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제의인물> '돌아온 킹메이커' 김한길 민주당 대표

  • 강현석 angeli@ilyosisa.co.kr
  • 등록 2013.05.06 15:5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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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자루 쥔 구원투수 '위기의 민주당 살릴까'

[일요시사=사회팀] 김한길 민주당 대표에게는 '원죄'가 있다. 참여정부 시절 '기획 탈당'이란 초강수를 택했던 그는 대선 패배의 여파로 정가를 떠났다. '인생만사 새옹지마'라 했던가. 끝난 줄 알았던 그의 정치 인생은 민주당의 위기와 함께 다시 시작됐다. 그리고 이젠 권력의 정점에서 '정계개편'의 칼자루까지 거머쥐었다.



대세를 뒤집기에는 구도가 너무 뚜렷했다. 친노 대 비노의 혈투로 불렸던 민주당 지도부 경선에서 김한길 민주당 대표가 웃었다. 대선 이후 달라진 당내 분위기를 반영한 결과였다.

비노 맑음
친노 흐림

이번 지도부 경선에서 일찍이 대세론을 굳힌 김 대표는 당내 비주류의 좌장으로 불린다. 본인은 누구보다 '비주류'로 불리는 걸 싫어하지만 그의 과거 행보는 '비주류'를 넘어 '반노'로 불릴만한 구실을 여럿 제공했다. 김 대표를 꼬리표처럼 따라다닌 '반역자'라는 오명. 참여정부 말기, 김 대표가 탈당을 선택하지 않았다면 지금과는 다른 정치 행로를 걸었을 것이란 추측이다. 

지난 2007년 2월, 김 대표는 22명의 의원과 함께 열린우리당 탈당을 선언했다. 명분은 '신당 창당을 통한 대선 승리'였다. 김 대표는 후발 주자로 합류한 염동연 의원 등 23명의 의원과 함께 '통합신당의원모임'을 발족했다. 정가를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이 사건은 결론적으로 노무현 전 대통령의 등에 비수를 꽂은 일로 비견됐다.

같은 달 10일, 김 대표는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원삼면에 위치한 중소기업인력개발원에서 1박2일간의 일정으로 '통합신당의원모임' 워크숍을 열었다. 이 자리에서 김 대표는 참여정부와 열린우리당의 국정 운영을 실패로 규정하면서 중도 노선의 신당 창당을 공식화했다.


이날 김 대표는 "슬프지만 결단하지 않을 수 없었다"며 탈당의 변을 밝혔다. 또 "국민들은 진작부터 이대로는 안 된다고 신호를 보냈지만 우리는 모른 척 했었다"며 "우리에게 책임이 있다고 해서 이대로 변하지 말고 주저앉아 (대선) 패배를 기다려야 한다는 한나라당(현 새누리당)의 주장에는 동의할 수 없다"고 말했다.

김 대표는 당의 대선 패배를 막기 위해 자신이 탈당했다고 주장했다. 실제로 2007년 대선에서 열린우리당의 후신인 대통합민주신당은 패배했다. 이명박 당시 후보는 국민의 압도적인 지지로 대통령에 당선됐다.

그러나 김 대표의 결정에 대해선 의견이 분분했다. 대선을 앞둔 중요한 시기에 당을 지켜야 할 중진의원이 대규모 탈당을 주도했다는 사실은 결과 여하를 떠나 당시 지도부에 큰 상처를 남겼다.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는 옹호론도 있었다. 하지만 그가 2006년 당내 원내대표로 있을 당시 참여정부와 마찰을 빚어왔다는 사실은 그의 탈당 명분을 희석시켰다.

대세론 속 일찌감치 승기 "비주류가 웃었다"
경선서 과열된 갈등봉합 숙제…안철수 문제는?

탈당 이후 김 대표는 "중도를 아우르는 새로운 정치 세력이 필요하다"며 구 민주당과 합당했다. 중도통합민주당의 출범이었다. 하지만 그가 주장한 '대통합 정당'은 끝내 완성되지 못했다. 김 대표는 대선을 눈앞에 둔 8월, 중도통합민주당에서 탈당했다. 열린우리당과의 공조를 못마땅하게 여긴 까닭이다. 당시 김 대표는 언론 인터뷰를 통해 "노무현 프레임을 깨버리겠다"고 말하는 등 대선 기간 내내 참여정부와 선을 그었다.

김 대표가 떠난 중도통합민주당은 대통합민주신당에 흡수됐다. 그리고 대통합민주신당이 내세운 정동영 후보는 17대 대선에서 참패했다. 대선 후 불거진 '책임론'에서 김 대표는 자유롭지 못했다. 2008년 1월, 김 대표는 "대선 대패에 책임을 지겠다"며 총선 불출마를 선언했다. 정계에 입문한 지 12년 만에 야인으로 돌아간 것이다. 


두 번의 탈당
반역자 꼬리표

김 대표는 정치인이기 이전 언론인으로 더 유명했다. 미국 생활 당시 <한국일보> 미주지사 기자, <중앙일보> 미주지사 지사장 등을 역임한 그는 자신의 이름을 내건 토크쇼 <김한길과 사람들>을 통해 존경 받는 언론인의 반열에 올랐다.

그러나 김 대표가 처음부터 언론인의 길을 걸었던 건 아니다. 건국대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한 그는 서울 중앙여고에서 잠시 교편을 잡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후 김 대표는 자신이 졸업한 학교의 석좌교수를 비롯해 명지대학교 초빙교수로 임용됐다.

김 대표의 장점은 '글'에 있다. 1981년 소설 <바람과 박제>를 통해 등단한 그는 <미국일기> <여자의 남자> <낙타는 따로 울지 않는다> 등의 소설집을 간행하며, 베스트셀러 작가로서 큰 인기를 누렸다. 가수 조영남의 히트곡 '화개장터'의 숨겨진 원작자가 김 대표라는 사실은 2010년 알려져 큰 화제를 낳았다.

김 대표가 정치와 인연을 맺게 된 건 1996년. 김대중 전 대통령의 권유를 승낙하면서부터다. 비례대표로 15대 국회에 입성한 그는 16대와 17대를 거치며 정치 거물로 자리매김했다. DJ 정부 때 청와대 정책기획수석과 문화관광부 장관을 역임한 그는 나이에 비해 빠른 승진으로 주변의 시샘 섞인 눈총을 받기도 했던 것으로 전해졌다.

김 대표는 김대중·노무현 두 대통령의 대선후보 선대위에서 선거기획을 총괄한 자타공인 '전략통'이다. 스스로도 '킹메이커'란 별칭에 자부심을 갖고 있다. 특유의 승부사적 기질과 탁월한 협상력은 지난 두 번의 대선을 통해 검증됐다는 평가다.

하지만 김 대표는 총선 불출마를 선언한 2008년부터 긴 칩거에 들어갔다. 그래서 혹자는 김 대표가 정계 은퇴를 선언한 것으로 오인하기도 했다. 가능한 말을 아꼈던 탓에 언론 노출도 없었다. 이 시기 김 대표는 외부 접촉을 최대한 자제한 채 집필 활동에 전념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김 대표가 정계 복귀 신호탄을 쏘아올린 건 칩거로부터 3년이 지난 2011년이다. 서울시장 재보궐 선거를 앞두고 후보군 중 김 대표가 거론된 것. 김 대표도 기자들과의 오찬 간담회를 통해 "출마 가능성을 검토하고 있다"며 정계 복귀 속내를 드러냈다.

하지만 김 대표는 고심 끝에 불출마를 선택했다. '안철수'라는 흥행티켓 앞에서 김 대표의 선택지는 넓지 않았다. 당시 김 대표는 민주당 당원게시판에 글을 올리며 "서울시장 후보경선에 나가기보다 정권교체를 위해 필요한 민주당의 변화와 혁신을 실현하는 일에 성심껏 기여하고자 한다"는 뜻을 밝혔다.

그러나 순순히 물러나지는 않았다. 이어진 글에서 김 대표는 "오늘의 위기를 자초한 것은 당의 최고 지도부"라며 "지도부의 무능과 계파 싸움 추태에 민주당이 상처받고 있다"고 지적했다. '비주류' 좌장 이미지가 김 대표에게 덧칠해진 순간이었다.

4년만의 귀환
비주류의 역습

서울시장 선거 후 새누리당이 각종 악재로 골머리를 앓을 무렵, 민주당(당시 민주통합당) 지도부는 김 대표에게 손을 내밀었다. 총선을 한 달 앞두고 서울 광진갑에 김 대표를 전략 공천한 것이다.

김 대표는 "중앙당으로부터 서울 광진갑 지역에 출마해달라는 요청을 받고 고심 끝에 받아들였다"며 "반드시 승리해 정권 교체에 앞장서겠다"는 출사표를 던졌다.


정송학 새누리당 후보와 맞붙었던 김 대표는 52.1%의 득표로 당선됐다. 국회 재입성에 성공한 것. 김 대표는 당선 직후 당 대표 출마 가능성을 내비치며 '당권'을 향한 의욕을 내보였다.

당시 김 대표는 "4년 전 정권을 뺏긴 책임을 지고 물러났다"며 "그러면 정권을 찾아올 책임도 있다고 생각한다"고 말해 의지를 거듭 확인했다.

김 대표가 첫 당권 사냥에 나선 2012년 4월. 이해찬 당시 상임고문과 박지원 최고위원의 이른바 당·원내대표 담함 의혹이 불거졌다. 김 대표는 크게 반발하며 "소위 계파의 큰 몫을 차지하고 있다는 분들이 밀실합의로 당직을 나눠 갖겠다는 것은 참으로 구시대적인 발상"이라고 비난했다.

하지만 박 최고위원은 압도적인 득표로 원내대표에 안착했다. 남은 건 이 고문의 당 대표 선출 여부. 이에 대항마로 떠올랐던 게 바로 '탈계파'를 주장한 김 대표다.

김 대표는 "패권적 계파정치에 민주당의 미래를 맡길 수 없다"며 자신을 당 대표로 뽑아줄 것을 읍소했다. 또 "친노니 친호남이니 하는 명찰을 모두 떼어버리고 우리당 모두가 오직 '대선승리'라는 하나의 명찰을 달고 한마음으로 나아갈 때"라고 강조했다. 올해 지도부 경선에서 들고 나왔던 구호를 당시부터 주창한 셈이다.

김 대표는 울산에서 열린 지역 대의원 첫 투표에서 1위를 차지하며 이변의 주인공이 됐다. 소위 말하는 '흥행 대박'을 터트린 것. 이후 김 대표는 지역 순회 과정에서 이 고문과 엎치락뒤치락하는 시소게임을 거듭하며 선전했다.


그러나 김 대표는 결국 이 고문의 벽을 넘지 못했다. 최종 득표 6만6187표. 이 고문과는 1471표 차이로 2위를 기록했다. 첫 도전에서 쓴맛을 삼켜야 했던 김 대표다.

최고위원에 선출된 김 대표는 지도부와 대립각을 세웠다. 김 대표는 지도부 선출 후 열린 첫 번째 최고위원회의에서 "민주당 대의원과 당원들에게 가장 많은 표를 받고도 당 대표가 되지 못했다"며 불만을 드러냈다. 일반 국민이 참여한 모바일 투표에서 패배했다는 데 아쉬움을 드러낸 것.

김 대표는 18대 대선 과정에서 안철수 후보와 문재인 후보의 단일화 협상이 진행되기 전 안철수 캠프의 박선숙 총괄본부장과 회동하는 등 안 후보 측에 깊은 관심을 보였다. "김한길의 의중이 안철수에 쏠려 있다"는 의혹이 나온 것도 이 시점이다.

선거전이 본격적으로 진행된 지난해 11월 김 대표는 최고위원직을 전격 사퇴했다. "정치쇄신을 위해 기득권을 내려놓고 용퇴하겠다"는 내용이었다. 그는 "문 후보가 민주당의 쇄신을 이끌 수 있도록 남은 지도부도 용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박 최고위원과 이 고문은 이를 일축했다. "지도부 사퇴로 민주당에 내분이 있는 것처럼 비춰서는 안 되고, 힘든 때일수록 당 지도부가 남아 문 후보를 적극 지원해야 한다"는 이유였다. 이를 두고 김 대표가 '후보 흔들기'를 했다는 소문이 난립했다. 만약 문 후보가 당선된다면 '친노'의 약진으로 김 대표의 입지가 좁아질 것이 자명해보였다.

하지만 민주당은 또다시 대선에서 패배했다. 문 후보가 분전했지만 박근혜 대통령의 '콘크리트 지지율'을 넘기는 역부족이었다. 대선 패배 직후 '친노 책임론'이 급부상했고, 가장 큰 수혜자는 김 대표였다. 지도부는 총사퇴했고, 비상대책위원회 선출 과정에서 '원내대표 추대론' '비상대책위원장 추대론' 등이 고개를 들었다. 당은 대선에서 졌지만 덕분에 김 대표의 역할이 조명받게 된 아이러니한 상황이었다.

지난 3월 김 대표는 '계파정치 청산'과 안 후보를 껴안는 '더 큰 민주당론'을 내세워 또 다시 당권 도전에 나섰다. 오는 5월 전당대회를 통해 당대표가 되겠다는 포부를 밝힌 것이다. 두 번의 대선을 거치며 비주류 좌장으로 우뚝 선 김 대표는 "계파의 이익을 당의 이익보다 앞세우고 계파의 이해를 국민의 이해보다 앞세우는 정치는 이제 끝장내야 한다"면서 '안철수 지지세력'을 껴안는 변화를 촉구했다.

DJ 권유 정계입문…대통령 만든 공신
4·11 총선 전후 비주류 좌장 급부상
"친노? 비노? 계파부터 청산"

5·4 전당대회를 앞두고 후보들 간 경쟁이 본격 궤도에 오르면서 자연스레 '김한길 대 반(反)김한길' 구도가 짜여졌다. 강기정, 이용섭 의원을 비롯한 범주류계는 비주류인 김 대표를 압박하면서 단일화 논의를 이어갔다. 특히 강 의원은 "김한길 당선이 혁신이라는 것은 또 다른 패권적 발상"이라며 김 대표를 겨냥한 강도 높은 공격을 이어갔다.

당 외곽에서도 '김한길 대세론'에 찬물을 끼얹는 성토가 이어졌다. 직계 친노인 유시민 전 보건복지부 장관은 한 강연에서 "국민연금법 등 참여정부 주요 정책을 통과시키려할 때 대통합민주신당 만든다고 선도 탈당해서 본회의장 복도에서 커피 마시면서 기권표 던진 분들이 민주당 당 대표가 되겠다고 한다"며 쓴소리를 날렸다. 김 대표에 대한 섭섭한 감정을 그대로 드러낸 표현이었다.

이 가운데 당권을 차기하기 위한 주류와 비주류간의 자존심 싸움은 날로 격화됐다. 지난 28일 강 의원과 이 의원은 '김한길 대세론'을 저지하기 위해 단일화를 선언하는 등 최후까지 계파대결에서 물러서지 않겠다는 의지를 보였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치고받기식 폭로가 연일 이어지며 양측은 큰 내상을 입었다.

갈등봉합 관건
정계개편 촉각

김 대표는 최근 <일요시사>와의 인터뷰에서 "친노니 비노니 주류니 비주류니 하는 말은 이제 그만해야 한다"고 경고했다. 자신의 목표는 '이기는 민주당'이라는 뜻도 분명히 했다.

남은 건 김 대표가 자신이 주장한 '계파청산'을 완수하고 국민을 위한 민주당으로 거듭날 것인지 여부. 이 과정에서 어느 정도 '정계개편'은 불가피하다는 전망이 나오고 있다. 또 그 출발은 '안철수 신당'이란 설명. 이에 대해 김 대표는 "안철수 신당을 반길 세력은 분명 새누리당밖에 없을 것"이라며 "야권의 재구성이 있다면 그 중심에 민주당이 있어야 한다"고 거듭 강조했다.

일각에서 제기하고 있는 '안철수 줄대기'가 사실이 아니란 것. 그러면서 김 대표는 "자신이 거름이 돼 2017년 대선에서 승리하는 민주당을 만들겠다"고 약속했다. 과연 김 대표가 경선 과정에서 과열된 갈등을 봉합하고 제1야당의 자존심을 회복할 수 있을지 주사위는 던져졌다.

 

강현석 기자 <angeli@ilyosisa.co.kr>

 

김한길 대표는?

▲건국대 정치외교학과 졸업
▲<한국일보> 미주지사 기자, <중앙일보> 미주지사 편집국장·지사장
▲건국대 정치외교학과 석좌교수, 명지대 초빙교수
▲제15대 김대중 대통령 인수위원회 위원·대변인
▲제16대 노무현 대통령 당선인 기획특보
▲제16·17대 총선 기획단장·본부장
▲제17대 건설교통위원장, 국회운영위원장
▲37대 문화관광부 장관
▲열린우리당 원내대표
▲국회 문화방송체육통신위원회 위원
▲15·16·17·19대(4선·광진갑) 국회의원
▲현 민주당 당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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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입수> 노상원 수사 기록 ②부정선거에 꽂힌 내막

[단독 입수] 노상원 수사 기록 ②부정선거에 꽂힌 내막

[일요시사 취재1·정치팀] 오혁진·박희영·김철준 기자 = 12·3 내란 사태가 발생한 지 6개월이 지났다. 특검이 출범하면서 관련 수사도 발 빠르게 진행되고 있다. 현재까지 여러 언론을 통해 핵심 인물들의 수사 기록이 일부 보도됐다. 그러나 노상원 전 정보사령관에 대한 내용은 구체적으로 언급된 바 없다. <일요시사>는 경찰 비상계엄 특별수사단의 ‘노상원 수사 기록’을 단독으로 입수해 공개하기로 했다. “부정선거 증거가 차고 넘치고 나중에는 드러날 것이다.” 노상원 전 국군정보사령관이 수사기관에 진술한 내용이다. 그가 윤석열 전 대통령과 김용현 전 국방부 장관처럼 부정선거 음모론에 꽂혀 있다는 걸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노 전 사령관은 윤 전 대통령의 지지자들이 주최하는 집회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사실상 수년 전부터 망상에 빠져있었다고 볼 수 있다. 같은 생각 노 전 사령관이 윤 전 대통령 지지자들이 주도하는 부정선거 음모론 집회에 참여하기 시작한 건 2년 전부터로 추정된다. <일요시사>가 입수한 노 전 사령관 수사 기록에 따르면 그는 부정선거 음모론 집회와 전광훈 사랑제일교회 목사의 집회에 여러 차례 참여했다. 노 전 사령관이 전 목사와 개인적으로 알았는지는 확인되지 않았다. 다만 노 전 사령관은 김 전 장관에게 집회에 참여할 때마다 당시 분위기와 참석자들이 윤 전 대통령을 어떻게 생각하는지에 대해 텔레그램으로 자신의 의견을 전달했다. 1년간 ‘극우 집회’를 분석한 노 전 사령관은 부정선거 음모론에 집착하기 시작했다. 그는 “문상호, 정성욱, 김봉규 등과 만날 때 주로 어떤 말을 했느냐”는 경찰 측의 질문에 “선관위를 얘기했는지는 잘 모르겠는데 선관위가 부정선거의 온상이라고 김용현 전 장관이 많이 말씀하셨다. 나에게도 여러 번 선관위의 부정선거에 대해 알아보라고 지시했고 네이버로 찾아도 봤다”고 말했다. “부정선거를 주로 누구에게서 들었냐”는 경찰 측의 질문에는 “관련 집회에 여러 번 참여하면서 들었고 특정 인물이 누구인지 실명을 거명하긴 그렇다. 나도 김 전 장관에게 보고를 해야 해서 스스로 공부도 많이 했다. 여론조사 조작이나 선거 부정은 합리적인 근거가 있다”고 했다. 전 주도 윤 지지자 극우 집회 직접 참석 김과 텔레그램으로 부정선거 자료 공유 노 전 사령관은 부정선거의 근거로 “선관위 산하에 여론조사심의위원회가 있다. 여론조사기관은 여론조사심의위에 등록해야 한다. 여론조사기관의 갑이다. 여론조사심의위원회는 9명으로 위원장 이대영 사무총장과 강성봉 등이고 그 밑에 쭉 있는데 7명이 진보 계열 인물이다. 여론조사기관이 편향되어 있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고 주장했다. 노 전 사령관은 부정선거 음모론자들이 주장하는 임시선거사무소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그는 “네이버에 검색하면 다 나오는데 2021년 국회의원 선거 때 동작구 선거사무소가 있는데 옆을 임대해서 임시선거사무소를 만들었었다. 언론에 나오니까 발뺌했었고 김 전 장관에게 보고하자 김 전 장관이 더 많은 자료를 보내 줬었다”고 했다. 노 전 사령관은 중앙선거관리위원회(이하 선관위)의 부정선거가 확실하다며 “결국에는 다 까질 것이다. 전산은 한 번 까지면 되돌릴 수가 없다. 폭파하거나 고물상에 갖다 버리지 않는다면 전산은 결국 까진다. 북한이 쳐들어온 것도 아니고 서울 상공에 포를 쏜 것도 아니지만 윤석열 전 대통령께서는 선관위의 부정선거가 확실하다고 생각하시고 정국이 전시에 준하는 사태라고 민감한 상황이라고 보신 것 같다. 그런 상황이 아닌데도 그렇게 행동한 건 그만큼 절박했기 때문이라고 본다. 2시간짜리 호소였다. 만약 국회 결정을 윤 전 대통령께서 받아들이지 않았다면 유혈사태가 났을 것”이라고 윤 전 대통령을 옹호했다. 노 전 사령관은 지난해 12월 초, 선관위가 서버 교체를 검토했다가 교체하려 했던 것을 두고 “윤 전 대통령께서 어디에선가 확실하고 핵심적인 정보를 들으셨을 것 같다. 서버 조작이 있었기에 그 서버를 우리가 확보하려 할 때 선관위 측이 폭파했을 수도 있다”고 말하기도 했다. <일요시사>가 입수한 여인형 전 방첩사령관의 군검찰·검찰 피의자 신문조서를 보면 윤 전 대통령은 지난해 8월 초 ‘정보사 군무원 간첩 사건 수사 결과’를 보고받는 자리에서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 대표였던 이재명 대통령을 포함한 정치인 등 인물들에 대해 “비상대권을 사용해 이 사람들에 대해 조치를 해야 한다”며 “현재의 사법체계, 형사소송법, 방탄국회 및 재판지연 아래에선 이런 사람들을 어떻게 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이재명 조치’ ‘2시간짜리 계엄’ 겹치는 윤·노 발언 "서버 확보하려 했다면 선관위가 폭파했을 것” 주장 윤 전 대통령이 “비상대권을 사용한 조치”를 언급한 건 한두 번이 아니다. 그만큼 이 대통령과 자신의 의견을 거스르는 인물들에 대한 복수심이 극에 달했던 것으로 해석된다. 이는 노 전 사령관도 마찬가지다. 노 전 사령관은 경찰에 “김용군(대령)과 구삼회 등에게 ‘이재명은 죄가 7개인데 봐주고 지연시키고 구속도 안 되고 당 대표까지 하는데 더불어민주당이 감사원장, 중앙지검장, 판사 등을 모두 탄핵하려고 하는 게 과연 올바른 세상이냐’고 한 적이 있다”고 진술했다. 윤 전 대통령과 노 전 사령관이 언급한 말이 일치하는 건 이뿐만이 아니다. 윤 전 대통령은 지난해 12월12일 “국정원 직원이 해커로서 해킹을 시도하자 얼마든지 데이터 조작이 가능했고 비밀번호도 아주 단순해 ‘12345’ 같은 식이었다”고 주장한 바 있다. 노 전 사령관도 “선관위가 헌법기관인데 스스로 깨끗해야 하거나 아무런 문제가 없어야 하는데 황제·세자 채용 등 문제가 나왔다. 각종 할 수 있는 최악의 것은 다 저질렀다. 그리고 전산 해킹이 언급될 때 서버 본체를 보여준 것도 아니고 일부 샘플만 살짝 보여줬는데 얼마든지 전산 조작이 가능하고 해킹에 얼마나 취약하면 비밀번호가 ‘1234’냐. 이미 그런 게 다 나왔다. 그렇게 떳떳하면 왜 본체를 못 열어주나”고 말했다. 그러나 조태용 국정원장은 같은 해 12월 검찰 조사에서 “선관위 시스템에 보안상 취약점이 발견됐지만, 부정선거에 관한 단서는 전혀 포착하지 못했다”는 내용으로 보고했다고 진술했다. 일각에서는 노 전 사령관이 윤 전 대통령과 직접 비화폰으로 연락을 주고받았을 것이라는 보고 있다. 실제 노 전 사령관도 지난해 12월2일 자신의 지인에게 윤 전 대통령과의 친분을 과시했다. 노 전 사령관은 당시 “나 같은 경우는 브이(V, 윤 전 대통령 지칭)하고 이렇게 좀 도와드리고 있다. 원래 한 4~5년, 3~4년 전에 알았다뿐이고 그래서 이제 뭐 이렇게 여러 가지로 좀 도와드리고 있다. 비선으로”라고 했다. 친분 과시 노 전 사령관은 안산 ‘롯데리아 회동’에 참석했던 구삼회 전 육군 2기갑여단장에게도 “며칠 전에는 김용현과 함께 대통령도 만났다. 갈 때마다 대통령이 나한테만 거수경례를 하면서 ‘사령관님 오셨습니까’라고 한다. 내가 이런 사람이다. 대통령과 장관 같이 만난다. 나는 벌써 여러 번 만났다”고 했다. <hounder@ilyosisa.co.kr> <hypak28@ilyosisa.co.kr> <kcj5121@ilyosisa.co.kr>