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제의인물> '돌아온 킹메이커' 김한길 민주당 대표

  • 강현석 angeli@ilyosisa.co.kr
  • 등록 2013.05.06 15:5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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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자루 쥔 구원투수 '위기의 민주당 살릴까'

[일요시사=사회팀] 김한길 민주당 대표에게는 '원죄'가 있다. 참여정부 시절 '기획 탈당'이란 초강수를 택했던 그는 대선 패배의 여파로 정가를 떠났다. '인생만사 새옹지마'라 했던가. 끝난 줄 알았던 그의 정치 인생은 민주당의 위기와 함께 다시 시작됐다. 그리고 이젠 권력의 정점에서 '정계개편'의 칼자루까지 거머쥐었다.



대세를 뒤집기에는 구도가 너무 뚜렷했다. 친노 대 비노의 혈투로 불렸던 민주당 지도부 경선에서 김한길 민주당 대표가 웃었다. 대선 이후 달라진 당내 분위기를 반영한 결과였다.

비노 맑음
친노 흐림

이번 지도부 경선에서 일찍이 대세론을 굳힌 김 대표는 당내 비주류의 좌장으로 불린다. 본인은 누구보다 '비주류'로 불리는 걸 싫어하지만 그의 과거 행보는 '비주류'를 넘어 '반노'로 불릴만한 구실을 여럿 제공했다. 김 대표를 꼬리표처럼 따라다닌 '반역자'라는 오명. 참여정부 말기, 김 대표가 탈당을 선택하지 않았다면 지금과는 다른 정치 행로를 걸었을 것이란 추측이다. 

지난 2007년 2월, 김 대표는 22명의 의원과 함께 열린우리당 탈당을 선언했다. 명분은 '신당 창당을 통한 대선 승리'였다. 김 대표는 후발 주자로 합류한 염동연 의원 등 23명의 의원과 함께 '통합신당의원모임'을 발족했다. 정가를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이 사건은 결론적으로 노무현 전 대통령의 등에 비수를 꽂은 일로 비견됐다.

같은 달 10일, 김 대표는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원삼면에 위치한 중소기업인력개발원에서 1박2일간의 일정으로 '통합신당의원모임' 워크숍을 열었다. 이 자리에서 김 대표는 참여정부와 열린우리당의 국정 운영을 실패로 규정하면서 중도 노선의 신당 창당을 공식화했다.


이날 김 대표는 "슬프지만 결단하지 않을 수 없었다"며 탈당의 변을 밝혔다. 또 "국민들은 진작부터 이대로는 안 된다고 신호를 보냈지만 우리는 모른 척 했었다"며 "우리에게 책임이 있다고 해서 이대로 변하지 말고 주저앉아 (대선) 패배를 기다려야 한다는 한나라당(현 새누리당)의 주장에는 동의할 수 없다"고 말했다.

김 대표는 당의 대선 패배를 막기 위해 자신이 탈당했다고 주장했다. 실제로 2007년 대선에서 열린우리당의 후신인 대통합민주신당은 패배했다. 이명박 당시 후보는 국민의 압도적인 지지로 대통령에 당선됐다.

그러나 김 대표의 결정에 대해선 의견이 분분했다. 대선을 앞둔 중요한 시기에 당을 지켜야 할 중진의원이 대규모 탈당을 주도했다는 사실은 결과 여하를 떠나 당시 지도부에 큰 상처를 남겼다.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는 옹호론도 있었다. 하지만 그가 2006년 당내 원내대표로 있을 당시 참여정부와 마찰을 빚어왔다는 사실은 그의 탈당 명분을 희석시켰다.

대세론 속 일찌감치 승기 "비주류가 웃었다"
경선서 과열된 갈등봉합 숙제…안철수 문제는?

탈당 이후 김 대표는 "중도를 아우르는 새로운 정치 세력이 필요하다"며 구 민주당과 합당했다. 중도통합민주당의 출범이었다. 하지만 그가 주장한 '대통합 정당'은 끝내 완성되지 못했다. 김 대표는 대선을 눈앞에 둔 8월, 중도통합민주당에서 탈당했다. 열린우리당과의 공조를 못마땅하게 여긴 까닭이다. 당시 김 대표는 언론 인터뷰를 통해 "노무현 프레임을 깨버리겠다"고 말하는 등 대선 기간 내내 참여정부와 선을 그었다.

김 대표가 떠난 중도통합민주당은 대통합민주신당에 흡수됐다. 그리고 대통합민주신당이 내세운 정동영 후보는 17대 대선에서 참패했다. 대선 후 불거진 '책임론'에서 김 대표는 자유롭지 못했다. 2008년 1월, 김 대표는 "대선 대패에 책임을 지겠다"며 총선 불출마를 선언했다. 정계에 입문한 지 12년 만에 야인으로 돌아간 것이다. 


두 번의 탈당
반역자 꼬리표

김 대표는 정치인이기 이전 언론인으로 더 유명했다. 미국 생활 당시 <한국일보> 미주지사 기자, <중앙일보> 미주지사 지사장 등을 역임한 그는 자신의 이름을 내건 토크쇼 <김한길과 사람들>을 통해 존경 받는 언론인의 반열에 올랐다.

그러나 김 대표가 처음부터 언론인의 길을 걸었던 건 아니다. 건국대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한 그는 서울 중앙여고에서 잠시 교편을 잡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후 김 대표는 자신이 졸업한 학교의 석좌교수를 비롯해 명지대학교 초빙교수로 임용됐다.

김 대표의 장점은 '글'에 있다. 1981년 소설 <바람과 박제>를 통해 등단한 그는 <미국일기> <여자의 남자> <낙타는 따로 울지 않는다> 등의 소설집을 간행하며, 베스트셀러 작가로서 큰 인기를 누렸다. 가수 조영남의 히트곡 '화개장터'의 숨겨진 원작자가 김 대표라는 사실은 2010년 알려져 큰 화제를 낳았다.

김 대표가 정치와 인연을 맺게 된 건 1996년. 김대중 전 대통령의 권유를 승낙하면서부터다. 비례대표로 15대 국회에 입성한 그는 16대와 17대를 거치며 정치 거물로 자리매김했다. DJ 정부 때 청와대 정책기획수석과 문화관광부 장관을 역임한 그는 나이에 비해 빠른 승진으로 주변의 시샘 섞인 눈총을 받기도 했던 것으로 전해졌다.

김 대표는 김대중·노무현 두 대통령의 대선후보 선대위에서 선거기획을 총괄한 자타공인 '전략통'이다. 스스로도 '킹메이커'란 별칭에 자부심을 갖고 있다. 특유의 승부사적 기질과 탁월한 협상력은 지난 두 번의 대선을 통해 검증됐다는 평가다.

하지만 김 대표는 총선 불출마를 선언한 2008년부터 긴 칩거에 들어갔다. 그래서 혹자는 김 대표가 정계 은퇴를 선언한 것으로 오인하기도 했다. 가능한 말을 아꼈던 탓에 언론 노출도 없었다. 이 시기 김 대표는 외부 접촉을 최대한 자제한 채 집필 활동에 전념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김 대표가 정계 복귀 신호탄을 쏘아올린 건 칩거로부터 3년이 지난 2011년이다. 서울시장 재보궐 선거를 앞두고 후보군 중 김 대표가 거론된 것. 김 대표도 기자들과의 오찬 간담회를 통해 "출마 가능성을 검토하고 있다"며 정계 복귀 속내를 드러냈다.

하지만 김 대표는 고심 끝에 불출마를 선택했다. '안철수'라는 흥행티켓 앞에서 김 대표의 선택지는 넓지 않았다. 당시 김 대표는 민주당 당원게시판에 글을 올리며 "서울시장 후보경선에 나가기보다 정권교체를 위해 필요한 민주당의 변화와 혁신을 실현하는 일에 성심껏 기여하고자 한다"는 뜻을 밝혔다.

그러나 순순히 물러나지는 않았다. 이어진 글에서 김 대표는 "오늘의 위기를 자초한 것은 당의 최고 지도부"라며 "지도부의 무능과 계파 싸움 추태에 민주당이 상처받고 있다"고 지적했다. '비주류' 좌장 이미지가 김 대표에게 덧칠해진 순간이었다.

4년만의 귀환
비주류의 역습

서울시장 선거 후 새누리당이 각종 악재로 골머리를 앓을 무렵, 민주당(당시 민주통합당) 지도부는 김 대표에게 손을 내밀었다. 총선을 한 달 앞두고 서울 광진갑에 김 대표를 전략 공천한 것이다.

김 대표는 "중앙당으로부터 서울 광진갑 지역에 출마해달라는 요청을 받고 고심 끝에 받아들였다"며 "반드시 승리해 정권 교체에 앞장서겠다"는 출사표를 던졌다.


정송학 새누리당 후보와 맞붙었던 김 대표는 52.1%의 득표로 당선됐다. 국회 재입성에 성공한 것. 김 대표는 당선 직후 당 대표 출마 가능성을 내비치며 '당권'을 향한 의욕을 내보였다.

당시 김 대표는 "4년 전 정권을 뺏긴 책임을 지고 물러났다"며 "그러면 정권을 찾아올 책임도 있다고 생각한다"고 말해 의지를 거듭 확인했다.

김 대표가 첫 당권 사냥에 나선 2012년 4월. 이해찬 당시 상임고문과 박지원 최고위원의 이른바 당·원내대표 담함 의혹이 불거졌다. 김 대표는 크게 반발하며 "소위 계파의 큰 몫을 차지하고 있다는 분들이 밀실합의로 당직을 나눠 갖겠다는 것은 참으로 구시대적인 발상"이라고 비난했다.

하지만 박 최고위원은 압도적인 득표로 원내대표에 안착했다. 남은 건 이 고문의 당 대표 선출 여부. 이에 대항마로 떠올랐던 게 바로 '탈계파'를 주장한 김 대표다.

김 대표는 "패권적 계파정치에 민주당의 미래를 맡길 수 없다"며 자신을 당 대표로 뽑아줄 것을 읍소했다. 또 "친노니 친호남이니 하는 명찰을 모두 떼어버리고 우리당 모두가 오직 '대선승리'라는 하나의 명찰을 달고 한마음으로 나아갈 때"라고 강조했다. 올해 지도부 경선에서 들고 나왔던 구호를 당시부터 주창한 셈이다.

김 대표는 울산에서 열린 지역 대의원 첫 투표에서 1위를 차지하며 이변의 주인공이 됐다. 소위 말하는 '흥행 대박'을 터트린 것. 이후 김 대표는 지역 순회 과정에서 이 고문과 엎치락뒤치락하는 시소게임을 거듭하며 선전했다.


그러나 김 대표는 결국 이 고문의 벽을 넘지 못했다. 최종 득표 6만6187표. 이 고문과는 1471표 차이로 2위를 기록했다. 첫 도전에서 쓴맛을 삼켜야 했던 김 대표다.

최고위원에 선출된 김 대표는 지도부와 대립각을 세웠다. 김 대표는 지도부 선출 후 열린 첫 번째 최고위원회의에서 "민주당 대의원과 당원들에게 가장 많은 표를 받고도 당 대표가 되지 못했다"며 불만을 드러냈다. 일반 국민이 참여한 모바일 투표에서 패배했다는 데 아쉬움을 드러낸 것.

김 대표는 18대 대선 과정에서 안철수 후보와 문재인 후보의 단일화 협상이 진행되기 전 안철수 캠프의 박선숙 총괄본부장과 회동하는 등 안 후보 측에 깊은 관심을 보였다. "김한길의 의중이 안철수에 쏠려 있다"는 의혹이 나온 것도 이 시점이다.

선거전이 본격적으로 진행된 지난해 11월 김 대표는 최고위원직을 전격 사퇴했다. "정치쇄신을 위해 기득권을 내려놓고 용퇴하겠다"는 내용이었다. 그는 "문 후보가 민주당의 쇄신을 이끌 수 있도록 남은 지도부도 용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박 최고위원과 이 고문은 이를 일축했다. "지도부 사퇴로 민주당에 내분이 있는 것처럼 비춰서는 안 되고, 힘든 때일수록 당 지도부가 남아 문 후보를 적극 지원해야 한다"는 이유였다. 이를 두고 김 대표가 '후보 흔들기'를 했다는 소문이 난립했다. 만약 문 후보가 당선된다면 '친노'의 약진으로 김 대표의 입지가 좁아질 것이 자명해보였다.

하지만 민주당은 또다시 대선에서 패배했다. 문 후보가 분전했지만 박근혜 대통령의 '콘크리트 지지율'을 넘기는 역부족이었다. 대선 패배 직후 '친노 책임론'이 급부상했고, 가장 큰 수혜자는 김 대표였다. 지도부는 총사퇴했고, 비상대책위원회 선출 과정에서 '원내대표 추대론' '비상대책위원장 추대론' 등이 고개를 들었다. 당은 대선에서 졌지만 덕분에 김 대표의 역할이 조명받게 된 아이러니한 상황이었다.

지난 3월 김 대표는 '계파정치 청산'과 안 후보를 껴안는 '더 큰 민주당론'을 내세워 또 다시 당권 도전에 나섰다. 오는 5월 전당대회를 통해 당대표가 되겠다는 포부를 밝힌 것이다. 두 번의 대선을 거치며 비주류 좌장으로 우뚝 선 김 대표는 "계파의 이익을 당의 이익보다 앞세우고 계파의 이해를 국민의 이해보다 앞세우는 정치는 이제 끝장내야 한다"면서 '안철수 지지세력'을 껴안는 변화를 촉구했다.

DJ 권유 정계입문…대통령 만든 공신
4·11 총선 전후 비주류 좌장 급부상
"친노? 비노? 계파부터 청산"

5·4 전당대회를 앞두고 후보들 간 경쟁이 본격 궤도에 오르면서 자연스레 '김한길 대 반(反)김한길' 구도가 짜여졌다. 강기정, 이용섭 의원을 비롯한 범주류계는 비주류인 김 대표를 압박하면서 단일화 논의를 이어갔다. 특히 강 의원은 "김한길 당선이 혁신이라는 것은 또 다른 패권적 발상"이라며 김 대표를 겨냥한 강도 높은 공격을 이어갔다.

당 외곽에서도 '김한길 대세론'에 찬물을 끼얹는 성토가 이어졌다. 직계 친노인 유시민 전 보건복지부 장관은 한 강연에서 "국민연금법 등 참여정부 주요 정책을 통과시키려할 때 대통합민주신당 만든다고 선도 탈당해서 본회의장 복도에서 커피 마시면서 기권표 던진 분들이 민주당 당 대표가 되겠다고 한다"며 쓴소리를 날렸다. 김 대표에 대한 섭섭한 감정을 그대로 드러낸 표현이었다.

이 가운데 당권을 차기하기 위한 주류와 비주류간의 자존심 싸움은 날로 격화됐다. 지난 28일 강 의원과 이 의원은 '김한길 대세론'을 저지하기 위해 단일화를 선언하는 등 최후까지 계파대결에서 물러서지 않겠다는 의지를 보였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치고받기식 폭로가 연일 이어지며 양측은 큰 내상을 입었다.

갈등봉합 관건
정계개편 촉각

김 대표는 최근 <일요시사>와의 인터뷰에서 "친노니 비노니 주류니 비주류니 하는 말은 이제 그만해야 한다"고 경고했다. 자신의 목표는 '이기는 민주당'이라는 뜻도 분명히 했다.

남은 건 김 대표가 자신이 주장한 '계파청산'을 완수하고 국민을 위한 민주당으로 거듭날 것인지 여부. 이 과정에서 어느 정도 '정계개편'은 불가피하다는 전망이 나오고 있다. 또 그 출발은 '안철수 신당'이란 설명. 이에 대해 김 대표는 "안철수 신당을 반길 세력은 분명 새누리당밖에 없을 것"이라며 "야권의 재구성이 있다면 그 중심에 민주당이 있어야 한다"고 거듭 강조했다.

일각에서 제기하고 있는 '안철수 줄대기'가 사실이 아니란 것. 그러면서 김 대표는 "자신이 거름이 돼 2017년 대선에서 승리하는 민주당을 만들겠다"고 약속했다. 과연 김 대표가 경선 과정에서 과열된 갈등을 봉합하고 제1야당의 자존심을 회복할 수 있을지 주사위는 던져졌다.

 

강현석 기자 <angeli@ilyosisa.co.kr>

 

김한길 대표는?

▲건국대 정치외교학과 졸업
▲<한국일보> 미주지사 기자, <중앙일보> 미주지사 편집국장·지사장
▲건국대 정치외교학과 석좌교수, 명지대 초빙교수
▲제15대 김대중 대통령 인수위원회 위원·대변인
▲제16대 노무현 대통령 당선인 기획특보
▲제16·17대 총선 기획단장·본부장
▲제17대 건설교통위원장, 국회운영위원장
▲37대 문화관광부 장관
▲열린우리당 원내대표
▲국회 문화방송체육통신위원회 위원
▲15·16·17·19대(4선·광진갑) 국회의원
▲현 민주당 당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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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한의대 졸업준비위 ‘강제 가입’ 논란

[단독] 한의대 졸업준비위 ‘강제 가입’ 논란

[일요시사 취재1팀] 안예리 기자 = 전국 한의과대학교에는 ‘졸업준비위원회’가 존재한다. 말 그대로 졸업 준비를 위해 학생들이 자발적으로 만든 조직이다. 하지만 내부에서는 “명목상 자발적인 가입을 독려하는 듯하지만 실질적으로는 강제로 가입할 수밖에 없는 구조”라는 지적이 잇따르고 있다. 졸업준비위원회(이하 졸준위)는 졸업앨범 촬영, 실습 준비, 학번 일정 조율, 학사 일정과 실습 공지, 단체 일정뿐 아니라 국가시험(이하 국시) 대비를 위한 각종 자료 배포를 하고 있다. 매 대학 한의대마다 졸준위는 거의 필수적인 조직이 됐다. 졸준위는 ‘전국한의과대학졸업준비협의체(이하 전졸협)’라는 상위 조직이 존재한다. 자료 독점 전졸협은 각 한의대 졸업준비위원장(이하 졸장)의 연합체로 구성돼있으며, 매년 국시 대비 자료집을 제작해 졸준위에 제공한다. 대표적으로 ‘의텐’ ‘의지’ ‘의맥’ ‘의련’ 등으로 불리는 자료집들이다. 실제 한의대 학생들에게는 ‘국시 준비의 필수 자료’로 통한다. 국시 100일 전에는 ‘의텐’만 보는 사람도 있을 정도다. 학생들 사이에서는 “졸준위가 없으면 국시 준비 자체가 어려워진다”는 말이 정설이다. 한의계 국시는 직전 1개년의 시험 문제만 공개되기 때문에 시험 대비가 어렵기 때문이다. 국시 문제는 오직 졸준위를 통해서만 5개년분 열람이 가능할뿐더러, 이 자료집은 공개자료가 아니라서 학생이 직접 구할 수 있는 방법이 없다. 사실상 전졸협이 자료들을 독점하고 있는 셈이다. 이 자료집을 얻을 수 있는 경로는 단 하나, 졸준위를 결성하는 것이다. 졸준위가 학생들의 투표로 결성되면 전졸협이 졸준위에 문제집을 제공한다. 이 체계는 오랫동안 유지돼왔고, 학생들도 졸준위를 통해 시험 자료를 제공 받는 것이 ‘관행’처럼 받아들여왔다. 이 때문에 졸준위는 반드시 결성돼야만 한다는 기조가 강하다. 학생들의 반대로 졸준위가 결성되지 않을 시 전졸협은 해당 학교에 문제를 제공하지 않기 때문이다. 졸준위 결성은 모든 학생들의 가입 동의를 얻어야 가능하다. 졸준위 가입 여부는 실질적으로 선택이 아니다. 자료집은 전졸협을 통해서만 제공되기 때문에, 졸준위에 가입하지 않으면 불이익을 받는다는 인식이 학생들 사이에서 강하게 자리 잡았다. 학생들은 “문제를 얻기 위한 목적이 가장 크다”고 말한다. 졸준위가 결성되지 않을 경우 현실적으로 문제집을 받아볼 수 있는 마땅한 대안이 없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졸준위는 학생들의 해당 학년 학생들을 모두 가입시키는 것이 목적이다. 실제 한 대학교에서는 졸준위 결성을 위한 투표를 진행했는데 익명도 아닌 실명 투표로 진행됐다. 처음에는 익명으로 진행했지만 반대자가 나오자 실명 투표로 전환한 것이다. 이 과정에서는 반대 의견이 나오기 어렵다. 실명으로 투표가 진행되는 데다, 반대표를 던질 경우 이후 자료 배포·학년 일정에 불이익이 있을 수 있다는 두려움 때문이다. 졸준위 결성, 실명 투표로 진행 가입시 200만원 이상 납부 필수 문제는 이 졸준위 가입이 무료가 아니라는 점이다. 졸준위에 가입하면 졸업 준비 비용(이하 졸비) 명목으로 학생들에게 돈을 걷는데, 그 비용이 상당하다. <일요시사> 취재 결과 한 대학교의 졸비는 3차에 걸쳐 납부하도록 했는데 1차에 75만원, 2차에 80만원, 3차에 77만원 등 총 232만원 수준이었다. 이는 한 학기 등록금에 맞먹는 금액이다. 금액 산정 방식은 졸준위 가입 학생 수에 따라 결정되는데, 한 명이라도 빠지게 되면 나머지 인원의 비용 부담이 커지게 된다. 심지어 2명 이상 탈퇴하게 된다면 졸준위가 무산될 수도 있다. 이 모든 사안은 ‘졸장’의 주도 하에 움직인다. 졸장은 학년 전체를 대변하며 전졸협과 직접 소통하는 역할을 맡는다. 실제 졸장을 선발하는 과정에서 “한 명이라도 탈퇴하면 안 된다”는 취지의 발언이 오갔을 정도다. 문제는 이뿐만이 아니다. 졸준위가 결성되면 가입한 모든 학생들은 졸준위의 통제를 받는다.<일요시사>가 입수한 한 학교의 규칙문에 따르면 졸준위는 다음과 같은 규정을 두고 있었다. ▲출석 시간(8시49분59초까지 착석 등) ▲교수·레지던트에게 개인 연락 금지 ▲지각·결석 시 벌금 ▲회의·행사 참여 의무 ▲병결·생리 결 확인 절차 ▲전자기기 사용 제한 ▲비대면 수업 접속 규칙 ▲시험 기간 행동 규칙 ▲기출·족보 자료 관리 규정 등이다. 학생들이 이 규정을 어길 시 졸준위는 ‘벌금’을 부과해 통제하고 있었다. 금액도 적지 않았다. 규정 위반 시 벌금 2만원에서 50만원까지 부과할 수 있도록 정해져 있었다. 가장 논란이 되는 부분은 병결이다. 졸준위는 병결을 인정하기 위해 학생에게 진단서 제출을 요구하고, 그 내용(질병명·진료 소견·감염 여부 등)을 직접 열람해 판단했다. 제출 병원에 따라 병결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공지도 있었다. 한 병원의 진단서가 획일적이라는 이유에서였다. 단체가 학생의 개인 의료 정보를 열람해 병결 여부를 자체적으로 결정하는 방식은 학생들 사이에서 부담과 압박으로 작용했다. 질병이 있어도 벌금이 부과될 수 있고, 병결을 얻기 위한 절차가 학습보다 더 어렵다는 말도 나왔다. 규정에 대해 문제 제기를 하면 졸준위는 대면 면담을 하는 방식으로 대응했다. 이 과정에서 3:1로 면담을 진행하는 등 학생이 위축될 수 있는 방식을 행하기도 했다. 전자기기 사용 불가 규칙 어기면 벌금도 이 같은 문제로 탈퇴자가 발생하기도 했다. 실제 A 대학 졸준위 전체 학번 회의에서 밝혀진 내용에 따르면 한 학생은 규정에 문제를 느껴 졸준위 측에 탈퇴를 의사를 밝혀왔다. 이 회의에서는 그간 탈퇴 의사를 밝힌 학생과의 카톡 대화 전문이 학생들에게 공개됐다. 공개된 카톡 내용에는 탈퇴 과정이 담겨있었는데 순탄하지 않았다. 졸준위 측은 탈퇴 의사를 즉각적으로 승인하지 않았고, 재고를 요청하거나 면담하는 방식으로 요청을 지연했다. 해당 학생이 다시 한번 탈퇴 의사를 명확히 밝힌 뒤에도, 졸장은 “만나서 얘기하자”며 받아주지 않았다. 심지어는 이 대화를 공개한 뒤 학우들에게 ‘졸준위에서 이탈하지 않는다’는 취지의 서약서를 받아내기도 했다. 졸준위 운영이 조직 이탈 자체를 문제로 판단하고, 이를 최소화하기 위해 압박을 가한 정황이 확인되는 대목이다. 해당 학우는 탈퇴 확인 및 권리 포기 동의서에 서명한 뒤에야 졸준위를 탈퇴할 수 있었다. 탈퇴 이후에도 갈등은 지속됐다. 목격자에 따르면 시험 기간 중, 강의실 앞을 지나던 탈퇴 학생은 졸준위 임원 두 명에게 “제보가 들어왔다”며 불려 세워졌다. 임원들은 이 학생이 학습 플랫폼 ‘퀴즐렛’을 사용한 점을 언급하며, 그 자료 안에 졸준위에서 배포한 기출문제가 포함돼있는지를 확인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후, 졸준위에서는 퀴즐렛에 학교 시험 내용이 있다며 탈퇴자가 보지 못하도록 사용자를 색출하기도 했다. 한편, 전졸협은 10년 전 자체 제작한 문제집으로 논란된 적이 있다. 당시 한의사 국가고시 시험문제가 학생들 사이에서 사용되는 예상 문제집과 지나치게 유사하다는 의혹이 제기되면서 경찰이 수사에 착수했다. 시험이 끝난 직후 시험장 앞에서 수험생 60여명을 상대로 참고서와 문제집을 압수했고, 국가시험원까지 압수수색해 기출문제와 대조 작업에 들어갔다. 기형적 구조 문제가 된 교재는 ‘의맥’ ‘의련’ 등 졸준위 연합체인 전졸협이 제작·배포해 온 자료들이다. 학생들은 교재에 일련번호를 붙이고 신분증을 확인한 후 배포하는 등 통제된 방식으로 유통해 온 것으로 알려졌다. 제보자는 “학생들이 전졸협을 통해서만 기출문제를 구할 수 있는 구조는 기형적”이라며 “국가고시를 위해 몇백만원씩 돈을 받고 문제를 제공하는 건 문제를 사고파는 것”이라고 말했다. <imsharp@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