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시사=정치팀] 원세훈 전 국정원장의 검찰 구속이 있은 지 한참이 지났지만 언론보도는 웬일인지 감감무소식이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국정원 대선개입 사건으로 인한 원 전 원장의 구속 여부가 정치권 최대 화두였다. 하지만 국정원 대선개입 보도는 감쪽같이 자취를 감췄다. 미디어가 ‘원세훈 구하기’에 나섰다는 비난이 끊이지 않고 있는 이유다. 그렇다면 박근혜정부에서 미디어를 배후조종하는 막후세력은 누구일까?
국정원 대선개입으로 인한 갈등은 여야를 뛰어넘었다. 최근 방송사에서 국정원 대선개입 사건으로 인한 보도국과 기자 간 갈등이 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예정된 방송 분량이 통째로 삭제되는가 하면, 국정원 직원 의혹 보도가 갑자기 중단됐기 때문이다. 이를 두고 미디어를 움직이는 ‘보이지 않는 손’이 있다는 의혹이 제기됐다.
보도국장 “완성도 미흡”
경영진 ‘책임 추궁’ 요구 커
YTN이 최근 단독 보도한 ‘국정원 직원의 트위터 댓글 공작 의혹’ 보도가 갑자기 중단됐다. 이와 함께 공중파인 KBS, MBC 등에서 국정원 대선개입 사건 관련 보도를 찾아보기 어렵다는 지적도 나온다. 전반적인 ‘방송통제’ 분위기가 조성되는 것 아니냐는 의심의 눈초리가 가득하다.
이 같은 상황에서 YTN이 신뢰성 등을 이유로 방송을 중단한 국정원 관련 단독 보도가 방송기자연합회의 ‘이달의 방송기자상 수상작’으로 선정됐다. 방송기자연합회는 '국정원 SNS 박원순 비하글 2만건 포착'을 보도한 이승현 YTN 기자를 이달의 방송기자상 뉴스부문 수상자로 선정했다고 지난 18일 밝혔다.
YTN이 보도한 '국정원 SNS 박원순 비하글 2만건 포착'은 “지난해 9월부터 12월까지 삭제된 ‘국정원 SNS’ 의심 계정 10개를 중심으로 복원을 시도한 결과, 복구된 트윗글과 인용글 2만여 건 가운데 박원순 시장과 반값 등록금, 무상보육 등과 관련한 글이 2000여 건으로 특히 많았는데, 비판 일색이었다”는 내용으로 보도 이후 큰 반향을 일으켰다.
MBC 파행방송에
노조 “코미디 같은 상황”
하지만 이 리포트는 당일 낮 2시께 방송이 돌연 중단됐다. 방송이 중단된 이유는 YTN 보도국장의 지시 때문이라고 알려져 있다. 그 배경을 놓고 현재까지도 논란이 지속되고 있는 상황. 이홍렬 YTN 보도국장은 “취재원과 추출방식의 신뢰도 등 완성도가 다소 미흡한 측면이 있었다”고 방송 중단 이유를 밝혔지만 내부에선 수긍할 수 없다는 분위기가 지배적이다.
방송 중단 지시가 내려지기 전에 국정원 직원이 YTN 보도국 회의 내용을 파악하고 이 기자에게 국정원 입장 반영을 요구했던 사실이 알려졌다. 이로써 국정원이 작년 대선개입에 이어 언론사 보도까지 개입했다는 의혹이 제기됐다.
논란 확산과 함께 해당 기자가 이달의 방송기자상으로 선정되면서 내부에서는 불방 결정을 내린 경영진의 책임을 추궁하는 목소리도 커졌다.
언론노조 YTN지부 공정방송추진위원회는 성명을 내고 “외부에서 가치를 높게 평가받은 특종기사에 대해 정작 YTN 보도국장과 간부들만 터무니없는 논리로 가치를 깎아내리느라 고심하는 코미디 같은 상황을 무슨 말로 판단해야 할지 난감하다”라며 “대외적으로 가치를 인정받은 특종기사에 대해 ‘내용이 어렵고 애매하다’는 상식 밖의 논리로 방송을 중단시킨 행위에 대해서는 반드시 책임을 물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YTN ‘국정원 직원의 트위터 댓글 공작 의혹’ 단독보도 중단
전반적인 방송통제 분위기 조성되는 것 아니냐는 의심 가득
언론사 YTN이 자체적으로 국정원의 정치개입을 밝혀낸 이 보도는 국정원 대선개입 사건의 핵심이 될 수도 있는 사안이라는 평이다. 정치개입 관련 글이 올라오면 트위터 계정 40여 개가 불과 몇 분 사이에 150여 개 이상 리트윗되는 일은 조직적이지 않으면 불가능하다는 게 전문가들의 의견이다. 이런 조직적인 국정원의 SNS 개입은 향후 국정원 사건에 아주 중요한 증거자료가 될 수 있는데, 아예 이것을 보도하지 않도록 지시한 사실이 알려져 논란이 인 것이다.
타 방송사 또한 YTN의 '국정원 SNS, 박원순 비하글 등 2만건 포착'이라는 기사를 인용하지 않았다. 국정원 관련 보도도 NLL사건이 중심을 이뤘으며 국정원 대선개입 사건과 정치 공작에 관한 기사는 찾아볼 수 없었다.
한 유명 블로거는 “국정원 사건의 핵심 증거는 사라지고, 오로지 NLL만 남았다는 사실은 지금 언론이 노리는 것은 국민의 관심을 국정원에서 NLL로 바꾸는 일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는 점이다”라고 지적했다.
국정원 대선개입 방송이 통째로 사라진 곳은 YTN뿐만이 아니다. MBC <시사매거진 2580>(이하 <2580>)의 국정원 대선개입 사건 방송 분량이 통째로 삭제된 것이다.
지난달 6월23일 밤 방송된 <2580>에서는 총 3건의 보도가 나갈 예정으로 그중 하나가 ‘국정원에서 무슨 일이?’라는 제목의 방송이었다. 그러나 실제로 방송된 <2580>에서에는 이 보도가 빠지고 나머지 2개만 나갔다. 결과적으로 '파행 방송'이 된 것이다.
“국정원과 민주당 결탁?”
MBC 기자 1인시위 중
그 중심에는 심원택 시사제작2부장이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2580>의 취재기자와 카메라 기자가 발표한 성명을 보면 심 부장은 국정원 관련 보도 불방 사태의 총 책임자이다. 하지만 담당기자인 김 모 기자에게 총대를 메게 하는 등 보복성 조처로 비난을 받고 있다.
성명에 따르면 심 부장은 데스크에게 “이번 사건의 본질은 전·현직 국정원 직원과 민주당이 결탁한 더러운 정치공작이다. 기자의 시각과 기자의 멘트로 이 부분을 명확히 지적해야 한다”며 “검찰 수사도 믿을 수 없다. 편향된 검찰이 정치적 의도로 편파수사를 했으니 그 점을 기자의 시각으로 지적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기사를 내줄 수 없다는 것이었다.
데스크는 “기사에 이미 여야의 인터뷰로 양측 주장이 균형 있게 담겨 있다”고 항의했지만 심 부장은 경찰의 수사 은폐와 조작, 원 전 원장의 간부회의 발언 부분을 통째로 삭제해 13분짜리 기사를 6분으로 만들라고 요구했다.
“국정원 사건의 핵심 증거는 사라지고, 오로지 NLL만 남아”
MBC <2580> “국정원에서 무슨 일이” 방송 통째로 삭제
심 부장은 김 기자를 업무에서 배제시켰다. 나아가 업적 평가에도 최하 등급인 'R등급'을 부여했다. <2580> 기자들은 합당한 근거가 아닌 감정적 판단에 따른 것이라며 MBC 본사 로비에서 1인 시위를 하고 있다.
파업 복귀 후 비교적 잠잠했던 MBC 기자들이 항의의사를 공개적으로 표시한 건 이번이 처음이다. 기자들은 ‘MBC 망가뜨린 심원택 물러나라’ ‘업무배제 R등급 즉각 철회하라’는 피켓을 들고 사태 해결 촉구에 나섰다.
이번 '국정원 보도 불방 사태'와 관련해 <2580>에서 쫓겨난 기자는 업무 배제 조치를 당한 김 기자를 제외하고도 6명이나 된다.
<2580> 기자들에 따르면, 심 부장은 지난해 9월 <2580> 소속의 또 다른 두 기자에 대한 인사이동을 요청했다. 그 결과 이들은 신천아카데미 '3개월 교육' 발령이 났다. 심 부장은 이들의 발령에 대해 구체적인 이유를 대지 않은 채 "성격이 잘 맞지 않는다. 자세한 이유는 나중에 밝히겠다"고만 말했다는 전언이다. 두 기자는 심 부장이 <2580> 기자들을 '종북좌파'로 매도한 것에 대해 기자들 대표로 항의했던 이들이었다.
심 부장은 자신의 의견을 받아들이지 않은 기자에게는 '업무배제'를 지시했고, 타 언론사와 인터뷰한 두 명의 기자를 징계위에 회부했다. 이들 기자는 '정직 3개월'의 중징계를 받았다.
“국정원 이슈 죽이기”
“언론이 제기능 잃어”
YTN의 한 해직언론인은 트위터를 통해 “아시아나 사고가 터지자 방송들이 판을 벌인다고 안간힘을 쓴다. 허나 국정원 같은 민감한 이슈를 외면해온 매체들의 자위로 보일 뿐, 국정원 이슈를 대놓고 죽이게 되어 기뻐하는 모습이 겹쳐 보인다”라고 비판글을 올렸다.
주요 매체의 국정원 대선개입 사건 보도 축소 또는 보도 불방에 대해 날 선 비난의 목소리가 끊이지 않고 있다. 현직 언론인들은 언론이 제 기능을 잃었다며 안타까운 마음을 드러내고 있다. 이에 불만을 느껴 대안언론으로 이직하는 공중파 기자의 수도 점점 느는 추세다.
현재 공중파 뉴스에서 원 전 국정원장의 검찰 수사 과정과 국정원 대선개입 사건 국정조사에 관한 소식을 듣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과연 언제쯤에나 원 전 원장에 관한 뉴스를 공중파 방송을 통해 접할 수 있을지 귀추가 주목된다.
조아라 기자 <archo@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