는 사고가 일어났다. 포스코이앤씨 시공 현장에서만 올해 들어 4번째 일어난 사망사고다. 지난 1월 경남 김해 아파트 신축 현장 추락사고, 경기도 광명 신안산선 건설 현장 붕괴사고, 대구 주상복합 신축 현장 추락사고 등도 줄을 이었다. 이 대통령은 “똑같은 방식으로 사망사고가 나는 것은 결국 죽음을 용인하는 것이고 아주 심하게 얘기하면 법률적 용어로 미필적 고의에 의한 살인”이라고 질타했다. 그러면서 “(산재 사망사고가 나면) 여러 차례 공시하도록 해서 투자를 안 하고 주가가 폭락하게 (해야 한다)”고도 말했다. 여름휴가를 마치고 복귀 첫 일성도 산재 관련 발언이었다. 이 대통령은 “앞으로 모든 산업재해 사망사고는 최대한 빠른 속도로 대통령에게 직보하라”고 지시했다. 산재 사망사고를 직접 챙기겠다는 의지를 다시 한번 천명한 것이다. 사과문 내고 또 반복되다 지난 9일 강유정 대통령실 대변인을 통해 전해진 이 대통령의 발언은 전날인 8일 경기 의정부 신축 아파트 공사 현장에서 안전망 철거 작업을 하던 50대 근로자가 6층 높이에서 떨어져 숨진 사고가 영향을 미쳤다. 이 대통령이 선포한 ‘산재와의 전쟁’에 기업은 바짝 얼어붙은 상황이다. 지난달 25일 경기 시흥 SPC 삼립 공장을 방문해 ‘중대산업재해 발생 사업장 현장 간담회’를 열었다. 해당 공장은 지난 5월 50대 여성 노동자가 작동 중인 컨베이어벨트에 끼어 사망했고 2022년과 2023년에도 여성 노동자가 각각 소스 교반기와 반죽 기계에 끼어 숨지는 등 중대 산재가 빈번하게 일어났던 곳이다. 이 대통령은 이날 간담회에서 SPC 근로자의 노동 시간 등을 자세히 물었다. 그러면서 “(산재가) 심야에 대체적으로 발생하고 12시간씩 4일간 일하다 보면 사실 심야 시간에 힘들다. 주의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며 “심야 장시간 노동 때문에 생긴 일로 보여진다”고 말했다. 이 대통령의 지적에 SPC 회장을 비롯해 그룹 관계자들이 쩔쩔맨 것으로 전해졌다. SPC그룹은 이 대통령이 다녀간 지 이틀 만인 지난달 27일, 8시간 초과 야근을 폐지하겠다는 대책을 내놨다. 제품 특성상 필수적인 품목 외에는 야간 생산을 최대한 없애 공장 가동 시간을 축소하겠다는 것이다. 또 주간 근무 시간도 점진적으로 줄여 장시간 근무로 인한 피로 누적, 집중력 저하, 사고 위험 등을 사전에 차단하겠다고 밝혔다. 포스코이앤씨는 지난달 29일 담화문을 내고 고개를 숙였다. 정희민 전 대표이사는 “어제(28일) 사고 직후 모든 현장에서 즉시 모든 작업을 중단했고 전사적 긴급 안전 점검을 실시해 안전히 확실하게 확인되기 전까지 무기한 작업을 중지하도록 했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협력업체를 포함한 모든 근로자의 안전이 최우선 가치가 되도록 필요한 자원과 역량을 총동원해 근본적인 쇄신 계기로 삼겠다”며 “또다시 이런 비극이 발생하는 일이 없도록 사즉생의 각오와 회사의 명운을 걸고 안전 체계의 전환을 이뤄내겠다”고 말했다. 하지만 정 전 대표의 사과는 엿새 만에 또다시 일어난 사고로 빛이 바랬다. 지난 4일 오후 경기 광명시 옥길동 광명-서울고속도로 민간투자사업 제1공구 현장에서 미얀마 국적 30대 근로자가 감전돼 심정지 상태로 발견됐다. 이 근로자는 병원으로 이송된 지 8일 만인 지난 12일 의식을 회복했다. 높아진 발언 수위·제재 조치 “왜 기업만 잡도리?” 의견도 정 전 대표는 사의를 표명하고 물러났다. 연이어 산재사고가 일어난 포스코이앤씨는 ‘본보기’가 될 가능성이 커진 상황이다. 일단 이 대통령은 포스코이앤씨에 대한 건설 면허 취소, 공공 입찰 금지 등 법률상 가능한 방안을 모두 찾아서 보고하라는 지시를 내린 바 있다. 국내 건설 면허 취소는 현행 건설산업기본법상 최고 수위의 징계다. 1994년 성수대교 붕괴 책임이 있던 동아건설산업에 내려진 사례가 유일하다. 건설 면허가 취소되면 신규 사업을 할 수 없고, 다시 면허를 취득한다고 해도 수주 이력이 없기 때문에 관급공사를 따내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하다. 경찰은 사고 관련 수사 전담팀을 만들고 고용노동부 안양지청과 함께 포스코이앤씨와 하청업체에 대한 압수수색에 돌입했다. DL건설도 대표이사를 비롯한 임원진 전원이 공사 현장에서 발생한 사망사고에 책임을 지고 일괄 사표를 제출하는 등 납작 엎드렸다. 특히 이 대통령이 휴가에서 돌아와 산재 관련 발언을 한 직후 터진 사고여서 충격파가 더 컸다. DL건설에서 사표를 제출한 임직원은 80여명, 공사를 중단한 현장은 44곳에 이른다. 이재명정부는 산재사고로 인한 사망자 비율을 2030년까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 수준인 1만명당 0.29명까지 끌어내리는 방안을 추진하기로 했다. 지난해 우리나라에서 발생한 산재로 인한 사망자 비율은 1만명당 0.39명으로 OECD 평균을 크게 웃도는 실정이다. 이 같은 내용은 ‘이재명정부 국정 운영 5개년 계획’에 포함됐다. 이 대통령이 지난달 수석보좌관 회의에서 “전 세계에서 또는 OECD 국가 중 산업재해율, 사망재해율이 가장 높다는 불명예를 이번 정부에서 반드시 끊어내겠다”고 의지를 드러낸 부분을 국정과제로 담은 것이다. 구조 문제 나 몰라라 일각에서는 이 대통령이 지나치게 건설업계만 잡고 있다는 지적도 제기된다. 관련 법과 제도가 시행되고 있는데도 사망사고가 끊이지 않는다면 구조적인 문제도 살펴봐야 한다는 것이다. 수주 경쟁이 과열되면서 저가 입찰이 늘고 안전관리에 소홀해지는 점이 산재로 이어지는 식의 고리를 끊어야 진정한 의미의 ‘근절’이 이뤄질 것이라는 분석도 있다. <jsjang@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